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 13화 결착 (4)
“기자들이 많이 와 있네요?”
시합을 마친 나는 웅성거리는 기자들을 보며 관장님께 말을 걸었다.
“훗, 다들 김제훈의 승리를 예상했는데 결과가 이렇게 나와서 당황했을 거야. 그것보다 아까 경기에서 레프트 바디를 유도한 거 맞지?”
“상대가 정신없어 보여서 습관대로 펀치가 나갈 것으로 생각한 게 잘 먹힌 것 같아요. 아마 다른 때였으면 통하지 않았을 거예요.”
나는 관장님의 물음에 겸손하게 대답했다.
“그걸 전문 용어로 드로잉이라고 하는 거다.”
“드로잉이요?”
“상대의 펀치를 유도하는 기술을 명칭하는 말인데, 페이크를 잘 주는 선수들이 종종 쓰곤 하지. 물론 너같이 상대의 습관이나 패턴을 모두 알고 있는 경우라면 굳이 페이크를 쓰지 않아도 되고.”
백성철 관장은 제자를 흐뭇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안녕하십니까?”
그렇게 한참을 경기에 대해 논평을 주고받던 그때, 우리의 등 뒤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 김현철 기자님 아니세요?”
이전에 서울 대표 선발전에서 안면을 익혔기 때문에 그를 알아보는 건 어렵지 않았다.
“하하, 절 기억하시네요. 맞습니다. 서울 데일리의 김현철 기자입니다. 시상식 전에 잠깐 인터뷰를 해도 되겠습니까?”
“관장님?”
“어, 그래 난 잠깐 나갔다 올 테니까 인터뷰하고 있어라.”
백성철 관장은 제자의 요청에 고개를 끄덕이고 다른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안 본 새에 실력이 느셨더군요.”
김현철 기자는 주변에 둘만 남은 것을 확인하고 입을 열었다.
“관장님께서 지도를 잘 해 주신 덕분입니다.”
“아무리 좋은 코치가 옆에 붙어도 천부적인 재능이 없다면 이렇게 빨리 성장하는 건 불가능하지요. 전국체전이 끝났는데 향후 계획이 있으십니까?”
“음, 시합을 마친 지 얼마 안 돼서 뭐라 드릴 말씀이 없네요.”
전국체전에서 멈출 생각은 아니었으나 관장님과 어떤 논의 없이 향후 계획을 말하는 건 안 된다고 생각했다.
“당연히 전국체전 이후를 생각하고 계신 것처럼 보였는데 의외네요.”
“제가 그렇게 보였나요?”
김현철 기자의 이야기에 호기심이 생긴 나는 궁금하다는 투로 반문했다.
“체전 우승이 확정됐는데도 별로 기뻐하지 않아 하셔서요.”
“음…… 전국체전으로 복싱을 마무리할 생각은 없습니다. 하지만 구체적인 향방은 관장님과 상의를 한 뒤에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아요.”
“앞으로 어떤 행보를 걸으실지 많이 궁금합니다. 그럼 본격적으로 인터뷰를 시작해 보겠습니다. 복싱을 입문하게 된 계기가 어떻게 되십니까?”
“처음엔 가볍게 체력을 키울까 하는 마음으로 체육관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복싱을 전문적으로 할 생각은 없었지만, 관장님께서 저를 좋게 봐 주신 덕분에…….”
내가 자세히 이야기할 의향이 없다는 것을 파악한 김현철 기자는 의례적인 질문을 던지는 것으로 인터뷰를 시작했다.
그의 입에선 복싱 입문 과정, 훈련 기간, 간단한 가정사와 같은 질문들이 쏟아졌고 나는 별 고민 없이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답변했다.
“재능이 있는 건 알았지만, 입문 4개월 차에 전국체전 우승이라니…… 대중들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하군요.”
“아마추어 대회에서 우승한 것뿐입니다. 아직 프로도 아닌데요 뭘.”
“단순히 실력만 봐서 그런 건 아닙니다. 강진우 선수는 팬들을 끌어모을 수 있는 마스크를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동생이 아이돌인 점도 플러스 요인이고요.”
김현철 기자는 머리를 긁으며 멋쩍어하는 날 보며 차분하게 말했다.
“전국체전 우승이 작은 성과는 아니지만, 더 멀리 나아가기 위해서는 앞으로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역시, 더 높은 곳을 바라보고 계시는군요. 김제훈 선수의 팬들이 실시간으로 커뮤니티에 글을 올린 덕분에 강진우 선수의 인지도도 많이 올랐을 겁니다. 저, 혹시 SNS를 하십니까?”
“해야 할 일이 많아서 SNS는 하지 않고 있습니다.”
어느 정도 구력이 쌓이면 SNS를 통해 날 홍보할 생각은 있었지만, 아직은 부족했다고 생각했기에 SNS를 시작할 마음은 없었다.
