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 15화 여동생 (4)
“오늘 이렇게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선배님이 아니었다면 여동생에 대한 걱정으로 계속 답답했을 거예요.”
대화를 마친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꾸벅 인사를 하며 감사의 뜻을 밝혔다.
“앞으로도 막히는 일이 있거나 고민이 있으면 편하게 연락을 주세요. 힘이 닿는 한 최선을 다해서 도와드릴 테니까.”
이규석 사장은 후배의 예의 있는 모습에 미소를 지으며 화답했다.
“바쁘실 텐데, 이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같이 나가시죠.”
“아닙니다. 저 혼자 갈 수 있으니 안에서 편하게 쉬십시오.”
나는 배웅 나오려는 선배를 만류하고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뜨르릉-뜨르릉
철컥-
“안녕하세요, 감성 출판사 이규석 사장입니다. 예, 다름이 아니라…….”
내가 나간 것을 확인한 이규석 선배는 주변 지인들에게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 * *
이규석 선배를 만난 후 6일이 지났다.
11월, 늦가을을 맞은 서울의 날씨는 영하에 가까울 정도로 쌀쌀해져 갔고 차가운 공기를 들이마실 때마다 묘한 가을의 향이 물씬 나는 것 같았다.
‘다음 주 월요일부터 훈련이 다시 시작되니까 대비를 좀 해야겠다.’
백성철 관장님은 12월 중순에 열리는 국가 대표 선발전을 슬슬 준비해야 한다며 다음 주부터 체육관에 나오라고 이야기했다.
한동안 편하게 지낸 탓에 약간 귀찮은 마음도 들었지만, 국가 대표에 뽑히는 것을 넘어 세계 챔피언을 꿈꾸는 나였기에 생각을 다잡았다.
“진우야, 우리만 가도 되는데 안 귀찮겠어?”
“저도 가서 지연이를 응원해 줘야죠.”
토요일 주말을 맞은 우리 가족은 지연이를 보기 위해 합정동에 있는 TM엔터테인먼트 사옥에 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연습생 시절부터 데뷔까지 숨 가쁘게 살았던 지연이와 팀원들은 학교생활 외에는 연습을 하느라 가족들과 제대로 지내지 못했다.
물론 꿈을 위해서 그럴 수 있다고는 하지만, 기껏 해 봐야 열여섯, 열일곱밖에 안 되는 여학생들에게는 다소 가혹할 수 있는 환경이었다.
9월 데뷔 후, 2개월간 방송 출연 및 행사 참여로 바쁜 스케줄을 소화한 이들을 위해 회사에서는 가족들을 초청하여 연습실과 회사를 둘러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주었다.
“지연이가 여기서 지내나 보네요.”
우리는 TM엔터테인먼트가 위치한 곳에 도착했다.
회사 부지에는 대표를 비롯한 직원들이 일하는 본사 건물과 연습생들이 기거하는 숙소가 함께 있었다.
“안에 들어가 봐야 알겠지만, 겉에만 봤을 때도 상태가 좋아 보인다.”
“딱 봐도 지은 지 얼마 안 된 것 같네. 지연이가 숙소가 괜찮다고 했을 때도 마음이 안 놓였는데 직접 보니까 안심이 된다.”
아버지는 엄마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했다. 동생은 연습생 때만 하더라도 일주일에 한 번 정도나 외박을 했지만, 정식으로 데뷔를 한 이후에는 집에 머무르는 시간이 급격히 줄었다.
“자, 내리자.”
본사 주변을 돌아보던 우리는 차에서 내려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저는 지연이 아버지 되는 사람입니다. 회사 초청을 받고 가족들과 왔는데 어디로 가야 합니까?”
경비원으로 보이는 남자가 다가와 말을 걸자 아버지는 방문 이유를 간단하게 이야기했다.
“아, 강지연 양 부모님 되시는군요. 엘리베이터 타시고 5층으로 가시면 됩니다.”
“네, 감사합니다.”
아버지는 남자에게 간단하게 인사를 한 뒤 가족들을 데리고 엘리베이터에 탔다.
드르륵-
잠시 후,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고 직원 하나가 안내를 위해 마중 나왔다.
“혹시 지연이 가족분들이신가요?”
“네, 그렇습니다.”
“이쪽으로 오세요.”
안경을 쓴 여성은 엘리베이터 우측에 있는 방으로 손짓을 하며 걸어갔다.
방문 앞에는 ‘라비’라고 프린트된 종이가 붙어 있었다.
