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 12화 계속되는 승부 (2)
한창 해설을 진행하던 담임은 갑자기 목소리를 깔면서 분위기를 잡았다.
“이번에 경시대회 1등을 한 친구를 제외하면 이 문제를 실력으로 푼 사람은 사실상 진우밖에 없을 거다.”
‘또 무슨 꿍꿍인 거지?’
이유 없이 날 칭찬할 양반이 아니었기에 그 저의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강진우.”
“네?”
“나와서 이 문제를 어떻게 풀었는지 설명 좀 해 봐라.”
‘그럼, 그렇지.’
나는 가볍게 고개를 저으며 천천히 칠판으로 나아갔다.
학생들뿐만 아니라 영어를 전공한 사람들도 쉽게 해석할 수 없는 지문이라 해도 자동 번역 기능이 있는 나에게는 아무런 부담이 되지 않았다.
“총 6개의 단락으로 이루어진 이 문제가 어려웠던 이유는 하나에서 두 개의 단락만 읽고 풀 수 있는 다른 문제들과 달리 지문의 전반적인 내용을 모두 알아야 풀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문을 차근차근 살펴보면…….”
3등급을 간신히 맞을 실력이었다고 하지만, 문제를 푸는 기본 공식 정도는 숙지한 상태였다.
“저걸 일일이 다 해석한다고?”
“그냥 원어민 수준 아니야?”
학생들은 어려운 어휘와 익숙하지 않은 구조로 만들어진 문장을 거침없이 해석하는 내 모습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러나 담임은 학생들과 달리 얼굴에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했다.
“진우야, 해석 실력이 출중한 건 알겠는데 제한된 시간에 문제를 풀려면 그런 식으로 해선 안 되지.”
“전 되던데요?”
“그럼 독해 문제 전체를 다 이렇게 풀었다는 거냐?”
“네, 선생님.”
한 문제를 푸는데 할당된 시간은 2분에서 2분 30초 사이였다. 물론 다른 문제들을 빠르게 처리하면 풀이에 3분 이상 쓸 수 있겠지만, 테크닉을 사용하지 않고 정직한 해석으로 문제를 푸는 건 효율적인 방법이 아니었다.
“혹시 어디서 이미 문제를 본 건 아니겠지?”
담임은 건수를 잡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질문을 던졌다.
“후, 아닙니다.”
“텝스 시험을 시간 안에 너처럼 푸는 건 웬만한 원어민에게도 어려운 일이야. 보통의 경우라면 각 단락의 핵심 문장을 찾아서 최대한 빨리 주제를 파악하는 편이…….”
“선생님, 절 의심하시는 것 같은데 해명할 기회는 주셔야지요.”
나는 담임의 말을 끊고 싸늘하게 말했다.
“기분 나빴다면 미안하지만, 교사 생활 20년 동안 너처럼 문제를 풀고 고득점을 맞는 학생을 보지 못해서 그런 거니까 이해해라.”
“문제를 주시면 즉석에서 하나 풀어 보고 싶습니다.”
“실력을 입증하고 싶다는 말이지? 그런데 꼭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나?”
“네, 선생님께서 가볍게 던진 한마디로 인해 아이들이 절 의심하는 게 싫거든요.”
‘눈치 하나는 귀신같이 빠르네. 뭐 하지만 나로서도 나쁠 게 없지.’
자신의 의도를 들킨 그는 뜨끔했지만, 이내 평정심을 되찾고 덤덤하게 대화를 이어 갔다.
“네가 정 불편하다면 해명할 기회를 주는 게 맞겠네.”
담임은 교탁으로 다가가 서랍을 연 뒤 종이 꾸러미 하나를 꺼냈다.
그는 인근 대학에서 영문학 박사 과정을 수료 중이었는데, 마침 읽고 있는 논문이 있어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래, 이걸 읽고 내용을 애들한테 설명해 줘 봐. 시간은 넉넉하게 5분 줄게.”
그는 자신만만한 태도로 종이 하나를 나에게 건넸다.
“5분까지 안 걸릴 것 같은데요.”
“푸핫, 알았으니까 해 봐.”
“지금 주신 이 종이는 셰익스피어의 리어왕에 관한 자료입니다. 대충 읽어 보니까 화가이자 행위 예술가로 유명했던 로버트 윌슨의 독창적인 견해가 녹아들어 간 논문이군요.”
“크흠, 계속해 봐라.”
내가 1분도 채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내용의 핵심을 파악하자 담임은 헛기침을 하며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무대 연출가이기도 했던 로버트는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포스트모더니즘적으로 해석했습니다. 보통의 리어왕 공연에서 나타나는 역사나 관행들을 철폐했을 뿐만 아니라 왕권과 도덕성에 관한 논의마저 모두 무시해 버렸지요. 그리고 리어왕에서 나오는 대사나 행동을 의도적으로 비틈으로써…….”
