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 14화 도약 (3)
어렸을 때부터 공부에 소질이 있던 것은 아니었으나 반에서 10등 안에는 꾸준히 들었던 것 같다.
포털 회사에 다니는 부모님은 공부를 강요하지 않으셨지만, 자식이 원하면 학원에 보내 주거나 과외 선생을 붙여 주기도 했다.
그러나 그마저도 잠깐이었다. 어렸을 때야 친구들이랑 놀기 위해 학원에 잠깐 다녔던 거지 웹소설을 쓰기 시작한 이후로는 사교육이라곤 일체 받지 않았다.
‘시험이 지난 학기보다 쉽게 나와서 등수가 떨어질 줄 알았는데 5등이라고? 채점이 잘못된 거 아니야?’
중간고사를 위해 어떤 공부도 하지 않았던 나는 얼떨떨한 표정을 지으며 성적표를 받았다.
“녀석, 운동하느라 공부는 뒷전인 줄 알았더니 이렇게 나를 놀라게 할 줄 누가 알았겠어? 긴 교직 생활 동안 너처럼 다재다능한 학생은 처음이다. 앞으로도 쭈욱 하는 거 열심히 해라.”
“하하, 감사합니다…….”
담임은 김준석에게도 보여 주지 않았던 애정 어린 눈길을 보내며 격려의 말을 해 줬다.
이런 그의 반응이 조금 부담스럽기도 했지만, 솔직히 뿌듯한 측면도 있었다.
‘역시 사람을 설득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실력이었어.’
지난 김준석 사건으로 학교 내에서 부정적인 평가를 받았던 담임은 내가 전국체전을 우승하자 이미지를 회복할 수 있었다. 게다가 반 평균을 올려 주는 역할까지 하니 이뻐하지 않으려야 않을 수가 없었다.
“애들아, 잠시만 주목해라.”
담임은 내 어깨를 두들기며 덕담을 하다 말고 학생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우리 진우가 1학기 기말 때보다 50등 가까이 등수가 올랐다. 하위권에 있던 학생이 공부에 열중해서 50등 이상 등수가 오르는 일이 종종 있긴 하지만, 진우처럼 운동에 전념하는 학생이 이러는 건 매우 드문 일일 거다.”
“진우가 원래 우리 반에서 9, 10등 하지 않았나?”
“10월 초에 전국체전 준비하느라 공부도 제대로 못 했을 텐데 정말 대단하다.”
“될 놈 될이라고 하잖아. 운동이든 뭐든 정점을 찍은 사람은 다른 걸 해도 잘하기 마련이지.”
이야기를 들은 아이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저마다 감탄사를 내뱉었다.
“진우는 전국체전 우승이라는 우수한 성적을 거두면서도 학업을 게을리하지 않았어. 너희들도 꿈을 좇는다고 학업을 등한시하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 진우야.”
“네?”
멍하니 이야기를 듣던 나는 담임의 부름에 정신을 차렸다.
“애들한테 짧게 소감이라도 말해 보는 게 어때? 이전에 전국체전 우승했을 때 너무 조용히 지나간 것 같아서 마음에 걸렸거든.”
“선생님께서 언급해 주신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애들도 쉬는 시간이나 이럴 때 따로 축하해 줬고요.”
“어, 그래? 흠, 알겠다 들어가라.”
“네.”
담임은 학우들 앞에서 자랑할 기회를 주려 했으나 부담을 느낀 나는 정중하게 거절했다.
‘요즘 들어서 수업이 잘 들리긴 했어.’
내 지능은 LV 4였는데, 이 수치는 LV 2에 머물렀던 과거와 비교하면 많이 올랐다고 볼 수 있었다.
시험 대비를 위한 공부를 한 적은 없지만, 높아진 스탯으로 인해 수업을 들으면 바로바로 이해가 됐고 중간에 쪽지 시험을 볼 때도 나쁘지 않은 성적을 거두곤 했다.
게다가 일전에 획득한 자동 번역 기능 덕분에 시험 성적이 대폭 오를 수밖에 없었다.
‘영어나 일본어처럼 외국어 시험에서만 유용할 줄 알았는데, 국어를 풀 때도 큰 도움이 되었어.’
나는 예전부터 고전산문과 고전시가에 약한 편이었다.
그러나 자동 번역 기능이 생긴 뒤로 옛 언어나 어려운 한자어로 쓰인 글들도 술술 읽을 수 있게 되어 국어 점수도 자연스럽게 올릴 수 있었다.
‘나중에 여유가 되면 공부에도 시간을 투자해야겠어.’
현재는 복싱과 소설을 쓰느라 공부에 시간을 할애하지 못하지만, 좋은 대학에 진학하려면 적어도 내년부터는 성적을 관리할 필요가 있었다.
“박현수.”
담임은 아까와 마찬가지로 이름을 호명하며 성적표를 배부했고 그렇게 조회 시간은 흘러갔다.
