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 15화 여동생 (3)
“선배님께서 믿어 주신 만큼 좋은 작품을 많이 써 보겠습니다.”
“저도 후배님이 성공할 수 있도록 더 열심히 돕겠습니다.”
우리는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덕담을 주고받았다.
“팀장님께서 이번 웹드라마 제작은 AJ기획에서 맡았다고 하시더라고요.”
“맞습니다. AJ가 회사 규모도 그렇고 고급 인력들이 많아서 특별히 이 회사로 선택했습니다.”
“안 그래도 AJ처럼 유명한 회사와 같이할 수 있어서 놀랐는데, 이게 다 선배님이 힘을 써 준 덕분이었네요.”
“저보다는 훌륭한 작품을 쓴 작가님의 공이 더 크지요. 아무리 관계자들과 친분이 있더라도 흥행성을 갖추지 않은 작품은 반려되기 마련이거든요.”
‘선택했다는 건 AJ기획에 의도적으로 일을 맡겼다는 이야기잖아. 언론 방송 등 여러 분야에 인맥이 짱짱하다고 들었는데, 사실이었어.’
나는 선배님의 말 안에 함축된 의미를 깨닫고 생각에 잠겼다.
“저, 그러면 혹시 드라마 제작을 담당하고 계신 분을 알고 계신가요?”
“촬영 감독님이 누군지는 모르지만, 부서 책임자는 알고 있습니다. 원하시면 내일이나 모레 중에 연락이 가능할 겁니다.”
“흠…… 그렇군요.”
동생 이야기를 어떻게 꺼낼까 고민하느라 말을 제대로 꺼내지 못했다.
아무리 선배님과 나 사이에 신뢰 관계가 싹텄다고 하지만, 사적인 부탁을 하는 건 어렵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작가님.”
“네?”
“신작에 관한 논의도 끝났으니 다음 이야기로 넘어가시죠. 보니까 따로 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신 것 같은데?”
이규석 선배는 망설이지 말고 편하게 말할 것을 권했다.
“사실, 선배님을 급하게 뵈려는 이유가 따로 있긴 했습니다.”
“짐작은 했습니다. 제가 아는 작가님이라면 신작 논의 정도로 뵙자고 할 분은 아니니까요.”
“그동안 연락을 잘 못 드려서 죄송합니다.”
이야기를 들은 나는 머리를 긁으며 멋쩍어했다
중요한 일이 아니면 연락하는 경우가 없다는 것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하하, 아닙니다. 연락을 안 한 건 피차 마찬가지인데요 뭘. 그것보다 이야기를 들어 볼까요?”
“저에게 여동생이 하나 있는데 요즘 힘들어하는 것 같아서 고민입니다.”
“오, 여동생이 있는지는 몰랐네요.”
그는 테이블에 몸을 기울이며 이야기에 관심이 있음을 드러냈다.
“지난 9월에 아이돌로 데뷔한 친군데, 팀 내 갈등으로 어려운 처지에 있는 것 같습니다.”
“자세히 말해 보세요.”
회사 업무와 관련이 없는 일임에도 이야기를 경청하는 선배의 태도에 마음이 편해진 나는 여동생이 처한 상황을 상세히 알려 줬다.
10분가량 말없이 말을 듣던 그는 턱에 손을 괸 채 고민을 하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여동생의 팀 내 입지를 높이기 위해 제힘이 필요하다는 말씀이시군요.”
“……이런 말씀 드려서 염치가 없긴 하지만, 그렇습니다.”
자존심이 강한 지연이가 팀에서 나올 일은 만무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문제를 타개하려면, 지금보다 인지도를 높여 회사에서 비중을 늘리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이규석 선배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했다.
“염치없어하실 게 뭐 있습니까? 자신의 인맥을 활용하는 건 세상이 돌아가는 중요한 방식 중 하나인걸요.”
“그래도 왠지 편법을 쓰는 것 같아서 마음이 불편하네요.”
“그렇게 따지면 이현영이라는 친구가 자신의 삼촌을 이용해서 중요한 자리를 모두 독차지하는 것도 편법 아니겠습니까?”
“선배님 말씀에 전적으로 동의하지만, 그 사람하고 똑같이 행동할 수밖에 없다는 게 조금 걸려서요.”
이세계의 존재를 만나 엄청난 성장을 이뤘다고는 하나 난 아직 열일곱 고등학생에 불과했다. 높아진 정신력과 통찰력 덕분에 세상이 돌아가는 방식과 사안에 대해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모두 알았지만, 사회 이면의 더러운 것들에 익숙할 나이는 아니었다.
