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사람들이 자꾸만 보은한다-49화 (49/122)

49. 12화 계속되는 승부 (5)

“안 본 새에 내 몸이 좀 커진 거 같지 않냐?”

“왠지 근육이 더 붙으신 것 같기도 하네요.”

자세히 보니 관장님의 몸이 예전보다 더 탄탄해 보이긴 했다.

“훗, 그동안 훈련을 게을리하지 않은 덕분에 전성기 때 몸을 되찾았어. 아니, 오히려 사이즈 면에서는 더 커졌다고 볼 수 있지.”

“그렇군요.”

백성철 관장의 몸무게는 어느새 90kg에 육박하고 있었다.

따라서 시합 체중을 맞추기 위해 평소 70~72kg을 유지하고 있는 나와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큰 체격을 자랑했다.

“체급이 깡패라는 말, 들어 봤지?”

“네.”

“내가 너보다 5체급 정도 윈데도 매섭다고 느낀 주먹이 몇 개 있었어. 펀치력은 그만하면 훌륭하니까 다른 부분을 보완할 생각을 하라고. 네 생각은 대충 알았으니까 영상이나 보자.”

그는 재생 버튼을 클릭한 뒤 나와 함께 스파링 영상을 시청했다.

“이것 좀 봐라. 스텝이 엄청 굳어 있잖아. 자신보다 체급이 높은 선수를 상대할 땐 아웃복싱을 구사해야 하는데, 카운터를 날릴 생각만 하고 있으니까 움직임이 자연스럽지 않아.”

본인보다 윗 체급의 상대와 맞설 땐 속도를 살려 경기를 푸는 게 기본이었다. 관장님은 내가 간과한 기본 원칙들을 짚어 주며 차근차근 설명을 이어 갔다.

“영상을 보니까 일목요연하게 보이네.”

“어떤 게 보인다는 거예요?”

“스피드와 동체 시력에만 의존하는 단순한 경기 운영 말이다. 지면에 발이 붙은 채로 상체를 활발히 움직이는 건 공격을 피하는 순간 곧바로 카운터를 날리기 위해서잖아.”

“관장님께서 워낙 단단하셔서 카운터 펀치 아니면 데미지를 줄 수 없다고 생각했어요.”

“네가 세계 챔피언이 되려면 올라운드 파이터가 되야 돼. 국내 챔피언까지는 카운터 일변도로도 충분히 먹히겠지만, 세계 무대에선 통하지 않을 거야. 자, 보자. 이 상황에서 나라면…….”

백성철 관장은 영상을 켰다 멈췄다를 반복하며 상황에 맞게 판단을 내리는 법을 가르쳤다. 거기에 더하여 상대 입장에서 내 영상을 보게 되면 어떤 점을 약점으로 파악할지도 일러 줬다.

“내가 만약 너랑 붙는다면 철저한 아웃복싱을 통한 스코어 획득을 최우선으로 할 거야. 네가 방어 기술이 뛰어나다곤 하지만, 심판도 사람이라 적극성을 띠는 선수에게 가산점을 주기 마련이거든. 한마디로 보여 주기 식 공격을 많이 섞는다는 이야기지.”

“흠, 그렇군요.”

“영상을 보면 공격 중 대부분이 턱, 관자놀이, 간장과 같은 급소 부위에 집중됐다는 것을 알 수 있어. KO로 이기는 것도 좋지만, 타격이 가능한 지점이 보이면 망설이지 않아야 돼.”

이후에도 설명은 계속됐고 나는 스마트폰을 꺼내 메모를 하며 경청했다.

“설명 들으니까 어때?”

“정말 도움이 많이 됐습니다. 오늘 지적받은 점들을 보완하면 더 강해질 수 있을 것 같아요.”

나는 관장님에게 존경 어린 눈빛을 보내며 말했다.

“그럼, 다음 영상부터는 네가 해 봐.”

“어떤 거를요?”

“뭐긴 뭐야. 영상 분석 말하는 거지.”

그는 당연하다는 투로 대답했다.

“왜 자신 없냐?”

“아니요. 한번 해 보겠습니다.”

관장님께서 워낙 자세히 설명해 준 덕분에 영상을 볼 때 어떤 점들을 주목해야 하는지 대략적으로 익힐 수 있었다.

“그래, 선수로 뛰려면 상대의 전력을 분석할 수 있는 안목이 있어야 해. 잠깐만 기다려 봐라.”

그는 이메일에 접속한 뒤 파일을 다운받았다.

“무슨 파일이에요?”

“김제훈이라고 너랑 붙게 될 선수의 영상 파일이야.”

김제훈은 부산광역시 대표로 작년 전국체전에서 금메달을 딴 선수였다. 그는 일찌감치 프로로 전향하려고 했지만, 프로 복서가 되면 군 면제가 걸린 아시안 게임이나 올림픽에서 뛰기 어렵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전국체전을 다시 나오게 되었다.

“자료를 따로 챙기신 걸 보면 우승 후보겠네요.”