담임이 회심의 일격이라 생각하고 준 과제는 앞선 문제 풀이보다 더 쉽게 느껴졌다.
전문적인 내용이 아무리 담겨 있다 한들, 자동 번역 기능 앞에서는 무용지물이었기 때문이다.
‘아니, 어떻게 저걸…….’
설명을 듣는 내내 애써 표정을 관리하던 담임은 내가 리어왕의 대사를 능숙 능란하게 해석하자 경악을 금치 못했다.
“과인의 비밀스러운 계획을 말하겠소. 고인은 국토를 셋으로 분할하고, 늙은 이 몸은 모든 근심과 국사를 벗어 던지…….”
“그만, 그만.”
리어왕의 대사를 언급한 뒤 이에 관한 로버트의 견해를 말하려던 그때, 담임은 다급하게 손을 저으며 설명을 중단시켰다.
“왜 그러시죠?”
“방금 그 대사는 어떻게 읽은 거냐?”
논문에 적힌 리어왕의 대사는 셰익스피어의 원작에서 그대로 따온 것으로 중세 영어로 적혀 있었다.
당시 영어는 현대의 그것과 어휘 형태, 문법의 구조 등이 달랐기 때문에 교육을 받지 않은 사람이라면 해석하기 어려웠다.
“어렸을 때 배운 겁니다. 옛날부터 외국 고전에 관심이 많았거든요.”
“헛소리하지 마. 관심이 있다고 그렇게 능숙하게 한다고?”
“선생님. 언제까지 그러실 겁니까?”
과제를 훌륭히 소화했음에도 끝까지 말꼬투리를 잡는 담임의 태도에 참고 참았던 분노가 터졌다.
“내가 뭘 어쨌다고 그러냐?”
“제가 경시대회에서 3등 안에 들었음에도 제 실력을 의심하신 건 백번 양보해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후에 선생님께서 주신 텍스트를 잘 해석했는데 왜 끝까지 인정을 안 하십니까?”
“인정을 안 하는 게 아니라 궁금해서 그러지…….”
말문이 막힌 그는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승부에서 진 것을 인정했다라는 말로 들어도 될까요?”
“흠, 그건…….”
자존심이 강한 담임은 끝까지 망설이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자 나는 그만 들을 수 있게 조용히 속삭였다.
“선생님, 이만하면 친구들도 제 실력을 인정할 것 같은데 더 끌어서 좋을 게 없습니다. 앞으로 저 하는 일에 방해를 안 하시고 관심을 꺼 주시면 여기서 그만하겠습니다.”
“……알겠다.”
담임은 복잡미묘한 얼굴로 고심을 하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고 이를 확인한 나는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상황을 마무리 지었다.
“생각해 보니까 제가 조금 예민하게 반응한 것 같습니다. 아직 질문들도 남았으니 이만 들어가겠습니다.”
“그, 그래라.”
나는 담임에게 목례를 한 뒤 유유히 자리로 돌아왔다.
“선생님은 인정 좀 하시지. 왜 저렇게 고집을 피우시는 거야?”
“야, 그것보다 진우가 담임 체면 살려 주려고 고개 숙이는 거 봤어?”
“나였으면 막 대들었을 텐데, 역시 진우야.”
학생들은 선생님이 듣지 못하게 조용히 대화를 나누었지만, 담임은 눈치껏 분위기가 어떻게 흘러가는지 눈치채고 있었다.
‘후, 저놈한테 완전히 당해 버렸군.’
그는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으며 멍하니 서 있다가 해설을 재개했다.
“자, 다시 시험지 펴고 집중해라. 다음 문제를 보면…….”
‘후우 속이 홀가분하네. 이 정도 했으면 앞으로 귀찮게 굴지 않겠지?’
나는 판서를 하는 담임을 바라보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더 이상 물어볼 게 없으면 각자 자율 학습을 하도록 해라. 반장.”
“네.”
“자율 학습 때 떠드는 학생 있으면 이름 적어서 알려 줘. 난 잠시 교무실 좀 가 봐야겠다.”
해설을 마친 담임은 나와 같이 있는 게 힘든지 급하게 반을 빠져나갔다.
‘꼴을 보니 더 이상 날 귀찮게 할 것 같진 않네. 그리고 옛 언어도 해석할 수 있다는 걸 발견한 것도 큰 수확이었어.’
일전에 미르헨 총장님께서 전생의 내가 몬스터들과의 소통도 가능하다는 이야기를 했기에 모든 종류의 언어를 해석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고서를 읽을 수 있다는 것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점이었다.