“능력의 범주를 축소시키면 작가님의 말씀이 옳겠지요. 하지만 동서양을 막론하고 출신과 인맥이 능력으로 작용하는 경우는 비일비재했습니다. 그리고 중요한 건 여동생을 돕고 싶은 마음 아니겠습니까?”
“네, 맞아요.”
“그러면 그런 생각들은 잠시 뒤로 밀어 두고 대책을 강구하도록 하죠. 일단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현재 AJ기획에서 배우들을 모색하고 있는데, 마침 여동생분이 컨셉에 딱 맞는 것 같습니다.”
이규석 선배는 머릿속에 있는 묘안을 하나씩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저도 그 방법을 생각하지 않은 건 아닙니다. 하지만, TM엔터테인먼트와 계약으로 묶여 있어 가능할까 싶더라고요.”
“삼촌 이사라는 사람이 제안이 들어와도 거절할 수 있다는 이야기시죠?”
“우리 지연이를 견제하려고 혈안이 된 놈들입니다. 저로서는 조금 걱정이 될 수밖에 없네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염려의 감정을 드러냈다.
“하하, 그 부분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네?”
“박태민 대표가 좋은 기회를 놓칠 정도로 어리석은 바보는 아니니까요.”
박태민은 TM엔터테인먼트의 대표로 우리나라 엔터계에서는 입지전적 한 인물이었다. 그는 대부분의 사업가들이 제조업과 금융업에 관심을 가질 때 엔터테인먼트 회사의 잠재력을 알아본 자로 업계 발전에 큰 기여를 한 사람이었다.
“박태민 대표를 아십니까?”
“한국대학교 동기인데 왜 모르겠습니까? 옛날엔 함께 술도 많이 마시고 나름 친했습니다.”
이규석 선배는 한국대에서 국문학과를 전공했으나 동아리 활동을 활발히 했기 때문에 법학과, 경영학과 등에도 아는 동기들이 적지 않았다.
“그럼 어떻게 따로 이야기를 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친한 대학 동기라면 직접 부탁을 하는 것도 괜찮았다.
굳이 어려운 방법을 써서 심력을 소모하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기 때문이다.
“그 친구는 이득이 되지 않으면 움직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AJ기획이라면 녀석의 마음을 움직이기에는 충분하죠.”
“TM 같은 거대 회사를 운영하시는 분인데 그게 먹힐까요? AJ기획이 대기업이라고 하지만, 콘텐츠나 연예 방면으로 진출한 지는 그렇게 오래되지 않았잖아요.”
나는 업계 터줏대감인 박태민 대표 입장에서 아쉬울 게 없을 것으로 여겨졌다.
“훗, TM엔터테인먼트 정도는 AJ기획에 비하면 중소기업에 불과한 회사입니다.”
“AJ기획이 그 정도로 대단한 회사인가요?”
프로듀싱 하는 팀마다 대박을 쳤던 TM엔터의 시가 총액은 1조 원에 육박했다.
물론 이름만 대면 아는 대기업에 비해서는 부족할 수 있는 수치였지만, 중소기업 취급을 당할 것 같지는 않았다.
“단순 회사 규모로만 본다면 TM과 AJ의 격차는 크지 않습니다. 하지만, AJ기획은 국내 최고 기업인 일송에서 빠져나온 회사로 재계에 미치는 영향력이 차원이 다릅니다.”
“재계에서의 입지가 권력으로 연결이 되는 모양이군요.”
나는 선배님의 말씀을 금세 알아들었다.
“후, 제가 그만 주책을 떨었습니다. 작가님께 이런 소리나 하려고 만난 것이 아닌데…….”
이규석 선배는 나이도 어린 후배에게 기업 간의 역학 구도를 이야기하는 건 시기상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내가 그저 차분히 글을 쓰며 작가로서의 즐거움을 만끽하길 바랄 뿐, 사회 이면에 대해 자세히 알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선배님은 자기도 모르게 사업가나 동년배 친구들에게 할 법한 말들을 쏟아 냈는데 이는 대화 내내 보여 준 나의 태도가 성숙하면서도 진지했기 때문이었다.
“제가 비록 미성년자이긴 하지만, 알아야 할 부분은 확실히 알고 넘어가야 합니다. 다른 일도 아니고 동생과 관련된 일이니까요.”
“흠, 작가님 말씀이 맞습니다. 친동생을 도와주려고 하는 건데 나이가 무슨 대수겠습니까?”
내 말이 타당하고 느낀 선배는 잠시 생각을 정리한 후, 말을 이어 갔다.
“마침 AJ기획의 이종수 사장과 이틀 후에 미팅을 하기로 예정되어 있습니다. 성북동에 있는 한정식집에서 단둘이 만나기로 해서 이야기를 꺼내기도 편할 거고요.”
