소설리스트

이세계 사람들이 자꾸만 보은한다-39화 (39/122)

39. 10화 인내는 쓰고 열매는 달다. (4)

“당연히 그래야지. 아, 혹시 이강호 경기도 봤어?”

백성철 관장은 입속에 국밥을 밀어 넣으며 물었다.

“제가 막 보려고 할 때는 이미 끝났었어요.”

“긴장되거나 그러지는 않지?”

“음, 그래도 지역 예선 우승 후보니까 조금은 집중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훗, 이강호쯤은 문제없이 상대할 수 있을 거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관장님은 집중을 해야 한다는 내 말에 코웃음을 치셨다.

말씀하시는 걸 봤을 때, 이미 이강호에 대한 분석을 끝냈고 내가 이길 거라고 확신하시는 것 같았다.

“이강호 선배는 어떤 선수입니까?”

“그건 결승전 당일에 이야기해 줄 테니까 일단 눈앞에 있는 상대에게 집중하자.”

‘응? 갑자기 왜 이렇게 뒤통수가 따갑지?’

한참을 이야기하고 있던 그때, 등 뒤에서 누군가 나를 노려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짧은 머리에 강인한 눈매, 그리고 잘 발달된 팔 근육을 가진 사내의 정체는 다름 아닌 이강호였다.

“저, 관장님. 조금 작게 이야기해야 할 것 같아요.”

“왜?”

“뒤에 이강호 선수가 있어요.”

나는 이강호가 듣지 못하게 조용히 속삭였다.

“자식이 소심하기는…… 네가 이길 수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 임마!”

“제발 작게 좀 이야기하세요.”

관장님은 이강호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더 큰 소리로 말했고 나는 손을 빠르게 저으며 자제시키려고 노력했다.

“훗, 어차피 쟤랑 붙는 건 너잖아.”

“네? 아, 관장님 정말 이러시기예요?”

“다 먹었으면 나가자. 사장님 여기 계산요.”

내가 어이없는 표정을 지으며 반문했지만, 백성철 관장은 능글맞은 미소를 지으며 계산을 하러 카운터로 향했다.

나는 이런 그의 모습을 멍하니 쳐다보다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야.”

관장을 따라 밖을 나가려던 그때, 이강호의 목소리가 귓가를 때렸다.

“방금은 실례했습니다. 대신 사과드리겠습니다.”

“헛소리는 집어치우고 결승전까지 올라와라. 김창섭 하나 이겼다고 기고만장한 꼴을 고쳐 줘야겠어.”

그의 냉담한 한마디에 가슴 한 켠에 있던 미안한 마음은 싹 사라져 버렸다.

“후, 남은 경기 잘 치르시길 바랍니다. 식사 맛있게 하세요. 그럼 이만.”

나는 살짝 목례를 한 뒤 음식점을 빠져나갔다.

“아주 건방진 놈이야.”

이강호는 사라지는 나의 뒷모습을 보며 주먹을 강하게 쥐었다.

그는 주변 동료들에게 전해 들어 이미 나에 대해 알고 있었다.

복싱에 입문한 지 고작 1달밖에 안 된 애송이가 여러 고등학교를 돌아다니며 도장 깨기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땐 과장된 소문일 뿐이라고 일축했었다.

하지만 나와 김창섭의 첫 경기를 관람한 이후, 무의식 안에선 나를 조심해야 한다는 강한 경계심이 생겼다.

‘저런 놈은 초장부터 아주 작살을 내야 돼.’

이강호는 복싱 경력이 짧은 내가 어렸을 적부터 알고 지내던 선수들을 손쉽게 제압하는 게 영 아니 꼬았다.

하지만, 나와 관장님은 이런 그의 마음도 모른 채 다음 경기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지금 붙을 선수도 김창섭이랑 별반 다르지 않으니까 이기고 돌아와라.”

“네, 관장님.”

백성철 관장은 첫 경기 때 그랬던 것처럼 시합에 대한 어떠한 조언도 없이 제자를 링 위에 올려 보냈다.

“후, 다녀왔습니다.”

나는 보란 듯이 남은 경기에서 승리를 거뒀다.

상대는 첫 경기에서 강한 임팩트를 보여 준 날 대비하기 위해 여러 가지 전략을 준비해서 왔지만, 여태껏 그랬던 것처럼 경기는 일방적으로 흘러갔다.

“대충 다 끝난 것 같으니까 이제 집에 가자.”

“네, 관장님.”

8강까지 모두 KO로 이겼지만, 나와 관장님은 차분하기 그지없었다.

모든 경기 일정이 마무리된 것을 확인한 우리는 차를 타고 집으로 향했다.

집에 가는 길 내내 별다른 대화는 이루어지지 않았기에 차 안은 조용했다.

“태워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도 고생 많으셨습니다.”

