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 12화 계속되는 승부 (1)
“뭘 그렇게 멍 때리고 있어? 준비 다 됐어?”
백성철 관장님은 생각에 잠겨 있는 나를 보며 물었다.
“네, 관장님.”
“전력을 다하는 게 좋을 거다. 만약에 대충하다가 걸리면 알지?”
그는 주먹을 흔들며 미소를 지었다.
“알겠습니다.”
“그래, 그럼 시작하자.”
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자 관장은 스파링 개시를 알렸다.
‘헉, 뭐야?’
백성철 관장님은 두 팔을 올려 가드를 견고히 한 채 나에게 대시해 왔다.
커다란 덩치와 어울리지 않는 민첩한 몸놀림에 당황한 나는 백 스텝을 밟으며 거리를 벌리려 했으나 거리가 좁혀진 걸 확인한 그는 곧바로 훅을 날렸다.
부웅-
더킹을 하여 훅을 간신히 피해 냈지만, 귓가에 울리는 바람 소리에 모골이 송연해졌다.
“최근에 스파링을 안 해서 실전 감각이 떨어졌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괜찮네?”
관장은 팔을 빙빙 돌리며 씽긋 웃었다.
외관상으로만 보면 제자를 위하는 자애로운 스승처럼 보였지만, 눈앞에서 선 그의 모습은 흡사 저승사자와 같았다.
“저, 시간 체킹은 잘하고 계시죠?”
“내가 그만하라고 할 때까지 멈추지 않을 거니까 집중해라.”
말을 마친 백승철 관장은 스텝을 밟으며 잽을 날렸다.
“윽.”
가드를 올려 잽을 방어했지만, 펀치가 워낙 묵직한 탓에 안면으로 충격이 그대로 전해졌다.
충격을 수습하느라 정신없는 나를 지켜보던 관장은 복부에 빈틈이 보이자 그대로 주먹을 날렸다.
‘큰일 날 뻔했네…….’
평소 미트 훈련 때 자주 봤던 콤비네이션이었기에 감각적으로 백 스텝을 밟아 피했지만, 단 한 방에 쓰러질 수 있다는 생각이 들자 긴장감은 점점 더 커졌다.
“잠시, 스톱.”
“네, 관장님. 헉헉…….”
고작 1분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온몸에서 땀이 비 오듯 쏟아졌다.
나는 호흡을 고르며 관장님 말씀을 경청했다.
“제대로 싸워 보기도 전에 상대를 부풀리면 어떻게 하냐? 설마 스승에 대한 예우로 공격을 주저하는 건 아니겠지?”
“핑계처럼 들릴 수도 있지만 실제로 관장님은 저보다 훨씬 강하시잖아요. 무턱대고 들어가서 한 대 맞으면 바로 골로 갈 것 같은데 어떻게 막 들이대겠어요.”
“하긴, 나도 나 같은 놈을 상대로 근접전을 쉽게 벌일 순 없을 것 같아.”
관장은 자칫 변명으로 들릴 수 있는 말에도 기분이 나빠 보이지 않았다.
“체력 훈련을 그렇게 열심히 했는데도 헐떡대는 꼴 좀 봐라. 너무 긴장하니까 체력 손실이 극심하잖아. 그리고 팁을 하나 주면 너도 하루빨리 더 강해져서 상대에게 이런 느낌을 줄 수 있어야 된다.”
“저야, 맨날 붙어 있어서 관장님 실력을 안 다지만, 다른 선수에게 주먹을 섞지 않고도 위압감을 줄 수 있나요?”
“물론이지. 예전에 세계 랭킹 2위와 붙을 기회가 있었는데, 주먹 한 번 뻗지 못하고 시합을 망친 적이 있다. 여튼, 잡담은 여기까지 하고 준비해라.”
“네, 관장님.”
난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가드를 올렸다.
‘그래, 관장님 말씀이 맞아.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일단 부딪쳐 보자.’
거칠었던 호흡을 가다듬으며 생각을 정리한 나는 가드 사이로 관장님을 유심히 바라봤다.
스텝을 뛰며 끊임없이 목과 팔을 움직이는 그를 보며 나름의 패턴을 찾으려 노력했다.
팍- 팍-
관장은 우직하게 서 있는 나에게 왼손 잽을 연속으로 두 방 날렸다.
“오, 정신 좀 차렸나 본데?”
“…….”
관장님은 연속된 공격을 사이드 스텝으로 여유롭게 피하는 나를 보며 말을 걸었지만, 나는 집중력을 극도로 끌어올린 상태였기에 어떤 대꾸도 하지 않았다.
‘격기술 수업이 정말 효과가 있었어.’
긴장한 탓에 허둥지둥하던 아까와 달리 관장님의 펀치가 눈에 선명히 보이기 시작했다.
이는 모두 격기술 수업을 열심히 한 덕분이었다.
