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사람들이 자꾸만 보은한다-48화 (48/122)

48. 12화 계속되는 승부 (4)

‘복싱으로 전설이 되다’는 ‘플레임’의 내용에 판타지적 요소를 첨가해서 만든 소설이었다. 불우한 환경에서 자란 부분까지는 원작과 똑같았지만, 헌책방에서 우연히 발견한 외국 고문서에서 판크라스 최강자의 영혼을 만나게 되는 전개와 이를 바탕으로 복싱에 입문하는 과정까지 독자들의 흥미를 끌 만한 요소가 어느 정도 장착된 상태였다.

참고로 판크라스는 격투기의 원류가 되는 고대 무술로 주인공이 강해지는 과정은 내가 아르마이스식 격기술로 복싱에 익숙해진 것과 유사한 측면이 있었다.

“총장님 말씀대로라면 그냥 이대로 연재해도 괜찮을 것 같긴 하지만 손을 놓고 있기에는 조금 불안합니다.”

[디테일을 살짝살짝 바꿔 주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연재를 시작한 지 하루도 안 되지 않았습니까? 연재가 들어간 화부터 해서 세부적인 내용을 점검하고 바꾸면 어떨까요?]

“매니저님과 상의를 하면 충분히 가능할 겁니다. 연재가 들어갔다고 해서 수정이 안 되는 건 아니거든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의 뜻을 밝혔다.

[그럼, 1화부터 차근차근 살펴보도록 하죠.]

“저, 잠시만요. 노트북을 가져오겠습니다.”

부모님은 내가 웹소설을 쓴다는 사실을 안 후 노트북을 사 주셨다.

회사 일로 바빠 자식들에게 많이 신경을 쓰지 못하지만, 이렇게 한 번씩 지원을 함으로써 관심을 드러내곤 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큰 틀을 바꾸는 건 의미가 없습니다. 게다가 이미 읽은 독자님들 수가 상당하기 때문에 건드릴 수 있는 부분이 거의 없지요. 따라서…….]

미르헨 총장은 그동안 읽었던 웹소설을 바탕으로 수정할 곳을 차근차근 짚어 줬다. 헌책방에서 역사 속 영웅과 조우하는 장면에 개연성을 불어넣어 독자들의 감정 이입을 도왔고 복싱을 하게 되는 동기를 강하게 부각하여 주인공의 목적 의식을 강조했다.

[복싱과 관련된 에피소드 외에 흥미를 끌 수 있는 요소를 더 넣지요. 예를 들면 아공간에서 가상의 적과 자유롭게 스파링을 할 수 있는 설정 같은 것처럼 말이죠.]

“괜찮은 아이디어 같아요. 그렇게 하면 다른 인물들보다 단시간에 실력을 키워 나갈 수 있는 데다가 상처 없이 실전 경험을 쌓을 수 있으니까요.”

웹소설의 생리를 파악한 미르헨 총장과의 대화는 무척 즐거웠다. 나는 현재 연재가 진행된 에피소드를 모두 수정했고 이에 더해 앞으로 연재할 화까지 추가로 작업을 진행했다.

[늦은 시각까지 고생 많으셨습니다.]

“저야 그저 총장님께서 지적하신 부분을 고친 게 전분데요 뭘.”

[세부 설정은 이런 식으로 함께 다듬으면 되니까 아르마이스 님께서는 단어 선택과 필체같이 기본적인 것들만 점검해 주십시오.]

“조언 감사드립니다. 아까까지만 해도 불안했는데, 덕분에 마음이 편해진 것 같아요.”

나는 미소를 지으며 고마운 마음을 전했다.

[매번 말씀드리는 거지만, 저희가 받은 은혜를 생각하면 감사하다는 말을 받는 게 조금 민망합니다. 저를 비롯한 제국의 모든 일원들은 그 어떤 공무보다 아르마이스 님 지원을 최우선시하니까 편하게 받으시면 됩니다.]

“감사합니다.”

[전 그럼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내일 같은 시각에 뵙겠습니다.]

“들어가세요, 총장님.”

‘후, 원고 수정하느라 다른 작업을 거의 못 했어. 아직 시간이 있으니까 글을 좀 더 쓰고 자자.’

화면이 꺼진 것을 확인한 나는 ‘천마회귀’ 파일을 연 뒤 글을 쓰기 시작했다.

계획에 없던 수정 작업이 추가되어 스트레스를 조금 받긴 했지만, 김호준을 이기기 위해서는 이보다 더한 일도 할 수 있었다.

나는 1시간 30분에 걸쳐 에피소드 하나를 완성한 뒤 총장님과 함께 다듬은 파일들을 회사 메일로 보낸 후에야 잠자리에 들 수 있었다.

* * *

9월 말의 어느 월요일.

추석 연휴를 맞은 사람들은 가족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을 것이다.

