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 13화 결착 (3)
‘내가 너무 까불었나?’
백성철 관장님은 팔짱을 낀 채 링 아래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평소 장난기가 많은 분이시지만, 운동하거나 시합할 때만큼은 진지한 태도로 임하셨기에 질책받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땠어?”
“네? 아, 시합 중에 건방 떨어서 죄송합니다.”
관장님께 혼날 거라는 생각에 엉뚱한 대답을 했다.
“첫 경기 소감 어땠냐고 임마. 왜? 스스로 좀 찔리나 보지?”
“평소에 관장님이랑 스파링을 많이 해서 떨리진 않았습니다.”
관장님이 예상 밖의 반응을 보이자 당황한 나는 적당한 말로 대충 얼버무렸다.
“진우야, 적당한 퍼포먼스는 나중에 프로 생활할 때 도움이 되니까 너무 개의치 않아도 된다. 대신 오늘 경기 이후로 모든 선수들의 표적이 된 것만 알아 둬라.”
“제가요?”
“그래, 아까 몇몇 코치들이 이야기하는 걸 들었는데, 널 엄청 경계하더라고.”
앞선 경기에서 압도적인 경기력을 보여 준 탓에 김제훈 선수와 더불어 경계 대상 1호가 돼 버렸다.
“후, 아무래도 제가 조금 오버한 것 같습니다.”
높아진 능력치를 시험해 보고 싶은 마음에 전력을 노출한 나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실력을 알았다고 지금 와서 대비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 그리고 나중에 신경 쓸 일이긴 한데, 프로 선수가 되면 방금 같은 쇼맨십이 빛을 발할 때가 있을 거야.”
프로 복서에게 가장 중요한 덕목은 무엇보다 실력이다. 그러나 실력을 갖췄음에도 흥행몰이를 하지 못한다면 큰 부를 쌓을 수 없는 것도 엄연한 현실이었다.
백성철 관장은 제자가 단순히 챔피언 벨트를 획득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현실적인 성공도 성취하길 바랐다.
복싱계에서 큰 부를 이룬 선수가 하나쯤은 있어야 업계 발전에 큰 도움이 됐기 때문이다.
“네, 알겠습니다.”
“오늘 수고 많았고 다음 경기 준비 잘하자.”
관장님은 내 어깨를 두드리며 덕담을 건넸다.
이후, 다른 체급의 경기들도 연달아 열렸고 우리는 다른 선수들의 경기를 관전하며 다음 경기에 대한 이야기를 간단하게 나누었다.
* * *
나는 전국체전을 치르면서도 글 쓰는 것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서울 대표 선발전 때 매일 경기를 뛰면서도 웹소설 쓰기를 해 본 경험이 있었기에 격일로 시합이 있는 전국체전 일정은 다소 여유롭게 느껴졌다.
“내일이면 벌써 전국체전도 끝이네요.”
경상남도 선수와 준결승 경기를 마친 나는 수건으로 땀을 훔치며 관장님께 말을 걸었다.
“뭐 한 것도 없는 것 같은데 시간이 참 빠르구나.”
백성철 관장님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결승전 대비해서 해 주실 말씀 없으신가요?”
“김제훈이라고 해서 다른 선수들과 다를 거 없어. 여태껏 한 것처럼 차분하게 경기를 풀면 우승에 큰 문제는 없을 거다.”
“그래도 조금 대비를 해야 하지 않을까요? 오전에 김제훈 선수 경기를 봤는데 만만치 않아 보이더라고요.”
“예전에 보내 줬던 김제훈 파일 있지?”
“네.”
“자기 전에 영상 보면서 네 나름대로 전략을 세워 봐라.”
관장님은 일전에 내 분석 실력을 본 이후 나에게 자율성을 많이 부여하는 편이었다.
“따로 하고 싶은 말씀은 없고요?”
스스로 영상 분석을 하는 것으로 충분할 수 있겠지만, 시합 경험이 풍부한 관장님의 의견을 추가로 더 듣고 싶었다.
“너, 전 세계에 스위치 복서가 얼마나 된다고 생각하냐?”
“예전에 고등학교 돌아다니면서 스파링할 때도 몇 명 있던 걸 생각하면 엄청 많지 않을까요?”
나는 다양한 상대와 스파링을 했던 경험을 떠올리면서 대답했다.
“네가 붙었던 놈들은 진정한 스위치 히터가 아니야. 정확한 건 아니지만, 세계 챔피언을 한 선수들 중에 스위치 복싱을 구사한 선수는 무하마드 알리와 마빈 헤글러를 포함해서 10명도 되지 않을 거다.”
“어째서죠? 스위치 복싱을 제대로 구사할 줄만 알면 엄청나게 도움이 될 텐데…….”
사우스포나 오소독스로 자신이 원하는 시점에 언제든지 전환할 수 있다면 복싱을 함에 있어 엄청난 이득을 얻을 수 있다.
