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사람들이 자꾸만 보은한다-40화 (40/122)

40. 10화 인내는 쓰고 열매는 달다. (5)

‘그래, 너무 쫄아 있었어. 관장님을 믿고 들어가 보자.’

상대의 펀치를 과하게 의식한 나머지 움직임이 굳어 있던 나는 근접전을 펼치기로 마음을 먹었다.

‘이 자식 봐라? 내 펀치 정도는 몇 대 맞아도 괜찮다는 거야? 그래, 와 봐라.’

이강호는 거침없이 치고 들어오는 나를 가소롭게 쳐다봤다.

“올해 대회에도 주목할 만한 선수가 없네.”

“재능 있는 친구들은 죄다 야구나 축구로 가니 그렇지. 옛날에는 한 해에 한두 명씩 싹수 있는 애들이 보였는데 어쩌다 이렇게 됐는지 모르겠어.”

몇몇 기자들은 우리가 있는 링 쪽으로 걸어오면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웰터급 결승을 하고 있나 봐.”

“이 체급에서에는 이강호라는 친구가 주목을 받는 것 같던데?”

“힘은 좋은데 테크닉이 딸려서 대성하긴 힘든 선수야. 그래도 지역 예선에선 적수가 없어서 우승하는 데 문제는 없을 거야. 그나저나 라이트급에 괜찮은 선수가 있다고 하니까 그 경기나 보러 가자.”

안경을 쓴 기자는 동료에게 웰터급은 볼 필요도 없다는 것처럼 말했다.

“꼭 그런 것 같지만은 않은데? 지금 이강호가 완전히 밀리고 있어.”

“에이, 네가 잘못 본 거겠지. 내 데이터에 의하면 이강호랑 적수가 될 만한 상대는…….”

동료의 말에 마지못해 고개를 돌린 기자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웰터급은 분명 주목할 만한 신인이 없었고 이변이 없는 한 이강호가 예선을 통과할 거라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수세에 몰리고 있는 선수의 트렁크에 서울체고라고 써 있는 것을 발견한 기자는 자신의 예측이 틀릴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이, 쥐새끼 같은 놈이.’

이강호는 사정 범위 안으로 들어온 나를 맞히기 위해 주먹을 정신없이 휘둘렀지만, 대부분 적중하지 못하거나 커버를 당했다.

나는 복부 쪽으로 가드를 내려놓은 채 스웨이와 위빙으로 모든 공격을 피해 내고 있었다.

‘복부 공격만 허용하지 않으면 어떻게든 이길 수 있을 거 같아.’

처음 이강호에게 접근했을 때는 약간의 두려움이 올라왔지만, 막상 근접전이 벌어지자 관장님이 고함을 친 이유를 알게 됐다.

그동안의 훈련으로 민첩성과 동체 시력이 향상된 나는 이강호의 펀치가 훤히 보였고 상대의 공격에 즉각 즉각 반응했다.

물론, 소나기같이 쏟아지는 주먹들을 근거리에서 모두 피하는 건 어려웠다. 하지만 간간이 닿는 주먹들마저도 가드로 커버링을 하여 허용한 공격이 없다고 말해도 무방했다.

“헉, 헉…….”

이강호는 온 신경을 집중하여 날린 펀치들이 모두 무위로 돌아가자 체력이 급속도로 고갈되어 갔다.

‘상태를 보니까 내가 먼저 들어가도 되겠어.’

상대의 호흡이 거칠어진 것을 확인한 나는 라이트 훅으로 복부를 가격한 다음, 같은 손으로 연달아 어퍼컷을 날렸다.

“윽!”

복부에 느껴지는 강한 통증에 허리를 숙인 이강호는 곧바로 들어온 어퍼컷에 얼굴이 젖혀졌다.

‘이걸로는 부족해.’

헤드기어를 쓴 상태라 안면 공격으로는 KO를 시키기 어려웠다.

나는 충격을 받아 주춤거리는 상대에게 대시하여 레프트 바디를 날렸다.

“헉…….”

내 레프트 훅이 간장에 꽂히자 어떻게든 버티려고 안간힘을 쓰던 이강호는 그대로 바닥에 쓰러져버렸다.

“원, 투, 쓰리, 포…….”

‘이미 끝났어. 애당초 나랑 차원이 다른 놈이었어.’

앞선 상황에서 마음먹고 지른 주먹들이 모두 막혀 버린 데다가 몸에 쌓인 데미지도 작지 않다는 것을 직감한 이강호는 전의를 상실했다.

카운터를 하던 주심은 이런 그를 잠시 바라보다가 손을 흔들며 경기가 끝났음을 알렸다.

“방금 봤어? 이거 간만에 물건이 나왔는데?”

“그러게. 저렇게 깔끔한 펀치가 정말 얼마 만인지 모르겠어.”

넋을 놓고 시합을 구경하던 기자들은 고등부 지역 예선에서 쉽게 볼 수 없는 실력에 감탄사를 아끼지 않았다.

