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11화 능력 개안 (4)
“못 할 게 뭐 있어. 보니까 경시대회 문제를 TEPS 유형으로 출제하려나 보네?”
텝스(TEPS)는 한국대학교 언어교육원에서 개발한 시험으로 토익 위주의 시험 풍토를 바꾸기 위해 고안된 시험이다.
토익이 비즈니스 영어로 문제를 출제한다면 텝스는 경제, 과학, 인문 등 다양한 분야의 내용을 논문 수준의 지문으로 구성했기에 난이도 면에서 훨씬 높다고 볼 수 있었다.
“웬만큼 영어 잘하는 애들도 텝스에서 고득점 받기 힘들어. 외국에서 살다 온 애들도 800점을 간신히 넘는 경우도 허다하고.”
텝스는 몇 년 전에 뉴텝스로 개정되어 990점 만점에서 600점 만점으로 바뀌었으나 학교 안에서 정식 텝스 시험을 치를 수 없기 때문에 출제 위원회에서 과거에 만들어 두었던 구 텝스의 문제를 구입하여 치르기로 결정됐다.
“걱정해 줘서 고마워. 아무튼 수고해.”
나는 반장을 뒤로하고 자리에 앉았다.
내가 이렇게 자신감을 보이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최근에 영혼 동기화율을 높여 자동 번역 기능을 활성화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미르헨 총장님께서 주신 나에 관한 자료들을 쭉 읽었음에도 미동도 없던 ‘아르마이스의 의지’는 ‘수사학의 정석’을 완독하자 동기화율이 상승했음을 알렸다.
‘전생의 내가 수사학의 정석을 읽었을 줄을 누가 알았겠어.’
어드바이저의 설명에 따르면 마왕이 강림하기 전, 홀로 산에서 기거하던 아르마이스는 카산트 대륙의 각종 도서를 섭렵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수사학의 정석’이 있었다.
전생에 애착했던 도서를 찾은 덕분에 내 영혼은 또 한 번 각성 작용이 이루어졌고 포상으로 ‘자동 번역 기능’을 얻게 된 것이다.
‘영어든 독일어든 상관없어.’
자동 번역 기능을 얻은 뒤, 서점에 가 외국 서적을 훑어본 적이 있었다.
영어로 된 고전 소설을 펼치자 한글을 읽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그 의미를 알 수 있게 되었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자막 없이 외국 영화를 봤을 때도 그 효능을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빨리 수요일이 됐으면 좋겠다. 그건 그렇고 일단 소설이나 써야겠다.’
나는 담임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 생각을 하며 스마트폰으로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 * *
오후 수업이 끝나고 문학부 활동 시간이 되었다.
교실에 들어서자 김호준은 기다렸다는 듯이 나에게 다가와 불쑥 말을 걸었다.
“방학 동안 소설은 잘 썼어?”
“그럭저럭 쓰고 있어.”
친하지도 않은 녀석이 다짜고짜 소설 이야기를 꺼내는 게 유쾌하진 않았다.
그러나 미션과 승부가 걸린 만큼 대화를 피할 생각은 없었다.
“예나 지금이나 태평한 건 여전하구나? 이규석 선배님을 생각하면 열심히 써야 하지 않겠어?”
“휴, 하고 싶은 말이 뭐냐.”
“방학 때 부지런히 글을 쓴 덕분에 연재 일정이 앞당겨졌어. 원래 10월 초로 기획되어 있었는데 9월 초나 중순 경에 연재를 시작할 수 있을 거 같아.”
“나름 열심히 했나 보네.”
“훗, 하루에 2, 3편씩 쓰느라 고생을 좀 하긴 했지.”
김호준은 거만한 표정을 지으며 자신의 노력을 알아달라는 듯이 말했다.
“잘됐다. 마침 나도 9월 중에 연재를 하기로 결정됐거든.”
“훗, 나랑 같은 시기에 연재하게 되면 여러모로 비교가 될 텐데, 괜찮겠어?”
“흠…… 그래.”
볼 때마다 시비를 거는 김호준에게 드는 생각은 한심스럽다가 전부였다.
난 한숨을 쉬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서로 최선을 다해 보자. 그럼 또 이야기하자.”
“최선? 웃기고 있네. 무료 연재 코너에서도 호응을 못 얻어서 조기 연재 종료나 하는 주제에 어디서 최선을 운운하지?”
“웹소설 연재 좀 먼저 했다고 되게 유세 떠네. 알겠으니까 흥분하지 말고 저리로 가라.”
나는 손을 저으며 꺼지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이 새끼가…….’
소설에 관해서는 적어도 두 수 아래라고 여겼던 나에게 개무시를 당한 김호준의 얼굴은 분노로 인해 빨개졌다. 그러나 이전에 제압을 당했던 경험 때문인지 더 이상 함부로 지껄이지 못했다.
“저, 진우야. 내가 가볍게 쓴 소설이 있는데 한번 살펴봐 줄 수 있어?”