라비는 지연이가 속한 팀의 이름으로 프랑스어로 ‘홀리다’,‘매료되다’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선배님께서 간담회에 가 보라고 해서 따라오긴 했는데, 내가 여기서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평소라면 내가 TM엔터테인먼트 본사에 올 일은 없었을 것이다. 물론, 내 또래 친구들은 연예인들을 보고 싶은 마음에 연예기획사 구경하고 싶어 안달이 나겠지만, 난 옛날부터 걸그룹이든 뭐든 관심이 없는 편이었다.
그러나 회사에 방문해 보라는 이규석 선배님의 말씀이 있어서 어쩔 수 없이 이곳에 왔다.
동생을 괴롭힌 이현영을 보고 싶지 않았던 탓에 거부 의사를 밝혔지만, 가면 보탬이 될 수 있다는 말에 더 이상 고집을 피울 수가 없었다.
‘그런데 왜 나를 자꾸 힐끔힐끔 보는 거지? 거 되게 부담스럽네.’
우리를 안내하는 여직원은 예사롭지 않은 눈빛으로 나를 스캔하고 있었다.
“이 방으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고맙습니다.”
“저, 괜찮으시면 아드님이랑 잠시 대화를 나눠도 될까요?”
“흠, 그렇게 하세요.”
부모님은 잠시 고민을 하는 듯하다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설마, 이현영이라는 애가 벌써부터 견제를 하려는 건 아니겠지?’
딱 달라붙는 오피스 룩에 메탈 안경을 쓴 그녀는 한눈에 봐도 까칠한 성격을 가진 것처럼 보였다.
나는 안경을 고쳐 쓰며 의미심장한 눈길을 보내는 그녀의 입에서 어떤 이야기가 나올지 점점 궁금해졌다.
“지연이한테 오빠가 있다고 들었는데 이렇게 훤칠한 분이신 줄은 몰랐네요.”
“네?”
그녀의 입에서 뜻밖의 말이 흘러나오자 조금 전의 긴장감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다.
“이런, 생각해 보니 제 소개를 안 했군요. 안녕하세요. 저는 TM엔터테인먼트의 장하나 경영지원실장입니다.”
“지연이 오빠 강진우입니다.”
장하나 실장이 자연스럽게 손을 뻗어 악수를 청하자 얼떨결에 손을 맞잡았다.
“진우 군, 갑자기 훤칠하다니 뭐니 해서 조금 놀라셨죠? 하지만 거기에는 다 이유가 있습니다. 제가 경영지원실장 하기 전에 인사팀장으로 일한 적이 있는데, 옥석을 잘 가려내서 대표님께서 좋아하셨거든요.”
‘어떤 이유로 날 불러 세웠는지 짐작이 가네.’
장하나 실장은 나를 처음 봤을 때부터 연예인이 될 재목으로 판단했다.
2000년대 초반에 회사에 입사한 이래로 그녀가 발굴한 가수와 그룹은 못 해도 열 이상은 되었다.
따라서 회사 내 입지가 무척 좋은 편이었고 대표를 제외한 그 어떤 누구도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얼굴에서 느껴지는 분위기랑 전체적인 실루엣이 딱 배우상입니다. 마침, 우리 TM엔터테인먼트에서 전문 배우를 육성하려던 참이거든요. 아 그 전에 나이를 여쭤봐도 될까요?”
“열일곱입니다.”
“나이까지 완벽하군요. 열심히 준비만 한다면 내년 상반기에 데뷔를 할 수도 있겠어요.”
183cm에 달하는 키에 깔끔하게 차려입은 내 모습이 그녀의 눈에는 보석처럼 보였나 보다. 최근, 백과사전 미션을 완료한 후 경험치가 올라 매력 레벨이 오른 적이 있었고 이전에 비해 훨씬 준수한 외모를 갖추게 됐으니 실장의 반응이 이상한 것도 아니었다.
어드바이저 말로는 사회생활과 대인 관계에 필요한 교양을 갖췄기 때문에 스탯이 올랐다고는 하는데, 솔직히 크게 공감되는 이유는 아니었다. 하지만 과정이야 어쨌든 매력이 올랐으니 그거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만약에 지원을 한다면 실장님께서 케어라도 해 주시는 건가요?”
“물론이죠. 진우 군이 원하시면 당장 팀을 꾸려 내일부터라도 케어를 들어갈 수도 있습니다.”
장하나 실장은 눈을 반짝이며 적극적인 태도를 드러냈다.
‘실장이면 제법 높은 사람 같으니까 비위를 거스를 필요는 없겠어.’
배우나 가수가 될 생각은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었기에 제안을 받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하지만, 지연이에게 약간이나마 보탬이 되기 위해서는 그녀와 연을 맺을 필요도 있었다.
내가 이런 판단을 하는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그중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현자의 눈이었다.
