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 13화 결착 (6)
‘왜 저러지?’
우리 쪽을 바라보고 있던 김호준은 나와 눈이 마주치자 그대로 책상에 엎드렸다.
“아까부터 우릴 계속 보고 있더라고.”
재웅이는 내 귀에다 조그맣게 속삭였다.
“안색이 안 좋던데, 무슨 일이라도 있나?”
“그러게, 너랑 내기에서 진 이후로는 우리에게 말도 걸지 않잖아.”
“흠, 생각해 보니까 그렇네.”
“알 게 뭐야. 문학부 활동 때마다 저 녀석 때문에 스트레스받았던 거 생각하면 지금이 더 편한 것 같아. 그냥 무시하고 아까 하던 이야기나 마저 하자.”
“그래, 알았어.”
나는 고개를 끄덕인 뒤 재웅이와 대화를 이어 갔다.
‘씨발,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천마회귀의 작가가 강진우였어?’
한편, 김호준은 우리의 대화를 듣고 넋이 나가 있었다.
승부에서 지긴 했지만, 그동안 쌓아 온 구력이 있었기 때문에 다음 대결에서는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다.
중학교 시절부터 웹소설 작가를 꿈꿔 왔단 나와 재웅이는 항상 녀석에게 뒤쳐졌고 김호준은 이를 은근히 즐겼다.
그러나 이번에 느낀 절망감은 머릿속을 지배했던 우월감을 모두 지워 버릴 정도로 강렬한 것이었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손톱을 깨물며 생각에 잠겼다.
‘그래, 맞아. 진우가 예전에 조선글쟁이라는 필명이 어떠냐고 물어본 적이 있었지. 게다가 놈의 반응을 보니 틀림없이 천마회귀의 작가가 분명해. 후우, 앞으로 어떡해야 하지? 지금까지 썼던 원고들을 모두 지우고 제대로 다시 한번 써 볼까? 하아, 그러기에는 이제까지 썼던 분량이 만만치 않은데…….’
김호준은 나를 이길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해 머리를 굴렸다.
그러나 뾰족한 수는 나오지 않았고 어떤 수를 쓴다 한들 이번에 나온 ‘천마회귀’를 능가할 만한 작품을 쓸 자신이 없었다.
클럽 활동 내내 한숨을 내쉬며 고민을 하던 그는 끝내 체념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만하자. 내가 죽어라 해 봤자 진우를 이길 수 없을 거야. 필력부터 차이가 엄청난데 여기서 소재를 한 번 더 바꾼다고 크게 달라질 건 없어.’
그는 ‘천마회귀’를 읽는 독자 중 하나였다.
정식으로 웹소설 작가가 된 이후에는 남의 글은 잘 읽지 않았다. 그러나 6개월 가까이 1위를 기록했던 작품의 아성을 뛰어넘는 신작이 나왔다는 이야기에 호기심이 생겼다.
‘소재도 소재지만, 대사 처리나 스토리 전개가 엄청 깔끔하잖아. 지금은 1, 2위를 왔다 갔다 하지만, 화수가 누적되면 독주 체제를 형성할 수도 있겠어.’
칭찬에 인색한 김호준이었지만, ‘천마회귀’의 작품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는 1화를 시작으로 최신화까지 귀신에 홀린 듯 거침없이 읽었고 평점도 이례적으로 10점을 준 상태였다.
내가 쓴 글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읽는 것을 일찌감치 중단했을 테지만, 이미 모두 읽은 상황이라 되돌릴 수 없었다.
“애들아, 오늘은 가을을 소재로 시를 써 볼 거야. 주제는 가을이랑 연관된 거면 뭐든 괜찮으니까 부담 갖지 말고 자유롭게 써 봐. 아, 그리고 저번에 말했던 것처럼 쓰고 있는 소설이나 시가 있으면 언제든지 나에게 가져와. 내가 전문 평론가는 아니지만 너희들에게 도움을 줄 정도는 될 거야”
김지아 선배는 여느 때처럼 부장으로서의 소임을 다하고 있었다.
그녀는 대입 시험을 곧 앞둔 상황이었지만, 동아리에 대한 애정이 컸기 때문에 활동 시간에는 빠지지 않고 출석했다.
‘쟤가 웬일로 시키는 걸 다 하지?’
그녀는 책상에 앉아 시를 쓰는 김호준을 보며 생각했다.
자신이 말하면 착실히 따르는 다른 부원들과 달리 김호준은 소설을 습작하거나 자기 마음에 드는 활동에만 참여했기에 의아하게 여겨졌다.
‘이것들이 왜 여기 있지? 신작 구상은 포기한 건가?’
교실을 돌아다니며 아이들의 활동을 지켜보던 그녀는 휴지통에 버려진 노트를 보고 놀랐다.