“저, 주제넘는 질문일지도 모르지만 하나만 여쭤봐도 될까요?”
“그렇게 생각할 일이 없으니 편하게 물어보십시오.”
이규석 사장은 손을 저으며 말할 것을 권했다.
“제 소설을 토대로 드라마를 제작한다고는 하지만, 배역을 정하는 건 제작진의 권한인데 어떻게 저들을 설득할 수 있을까요?”
“AJ기획에게 이득이 되는 것들을 몇 개 던져 주면 가능하지요.”
“이득이 되는 것들이요?”
“네. 아실지도 모르겠지만, 신문사와 대학 동기들 중에 방송사 간부로 일하는 친구들이 적지 않거든요.”
‘어떤 식으로 AJ기획과 딜을 할지 알겠어.’
나는 선반 위에 놓인 음료를 마시며 선배님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AJ기획은 영화뿐만 아니라 드라마 제작도 하기 때문에 방송사와 좋은 관계를 맺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정관계에 지속적으로 로비를 시도하여 본인들이 별도의 방송국을 차릴 모종의 계획도 갖고 있고요. 훗, 대화 중에 별 이야기가 다 나오네요. 방금 말한 건 작가님만 알고 계세요.”
이규석 선배는 씽긋 웃으며 당부했다.
“인맥을 활용해서 AJ를 도와준 뒤, 우리의 요구 사안을 말씀하신다는 거네요?”
“아니요. 상대의 직접적인 요청이 있기 전까지는 도와줄 필요는 없습니다.”
“그럼, 아무런 대가 없이 이종수 사장님께서 우리의 요구를 들어준다는 말씀이세요?”
그의 말이 선뜻 이해가 되지 않았던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반문했다.
“배역을 결정하는 것쯤은 너무나 쉬운 일이라 배포 있는 모습을 보여 주고 싶을 겁니다. 쉽게 말하면 호의를 베풀고 상대에게 마음의 짐을 생기게 만드는 거지요.”
선배님의 말씀은 AJ기획 측이 선의로 포장된 배려로 관계를 돈독히 한 후 추후에 빚을 갚게 만들 거라는 이야기였다.
“확실히 일리가 있네요. 저라도 호의를 베풀었던 사람에게 은혜를 갚으려고 하겠어요. 하지만 실제로 은혜를 갚을지 말지는 그때 가서 판단하겠지만요.”
“하하, 가만히 보니까 글 쓰는 재주만 있는 게 아니라 사업가로서의 수완도 갖추고 계시네요. 맞습니다. 내가 준 호의에 상대가 보답한다는 보장이 꼭 있는 건 아니죠. 아마 이종수 사장도 이런저런 것들을 모두 감안해서 판단을 내릴 겁니다.”
이규석 선배는 나를 흥미롭다는 듯 쳐다보며 말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나도 모르게 말이 튀어나왔어.’
복싱과 소설로 많이 성장했다고는 하나, 사회 경험은 미천한 나였다.
수없이 많은 인간군상을 지켜본 선배님이 감탄할 만한 의견이 나올 수 있었던 건 통찰력과 지능 스탯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그동안 열심히 수련한 덕분에 열일곱에 어울리지 않은 혜안과 노련함이 생기고 있던 것이다.
“동생에게 웹드라마 배역을 배정하는 거 외에 도움을 줄 방법이 있을까요?”
“관공서나 방송사에서 주관하는 행사들 몇 개 던져 주면 동생분 입지는 금방 올라갈 겁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는 것보다 더 좋은 건 스스로 입지를 다지는 거겠지요.”
“웹드라마에서 대중의 관심을 받아야 한다는 말씀이시군요.”
“그렇습니다. 외부의 도움으로 입지를 구축하면 본인에겐 편하지만, 주변의 원성을 듣기 십상입니다. 잘은 모르지만, 같은 팀이나 회사 내에서 이현영 양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분명히 있을 겁니다. 지금이야 그런 사람들이 별 영향을 못 끼치겠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뇌관처럼 작용할 때가 있거든요.”
‘관공서면 정관계에도 인맥이 있다는 말씀이시잖아?’
이규석 선배는 평소 겸손한 태도로 후배들을 대했기에 명예나 재물에 무심한 분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오늘 본 선배의 모습은 온화한 미소라는 가면을 쓴 냉철한 사업가 그 자체였다.
선배의 면모를 재발견한 나는 책상에 무릎을 갖다 붙이고 자세히 그의 말을 들었다.
이후 한참 동안 선배님의 말씀은 계속됐고 동생에 관련된 논의는 모두 마무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