아파트에 도착한 나는 차에서 내리면서 짤막한 감사 인사를 건넸다.

“고생은 네가 다했는데 뭘. 첫 출전이라 긴장했을 텐데 잘했다. 딱 지금처럼만 하자.”

“네, 관장님!”

“그래, 잘 들어가고 간다.”

관장님은 칭찬을 건네는 게 낯뜨거운지 곧바로 아파트 단지를 빠져나갔다.

‘그래도 첫 단추를 잘 끼워서 다행이야. 집에 들어가서 샤워 먼저 하고 바로 글을 쓰자.’

달콤했던 승리도 잠시, 난 해야 할 일을 생각하며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 *

첫날 그랬던 것과 마찬가지로 준결승 경기도 어렵지 않았다.

토너먼트가 거듭됨에 따라 상대의 수준은 점점 올라갔지만, 그동안 훈련을 열심히 했기에 이변은 발생하지 않았다.

결승 진출을 확정한 나는 남는 시간은 소설을 쓰며 보냈다.

백성철 관장님은 시합을 치렀으니 휴식을 취하라고 당부했으나 평소처럼 늦은 밤까지 글을 쓰는 데 전념했다.

“어제 푹 쉬었어?”

“네, 관장님.”

“자식, 결승전이라고 조금 긴장했나 본데? 설마 상대한테 쫀 건 아니지?”

일찌감치 종합 체육관에 도착한 우리는 미트 치기로 워밍업을 간단히 한 뒤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간단한 미트 치기에도 땀을 많이 흘리는 내 모습을 본 관장은 긴장을 풀어 주기 위해 농담을 던졌다.

“체육관에 사람들이 북적거려서 그렇지, 이강호 선배 때문은 아니에요.”

체육관 안에는 기자로 보이는 사람들이 눈에 띄었다.

대회 마지막 날인 오늘, 전 체급 결승전이 열렸기 때문이다.

“어차피 여기서 우승해도 신문에 한 줄 날까 말까 하니까, 신경 쓰지 마라.”

“하긴, 선발전 우승으로 유명해진 사람을 못 본 것 같긴 하네요.”

일반인들 입장에선 선발전은커녕 전국체전 우승자가 누군지도 모르는 게 현실이었다. 복싱은 1970년대 후반부터 90년대 초반까지 국민 스포츠로 각광을 받았지만, 경제가 발전하고 야구, 축구 등으로 인기가 쏠리면서 서서히 인기가 식어 갔다. 따라서 한국 챔피언 아니 세계 챔피언이 되어도 예전과 같은 국민의 성원을 받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몸은 이만하면 충분히 풀린 것 같고 뭘 하면 좋을까? 흠, 그냥 음악이라도 들으면서 마음 좀 가라앉혀. 적당한 흥분과 긴장은 집중력 향상에 도움이 되지만, 과하면 약간의 움직임에도 체력 소모가 극심하거든.”

관장은 결승전이 임박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저 푹 쉬라는 말을 남긴 채 떠나려 했다.

“저, 관장님!”

“어, 왜?”

“저, 지시 사항이나 주의할 점 같은 건 없을까요?”

“흠, 있기야 한데 너한테 필요가 있을까 싶네?”

그는 제자의 질문에도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아 그래도 아시는 게 있으면 뭐라도 말씀해 주세요. 결승전 때는 이강호 선배에 대해서 알려 준다고 하셨잖아요.”

“어휴, 참. 알겠다. 내가 어제 이강호에 관한 자료들을 분석해 봤는데 파워 타입인 것 같더라고. 12온스 글러브로 헤드기어를 쓴 선수를 KO 시키는 건 프로 선수들도 어려운데, 지난 전국체전에서 제법 높은 KO율을 보였어.”

“흠, 경기를 본 건 아니지만, 펀치력이 좋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진지하게 경청했다.

“내가 분석한 건 이게 전부야. 아무튼 결승전 잘 치르고 와. 이기면 삼겹살 사 줄 테니까 파이팅 하고.”

“예? 하실 말씀이 그게 전부세요?”

무성의한 관장님의 말에 난 어이없어하며 반문했다.

“네가 그동안 붙었던 스파링 상대들을 생각해 봐. 이강호가 펀치력이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그들을 능가할 수 있을 거 같아?”

“스파링 하셨던 분들이 약했던 건 아니지만, 우승 후보인 이강호 선배랑 비교할 수 있을까요?”

“하, 답답하네. 이강호에게 경계해야 할 게 펀치력뿐이라면 이미 대비는 다 되어 있잖아.”

“아, 무슨 말씀인지 알겠네요.”

나는 관장님의 말씀이 이제야 이해가 됐다.