그 노트는 김호준의 것으로 최근에 구상하고 있던 신작의 플롯과 인물 특성들이 빼곡히 적혀져 있었다.
‘아이 씨발, 쪽팔리게 왜 저걸 보는 거야?’
승부에서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직감한 김호준은 신작에 대한 열정을 모두 잃고 현재 연재하는 작품을 잘 마무리하는 것으로 방향을 정했다.
한번 마음을 정하고 나니까 나로 향했던 질투심과 열등감은 모두 사라졌다.
보통의 사람들은 자신과 비슷한 위치거나 아래 있는 사람에게는 야멸차게 굴지만, 아예 상대가 안 될 정도로 높은 곳에 다다른 자에게는 비교 자체를 안 하는 법이다.
그는 자신이 버린 습작 노트를 보고 있는 김지아 선배를 불만스럽게 쳐다보다가 이내 고개를 돌리고 시 쓰기에 집중했다.
* * *
학교를 마치고 집에 돌아온 나는 방에 들어와 나이트 아린을 기다렸다.
‘무슨 일로 날 보자고 하신 걸까?’
웹소설 론칭부터 체전 준비까지 바쁜 스케줄을 소화한 탓에 오랫동안 이세계의 존재들과 연락을 취하지 못했던 나는 설레는 기분으로 이들을 만날 준비를 했다.
[아르마이스 님, 계십니까?]
약속한 시각이 되자 나이트 아린은 화면에 모습을 드러냈다.
“네, 저 여기 있습니다.”
잠시, 컴퓨터로 소설을 쓰던 나는 얼른 등을 돌리고 나이트 아린에게 인사했다.
[바쁘실 텐데,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호출하신 데에는 다 이유가 있으시겠죠. 그런데 혹시 어디세요? 평소에 계시던 곳하고 많이 다른 것 같은데?”
나는 화면 주변에 보이는 이질적 풍경을 보며 물었다.
이제까지 이르젠 제국의 사람들과 소통할 때는 시스템이 연결되어 있는 황궁이나 주요 건물에서 보는 게 보통이었다.
그러나 지금 내가 보고 있는 화면에는 나무와 산이 있는 것을 보면 보통 때랑 다른 장소에 나와 있는 것이 분명했다.
[휴. 브루스 단장님께서 고집을 피우는 통에 황성 근처에 있는 야산에 나와 있습니다.]
[아르마이스 님, 오랜만입니다!!]
브루스 단장은 여느 때처럼 활기 넘치는 목소리로 나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단장님. 잘 지내셨나요?”
[하하, 저야 항상 똑같지요. 그것보다 나이트 아린이 격기술 훈련이 끝났다고 헛소리를 했다면서요?]
“스승님께서 훈련 과정을 모두 수료했다고 하시긴 했습니다만…….”
나이트 아린은 9월 중순경에 있던 마지막 만남에서 기본 초식으로 시작하는 기초 단계부터 실전 적용에 중심을 둔 고급 과정까지 모두 가르쳤다고 이야기했다.
[격기술 수업이 끝났다고 한 건 아르마이스 님이 살고 계신 현실을 고려해서 드린 말씀이었습니다. 아시다시피 저편에 있는 세상은 마력이 거의 없잖아요.]
[허허, 아무리 그렇다 해도 격기술 최종 오의를 그냥 지나가면 쓰나?]
[어차피 배워도 헛수고이실 것 같아서 그런 겁니다.]
[정 하기 싫으면 뒤로 물러나 있게. 내가 직접 아르마이스 님을 지도할 거니까.]
브루스 단장은 그녀의 설명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마지막 기술을 가르칠 의지를 내비쳤다.
“단장님께서 이렇게까지 말씀을 하시니까 궁금하긴 하군요.”
[방금 제가 한 말을 들으셔서 아시겠지만, 일부러 마지막 과정을 스킵한 것은 아닙니다. 아르마이스 님께서 원하시면 지금이라도 당장 가르쳐 드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기술은 배우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릴 뿐만 아니라 실제로 사용할 수 있는지 여부도 불확실하기 때문에 고민을 하시고 결정하시길 바랍니다.]
내가 배우겠다는 의지를 드러내자 나이트 아린은 멋쩍어하는 얼굴로 설명을 덧붙였다.
[배우시겠다는 분께 이 이상 왈가왈부하는 건 실례야. 아르마이스 님. 제가 간단히 시범을 보일 테니 지켜봐 주십시오.]
브루스 단장은 아직도 머뭇거리는 나이트 아린을 답답하게 바라보다가 격기술의 기본자세를 잡기 시작했다.
‘어쩌시려는 거지?’
나는 가장 처음에 배운 1형의 초식을 행하려는 브루스 단장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그리고 얼마 있지 않아 기수식을 취하던 브루스 단장의 주먹에서 푸른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콰아앙!-
엄청난 굉음과 함께 뿌연 연기가 화면을 가득 채웠다.