업그레이드된 현자의 눈은 상대가 나에게 어떤 감정을 가졌는지 확인할 수 있었는데, 이에 따르면 그녀가 나에게 보내는 관심은 일시적인 호기심이 아니라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감정이라고 했다.
“생각할 시간이 좀 필요할 것 같아요. 제가 사실 이것저것 하는 게 있어서 바로 말씀드리기는 어렵거든요.”
“아니에요. 제가 너무 급하게 이야기한 면도 없지 않아 있습니다. 여기 명함을 드릴 테니 천천히 고민해 보시고 연락 주세요.”
장하나 실장은 손을 저으며 괜찮다는 제스처를 보였다.
“네, 전 이만 들어가 볼게요. 가족들이 기다릴 것 같아서요.”
“같이 가시죠. 어차피 저도 일정을 같이 소화해야 하거든요.”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손수 문을 열어 주었다.
‘방을 무슨 강의실처럼 꾸며 놨네?’
방 안은 프레젠테이션을 할 수 있게 스크린과 프로젝터가 설치되어 있었고 발표자가 설 수 있는 연단과 청중들이 앉을 수 있는 테이블까지 구비되어 있었다.
“진우야, 여기야.”
“네, 갈게요.”
엄마는 손을 흔들며 나를 불렀다.
테이블은 총 4개가 배치되어 있었는데, 이는 ‘라비’의 팀원이 총 4명인 것을 염두에 두고 내린 결정 같았다.
“오빠, 안녕.”
“응, 지연아 잘 지냈지?”
“당연하지. 엄마랑 아빠만 올 줄 알았는데, 오빠까지 보니까 너무 좋다. 거기 서 있지 말고 이쪽에 와서 앉아.”
지연이는 활짝 웃으며 자리에 앉을 것을 권했다.
‘쟤가 이현영인가 보네.’
나는 지연이를 제외한 3명의 여자 아이들 중에 누가 이현영인지 한눈에 알아챘다. 긴 생머리에 치켜 올라간 눈매를 가진 그녀는 어른들 사이에서도 화장을 고치는 여유를 보이고 있었다.
“팀에서 현영이가 눈에 제일 많이 띄더라고요.”
“훗, 이게 다 팀원들이 잘 받쳐 줘서 그런 거죠.”
“그나저나 현영이는 체중 관리 어떻게 하고 있어요? 예전에 민지는 다이어트가 너무 힘들다고…….”
우리 가족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이현영네 테이블에 모여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다.
“지연아, 너 가수 진짜 꼭 하고 싶어? 와서 보니까 분위기가 영 아닌데?”
“조용히 해. 옆에 듣겠어. 그나저나 TM이 좋은 회사긴 한가 보다. 오면서 보니까 시설들이 깔끔하니 좋더라고.”
애써 밝은 척을 하는 엄마와 달리 아버지는 침중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맞아, 좀 있다가 연습실이랑 식당도 갈 건데, 거기는 여기보다 더 좋아. 그리고 아빠. 당연히 계속해야지, 그럼 그만둬?”
우리의 우려와 달리 지연이는 씩씩한 태도를 보였다.
“안 힘들어?”
“처음에는 그만둘까 고민도 했는데, 생각해 보니까 그렇게 하면 저 언니만 좋겠더라고.”
이현영은 지연이보다 한 살 위로 나와 동갑이었다.
“맞아요. 지연이는 잘못한 것도 없는데 왜 그만둬요.”
“그걸 누가 몰라서 그러냐? 상황 돌아가는 거 보니까 걱정돼서 그렇지.”
아버지는 왁자지껄 떠들고 있는 학부모들을 바라보며 힘없이 말했다.
“지연이 일은 조만간 해결될 거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휴, 그게 말처럼 쉬우면 내가 걱정도 안 하지.”
이규석 선배가 도와줄 것을 알고 있는 나와 달리 부모님은 지연이가 처한 상황에 한숨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가족들끼리 오랜만에 풀며 이야기를 나누던 그때, 문이 활짝 열리더니 거대한 체구의 중년 남성이 들어왔다.
“삼촌! 빨리 와요.”
“녀석, 어제 봐 놓고 뭘 그렇게 보채냐? 형님, 오랜만입니다. 현영이 때문에 걱정 많으시죠?”
외삼촌을 발견한 이현영은 호들갑을 떨며 그를 불렀다.
“네가 신경 써 준 덕분에 얼마나 마음이 편한지 모른다. 하여간 현영이한테 잘해 줘서 정말 고맙다.”
“여보도 참, 삼촌이 조카한테 그 정도도 못 해 줘?”
“하하, 맞습니다. 조카인데 당연히 신경을 써 줘야지요.”
김민규 이사는 호탕하게 웃으며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