여러 고등학교를 돌아다니며 만났던 스파링 상대 중 웰터급 선수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미들급부터 헤비급까지 다양한 상대와 붙는 동안, 빠른 몸놀림으로 제대로 된 정타를 허용하지 않았고 설령 가드 위를 맞더라도 상대의 펀치력으로 곤란해 본 적이 없었기에 특별한 전략을 세우지 않은 것이다.

“방금, 아마추어 시합에서 KO를 내기 어렵다고 하셨는데, 그럼 저도 펀치력이 꽤 강한 편인가요?”

“쓸 만은 하지만, 이강호보다 쎄다고 볼 순 없지. 네가 상대를 KO 시키는 메커니즘은 그놈하고는 달라.”

“어떤 점에서 다르다는 건가요?”

자신에 관한 이야기는 언제 들어도 흥미로웠기에 귀를 쫑긋 세우고 다음 설명을 기다렸다.

“제아무리 펀치력이 강한 선수라도 뻔히 보이는 주먹에는 KO가 잘 나지 않아. 이강호의 펀치가 현재 통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프로 무대에 뛰는 선수들을 상대로는 쉽지 않을 거다. 하지만, 반응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른 공격과 사각에서 들어오는 펀치에는 선수들이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것을 쉽게 볼 수 있다.”

“카운터 펀치에 쓰러지는 선수들처럼요?”

“그래, 공격에만 치중하다가 카운터 펀치에 급소를 얻어맞으면 맷집이 좋은 선수라도 충격에서 벗어나기 힘들지. 아직 세계 수준의 선수들에 비해서 부족한 점이 많지만, 너의 기본기와 스피드는 한국에서 찾아보기 힘든 수준이야. 그래서 단순히 힘으로 KO를 시키는 선수보다 훨씬 수준이 높다고 볼 수 있는 거고.”

“좋게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갑작스러운 칭찬 세례에 나는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아직은 국내 수준이라는 것을 명심해. 카운터를 잘 치려면 기본기와 스피드를 갖추는 건 기본이고 타이밍과 상대의 공격 패턴에 빠르게 적응하는 능력이 필요해.”

“그래서 최근에 계속 펀치볼 훈련을 시켰던 거군요.”

백성철 관장은 가끔씩 무성의한 모습으로 제자를 대하는 듯했지만, 스파링이나 훈련 계획을 세울 때 결코 허투루 하는 법이 없었다.

중량급의 선수와 스파링을 잡은 것은 이강호를 대비하기 위함이었고 내내 진행하던 훈련도 나의 약점을 보완하여 더 완벽한 복싱 선수로 키워 내기 위한 일환이었다.

‘앞으로는 관장님의 말씀을 의심하지 말아야겠어.’

가끔 나를 건성으로 대하시는 게 아닌가 싶어 서운했던 적이 있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관장님께서는 다른 코치들처럼 매사 강하고 진지한 것이 아니라 강약을 조절할 줄 아는 유능한 분이셨다.

“이제야 말이 좀 통하는구먼. 알아들었으면 가서 좀 쉬고 있어. 시합 10분 전에 가볍게 미트 한 번 더 칠 테니까 시간 체크 잘하고.”

“네, 알겠습니다!”

나는 힘차게 대답을 한 뒤 관장님의 지시에 따라 음악을 들으며 마음을 차분히 했다.

“뭐야, 갑자기 왜 저래?”

갑작스러운 나의 행동에 놀란 백성철 관장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 * *

오전 11시.

웰터급 결승전이 시작되었다.

이강호는 반대쪽 코너에 서서 나를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본인의 펀치력에 자신이 있던 그는 종이 울리자마자 큰 펀치를 통해 나를 제압하고 싶었지만, 앞서 나와 붙었던 선수들이 어떻게 졌는지 본 이후라 경계심도 상당히 컸다.

‘확실히 이전 선수들하고는 다르네.’

나에게 쏘아 댔던 살기 어린 눈빛과 달리 이강호는 가드를 굳건히 올린 채 섣불리 공격을 들어오지 않았다.

그와 나는 서로에게 견제 잽을 날리며 간을 봤고 그렇게 1분이 지났다.

“아, 이래서 내가 이야기를 안 하려고 했다니까? 뭐 해 임마! 그냥 쭉 들어가! 저 녀석 펀치 몇 대 맞는다고 큰일 나는 것도 아니잖아?”

링 아래에서 시합을 관전하던 백성철 관장은 답답한 마음에 고성을 질렀다. 그러자 주심은 잠시 시합을 중단시키더니 그에게 경고했다.

“상대 선수를 모욕하는 행위는 허락되지 않습니다. 한 번만 더 그럴 시에는 불이익이 생길 수도 있으니 참고하세요.”

“코칭을 하다가 저도 모르게 흥분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주심의 경고를 들은 백성철 관장은 예상이라도 한 듯 능글맞게 대답을 한 뒤 자리에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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