방학 동안 나이트 아린과 나는 션 다이스가 고안한 장치를 통해 가상 스파링을 진행했다.
그는 화상 대화 프로그램에 홀로그램 기능을 첨부하여 대화 상대의 신체를 다른 차원에 3D로 구현할 수 있게 안배했다.
나이트 아린은 일체의 마력을 배제한 채 육체의 힘만을 사용하여 나와 스파링을 진행했고 이는 민첩성과 동체 시력의 향상으로 이어졌다.
“피하지만 말고 공격도 좀 해 봐.”
마음먹고 한 공격이 번번이 빗나가자 관장은 슬슬 약이 올랐다.
“알겠습니다.”
나는 짤막하게 대답을 한 뒤 스텝을 밟으며 주먹을 날렸다.
퍼억-
“윽.”
안면으로 날라오던 스트레이트가 순식간에 궤적을 바꿔 복부로 향했고 당황한 관장은 허리를 틀어 어떻게든 피하려 했지만, 얻어맞고 말았다.
‘통한다.’
이 펀치는 현대 격투기 선수들이 사용하는 브라질리언 킥과 유사한 기술로 시선과 펀치 궤적으로 상대를 속이는 기술이었다.
나이트 아린은 수업이 진행됨에 따라 아르마이스식 격기술만의 고유 기술들을 알려 줬는데, 오늘 처음으로 실전에서 활용해 본 것이었다.
“아, 거 참 되게 거슬리네.”
잽, 스트레이트와 같은 보통의 복싱 기술을 쓰다가도 틈이 보일 때면 틈틈이 격기술 수업에서 배운 펀치를 날렸고 많지는 않지만 몇 방의 유효타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후, 여기까지 하자.”
5분 가까이 진행된 스파링이 드디어 막을 내렸다. 관장님은 수건으로 땀을 훔치며 나를 못마땅하다는 듯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왜 안 가르친 걸 갑자기 하고 그러냐?”
“정석으로 붙어서 재미를 볼 수 없으니까 그러죠. 그리고 어쨌든 저한테 몇 방 맞으셨잖아요.”
“크흠, 뭐 조금 놀라긴 했지만, 너무 많이 쓰지 않는 게 좋겠어. 왜냐하면 그 기술은 몇 가지 단점들이 있거든.”
백성철 관장은 진지한 자세로 조금 전 펀치에 대해 논평했다.
“우선, 중간에 궤도가 바뀐다는 거는 파괴력이 급감한다는 이야기야. 내가 아까 복부랑 안면에 몇 대 맞긴 했지만, 데미지가 별로 없는 걸 보면 설명이 필요 없을 거다. 그리고 네가 앞으로 만날 상대들은 나보다 몸놀림이 훨씬 빠른 친구들이야. 한두 번은 통하겠지만, 자주 쓰면 역으로 당하는 일이 생길 거다.”
“명심하겠습니다.”
“상대의 템포를 끊거나 혼란을 줄 수 있다는 장점도 있으니까 너무 고깝게 듣지는 말아라. 그리고 네가 힘과 스피드를 지금보다 배 이상 끌어올린다면 궤도가 바뀌는 주먹으로도 큰 재미를 볼 수 있을 거다.”
‘역시, 관장님께서는 보통 분이 아니시다.’
관장님이 하시는 말씀은 나이트 아린이 나에게 했던 조언과 정확히 일치했다.
그녀의 조언에 따르면 중간에 궤도를 수정한다는 말은 속도와 파괴력이 감소한다는 것을 의미했고 이를 보완하기 위해서는 힘과 속도를 올려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다음 스파링 때는 강도를 더 올려서 할 테니까 운동 게을리하지 마라.”
“지금보다 더 강도를 높이겠다고요?”
“훗, 그럼 내가 너한테 전력을 다한 줄 알았냐?”
백성철 관장은 눈을 크게 뜨고 반문하는 나를 보며 코웃음을 쳤다.
“다 쉬었으면 여기 와서 좀 앉아라. 아까 스파링을 복기해 보자. 처음에 내가 너한테…….”
이후 스파링에 대한 피드백이 이어졌고 나와 관장님은 서로 의견을 주고받으며 유익한 시간을 보냈다.
* * *
‘시험은 잘 봤을 것 같긴 한데…….’
오늘은 교내 경시대회 영어 점수가 나오는 날이다.
아침 일찍 학교에 온 나는 평소처럼 웹소설을 쓰면서 평범한 일상을 보내고 있었지만, 내심 초조한 기분이 들었다.
시험을 잘 봤다고 해서 3등 안에 든다는 보장이 없었기 때문이다.
“시험 결과는 어떻게 나왔을까?”
“어차피 내신에 들어가지도 않는데 뭘 그렇게 고민하냐? 그리고 3등 안에 들어야 뭐라도 얻을 수 있는 시험이잖아.”
“하긴, 3등 안에 드는 건 아무래도 무리겠지?”
