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 14화 도약 (2)
사업을 하다 보면 많은 사람과 얽히기 마련이다.
회사의 규모가 커질수록 직원의 수는 늘어나기 마련이고 사업상의 이유로 파트너십을 맺는 경우도 빈번하게 발생한다.
이런 상황을 고려했을 때, 유능하면서도 신뢰 있는 사람을 알아볼 수 있다는 건 엄청난 메리트가 아닐 수가 없었다.
‘사용 시 주의할 점이라든가 그런 건 없어?’
추가된 기능을 모두 확인한 나는 어드바이저에게 현자의 눈을 이용할 때 알아야 하는 세부적 사항들을 알아봤다.
<사용법은 간단합니다. 제가 활성화되는 방식과 마찬가지로 현자의 눈은 아르마이스 님의 마음을 읽은 뒤 원하시는 정보를 볼 수 있도록 작동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를 위해서 보완해야 할 점과 몇 가지 제한 사안이 있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줘.’
중요한 내용이 나올 것 같은 예감에 난 책상 위에 놓인 메모지를 챙긴 뒤 자리로 돌아왔다.
<우선 상대의 스탯을 체크하기 위해서는 실제로 눈앞에 그 대상이 있어야 합니다.>
‘텔레비전이나 인터넷 같은 매체로 본 사람은 스탯 체크가 안 된다는 이야기네.’
<그렇습니다. 스탯 확인에 들어가는 시간이 찰나이긴 하지만, 그 순간에 정밀한 분석이 들어가기 때문에 상대는 같은 공간에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둘째는 본인보다 스탯이 월등히 높을 경우 수치는 물음표로 표시됩니다.>
‘저 궁금한 게 있는데 나보다 스탯이 얼마나 높은지 정도는 알 수 있을까?’
단순히 나보다 높다는 사실을 아는 것만으로는 적절한 대비가 어려운 점을 감안한 질문이었다.
<사용자보다 스탯이 약간 높은 사람의 경우 측정이 가능하지만, 앞서 언급한 대로 월등히 높은 자는 측정이 어렵습니다.>
“그니까 그 월등히가 어느 정도냐고요.”
어드바이저의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탓에 혼잣말이 절로 입에서 새어 나왔다.
<정확한 수치까지는 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닙니다. 통찰력의 레벨을 높이면 본인보다 윗 레벨의 사람들을 분석할 수 있는 폭이 넓어집니다. 그리고 참고로 말씀드리면 업그레이드된 현자의 눈은 LV 4부터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흠, 일단 통찰력 레벨을 먼저 올려야 될 것 같네. 혹시 더 알아야 할 내용 있어?’
현재 나의 통찰력 레벨은 3이었고 경험치를 하나도 채우지 못했기에 미션 수행이 시급한 상태였다.
<더 이상 알려 드릴 건 없습니다. 추가로 알려 드릴 사안이 있으면 그때마다 공지를 해 드리겠습니다.>
‘만능인 줄 알았는데, 허점이 없는 건 아니었구나?’
<불편하게 만들어서 죄송합니다.>
‘아니야, 뭐라고 하려는 건 아니었어. 그만 들어가 봐.’
용건을 마친 나는 화면을 종료한 뒤 생각에 잠겼다.
‘후 조금 쉬었다가 미르헨 총장님과 상의해 봐야겠다. 응? 갑자기 또 뭐야?’
30분 후면 미르헨 총장님을 만날 시간이었기에 고민을 하기보단 잠깐 휴식을 취하고 싶었다.
그런데, 화면을 종료한 지 채 1분도 안 됐음에도 시스템은 자기 멋대로 다시 실행되었다.
<아르마이스의 의지가 발동되었습니다.>
<사용자의 욕망을 읽고 미션이 생성됩니다.>
<목표를 설정합니다.>
<보상이 설정됩니다.>
<목표: 미르헨 총장이 주는 과제를 소화하라.>
<보상: 통찰력, 창의력 LV UP, 필력 경험치 +50%>
‘딱 보니까 패키지 미션이네. 얼른 총장님 만나서 뭘 해야 할지 알아봐야겠다.’
나는 미션 수행으로 주어지는 보상들이 글쓰기 속도와 현자의 눈 사용과 연관이 있음을 단숨에 알아챘다.
<아르마이스 님, 저 왔습니다.>
미르헨 총장은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화면에 등장했다.
“안색이 너무 안 좋으신데 괜찮으세요?”
[밀린 업무가 조금 있어서 무리를 약간 했지만, 상관없습니다. 음, 아무래도 이런 몰골로 아르마이스 님과 대화를 하긴 그렇군요.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미르헨 총장은 최근 몇 달간 나와 함께 작업을 하느라 업무에 집중하지 못했다.