원래라면 나도 아버지와 엄마를 따라 친척 일가가 살고 있는 태안에 가서 사촌들과 놀고 있어야 했다. 그러나 전국체전이 2주 앞으로 다가온 상황에서 한가로이 휴식을 취할 수 없는 노릇이고 부모님마저 대회에 집중하라며 성화를 한 탓에 나 홀로 서울에 남고 말았다.

“헉헉…….”

“힘드냐?”

백성철 관장은 땀을 뻘뻘 흘리며 체육관에 들어오는 나를 보며 물었다.

“당연하죠. 그냥 달려도 쉽지 않은데 이걸 차고 15km를 달렸잖아요.”

나는 팔과 발목에 찬 모래주머니를 떼며 말했다.

“이게 다 널 위해서 그런 거니까 이해해라. 저쪽 가서 스트레칭 좀 하고 있어. 난 스파링 준비 좀 해야겠다.”

“네, 관장님.”

남들 다 쉬는 연휴임에도 체육관을 나온 건 대회 준비를 하기 위함도 있었지만, 나를 위해 휴일을 반납한 관장님의 열정에 이끌린 것도 있었다.

‘요즘 체력이 부쩍 늘었다고 해도 15km를 다 완주할 줄은 몰랐어. 가면 갈수록 점점 괴물이 되어 가는군.’

백성철 관장은 거울 앞에서 스트레칭을 하는 날 보며 감탄했다. 체중 감량을 목적으로 시키긴 했지만, 모래주머니를 차고 15km를 완주할 줄은 상상도 못했다.

“야, 너 따로 운동하지?”

“특별히 하는 건 없고 그냥 러닝하고 맨몸 운동 정도만 하고 있어요.”

땀을 뻘뻘 흘리며 호흡을 정돈하기에 바빴던 내가 언제 그랬냐는 듯 경쾌한 스텝을 보이자 관장은 감탄을 넘어 경악스러운 감정이 들었다.

지난 방학 동안 여러 미션을 소화한 나는 체력 스탯 관리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 옛날에 체력 향상 미션으로 받았던 10km 달리기와 팔 굽혀 펴기 등을 꾸준히 한 덕에 LV 4를 찍은 지 오래였다.

“그래, 챔피언이 되려면 시키는 것만 해선 안 되지.”

백성철 관장은 제자의 대답을 듣고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저, 그런데 관장님. 저건 뭐예요?”

나는 삼각대 위에 올려진 스마트폰을 가리키며 질문을 던졌다.

“아, 저걸로 우리 스파링을 촬영할 거야. 깜빡하고 있었는데 잘 말해 줬다. 세팅 끝나면 바로 시작할 거니까 준비하고 있어.”

그는 아차 하는 표정을 지으며 삼각대 쪽으로 다가가 재생 버튼을 눌렀다.

“영상을 분석하면서 부족한 점들을 하나하나 보완할 거니까 스파링에 전력으로 임해라.”

“네, 관장님.”

“자식, 눈빛을 보니까 이제 떨지도 않네? 이전에 했던 것보다 강도를 더 올릴 거니까 긴장하는 게 좋을 거다.”

“알겠습니다.”

일전에 했던 스파링에서 위축감을 느꼈던 나는 시합 때 느껴지는 두려움을 컨트롤 할 필요성을 느꼈다.

내 욕망을 읽은 어드바이저는 정신력을 키울 것을 추천했고 이후 부지런히 미션을 소화한 덕분에 LV 4까지 올리는 데 성공했다.

‘확실히 예전보다 마인드 컨트롤이 훨씬 잘 되는데?’

관장님의 가벼운 움직임에도 엄청나게 긴장했던 지난 날과 달리 상대의 몸놀림이 눈에 선명히 들어왔다.

“그럼, 시작한다.”

제자가 스파링할 준비가 됐음을 확인한 관장은 스텝을 밟기 시작했다.

팡-

‘녀석, 제법인데? 팔이 얼얼한 걸 보니 그동안 가르친 게 헛것은 아니었어.’

관장은 송곳같이 예리한 펀치로 인해 미미하게나마 통증을 느끼고 있었다.

‘손 끝의 느낌이 아주 좋은데?’

나는 위빙으로 공격을 흘린 뒤 카운터 스트레이트를 날렸다. 비록 관장님의 가드에 막혀 유효타를 만드는 데 실패했으나, 정확한 동작에서 나오는 펀치는 관통력을 갖고 있었다.

“훗, 이러다가 제자 앞에서 꼴사나운 모습을 보이겠어. 지금부턴 조금 진지하게 해야겠는데?”

그는 양팔을 돌리며 몸을 푼 뒤 나에게 대쉬했다.

‘이, 이건 반칙이잖아.’

이전 스파링과 비교도 안 되는 속도로 펀치들이 쏟아졌다.

두 팔로 급소를 막으며 결정타를 간신히 피하고 있긴 했으나 폭풍처럼 휘몰아치는 그의 공격에 반격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잽싸긴 하지만 압도적인 힘 앞에서는 무용지물이지.’