첫째로 변칙적인 복싱을 구사할 수 있게 되는 만큼 상대 선수가 시합에 적응하기 어렵게 만들 수 있다. 둘째로 스탠스의 전환이 수시로 가능해져 거리 감각에 혼동을 주기 때문에 상대가 펀치 타이밍을 잡기 어렵게 만들어 경기 운영에 큰 차질을 빚게 할 수 있었다.
따라서 나도 전국체전이 끝나면 스위치 복싱을 익힐 계획을 갖고 있었다.
“흉내는 쉽지만, 몸에 체득하는 건 어려워서지. 다른 세계적인 복서들이라고 스위치 복싱이 좋은 줄 모르는 건 아니야. 그러나 내가 언급한 전설적인 복서들처럼 자유자재로 구사하려면 천부적인 재능과 엄청난 노력이 필요하다.”
“혹시, 김제훈 선수의 스위치 복싱이 어설프다는 말씀을 하시려는 건가요?”
“이제야 말귀를 좀 알아먹는구나. 네가 예전에 분석한 대로 그놈은 원래 사우스포였고 스타일을 바꾼 건 불과 1년 전쯤이야. 녀석의 재능이면 고등부 선수들에게는 어느 정도 먹히겠지만, 당장 국내 탑급 프로 선수와 붙어도 밑천이 금방 들통날 거다.”
백성철 관장은 김제훈 선수의 실력이 주변의 평가로 인해 과장된 면이 있다고 생각했다.
“이상하네요.”
“뭐가 말이냐?”
“관장님 말씀대로 김제훈 선수의 스위치 복싱이 어설프다면 기자들이 왜 그렇게 몰리는 걸까요?”
기자들은 현업에 종사하는 선수나 코치들 정도는 아니지만, 취재를 했던 경험을 토대로 선수를 보는 안목이 있었다.
포털이나 종이신문에서는 전국체전에 관한 기사를 야구나 축구와 같은 대중적 스포츠에 비해 덜 중요하게 취급하지만, 스타성이 있는 선수들이 나타나면 종종 특집기사를 싣곤 했다.
김제훈 선수의 경우 대회 전에 했던 개인 인터뷰가 포털에 실렸던 것을 고려하면 우승 시에는 특집기사가 나올 확률이 높았다.
“그거야 대중들에게 인기가 많으니까 그런 거겠지. 허구한 날 SNS로 훈련 영상이랑 몸 자랑을 해서 그런지 팬이 제법 많은 것 같더라.”
“그렇군요.”
“내가 볼 땐 팬들을 위해서 스타일을 일부로 화려하게 바꾼 것 같아. 멍청한 녀석, 인기 좀 얻으려고 자기 발목 잡을 짓을 하다니…….”
그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혀를 찼다.
“그래도 인지도를 높이기 위해서 SNS 활동을 한 건 현명한 것 같네요. 저도 나중에 V튜브 활동을 해야겠어요.”
V튜브는 동영상 공유 서비스를 제공하는 회사로 전 세계 사람들이 이용하는 대중적인 사이트였다.
“그건 세계 챔피언이 되고 나서 생각해라. 너도 김제훈처럼 헛바람 들어가면 어쩌려고 그러냐?”
“지금 당장 하려는 건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후, 그래 네가 잘 알아서 하겠지. 하여튼 경기도 끝났으니까 이만 들어가자.”
“네, 관장님.”
우리는 내일 있을 결승전을 위해 일찍 들어가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 * *
결승전 당일.
이날은 웰터급 경기뿐만 아니라 다른 체급의 결승전도 열렸기 때문에 체육관 안에는 평소보다 기자들이 많이 포진해 있었다.
“전국체전 우승하면 프로로 전향한다는 말이 있던데?”
“누구? 아, 김제훈 선수 말하는 거지. 그래서 다들 인터뷰 따려고 이렇게 온 거 아니야.”
몇몇 기자들은 일찌감치 김제훈의 승리를 점치며 김칫국을 마시고 있었다.
이들은 결승전이 있기 전까지 복싱 경기를 관람하지 않아서 내 실력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한 상태였다.
“팬들이 있다는 게 사실이었네요.”
나는 관장님과 몸을 풀다가 관중석에 걸린 현수막을 발견하고 입을 열었다.
“오히려 잘됐어. 이번 시합에서 네가 승리하면 더 많은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수 있잖아.”
백성철 관장은 김제훈 선수의 승리를 염원하는 관중들을 바라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전 그냥 이런저런 거 생각 안 하고 시합에 집중하려고요.”
“그래. 아, 그것보다 어제 영상 분석은 해 봤어?”
“자기 전에 잠깐 보긴 했는데 참고할 건 크게 없더라고요.”
일전에 관장님과 영상 분석을 한 적이 있었기에 새롭게 발견한 내용은 딱히 없었다.