아카데미 총장이라는 직책 외에도 황실 고문, 제국 도서관장 등 다양한 명함을 갖고 있던 그는 그동안 밀린 업무를 처리하기 위해 격무에 시달렸었다.
[이제 좀 괜찮아 보입니까?]
“어떻게 하신 겁니까?”
방금까지만 해도 피곤에 찌들어 있던 총장님의 얼굴은 언제 그랬냐는 듯 활기가 넘쳐흐르고 있었다.
[카산트 대륙에는 아르마이스 님이 사시는 곳에 없는 신기한 물건들이 많답니다.]
그는 플라스크처럼 생긴 유리병을 흔들며 말했다.
“그게 뭡니까?”
[제국 연구소에 만든 힐링 포션입니다. 이걸 마시면 피로 회복은 물론 웬만한 치명상은 모두 나을 수 있지요.]
“정말 엄청나군요. 힐링 포션을 이곳에 가져올 수만 있다면 재벌이 되는 건 일도 아니겠어요.”
[조만간 연구원들을 불러서 차원 연결 장치가 얼마나 고쳐졌는지 알아보겠습니다.]
미르헨 총장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아닙니다. 알아서 잘하고 계실 텐데, 굳이 재촉하고 싶지는 않네요. 휴, 그것보다 고민이 하나 있습니다.”
[네, 말씀하시죠.]
“총장님께 글 쓰는 법을 배운 덕분에 한 편을 쓰는 데 걸리던 시간을 단축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소설이 중후반부에 진입하면서…….”
나는 글을 쓰면서 느꼈던 애로 사항을 기탄없이 이야기했다.
[아르마이스 님, 방금 미션을 받으셨다고 했는데 정확한 내용을 알 수 있을까요?]
“안 그래도 말씀드리려던 참이었습니다. 제 안에 내재된 시스템은 저의 성장을 돕기 위해 미션을 하나씩 던져 주곤 하는데, 이번 미션은 총장님과 관련이 있었습니다.”
[오, 그렇습니까?]
보통의 사람이라면 미션 생성과 관련된 부분에 대해 일체 언급하지 않았겠지만, 아르마이스학 최고 권위자인 미르헨 총장에게는 굳이 숨길 필요가 없었다.
게다가 전생에 내가 갖고 있던 능력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아는 만큼 정보를 공유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이득도 적지 않았다.
[글을 빨리 쓰기 위해서는 필력과 창의력 스탯을 올려야 하는군요. 둘 다 올리면 좋겠지만, 중요도를 굳이 따지자면 창의력을 올리는 게 맞겠습니다.]
“아, 그런가요?”
[네, 소설이 후반부에 들어가면서 쓰는 속도가 느려지는 건 누구에게나 일어나는 당연한 현상입니다. 그러나 간혹 초반의 페이스를 그대로 유지하는 작가들이 없는 건 아닙니다. 그들의 특징 중 하나는 흔히 접하는 소재만으로도 재미있는 이야기를 잘 만들어 낸다는 겁니다.]
질문을 받은 미르헨 총장은 차분하게 설명을 시작했다.
[각 스탯이 아르마이스 님의 실력에 어떻게 영향을 주는지 정확히는 모르지만, 대충 짐작은 갑니다. 필력이 높으면 같은 내용이라도 좀 더 맛깔스럽게 표현할 수 있겠지요. 그리고 머릿속에 맴돌고 있는 이미지와 생각들을 글로 도출하는 능력과도 큰 연관성을 갖고 있을 겁니다.]
“총장님께서 무슨 말씀하시는지 알겠네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총장님의 말에 공감했다.
미션과 수업을 통해 필력이 증가할 때마다 모종의 변화를 느낄 수 있었고 이는 총장님의 설명과 많은 부분에서 일치했다.
[그러나 아무리 글로 현출하는 능력이 좋아진다 한들, 이야기를 구성할 능력이 고갈되면 글 쓰는 속도가 더뎌질 수밖에 없습니다.]
“맞습니다. 소재가 떨어지다 보니 글 쓰는 시간은 줄어들고 고민하는 시간만 늘어나고 있습니다.”
[제가 볼 땐 소재의 문제는 아닌 것으로 보여집니다. 뛰어난 작가는 소재 하나를 가지고도 여러 가지 스토리를 만들 수 있는 법이거든요.]
“결국 창의력을 키우는 방향으로 가야겠네요.”
[필력, 통찰력도 함께 아울러서 키울 수 있는 방법이라면 더 좋겠지요. 흠, 그럴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요?]
미션의 내용을 모두 알게 된 미르헨 총장은 창의력을 주로 키우되 통찰력과 필력을 동시에 올릴 수 있는 방안을 모색했다.
[아, 그거면 되겠군. 아르마이스 님. 혹시 집에 백과사전 같은 거 있으십니까?]
“백과사전이요? 아마 부모님 방에 하나 있을 거예요.”