김호준으로부터 고개를 돌리고 휴식을 취하려 하는데, 여자부원 하나가 쭈삣쭈삣한 자세로 노트를 내밀었다.
“어? 응. 알겠어.”
뜻밖의 요청에 잠시 당황했지만, 난 능숙하게 노트를 받고 읽어 나갔다.
“어, 진우야. 내 것도 좀 읽어 주면 안 돼?”
“읽는 거야 문제는 없는데 괜찮겠어? 순문 쪽은 경험이 아직 부족해서 너희에게 도움이 안 될지도 몰라.”
한 명이 물꼬를 트자, 다른 여학생들도 이에 질세라 나에게 피드백을 요청했다.
“아니야, 예전에 공모전에서 은상 탄 걸 보면 우리가 너에게 배워야지.”
“와, 얼굴도 잘생긴 데다 겸손하기까지 하네? 진짜 너무 멋지다.”
‘뭐 때문에 이렇게 몰리는지 대충 알겠네.’
노트를 들이미는 여자애들의 초롱초롱한 눈빛을 본 나는 짐작이 간다는 표정을 지으며 하나하나 정성껏 피드백을 해 줬다.
‘저 새끼가 뭐가 좋다고 호들갑들을 떠는 거야?’
김호준은 그동안 부원들 앞에서 끊임없이 자신의 실력을 어필했지만, 그 누구도 피드백을 요청하는 친구는 없었다.
그는 열등감 어린 시선으로 날 노려보다가 쓸쓸히 자리로 돌아갔다.
* * *
시간은 흘러 수요일이 되었다.
오늘은 교내 영어 경시대회가 열리는 날로 교실 안 책상들은 시험 때처럼 띄엄띄엄 배치되어 있었다.
“다들 알겠지만, 텝스는 청해, 문법, 어휘, 독해 총 4파트로 이루어져 있어. 시중에서 보는 뉴텝스하고 유형이 다르긴 해도 본질에서는 크게 차이가 없으니까 진짜 텝스를 치른다는 기분으로 시험에 임하길 바란다. 자, 시험지 뒤로 넘겨라.”
담임은 시험에 앞서 가볍게 훈계를 한 뒤 시험을 개시했다.
맨 앞줄에 앉은 인원들은 뒤로 시험지를 넘겼고 학생들은 테스트 방송을 들으며 듣기 평가를 기다렸다.
그리고 잠시 후, 본격적인 문제 풀이가 시작됐다.
‘하아, 말이 왜 이렇게 빨라?’
‘단어도 못 알아듣겠어.’
학생들은 저마다 난색을 드러내며 힘겹게 답안을 체크했다.
‘할 만한데?’
자동 번역 기능은 독해 능력만 향상시켜 주는 것이 아니라 듣기, 말하기 등 모든 범위의 능력을 끌어올려 줬기 때문에 여유롭게 문제를 풀 수 있었다.
문제 풀이에 집중하다 보니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고 독해 파트를 마지막으로 시험은 끝이 났다.
“어떤 거 같아?”
“뭘 어떠긴 어때, 망했지.”
시험을 마친 아이들은 논평을 주고받았다.
“고생 많았다. 시험 성적은 내일 바로 나오니까 기대들 하고. 아, 진우야. 어떻게 시험은 괜찮았어?”
담임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물었다.
“나름 신경 써서 시험을 쳤습니다.”
“오, 말하는 걸 보니까 자신감이 넘치는데? 그래서 결과는 어떨 것 같아?”
“결과야 내일 되면 자연스럽게 알겠죠.”
“3등 안에 못 들면 복싱 안 한다고 했지? 나중에 말 무르기 없기다.”
“선생님도 저랑 한 약속 기억하시죠?”
“하하, 당연하지. 내 걱정은 하지 말고 약속을 이행할 준비나 잘해라.”
그와 나는 미소를 띠며 이야기했지만, 뼈 있는 말을 거침없이 주고받으며 신경전을 벌였다.
“네, 선생님. 여기 증인이 이렇게 많은데 약속을 안 지킬 순 없지요.”
나는 주변을 둘러보며 능청스럽게 말했다.
“걱정하지 마라. 3등 안에만 들면 네가 앞으로 무엇을 하든 신경 쓰는 일은 없을 거다. 아, 그리고 자율 학습 신청 계속 받고 있으니까 고민 좀 해 봐. 어차피 제대로 공부할 거면 신청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테니까.”
“그 부분은 내일 결과 나오는 걸 보고 이야기하도록 하죠.”
유치하기 짝이 없는 담임과 한 마디도 섞고 싶지 않았던 나는 빙긋 웃으며 말을 받아넘겼다.
“내일은 시험 본 것 중에 어려운 문제 위주로 해설을 할 예정이니까 특별히 어려웠던 게 있으면 편하게 물어봐라.”
담임은 나에게 시선을 거두고 아이들에게 말했다.