백성철 관장은 팔을 바쁘게 움직이며 안면과 복부를 가드하는 날 바라보다가 있는 힘껏 일격을 날리기 시작했다.

분명 공격들은 눈에 훤히 보였다.

관자놀이를 향해 들어오는 훅을 더킹으로 피한 후 카운터 스트레이트를 날렸지만, 관장은 이를 이마로 받아 낸 뒤 반대손으로 또 훅을 날렸다.

훅-

순간적으로 허리를 젖혀 결정타를 허용하진 않았지만, 글러브가 코끝에 미세하게 닿았고 가느다란 선혈이 코 아래로 흘러내렸다.

“야, 너 코피 난다.”

“전 괜찮으니까 계속하시죠.”

“자식, 쿨한 척하기는.”

백성철 관장은 제자의 패기 어린 대답이 마음에 드는지 씽긋 웃어 보였다.

‘한 대만 맞아도 끝이야. 내가 먼저 가야겠어.’

스피드를 활용한 카운터 공격으로 스파링을 풀어 나가려 했지만, 시합 경험이 많은 관장님 입장에선 대응하기 어렵지 않았다.

‘전략을 바꿔야겠어.’

마음먹고 한 공격들이 번번이 빗나가자 큰 충격을 주기보단 포인트 위주로 경기를 풀어 나가기로 했다.

이후, 나는 동작을 간결하게 가져가며 유효타를 만들고자 최선을 다했다.

‘이 녀석 봐라? 실력이 점점 늘고 있는데?’

백성철 관장은 어느 순간부터 나의 무브먼트가 크게 좋아지고 있음을 알아챘다.

제자는 스파링이 상당이 진행됐음에도 지친 기색 하나 없이 기어를 조금씩 올리고 있었다.

‘진즉에 이렇게 할 걸 그랬네.’

나는 전략을 바꿈에 따라 몸에 힘을 빼고 공격을 적중시키는 것에 집중했고 그 결과 깃털처럼 가벼운 움직임을 할 수 있게 되었다.

팡- 팡-

“오, 이번 건 좀 좋았다.”

스파링이 시작된 후 처음으로 공격이 먹혀들었다.

제자에게 잽 두 방을 허용한 관장은 엄지를 들며 제자를 칭찬했다.

“어깨에 힘을 빼니까 펀치가 전보다 훨씬 날카로워졌어.”

“아, 그런가요?”

“뭐야? 알고 그렇게 한 게 아니야?”

“네…….”

경기 운영 방식을 살짝 바꾼 게 전부인 나는 얼떨떨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후, 어쩌다 얻어걸린 펀치에 맞다니. 세월이 야속하구나. 어쨌든 방금 그 감각 정확하게 기억해라. 복싱은 힘을 줄땐 주고 뺄 땐 빼야하는 거야. 바로 이렇게.”

백성철 관장은 설명을 하는 듯하다가 빠르게 스트레이트를 날렸다.

“악!”

대화 중 불의의 일격을 맞은 나는 배를 움켜쥐고 쓰러졌다.

“윽…… 갑자기…… 그러시면…….”

“스파링이 끝났다고 한 적은 없는 것 같은데? 오늘은 여기까지 할 테니까 좀 쉬다가 사무실로 들어와라.”

명치를 맞은 탓에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그는 제자가 바닥에 엎드려 고통을 호소함에도 할 말만 한 뒤 사무실로 들어갔다.

“정말 너무하세요.”

“미안하다. 그런데 방금 펀치는 어땠어?”

“참나, 제 상태보다 그게 더 궁금하신 거예요?”

“펀치가 들어갈 줄은 몰랐어. 원래는 시연만 하려고 했거든. 아무래도 훈련을 추가해야겠어. 그동안 테크닉과 체력 증진만 하다 보니 맷집 훈련을 거의 못 한 거 같아.”

“참나, 그나마 저니까 다행이지, 일반 사람이었으면 죽었어요.”

복싱 경력 20년이 넘는 관장님께서 실수를 하셨다는 말씀에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잡담은 그만하고 이제 슬슬 영상분석을 해보자.”

백성철 관장은 스마트폰에 있던 동영상 파일을 컴퓨터로 다운을 받은 뒤 실행시켰다.

“영상 분석 전에 네 의견을 먼저 들어 봐야겠다. 스파링 중에 보완해야 할 점을 발견한 게 있어?”

“경험, 공격 패턴의 단순함 등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무엇보다 펀치력이 부족하다고 느꼈습니다.”

‘마치 철벽을 두드리는 것 같았어.’

각고의 노력 끝에 몇 방의 펀치가 관장님의 몸에 닿았지만, 어떤 데미지도 줄 수 없었다.

최근에 힘 스탯도 올려 파워에 어느 정도 자신이 있다고 생각했으나 세계 무대까지 멀었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흠, 그 정도 펀치력이면 전국체전 아니, 동 체급에서 거의 최고 수준인데, 욕심이 과하구나.”

“아, 그런가요? 하지만 관장님께서는 미동도 없으셨잖아요.”

나는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반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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