한 10분쯤 지났을까, 미르헨 총장은 다짜고짜 백과사전이 있는지 물었다.
[잘됐군요. 대화가 끝나면 아카이브에 제국에서 편찬한 백과사전도 보내 드릴 테니 집에 있는 거랑 해서 읽어 보시길 바랍니다.]
“혹시 분량이 얼마나 되나요?”
[1,000p 분량으로 10권쯤 될 겁니다.]
“헉, 그렇게나 많나요?”
[과학, 마법, 역사, 사회, 교육 등 여러 분야의 지식이 망라해 있는 걸 고려하면 많은 것도 아닙니다. 그냥 소설 읽듯이 쭉 보다 보면 금세 다 읽을 수 있을 겁니다.]
‘후, 그건 할 일 없는 사람한테나 해당하는 이야기잖아.’
웹소설과 복싱을 병행하느라 바쁜 나날을 보내는 나에게 백과사전 읽기는 조금 부담스러운 과제였다.
“인터넷으로 검색하면 다 나오는 지식들을 굳이 책으로 읽을 필요가 있을까요?”
[보통의 작가들은 스토리를 확정 지은 뒤 필요한 지식들을 검색하곤 하지요. 그리고 한 편의 스토리는 단편적인 지식만으로 만들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그는 일전에 내가 보낸 파일들을 통해 인터넷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제가 생각이 짧았네요. 총장님 말씀을 따르도록 하겠습니다.”
과제를 바꾸고 싶은 마음에 이야기를 꺼내 봤지만, 미르헨 총장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당장은 수고스럽겠지만, 장기적으로 볼 때 아르마이스 님께 분명 도움이 될 겁니다. 카산트 대륙의 지식을 활용해서 판타지 소설을 쓴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다른 작가들이 쓴 것보다 훨씬 생동감 있고 멋진 글을 쓸 수 있을 겁니다.]
미르헨 총장은 끊임없이 날 격려해 주었다.
“조언 감사합니다. 아카이브에 책을 올려 주시는 대로 바로 읽겠습니다.”
[좋습니다. 저도 지금 바로 제국 도서관에 가서 책을 확인해 보겠습니다.]
합의점에 다다른 우리는 작별 인사를 나눈 뒤 대화를 마쳤다.
‘우선 집에 있는 것 먼저 찾아봐야겠다.’
마침 집에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책을 찾기에 딱 좋은 상황이었다.
나는 안방에 들어가 책장에 꽂힌 백과사전을 뽑아 들고 내 방으로 돌아왔다.
<아카이브에 새로운 자료가 업데이트되었습니다.>
‘어? 벌써 자료를 올리셨나 보네?’
시스템은 아카이브에 자료가 업로드됐음을 알렸다.
‘후, 일단 그냥 해 보자.’
아카이브 검색창에 백과사전을 치자 방대한 분량의 텍스트가 눈앞에 펼쳐졌다.
백과사전을 읽는 것으로 창의력이 는다는 사실에 의구심이 안 드는 건 아니었으나 미션을 완료하면 스탯이 올랐기 때문에 더 이상의 고민은 무의미했다.
이날 밤, 나는 안방에서 가져온 백과사전과 아카이브를 책상에 놓은 뒤 번갈아 가며 읽었다.
‘생각보다 읽을 만한데? 이번 기회에 내가 모르는 분야의 지식도 많이 배워 놔야겠어.’
지루할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책의 내용에 금방 빠져들었다.
평소 소설 말고는 독서를 하지 않았던 나에게 백과사전은 교양을 쌓기 위한 좋은 도구였다.
* * *
시간은 흘러 10월 말이 되었다.
“자, 다들 자리에 앉아라.”
담임은 여느 때처럼 아침 조회를 위해 반에 들어왔다.
“오늘 중간고사 결과가 나왔다. 호명하는 학생은 앞으로 나와서 성적표를 받아 가라.”
“아, 어떻게 하지? 시험 완전 망친 것 같은데…….”
“몰라, 난 그냥 부모님 안 보여 드리려고.”
성적표를 받아 가라는 이야기에 반은 금세 시끄러워졌다.
“지금부터 이름 부를 거니까 다들 조용히 해라.”
그는 웅성대는 학생들을 무시하고 성적순대로 학생을 호명했다.
보통의 경우라면 번호 순서대로 성적표를 나눠 주는 게 맞았으나 담임은 성적이 좋은 학생들을 치하하기 위해 성적 순서로 성적표를 배부했다.
“강진우.”
“……네? 저요?”
“우리 반에 강진우가 너 말고 또 누가 있어? 빨리 나와서 성적표 받아 가.”
‘시험공부 한 적이 없는데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예상보다 일찍 호명된 나는 얼떨떨한 표정을 지은 채 성적표를 받으러 앞으로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