“응, 작년에 전국체전을 우승하고 국가 대표 상비군에도 뽑힌 녀석이야.”

‘고등학교 2학년 때 상비군에 뽑혔다고?’

국가 대표 상비군은 결원이 생겼을 때 보충하는 역할을 하는 선수로 선발전에서 3위안에 들어야 했다.

보통 대학부나 일반부에서 국가 대표 선발전 우승자가 나오는 현실을 고려하면 18살의 나이에 상비군에 뽑힌 김제훈의 실력이 만만치 않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었다.

김제훈에 대한 신상을 들으며 생각에 잠겨 있던 그때, 화면이 눈앞에 떠오르더니 미션이 생성되었음을 알렸다.

<아르마이스의 의지가 발동되었습니다.>

<돌발 미션이 발생하였습니다.>

<목표치와 보상이 설정됩니다.>

<목표: 백성철 관장이 보유한 영상 자료를 모두 분석하십시오.>

<보상: 통찰력, 지능 LV UP>

‘잘됐다. 미션도 하고 영상 분석도 하고 일석이조네.’

일전에 인간 샌드백 아르바이트를 하며 돌발 미션을 받아 본 경험이 있던 나는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미션을 수락했다.

“파일들은 네 메일로 보내 줄 테니까 다 보고 나면 연락해라. 나랑 같이 영상을 다시 보면서 놓친 부분이 있는지 살펴봐야 하거든, 그리고…… 진우야, 듣고 있어?”

“아, 네. 관장님. 듣고 있습니다.”

미션 창을 확인하느라 미처 이야기를 못 들은 나는 말을 얼버무렸다. 그러자 관장님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질문을 던졌다.

“방금 내가 뭐라고 했지?”

“저, 관장님. 저기 꽃혀 있는 비디오들도 다 영상 자료입니까?”

“어, 그렇긴 한데 왜?”

“괜찮으면 남은 추석 연휴 동안 저것들도 모두 시청하면 안 될까요? 다른 선수들 영상들도 보고 싶어서요.”

나는 관장님의 추궁을 피하기 위해 얼른 화제를 전환했다.

“하하, 어떻게 그런 기특한 생각을 다 했어? 나도 네 나이 때쯤에 세계적인 선수들의 영상을 보면서 꿈을 키웠다. 여기 비디오 플레이어가 있으니까 하고 싶은 대로 해라.”

제자의 대답에 신이 난 관장은 책장에 있는 비디오를 꺼낸 뒤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이건, 로베르트 듀란의 경기를 녹화한 영상이야. 말미에 짤막한 인터뷰도 있는데 챔피언이 되기 위해서 얼마나 노력했는지 알 수 있어.”

로베르트 듀란은 슈가레이 레너드, 마빈 헤글러와 함께 80년대 복싱의 중흥기를 이끌었던 전설의 복서였다. 관장님은 이외에도 조지 포먼, 무하마드 알리 등 전설적인 복서들의 자료들을 소개하며 설명에 열을 올렸다.

“자, 받아라.”

“어, 이건……..”

관장님은 주머니에서 체육관 열쇠를 꺼낸 뒤 나에게 건네줬다.

“앞으로 3일 동안 체육관에 아무도 없으니까 영상을 시청하든 개인 훈련을 하든 네가 알아서 해라.”

“감사합니다, 관장님.”

예상을 뛰어넘는 호의에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부모님 걱정하시니까 너무 늦게까지는 있지 말고. 이런,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 난 친구랑 약속이 있어서 나가 봐야겠다.”

“네, 조심히 들어가세요.”

나는 관장님을 배웅하고 자리에 다시 돌아왔다.

‘집에 가서 노트북이랑 옷들을 챙겨야겠다.’

체육관은 샤워 시설과 휴식 공간이 갖춰져 있어 작업을 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관장님의 당부 말씀이 있었지만, 나는 남은 3일 동안 체육관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훈련과 소설 쓰기에 집중하기로 결심했다.

* * *

추석 연휴 마지막 날.

나는 퀭한 얼굴로 티비를 보며 김제훈 선수의 영상을 분석 중이었다.

지난 3일간, 쉬지 않고 비디오를 본 덕분에 관장님이 소장하신 자료를 모두 시청할 수 있었다.

30~40분 분량의 비디오를 모두 보기 위해서는 촌음을 아껴야 했다. 게다가 웹소설 쓰기와 간단한 훈련도 병행했기에 잠을 거의 잘 수 없었다.

벌컥-

점심이 조금 지난 시간.

문 열리는 소리와 함께 백성철 관장이 체육관에 들어왔다.

“이야, 일찍 나왔네.”

“오셨어요.”

“뭐야? 너 집에 안 들어가고 여기 있었던 거야?”

그는 사무실에 널브러진 내 짐들을 보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자료가 워낙 많아서 어쩔 수 없었어요.”

“헉, 이 많은 걸 벌써 다 봤다고?”

관장은 선반 위에 가득 쌓인 비디오를 보며 탄성을 질렀다.