* * *
10월 말의 토요일.
점심을 먹기에 이른 오전 11시, 나는 신사역 부근의 카페로 향하고 있었다.
지하철역 주변의 가로수들은 울긋불긋 단풍이 들어갔고 코끝에선 선선한 가을바람이 느껴졌다.
10월 초중반까지만 해도 한낮에 반팔을 입고 돌아다니는 행인들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으나 날이 쌀쌀해진 덕분에 거리는 완연한 가을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혹시 이민영 팀장님이신가요?”
카페에 도착한 나는 출입문 바로 옆 테이블에 자리를 잡은 여성에게 말을 걸었다.
“강진우 작가님?”
“네, 그렇습니다.”
“전화상으로만 연락을 주고받다가 이렇게 뵙게 되니 반갑네요. 여기 앉으세요.”
이민영 팀장은 활짝 웃으며 자리에 앉을 것을 권했다.
“뭐라도 드시겠어요?”
“이미 주문을 해서 괜찮습니다. 아, 잠시만요.”
카운터에서 아메리카노가 나왔다는 소리가 들리자 커피를 가지러 일어났다.
“저, 오늘 중요하게 하실 말씀이 있다고…….”
다시 자리에 돌아온 나는 조심스럽게 만남의 목적을 물었다.
“원래는 사장님께서 직접 작가님을 챙기려고 하셨는데, 요즘 워낙 바쁘셔서 부득이하게 제가 대신 나오게 됐습니다.”
“그런가요?”
“최근에 작가님이 쓰신 작품들로 큰 프로젝트가 논의되고 있었거든요.”
“천마회귀 웹툰 작업을 말씀하시는 거군요.”
10월 초에 론칭한 ‘천마회귀’는 단숨에 플랫폼 1위 타이틀을 획득했고 최근 유료화가 진행된 이후에도 계속 승승장구하는 중이었다.
감성 출판사는 ‘천마회귀’에 대한 독자들의 반응이 심상치 않자 급하게 그림 작가를 섭외한 뒤 회사 내에 웹툰 부서를 설립했다.
“맞습니다. 최근에 ‘천마회귀’를 기반으로 한 웹툰을 푸른닷컴에 제출했는데 일사천리로 심사가 통과했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아닙니다. 작가님께서 글을 쓰느라 고생이 많으시죠. 이건 연재할 때 올릴 그림 샘플인데 한번 보시겠습니까?”
이민영 팀장은 가방에서 태블릿을 꺼내며 말했다.
“웹툰을 그리기 시작했나요?”
“이미 5화 분량까지 그린 상태입니다. 사장님께서 미리 알려 주신다고 했는데, 어쩌다 보니 좀 늦었네요.”
“괜찮습니다. 와, 작가님께서 실력이 되게 좋으신 것 같네요.”
태블릿에 뜬 작업물을 확인한 나는 그림 작가님의 그림체에 크게 감탄했다.
옛날 만화들처럼 선을 많이 넣지는 않았지만, 섬세한 인물 동작 묘사와 적절한 채색은 퀄리티 있는 웹툰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원래 동화나 소설 일러스트레이터 하시던 분인데, 손재주가 좋으신 것 같아서 직접 스카웃했습니다. 앞으로 강진우 작가님께서 웹툰이나 웹소설을 런칭하게 되시면 표지부터 웹툰 작업까지 모두 맡아 주실 겁니다.”
그녀는 만족해하는 나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좋은 분으로 배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표지나 웹툰 그릴 때는 보통 외부에 아웃소싱하는 것으로 아는데, 회사에서 자체적으로 해결하신다고 하니까 신기하네요.”
“이게 다 작가님께서 좋은 글을 써 주신 덕분이지요.”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괜히 부끄럽네요.”
칭찬을 들은 나는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농이 아니라 진심으로 드리는 말씀입니다. 작가님께서 연달아 내놓은 두 작품이 모두 성공을 거둔 덕분에 푸른닷텀 내부에서도 우리 회사를 단순 유망회사에서 중요 전략적 파트너로 위치를 전환시켰거든요.”
“사장님께서 타 회사 관계자분들과 원활하게 소통하신 부분이 잘 맞물려서 그렇게 된 것 같습니다.”
“일리 있는 말씀이긴 하지만, 그래도 작가님의 역량이 좀 더 크게 작용한 게 아닌가 싶네요.”
겸손한 태도로 일관하는 나를 좋게 본 팀장님은 나에게 공을 돌렸다.
“사실 오늘 뵙자고 한 건 첫 작품인 ‘복싱으로 전설이 되다’와 관련된 논의를 하고 싶어서였습니다.”
“그렇군요. 혹시 첫 작에 관해서도 진행되고 있는 일이 있는 건가요?”