‘응? 갑자기 뭐지?’
워밍업을 마치고 결승 시합을 기다리던 그때, 미션을 알리는 화면이 눈앞에 떠올랐다.
<아르마이스의 의지가 발동됩니다.>
<목표치를 설정합니다.>
<보상이 설정됩니다.>
<목표: 김제훈을 꺾고 전국체전에서 우승하기.>
<보상: 매력, 힘, 민첩성. 경험치 + 50%>
‘스탯이 어느 정도 오르니까 예전처럼 바로 레벨이 오르진 않네.’
나는 미션을 수락하며 생각했다.
“진우야, 널 응원하는 사람들도 있는 것 같은데?”
“네?”
미션 문구를 보느라 정신이 팔려 있던 나는 관장님의 목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렸다.
“어, 진짜네요?”
“훗, 다른 것도 아니고 전국체전 결승인데 이 정도는 해 줘야지.”
관장님은 관람석에 한쪽에 걸린 현수막을 보며 흐뭇하게 말했다.
걸개 뒤편에 교감 선생님과 몇몇 선생님들이 계신 것을 보면 학교에서도 이번 결승전을 각별히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재학생이 전국체전 결승에 진출한 건 성문고 창립 이래 처음이라 학교에서 나를 자랑스러워하는 건 당연했다.
“학교에서 응원까지 와 줬으니까 반드시 이겨라.”
“알겠습니다.”
모교의 응원에 기분이 좋아진 나는 결의에 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잠시 후, 경기 진행 요원이 시합이 임박했음을 알렸다.
“강진우 선수, 준비되셨으면 링 위로 올라가세요.”
“예.”
요원의 말에 짤막하게 대꾸한 뒤 편안한 마음으로 링으로 향했다.
‘상대는 안중에도 없나 보네.’
이미 링에 도착해 있던 김제훈 선수는 관중석에 있는 팬들에게 손을 흔드느라 정신이 없어 보였다.
경기에 집중하지 않는 그의 태도가 살짝 거슬리긴 했으나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훗, 그래도 결승전이라 이거지?’
주심이 링 중앙으로 선수들을 부르자 김제훈의 눈빛은 순식간에 돌변했다.
나를 죽일 듯이 쳐다보는 그의 눈빛은 좀 전의 안이한 태도와 달리 시합에 임하는 각오가 남다르다는 것을 보여 줬다.
땡-
시합의 개시를 알리는 종이 울렸다.
‘초장부터 장난을 치려고 하네?’
스위치 복싱을 하기 전에 사우스포였던 김제훈은 상대에게 혼란을 일으키기 위해 의도적으로 오소독스 자세를 취했다.
그러나 이미 분석을 모두 마친 나는 당황한 기색 없이 왼손 잽으로 경기를 풀어 갔다.
팡- 팡-
‘생각보다 묵직하잖아.’
김제훈은 나의 더블 잽을 앞 손으로 막으려 했지만, 예상보다 강하고 빠른 공격에 안면을 한 대 허용했다.
관장님의 말씀대로 녀석의 스위치 복싱은 고등부 선수에게는 통했으나 스탯을 충분히 올린 나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길게 끌 것 없어.’
스위치 복서라고 하지만, 그의 진가는 사우스포 스탠스를 취할 때 발휘되었다.
따라서 어설프게 오소독스를 취하고 있는 이때야말로 나에게 있어 큰 기회였다.
“야, 이게 어떻게 된 거야. 김제훈 선수가 밀리잖아.”
“어, 이상하다. 왜 저러지?”
내가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뒤 양 훅으로 김제훈을 흔들자 팬들 사이에서 동요가 일었다.
‘이런 씨발.’
김제훈은 소나기처럼 쏟아지는 내 펀치를 막느라 스위치 복싱은커녕 생각할 틈조차 갖지 못하고 있었다.
‘준비한 걸 한번 써 볼까?’
상대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것을 확인한 나는 의도적으로 왼쪽 복부를 열어 두었고 궁지에 몰려 있던 김제훈은 귀신에 홀린 것마냥 레프트 바디를 날렸다.
“윽!”
레프트 바디가 들어올 것을 알고 있던 나는 백 스텝으로 공격을 흘린 뒤 라이트 스트레이트로 안면 정중앙을 가격했고 김제훈은 충격으로 인해 비틀거렸다.
‘바로 끝내자.’
상대가 그로기 상태인 것을 확인한 나는 지체 없이 그에게 달려들어 안면, 복부 가리지 않고 연타를 꽂아 넣었다.
“원, 투, 쓰리…….”
연달아 강타를 얻어맞은 김제훈은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고 주심은 카운터를 세기 시작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웰터급에 저런 선수가 있었나?”
당연히 김제훈이 이길 것으로 예상했던 기자들은 뜻밖의 결과에 어안이 벙벙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