“계정을 만드시길 권해 드립니다. 화제를 끌 수 있을 때 팬들을 확보하는 게 여러모로 좋을 테니까요.”
“참고하겠습니다. 저, 관장님께서 기다리고 계셔서 이만 가 보겠습니다. 시상식에 참여도 해야 하고요.”
관장님은 기자님 뒤에 멀찍이 서서 손목시계를 손으로 가리키고 있었다.
아까 전에 진행 요원과 대화를 나눈 걸 봤을 때 시상식이 임박했음을 알리려는 게 분명했다.
“이런 바쁜 분 잡아 놓고 제가 결례를 저질렀네요. 우승 다시 한번 축하드립니다. 그럼 나중에 뵙겠습니다.”
“괜찮으시면 시상식이 끝나고 인터뷰를 더 해 드리겠습니다.”
나는 지역 대표 선발전 때부터 나를 높게 평가한 기자님에게 관심이 있었다.
내 착각일지 모르겠지만, 김현철 기자는 날 단순히 기사를 쓰기 위한 인터뷰어가 아닌 팬심으로 대하는 게 느껴졌고 그가 하는 몇몇 조언들이 진심에서 나온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은 아마 어렵지 않겠습니까?”
김현철 기자는 주위를 돌아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다들 왜 우리를 쳐다보는 거죠?”
“저분들은 타 언론사 기자들로 제가 아니라 선수님을 쳐다보고 있는 겁니다. 아, 어쩌면 절 보고 있을 수도 있겠네요. 전국체전 최고 스타와 단독 인터뷰를 하고 있으니까요.”
기자들은 부러움이 섞인 시선으로 김현철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처럼 이제 막 데뷔한 신인 선수는 기자들이 기사 한 줄 써 주는 걸 감사해야 했으나 압도적인 경기력과 출중한 외모 덕분에 많은 관심을 받을 수 있었다.
“인터뷰에 응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
“네, 조심히 가세요.”
나는 김현철 기자에게 꾸벅 인사를 한 뒤 관장님이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무슨 인터뷰를 그렇게 길게 하는 거야? 원래 시합 마치고 바로 시상식이 있는데 약간 지연되는 바람에 관계자에게 잔소리 들었잖아.”
“죄송합니다. 관장님.”
“훗, 그래도 오늘은 첫 우승이니까 봐준다. 자, 가자.”
관장님은 등을 두드리며 개의치 않다는 제스처를 취했다.
잠시 후, 시상식은 거행됐고 내 목에는 전국체전 금메달이 걸렸다.
“메달을 손에 들고 포즈를 취해 주세요.”
“이쪽 바라봐 주세요.”
‘판 다 깔아 놓았는데 주인공은 따로 있네.’
김제훈은 기자들의 카메라 플래시를 받는 나를 보며 씁쓸해했다.
자신이 그동안 열심히 활동해서 끌어모은 매스컴의 관심을 내가 가로챘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성동일보의 김기현 기자입니다. 고등학교 1학년의 나이로 웰터급 기대주로 불리는 김제훈 선수를 이긴 소감을 듣고 싶습니다.”
“지난 몇 달간의 노력이 보상을 받은 것 같아 무척 기쁩니다. 앞으로 가야 할 길이 멀지만, 오늘만큼은 집에서 가족들과 이 기쁨을 같이 공유하고 싶어요.”
포토 타임이 끝나기 무섭게 기자들은 나에게 다가와 질문 세례를 퍼부었다.
“체전을 우승하고 나면 프로에 데뷔할 거라고 선언한 김제훈 선수를 완전히 압살해 버리셨는데 그 비결이 무엇입니까?”
“제가 아무래도 초출이다 보니 전력이 노출되지 않은 게 승리로 이어진 것 같습니다. 운이 어느 정도 따라 준 면이 있고요.”
처음 인터뷰에 임할 땐 과감한 멘트도 몇 개 던져 볼까 생각했지만, 막상 기자들 앞에 서니 섣불리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으이구, 답답하기는…….’
이 광경을 옆에서 보던 백성철 관장은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쉬었다.
그러자 기자 중 하나가 이를 눈치채고 그에게 질문을 던졌다.
“혹시 일전에 동양 챔피언을 지내셨던 백성철 선수 아니십니까?”
“절 기억해 주시는 분이 계시는군요.”
백성철 관장은 의외라는 얼굴로 말을 건 기자를 쳐다봤다.
그는 비록 은퇴한 지 10년이 다 되어 가지만, 세계 랭커였던 만큼 복싱 취재 기자들 사이에서 종종 회자되는 인물이었다.
“지금은 뭘 하고 계십니까?”
“보시다시피 강진우 선수 코치를 맡고 있고 동네에서 체육관을 운영하는 중입니다.”
“그러면 강진우 선수의 일거수일투족을 모두 알고 계시겠군요.”
“아마 그럴 겁니다.”
기자의 물음에 관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의 뜻을 밝혔다.