‘천마회귀’가 아니라 ‘복싱으로 전설이 되다’를 염두에 두고 미팅을 계획했다는 이야기에 호기심이 생겼다.
물론 첫 작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다운 수도 크게 오르고 독자들의 호응이 잇따랐지만, 화제의 중심인 ‘천마회귀’에 비하면 파급력 면에서 부족했기 때문이다.
“눈치가 빠르시네요. 맞습니다. 최근 사장님께서 방송이나 엔터 쪽 관계자들을 만나실 때마다 ‘복싱으로 전설이 되다’를 드라마화나 영화화하면 어떨지 이야기를 꺼내셨다고 들었습니다.”
“마음은 감사하지만, 너무 무리하시는 것 같아서 죄송스럽네요.”
선배님께 고마운 감정이 들었지만, 분수에 맞지 않은 과한 호의에 살짝 부담스럽다는 생각도 들었다.
“뭔가 오해가 있으신 것 같습니다.”
“오해요?”
“일련의 결정들은 사장님께서 작가님을 편애해서 내려진 게 아닙니다. ‘복싱으로 전설이 되다’의 드라마화는 회사 차원의 내부 검토와 외부 협력사의 동의를 모두 거쳐 결정된 사안으로 사장님의 사사로운 감정만으로 진행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내 마음을 읽은 이민영 팀장은 차분히 내막을 알려 줬다.
“후, 다행이네요. 전 제가 실력에 비해 과한 특혜를 받는 게 아닌가 했거든요.”
“현재 작품들이 올리고 있는 성과들을 생각하면 특혜라고 볼 수 없지요. 그리고 이제 막 연재를 시작했다는 상황을 고려하면 작가님께 불리한 측면이 없는 것도 아니에요.”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까 마음이 편해지네요. 저, 그런데 ‘복싱으로 전설이 되다’의 드라마 제작이 결정된 건가요?”
나는 조금 전의 대화를 떠올리며 본론으로 돌아왔다.
“그렇습니다.”
“그럼 제 작품이 티비에 나올 수도 있다는 건가요?”
“작가님께서 아직 신인이시고 경력도 짧으셔서 티비 드라마 추진은 시기상조로 판단했습니다. 우선은 웹드라마로 시작을 하되 차기작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면 티비 드라마에 다시 도전할 수도 있으니까 너무 실망하지 마세요.”
이민영 팀장은 내 기분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첫 작은 기대도 안 했는데 웹드라마라도 어디야.’
그녀의 우려와 달리 나는 기분이 좋은 상태였다.
“실망이라니요. 웹드라마 제작 소식만으로도 충분히 기쁜걸요.”
“휴, 다행이네요. 아, 그리고 이번 웹드라마 제작 및 투자는 AJ기획에서 해 주기로 결정되었습니다.”
“AJ기획이면 엄청 유명한 회사잖아요.”
AJ기획은 엔터, 영화, 드라마 등 콘텐츠 사업에서 두각을 드러내는 곳으로 대기업으로 분류되는 거대 회사였다.
이들은 콘텐츠 사업 외에도 외식업, 의류 등과 같은 분야에서도 활동했기에 다른 엔터 회사들에 비해 훨씬 높은 인지도를 자랑했다.
“AJ기획에 웹드라마 제작소가 따로 있어서 계획한 것보다 방영 일정이 빨라질 수도 있습니다. 제가 듣기로 중간에 별일만 없으면 한 달이면 된다더군요.”
“빨리 진행하는 것도 좋지만, 천천히 가더라도 퀄리티 있게 제작되었으면 좋겠네요.”
나는 설레는 마음을 다스리며 침착하게 대화를 이어 갔다.
이민영 팀장은 한동안 드라마 제작과 관련된 정보를 쏟아 냈고 난 메모장에 중요 사안들을 옮겨 적으며 열심히 경청했다.
“이외에 추가로 아셔야 할 부분이 있으면 메일이나 통화로 알려 드리겠습니다.”
“오늘 좋은 소식 많이 듣고 가서 힘이 나네요.”
“앞으로도 계속 좋은 일만 있을 거예요.”
“감사합니다.”
“아, 맞다. 하마터면 깜빡할 뻔했네.”
그녀는 아차 하는 표정을 지으며 가방에서 기다란 종이 하나를 꺼냈다.
“이게 뭔가요?”
“원래는 작가님 개인 메일로 보내야 하는데 오늘 만나 뵙게 돼서 직접 가져와 봤어요. 자, 한번 확인해 보세요.”
“네, 알겠습니다.”
‘헉, 이건…….’
얼떨떨한 얼굴로 종이를 건네받은 나는 지면에 적힌 수치에 입이 떡 벌어졌다.
“9월 중순부터 유료화가 되는 바람에 예상보다 적게 나왔습니다. 아마 11월 정산 때는 그것보다 몇 배는 더 많이 나올 거예요.”
이민영 팀장은 나를 흐뭇하게 바라보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