상장을 비롯한 장학금 혜택을 받는 자는 3명으로 국한되어 있기 때문에 대부분의 학생들은 기대를 내려놓은 상태였다.
“네가 볼 땐 진우가 3등 안에 들 것 같아?”
“이번 시험이 워낙 어려워서 힘들 것 같은데? 솔직히 공부를 그렇게 잘하는 편은 아니잖아.”
“그래도 난 진우가 이겼으면 좋겠어. 솔직히 말도 안 되는 걸로 사사건건 태클을 걸잖아.”
“맞아, 김준석이 전학 간 이후로 유독 엄격하게 구는 거 같아.”
김준석을 처리한 후로 반 분위기가 좋아진 덕분에 여론은 나의 편이었다. 게다가 쓸데없는 트집을 잡는 담임의 행동도 학생들의 반감을 사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담임은 아침 조회를 위해 반에 들어왔다.
“자, 조용. 오늘은 예고한 대로 시험 결과를 알려 주겠다. 호명하는 학생들은 앞으로 나와라.”
담임은 무표정한 얼굴로 성적표를 학생들에게 나눠 줬다.
‘흠, 이상하다. 왜 별말이 없는 거지?’
속 시원하게 내 성적을 밝히고 승부 결과를 이야기하기를 기대했던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생각했다.
“강진우.”
“네.”
맨 마지막이 돼서야 내 이름은 호명되었고 난 천천히 단상으로 나가 성적표를 받았다.
‘뭐야? 성적이 이렇게 나왔는데 왜 아직도 말이 없는 거야.’
925점, 전체 석차 2등이라는 숫자를 발견한 내가 항변을 하려는 순간, 담임은 눈치라도 챈 듯 입을 열었다.
“아, 모르고 말을 못 했는데, 진우가 925점을 맞아 이번 경시대회에서 전교 2등이라는 우수한 성적을 거뒀다.”
“와, 진짜?”
“대박이다. 어떻게 공부했길래 고득점을 맞을 수 있었을까?”
“그러게, 외국에 다녀온 친구도 900점 이상을 장담하지 못하던데, 대단하다.”
아이들이 놀랍다는 반응을 보였지만, 난 차분한 마음으로 담임을 지긋이 바라보고 있었다. 내 시선을 느낀 그는 잠시 딴 곳을 보며 외면하다가 퉁명스럽게 말을 내뱉었다.
“이야기 끝났으니까 이만 자리로 돌아가라.”
“약속은 지키실 건가요?”
“일단, 알았으니까 돌아가서 앉아.”
“그럼, 믿고 들어가겠습니다.”
애매모호한 그의 답변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담임이 결과를 인식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기에 개의치 않기로 했다.
“1교시에는 시험 문제 중 어려웠던 것을 해설해 줄게. 시험지들 갖고 있으면 어려웠던 문제들 골라서 조금 있다가 질문하도록 해.”
오늘 첫 수업은 영어였기 때문에 영어 교사인 담임은 예고했던 대로 해설 강의를 하기로 했다.
‘아무래도 이상해. 기껏해야 3등급 정도 맞던 애가 갑자기 이런 실력을 보인다고?’
담임은 나를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바라보며 생각했다. 원래라면 성적 발표 후, 승부에서 졌음을 시인하는 게 옳았지만, 단기간에 이렇게 실력이 오른 경우를 본 적이 없었기에 도저히 납득할 수가 없었다.
“질문을 받기 전에 오답률이 가장 높았던 문제들을 먼저 살펴보자. 먼저 어휘 파트에서 가장 많이 틀렸던 부분이…….”
그는 학생들이 어려워했던 문제들 위주로 해설을 시작했다.
“솔직히 이 정도 수준의 단어는 33000 단어집을 통째로 외우지 않는 이상 뜻을 알기가 어려워. 하지만 그렇다고 문제를 풀 수 없다는 이야기는 아니야. 앞뒤 문장을 비교해서 맥락을 유추하면 어떤 의미의 단어인지 충분히 알 수 있거든.”
비록 도덕적인 면에서는 부족한 부분이 많았지만, 사립 명문인 성문고등학교에 영어 선생님으로 스카우트된 그의 실력은 동료 교사들 사이에서도 우수한 편이었다.
“이건 독해 파트에서 가장 오답률이 높았던 문제야. 과학 논문을 발췌해서 만든 지문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난해하더라고. 1학년 중에 이 문제를 맞힌 학생이 고작 4명에 불과한데, 찍은 학생 1, 2명을 제외하면 거의 아무도 못 풀었다고 봐도 돼.”
문제 풀이를 진행하던 담임은 독해 파트에서 가장 어려웠던 문제를 두고 논평을 시작했다.
‘왜 날 쳐다보는 거지?’
문제지를 보며 설명을 듣던 나는 따갑게 느껴지는 담임의 시선에 고개를 천천히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