“강진우 선수의 전적을 보면 아마추어 경기치고 이례적으로 KO가 많이 나왔습니다. 펀치력이 좋아 보이는데, 따로 행하는 훈련이 있으십니까?”
“음, 딱히 특별한 훈련 같은 건 없었습니다. 아마 들어 봤자 이미 다른 코치들로부터 숱하게 들은 이야기일 겁니다.”
“그 말씀은 훈련 외에 다른 비결이 있다는 것으로 들리는데요?”
“훈련이 아니면 뭐겠습니까, 바로 재능이죠.”
백성철 관장은 당연한 걸 묻냐는 투로 대답했다.
“오, 그럼 재능을 확인할 수 있었던 일화 같은 게 있습니까?”
“다른 사람이랑 스파링 해서 이긴 경험이나 복싱계에 유명하신 분으로부터 재능을 인정받은 스토리가 있으면 가감 없이 말씀해 주십시오.”
내 인터뷰에서 건질 걸 찾지 못했던 기자들은 눈을 빛내며 백성철 관장의 대답을 기다렸다.
“스파링과 실전은 차이가 많이 나기 때문에 거기서 누굴 이겼고 졌고는 크게 의미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2달 전에 있었던 대표 선발전이 데뷔전이었기 때문에 누굴 만날 시간도 없었고요.”
“그러면 간단하게 훈련 일화 하나 정도만 말씀해 주시는 것으로 마무리해 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관장님께 처음 말을 걸었던 기자는 특색 없는 답변에 흥미를 잃었다.
“하하, 이런 서론이 너무 길었던 모양이군요. 바쁘신 것 같으니 딱 하나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진우는 올 6월까지만 해도 복싱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친구였습니다.”
“그 말씀은 설마…….”
“네, 맞습니다. 진우는 복싱에 입문한 지 4개월 만에 전국체전에서 우승을 했습니다. 그리고 올 12월에 열리는 국가 대표 선발전에도 참가시킬 예정이고요.”
“저, 말씀 중에 죄송합니다만 입문 4개월 만에 체전 우승하는 게 현실적으로 가능합니까?”
기자들 중 하나가 의심쩍은 표정을 지으며 의문을 제기했다. 그러자 관장은 태연한 태도로 답변을 이어 갔다.
“진우가 복싱을 배운 지 4개월밖에 안 됐다는 건 사실입니다. 정 믿기 어려우시면 우리 체육관 부원들을 잡고 물어보세요.”
“관장님 말씀을 못 믿겠다는 게 아니라 상식적으로 그게 맞나 싶어서…….”
“상식에 부합하는 퍼포먼스를 보였다면 재능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한 가지 더 말씀드리면 복싱계에 몸담으면서 숱한 챔피언들과 유망주들을 봤지만, 진우보다 잠재력이 뛰어난 선수는 없었습니다. 그리고…….”
‘좋게 말씀해 주셔서 감사하긴 한데, 왠지 부끄럽다.’
기자들을 상대로 열변을 토하는 관장님의 모습에 고마운 기분도 들었지만, 낯이 뜨거운 것도 사실이었다.
“자, 이만하면 답변이 충분히 됐을까요?”
“하하, 네.”
“감사합니다, 덕분에 좋은 정보 많이 얻어 갑니다.”
그들은 흡족해하는 얼굴로 관장님께 감사의 뜻을 표한 뒤 자리를 떴다.
“고생하셨습니다.”
“고생은 무슨. 네가 인터뷰 경험이 많이 없어서 오늘은 도와줬지만, 나중에 프로가 되면 적절하게 널 PR할 줄 알아야 돼.”
“자기 PR 수준을 넘어서 거의 소설을 쓰시던데요.”
“그래서 네가 아직 풋내기라는 거야. 대중들의 흥미를 끌려면 어느 정도 양념을 쳐 줘야 한다고.”
관장님은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이제 슬슬 갈까요?”
“가긴 어딜 가냐? 지금 저기서 너 기다리고 계신 분들 안 보이냐?”
“아, 그렇네요.”
체육관 한쪽에는 성문고등학교 관계자들과 복싱 협회 간부 몇몇이 날 기다리고 있었다.
“수고했다. 진우라고 했지?”
“네.”
“우리 학교에서 명문대 간 학생들은 많이 나왔어도 체육으로 성공한 사람은 없었던 것 같은데, 정말 장하다.”
“감사합니다, 응원해 주신 덕분에 시합을 무사히 치를 수 있었습니다.”
교감 선생님은 내 어깨를 두드리며 칭찬했다. 그러자 옆에 있던 다른 교직원들도 한마디씩 거들었다.
“맞습니다. 제가 알기로 전국체전에서 우승한 학생이 나온 건 개교 이래 처음입니다.”
“하하, 학교에 돌아가면 표창장이라도 줘야겠습니다.”
선생님들은 돌아가며 날 칭찬하기 바빴고 이후에도 협회 간부들 몇몇이 찾아와 격려의 말을 아끼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