“그냥 틀어만 놓은 거 아니야?”

“피곤해서 놓친 부분이 있을 수는 있지만, 최대한 분석을 하면서 시청하려고 노력했습니다.”

나는 양손 깍지를 낀 채 기지개를 켜며 대답했다.

“김제훈 영상 아직도 안 봤어?”

“아니요, 첫날에 봤는데 한 번 더 보고 있었어요.”

내가 반복해서 영상을 시청하는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오늘 아침, ‘아르마이스의 의지’는 자료 분석을 마친 나에게 미션 완료를 알려 왔다.

이후, 보상 적용까지 끝낸 상황이라 지능과 통찰력은 한 단계씩 올라 LV 4를 달성했다.

스탯이 오른 만큼 분석의 질도 더 나아졌을 거라는 기대감에 나는 김제훈 영상을 실행한 뒤 재분석에 들어갔다.

“진짜지 거짓인지는 들어 보면 알겠지. 그래, 지금 보고 있는 그 영상에서 분석한 것을 말해 보면 되겠다.”

관장님은 내 옆에 앉은 뒤 설명을 기다렸다.

“김제훈 선수의 경기를 보면 양손을 잘 활용하기 때문에 사우스포인지 오소독스인지 구별이 안 될 때가 많습니다.”

“딱 봐도 스위치 복싱을 구사하고 있잖아.”

“관장님 말씀대로 김제훈은 스위치 복싱을 통해 톡톡히 재미를 보고 있습니다.”

복싱의 기본 스탠스에는 왼손을 주 손으로 쓰는 사우스포와 오른손을 주 손으로 쓰는 오소독스가 있다.

그리고 간혹 가다가 이 둘을 상황에 맞춰 적절히 활용할 줄 아는 선수가 있는데, 김제훈이 이 설명에 맞는 전형적인 스위치 복서였다.

“스위치 복싱을 하게 되면 거리 싸움에서 재미를 볼 수 있지만, 스탠스를 자주 바꿔야 하기 때문에 스스로 자멸할 수도 있어.”

관장은 내가 뻔한 설명을 한다고 생각해서인지 중간중간 계속 첨언을 했다.

“관장님, 설명 계속해도 될까요?”

“미안하다. 나도 모르게 말이 많았구나.”

“아닙니다. 관장님께서도 분석하신 게 있으시니까 그러신 거겠지요. 아무튼 다시 돌아가면 김제훈 선수의 약점을 찾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래?”

스위치 복싱을 구사하는 선수는 실력으로 압도하는 것 외에는 방도가 없다고 생각했던 백성철 관장은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으며 경청했다.

“양손 전환이 자연스러워 처음엔 긴가민가했습니다. 하지만 경기를 반복해서 보니 결정적인 순간에는 왼손 스트레이트를 사용하더군요. 이 점을 잘 이용하면 경기를 쉽게 풀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오, 진짜네. 이걸 어떻게 발견했지?”

그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내가 가리키는 지점을 시청했다.

“연습을 통해서 스위치 복싱에 숙달할 순 있지만, 어렸을 때부터 익혀 온 습관은 무의식적으로 나오는 거라 2, 3년 가지고 바꾸기 힘듭니다.”

“계속해 봐라.”

나의 분석 실력에 감탄한 백성철 관장은 더 이상의 첨언은 하지 않고 다음 설명을 재촉했다.

지능과 통찰력이 향상되자 첫날 영상을 시청했을 때 보이지 않았던 부분이 훤히 보이기 시작했다.

“김제훈 선수는 백 스텝을 무척 잘 쓰는 선수입니다. 상대가 잽 견제를 들어올 때, 뒤로 한 번 빠진 다음, 카운터 잽이나 스트레이트를 날리는 데 특화되어 있지요. 따라서 링이나 코너에 모는 전략을 구사하는 게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말 끊어서 미안한데, 녀석이 사이드 스텝으로 코너를 빠져나오는 걸 못 봤나 보네?”

관장님은 내가 주요 포인트를 놓쳤다는 것을 지적했다.

“봤습니다.”

“봤다는 놈이 전략을 참 이상하게 짜네…… 잘 나가다가 왜 그래?”

지적을 받았음에도 태연하게 대꾸하는 제자의 모습에 그는 실망스러운 감정을 내비쳤다.

“사이드 스텝을 밟을 시 우측으로 빠져나갈 확률이 80%를 넘었습니다.”

“정말이냐?”

“네, 파일 안에 5경기 중 4경기에서 같은 패턴을 보이더라고요.”

“너 선수 말고 코치해도 되겠다. 네 말대로면 우측으로 빠질 때 한 방 먹여 주면 되잖아.”

“상대가 오히려 이것을 역이용할 수도 있어서 정확한 판단은 경기를 치르면서 내리려고요.”

추가 설명을 들은 그는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칭찬 모드로 바뀌었다.

이후, 15분가량 분석이 이어졌고 관장님은 흡족한 얼굴로 차분히 경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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