“봐 봐. 내 말대로 하니까 금방 이기잖아. 자만하지 않는 것도 중요하지만, 스스로 상대를 부풀리는 것도 경계해야 돼.”

백성철 관장은 승리를 거둔 제자에게 칭찬보다는 쓴소리를 아끼지 않았다.

“명심하겠습니다.”

나는 헤드기어를 벗으며 대답했다.

“자, 이걸로 땀 좀 닦아.”

“감사합니다.”

“저기, 강진우 선수 맞으시죠?”

관장님이 건네주는 수건을 받아 땀을 닦고 있던 그때, 시합을 관전하던 기자 중 하나가 우리에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누구시죠?”

“네, 저는 서울 데일리에서 일하고 있는 김현철 기자라고 합니다. 선수와 잠시 인터뷰를 나누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흠, 네 생각은 어떠냐?”

“관장님 뜻에 따르겠습니다.”

백성철 관장은 내가 작은 성취에 만족할까 염려하여 언론과의 접촉을 금하려 했다.

하지만 내 눈빛 속에서 일말의 관심도 보이지 않자 선선히 인터뷰를 허락했다.

“인터뷰 끝나면 차 있는 데로 와.”

관장님은 나를 힐끔 보며 말한 뒤 체육관을 빠져나갔다.

“안녕하세요. 선수님. 인터뷰에 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안녕하세요, 강진우입니다.”

‘왜 저렇게 날 뚫어져라 보는 거지?’

덥수룩한 머리에 안경을 쓴 남자는 보물을 찾은 것마냥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김현철은 기자가 되기 전부터 복싱을 좋아했고 서울 데일리에 입사한 이후로는 복싱 전문 기자로 활동하는 중이었다.

그는 국내에서 열리는 타이틀 매치는 빼먹지 않고 모두 관람했고 유망주를 발견하면 중요하지 않은 시합임에도 취재하러 쫓아다닐 정도로 복싱을 사랑했다.

“결승전 경기, 인상 깊게 잘 봤습니다. 승리의 비결에 대해 짤막하게 말씀해 주실 수 있을까요?”

“관장님의 조언을 따랐던 것이 승리의 주요인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강호 선수의 펀치력이 대단하긴 하지만, 속도와 테크닉은 제가 더 낫다고 생각하여 근접전으로 경기를 풀었습니다. 그리고…….”

서울 데일리는 지역 신문사로 판매 부수가 많은 편은 아니었으나 포털 사이트에서 종종 눈에 띄곤 하는 언론사였다.

‘해 봤자 지역 예선 우승이고 간단한 인터뷰니까 편하게 이야기하자.’

첫 인터뷰라서 어색한 감이 없진 않았지만, 꾸밈없이 차분히 말하려 노력했다.

“세워 놓은 전략을 그대로 수행할 수 있는 선수가 과연 얼마나 되겠습니까? 방금 경기를 보니까 경량급 못지않은 동체 시력과 반응 속도를 갖췄더군요.”

“체육관에서 열심히 훈련했던 게 빛을 발한 것 같습니다.”

“훗, 전형적인 모범 답변이네요. 혹시 향후 목표는 어떻게 됩니까?”

“일단 전국체전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김현철 기자는 헤드라인으로 뽑을 수 있는 자극적인 멘트를 기대했지만, 나는 그저 겸허한 답변만을 내놓았다.

“하긴, 더 큰 그림을 그리려면 앞의 일들을 차근차근 처리하는 게 우선이겠지요. 인터뷰는 여기까지 하도록 하겠습니다. 한동안 국내 복싱에 걸출한 인재가 나오지 않아 걱정이 많았는데, 강진우 선수를 보니 우리 복싱계의 미래가 기대되는군요.”

인터뷰를 마친 그는 복싱 팬으로서의 사심을 드러냈다.

“좋게 봐 주신 만큼 더욱 열심히 하겠습니다.”

“제 입으로 말하긴 부끄럽지만, 선수를 보는 안목이 제법 있는 편이라고 생각합니다. 앞으로도 좋은 성과를 내실 수 있도록 응원을 아끼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이건 제 명함입니다.”

“……?”

고작 지역 선발을 통과한 것뿐인데, 명함까지 주시는 이유는 뭘까?

나는 기자님의 행동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하, 조금 놀라셨나 봅니다.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 그런 게 아니라 한 명의 팬으로서 친해지고 싶은 마음에 드리는 거니 부담 갖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비록 선수나 코치는 아니지만, 복싱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조금 안다고 생각합니다. 나중에 선수님에게 도움을 드릴 순간이 생길 수도 있으니 일단 받으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아, 아닙니다. 전 그저 무명인 저에게 관심을 써 주시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아서 그랬습니다.”

속마음을 들킨 나는 황급히 명함을 받아 지갑에 넣었다.