그는 마침 영어 담당이었기 때문에 피드백을 주는 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시험이 끝난 후, 수업은 재개되었고 학생들은 보통의 일상으로 돌아왔다.
* * *
학교를 마친 나는 관장님을 뵙기 위해 체육관에 왔다.
지역 예선이 끝나고 아침 훈련만 소화했기에 기량 저하를 우려한 관장님이 테스트를 해 보겠다고 날 부른 것이다.
“진우야, 너 키가 더 큰 거 같다? 이제 보니까 얼굴도 좀 변한 거 같고?”
런닝을 비롯한 체력 훈련을 할 때에는 후드를 뒤집어쓰고 하기 때문에 내 외모를 살펴볼 틈이 없었던 관장님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풋, 방학 때 맨날 봤으면서 그걸 이제 알아보시네요.”
그의 뜬금없는 말에 입에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야, 거기서 키 더 크면 체중 관리 어떻게 하려고 그래? 현재 체중이 어떻게 되냐?”
“75kg입니다.”
가족과 친구들이 잘생겨진 내 외모에 주목했던 것과 달리 관장님은 우려를 표했다.
182cm의 키에 75kg은 보기에 딱 좋은 체중이었지만, 웰터급에 맞추려면 여기서 6kg을 더 빼야 했는데, 이는 보통 사람 기준으로도 약간 마른 편에 속했다.
“거기서 더 커 버리면 체급을 올려야 할 수도 있어. 살다 살다 제자 키 크는 걸 다 신경 써 보네.”
“걱정하지 마세요. 여기서 더 크더라도 체중은 어떻게든 맞춰 보겠습니다.”
체력과 힘 스탯이 올라간 후로 골격마저 커져 버린 나로서는 관장님의 말씀을 쉬이 무시하기 어려웠다. 게다가 김호준과의 승부에서 이기면 보상으로 매력 스탯이 향상되기 때문에 10월 전국체전 전까지 대비를 철저히 해야 했다.
“내가 볼 땐 앞으로 5~6cm는 더 클 거 같다. 힘들겠지만, 지금부터 70kg 정도로 체중을 맞춰 놔라. 하, 이걸 어쩌지? 몸무게가 빠지면 근육도 같이 빠져서 힘이 약해질 텐데.”
관장님은 턱에 손을 올린 채 고민에 빠졌다.
“펀치력이 유지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후, 그래 일단 해 보다가 문제가 생기면 그때 고민하자. 그것보다 가볍게 몸 풀고 나랑 스파링 한 번 하자.”
“네?”
“뭘 그렇게 놀라고 그래? 예전에 이야기했었잖아. 너랑 스파링 하기 위해서 같이 훈련하는 거라고.”
가뜩이나 다부진 체격을 자랑했던 백성철 관장은 그동안의 합동 훈련을 통해 군살이 모두 빠져 있는 상태였다.
얼핏 봤을 땐 이전보다 덩치가 살짝 작아진 듯 보였으나 지방은 빠지고 근육량이 증가함에 따라 체중은 오히려 증가했다.
한마디로 현역 때와 크게 다르지 않은 몸 상태로 다시 돌아온 것이다.
“기억이 나긴 하는데, 이렇게 급하게 스파링을 하게 될 줄은 몰랐죠.”
“진우야, 인생은 실전이다. 세계 챔피언이 되려면 언제 어디서 누가 붙자고 해도 대비가 돼 있어야 해.”
“아, 네…….”
관장님의 말씀에 크게 공감이 되는 건 아니었으나 지시를 거역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샌드백을 치며 몸을 푼 뒤 헤드기어를 머리에 썼다.
‘후, 이길 생각은 하지 말고 배운다는 기분으로 임하자.’
미들급과 슈퍼 미들급을 오가며 맹활약을 했던 관장님은 지역 예선에서 붙었던 선수와는 차원이 다른 실력을 가졌기에 이길 수 있겠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야, 누가 보면 죽으러 가는 줄 알겠다. 힘 조절 하면서 할 거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라.”
“네, 관장님.”
스파링은 그냥 매트 위에서 진행하기로 했다.
보통 때라면 박재엽 코치님이 심판을 보고 링 위에서 정식으로 스파링을 했겠지만, 앞으로 관장님과 종종 스파링할 것을 생각하면 형식에 너무 운운할 필요가 없었다.
붕- 붕-
백성철 관장은 쉐도우로 예열을 하고 있었다.
그가 주먹을 내지를 때마다 묵직한 바람 소리가 생성되었고 나는 이 광경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파워도 파워지만, 스피드도 엄청나신데? 저 정도는 돼야 세계에서 먹히는 거구나.’
현역 때 미들급과 슈퍼 미들급에서 활동했던 관장님의 평소 체중은 85kg이었고 현재는 근육이 더 붙어서 88kg에 달했다.
그러나 그의 몸놀림은 웰터급 선수의 그것과 별반 차이가 없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