“저, 진우야.”
“어?”
한 학우가 말을 걸자 상념에 빠져 있던 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혹시, 이 문제 어떻게 풀었는지 알려 줄 수 있어? 선생님께서 설명해 주시긴 했는데 조금 이해가 안 되더라고.”
“알겠어, 한번 줘 볼래?”
“응.”
“이 문제는…….”
문제지를 건네받은 나는 친절하게 풀이를 알려 줬다. 원래라면 남는 시간에 웹소설을 쓰는 게 맞았지만,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는 생각에 기쁜 마음으로 알려 줬다.
* * *
뜨거웠던 8월이 지나고 9월이 되었다.
선풍기 없이는 잠이 들 수 없었던 열대야 현상은 사라지고 밤이면 선선한 기운이 돌아 가을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려 줬다.
사립 명문인 성문고등학교 학생들은 본격적인 새 학기 생활이 시작되자 성적을 끌어올리기 위해 좋은 학원을 찾아다니고 과외 수업도 듣는 등 동분서주했지만, 난 방학 때와 별반 다를 것 없는 생활을 했다.
‘후, 곧 있으면 작품이 올라오겠네.’
현재 시각 23:59분, 앞으로 1분 후에 내 작품이 푸른닷컴에 올라온다.
확인한 바로는 김호준의 작품과 동시에 연재를 시작하기 때문에 치열한 경쟁은 불가피할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진짜 좋은 작품이라면 퀄리티 있는 글들 사이에서도 충분히 선방할 수 있기에 여러 변수를 두고 부화뇌동할 필요는 없었다.
“올라왔다.”
무료 연재 코너에 뜬 내 소설을 본 나는 흥분한 나머지 혼잣말을 했다.
타 웹소설 사이트에서 무료로 글을 올린 적이 있지만, 푸른닷컴 같은 대형 플랫폼에 정식으로 연재하는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전자는 소수 독자들의 반응만 바라보며 힘들게 글을 써야 한다면, 후자는 유료 연재가 보장되는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벌컥-
“오빠!”
“어, 어. 지연아 무슨 일이야?”
감상에 빠져 있던 나는 문을 열고 들어오는 여동생의 목소리에 급히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이번 주 수요일에 나 데뷔하는 거 몰라?”
“아, 맞다. 요즘 워낙 바쁘다 보니까 깜빡했어.”
“칫, 우리가 아무리 대화가 부족하다고 하지만 조금 서운하네.”
강지연은 짐짓 삐진 척을 하며 말했다.
“미안해 지연아. 앞으로는 잘 확인할게.”
“됐네요. 것보다 소설 쓰는 건 잘하고 있어?”
“어? 응. 그냥 뭐 그럭저럭하고 있지.”
지금 당장 실시간으로 내 글이 연재되고 있는 상황임에도 입 밖으로 말이 나오지 않았다.
연재 사실을 밝혀 응원을 받는 것도 좋았지만, 실적을 어느 정도 내고 이야기하고 싶은 마음이 컸기 때문이다.
“연재하게 되면 나한테 알려 줘. 주변 아는 사람들한테 읽으라고 권할 테니까. 내일부터 당분간은 집에 못 오는데 조금 아쉽다.”
“그러게 앨범 활동 끝날 때까지는 집에 거의 못 들어오겠네. 그래도 동생이 아이돌이니까 왠지 기분이 좋은데?”
“훗, 두고 봐. 나중에 유명해져서 돈 많이 벌면 부모님이랑 오빠 호강시킬 거니까.”
“지연아…….”
16살 중학생의 입에서 나올 만한 이야기치고는 어른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족들을 위하는 동생의 마음에 울컥하는 감정이 올라왔지만, 애써 참고 있었다.
이런 내 심정을 읽은 걸까, 지연이는 미소를 지으며 농담을 던졌다.
“그것보다 언제 피부 관리라도 받았어?”
“운동하고 그러다 보니까 좋아진 것 같아. 안 그래도 얼마 전에 엄마도 그 소리 했는데, 역시 엄마랑 딸은 서로 닮는다니까?”
“그냥 하는 말이 아니야. 우리 회사에 있는 연습생들보다 오빠가 더 잘생긴 것 같아.”
“참네, 알았어.”
“아, 진짜래도 그러네? 오빠 정도 얼굴이면…….”
한동안 보지 못한다는 걸 알아서였을까, 여동생은 새벽 1시가 될 때까지 수다를 떨다가 방을 나갔다.
‘빨리 확인해 봐야겠다.’
동생이 나간 것을 확인한 나는 핸드폰을 집어 들고 앱에 접속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