“헉, 어떻게 하신 겁니까?”
나이트 아린과 단장이 서 있던 곳 근처에 있던 커다란 나무는 브루스 단장의 권격에 의해 산산조각이 나 있었다.
브루스 단장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놀란 나를 흐뭇하게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흥미가 좀 생기셨습니까?]
“네, 단장님. 가능하면 지금 당장 배우고 싶습니다.”
[나이트 아린.]
[네. 단장님.]
[지금부터 아르마이스 님께 마력 운용법을 알려 드릴 예정이니 세이라 황녀님께 검술 세미나가 취소됐다고 알려 주게.]
[검술 세미나는 황제 폐하를 포함한 황실 인사들이 대거 참가하시는 자리인데 괜찮으시겠습니까?]
나이트 아린은 브루스 단장을 걱정스러운 눈길로 쳐다보며 말했다.
[자네는 아르마이스 님과 관련된 업무보다 황실의 일이 더 중하다고 생각하는 건가?]
[아, 아닙니다. 그럼 먼저 가 보겠습니다.]
브루스 단장의 호령에 당황한 그녀는 고개를 숙여 인사한 뒤 황궁에 보고를 하러 떠났다.
“괜히 저 때문에 불이익을 받으실까 걱정입니다. 다른 분도 아니고 황제 폐하가 참가하는 자리라면서요…….”
[이르젠 제국 아니 카산트 대륙에 존재하는 모든 국가는 아르마이스 님이 아니었으면 존재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뒷일은 제가 감당할 테니 신경 쓰지 마시고 자리에 정좌해 주시길 바랍니다.]
나에 대한 업무를 그 어떤 공무보다 우선하라는 황실의 지침이 있었기에 브루스 단장으로서는 거리낄 게 없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그가 나에게 갖고 있는 존경심은 황실에 대한 충성심을 능가했기 때문에 지침이 아니었어도 세미나에 갈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후, 황궁의 머저리들을 가르치려니까 머리가 지끈거렸는데, 잘됐군.’
세이라 황녀와 황제를 제외한 대부분의 황실 인사들은 무공에 재능이 없었기 때문에 가르치는 맛이 없었다.
브루스 단장은 재미없는 공무에서 벗어난 기쁨에 팔을 걷어붙이고 날 가르치기 시작했다.
[아르마이스 님이 만든 마력 운용법은 기존의 마법사들이 행하던 방식보다 신체적인 부담이 덜하고 훨씬 효율적입니다. 따라서 제국에서도 엄격하게 선발한 기사들과 황실의 인사들만이 이 기술을 배우지요.]
“아, 그래요?”
[과거 카산트 대륙의 현자들은 마력의 근원을 심장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혹시 드래곤 하트를 들어 보신 적이 있습니까?]
“드래곤이 무한에 가까운 마력을 보유할 수 있는 이유가 드래곤 하트 때문이라고 들었습니다.”
아카이브를 통해 카산트 대륙의 여러 문헌들을 살펴본 덕분에 드래곤에 대한 대략적인 지식을 갖고 있었다.
[맞습니다. 드래곤은 아르마이스 님의 말씀처럼 무한대의 마력을 지녔기에 9서클의 마법을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지요. 그리고 인간에 호감을 가졌던 몇몇 드래곤들이 고대에 활동하던 현자들에게 접근하여 마법을 가르쳐 준 거고요. 따라서…….]
브루스 단장은 수업에 앞서 마법의 기원을 간단히 알려 줬다.
설명을 요약하면 이랬다.
심장에 깃든 마력을 동력으로 마법을 쓰던 드래곤들이 인간에게 자신들의 지식을 알려 줬고 이를 토대로 심장에 서클을 생성하는 방식으로 마법을 행하는 게 유행했다는 내용이었다.
[드래곤이 알려 준 비법대로 꾸준히 수련하면 심장 부근에 둥근 고리가 형성되는데 이를 서클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 서클의 개수에 따라 마법사의 등급이 결정되곤 하지요. 그러나 아르마이스 님은 이전의 방식과 궤를 달리하는 마력 운용법을 창안하셨고 이는 인류 발전에 큰 보탬이 됐습니다.]
“새로운 방법을 알려 준 게 큰 도움이 됐나 보네요.”
내막을 모르는 나로서는 새로운 마력 운용법이 인류 발전에 기여한 사실이 와닿지 않았다.
[만물 중 가장 지혜롭다는 드래곤이 만든 거긴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그들에게 적합한 방식이었습니다. 신체가 허약한 인간이 마법을 익히려고 하면 심장이 터지거나 혈맥이 역류하는 것과 같은 부작용이 심심치 않게 나타나곤 했으니까요.]
“그런 일이 있었군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브루스 단장의 설명을 진지하게 경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