“우승 축하드립니다. 그럼, 본선 시합 때 뵙겠습니다.”

김현철 기자는 멋쩍어하는 나를 보며 미소를 지은 뒤 동료가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래, 기자님과 친하게 지내서 나쁠 건 없겠지.’

나는 동료와 함께 다른 체급의 경기를 보러 가는 기자님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관장님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생각보다 빨리 끝났네? 밥이나 먹으러 가자.”

“네, 관장님.”

우리는 근처 음식점으로 이동하여 삼겹살을 먹은 뒤, 다시 체육관으로 돌아와 폐회식에 참여했다.

“서울 지역 대표가 된 기분이 어떠냐?”

“조금 얼떨떨하네요.”

폐회식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는 길, 난 상장이 든 케이스를 손에 든 채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대회 치르느라 고생했으니까, 이틀 동안은 푹 쉬어라.”

“네, 관장님.”

“야, 휴가를 줬으면 좋아하는 기색이라도 좀 보여라. 가끔 보면 꼭 애어른처럼 군단 말이야?”

백성철 관장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대화를 하다 보니 어느새 아파트에 도착했다.

나는 관장님께 인사를 드린 뒤 집에 들어왔다.

‘조금 쉬었다가 바로 소설을 써야겠다.’

결승전에서 체력을 많이 소모하지 않아서 하루를 통째로 쉴 필요까지는 없었다.

게다가 두 작품을 동시에 연재해야 하는 상황을 고려하면 모처럼 찾아온 자유 시간을 허투루 보내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맞다. 미션이 있었지.’

나는 갑작스럽게 뜬 화면을 보며 생각했다.

<아르마이스의 의지가 발동됩니다.>

<사용자의 미션 완료를 알려 드립니다.>

<보상: 민첩성, 힘, 정신력. LV UP>

<보상을 받으시겠습니까? Y/N>

아르마이스의 의지는 관장님이 지시한 과제들을 모두 소화하라는 미션을 준 바가 있었다.

나는 소설을 쓰고 대회 일정을 소화하느라 미션의 존재를 까맣게 잊고 있었고, 보상들이 뜻밖의 선물처럼 느껴졌다.

잠시 후, 환한 빛이 내 몸을 감싸 안았고 화면에 언급된 스탯들은 모두 상향 조정되었다.

‘민첩성하고 정신력은 쓸 만한데, 아직 힘은 부족하구나.’

다른 스탯들은 LV 4에 도달한 것에 비해 힘은 아직 LV 3에 불과했다.

아르마이스의 기능 중 하나인 어드바이저의 말에 따르면 일반적인 성인들의 평균 수준이 LV 2라고 한 것을 참고하면 LV 3라는 수치는 아직 갈 길이 멀다는 것을 의미했다.

‘LV 3 정도면 고등부 선수들한테는 통할지 모르겠지만, 일반부 선수들이나 랭커들을 상대로는 턱없이 부족하다. 관장님에게 근력을 키울 수 있는 훈련을 부탁드려야겠어. 아니면 추가 미션을 진행할까? 흠, 미션으로 뭐가 나올지 모르니까 조금 신중하게 생각하자. 차라리…….’

나는 부족한 스탯을 키울 수 있는 방도를 고민하며 천천히 집으로 향했다.

* * *

다음 날이 되었다.

‘천마는 과거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두 알고 있어. 이 이점을 살릴 수 있는 에피소드가 뭐가 있을까?’

점심시간이 막 지난 이른 오후, 난 강남의 한 카페에서 노트북을 편 채 글을 쓰고 있었다.

며칠 전, 플랫폼에 심사를 넣기 위해 담당 매니저님에게 원고를 보낸 적이 있었다.

그리고 얼마 있지 않아 이규석 선배님께 잠시 볼 수 있냐며 연락이 왔고, 오늘이 바로 만나기로 한 날이었다.

“작가님 벌써 와 계셨군요.”

“안녕하세요, 선배님.”

이규석 선배가 온 것을 확인한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인사했다.

“하하, 너무 그렇게 예의를 차리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닙니다. 이렇게 하는 게 더 편합니다.”

그는 나이답지 않게 어른스러운 나를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심사 결과가 궁금하시지요?”

“사실 카페에 온 뒤로 소설을 쓰고 있었는데 손에 잘 잡히지 않더라고요.”

“둘 다 통과했습니다.”

“그게 정말입니까?”

심사를 통과했다는 기쁨에 나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날 뻔했다.

웬만한 좋은 소식에도 호들갑을 떨지 않는 나였지만, 이번만큼은 흥분을 감추기 어려웠다.

지난 몇 년간 정식 작가가 되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던가?

무료 연재 코너에서 고전을 면치 못했던 게 엊그제 같은데, 심사 통과라니…….

물론 다소 행운이 따른 것도 사실이지만, 작가로 데뷔할 수 있다는 거 자체만으로 나에겐 커다란 기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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