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 15화 여동생 (5)
TM엔터테인먼트 김민규 이사는 회사가 처음 설립될 당시, 3,000만원의 자본금을 투자한 인물로 당시에는 여의도 증권회사에 다니는 평범한 인물이었다.
한국대 경제학과를 졸업한 그는 우연한 기회에 박태민과 친하게 지내는 사람을 알게 되었고 좋은 투자처가 있다는 말에 아무 생각없이 돈을 맡겼다.
투자를 한 지 얼마 되지 않아 IMF 광풍이 몰아닥쳤고 대기업을 비롯한 회사들은 대대적인 구조 조정에 들어갔다.
‘이래서 타고난 팔자가 중요하다는 건가? 낙동강 오리알 신세에서 이렇게 될 줄 누가 알았겠어.’
수많은 직장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회사에서 짤린 김민규는 암담한 현실에 신음하며 일용직을 전전하며 살았다.
그랬던 그에게 기회가 오게 됐으니 그건 바로 TM엔터테인먼트의 약진이었다.
TM엔터에 초기 자본을 투자한 김민규는 회사의 규모가 커지자 이사 자리를 제안받았고 그후로 탄탄대로의 인생을 살게 되었다.
“김 이사님 안녕하세요. 들어 보니까 현영이 외삼촌 되신다면서요? 현영이가 누굴 닮아서 이렇게 예쁘나 했더니 삼촌을 닮은 거였네요.”
“우리 아이들 잘 챙겨 주신다고 이야기 들었습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릴게요.”
라비 멤버의 부모들은 김민규 이사에게 다가와 갖은 아양을 떨며 잘 보이려 노력했다.
그에게 밉보였다가는 팀 내 비중이 줄어들어 불이익을 볼 게 뻔했기 때문이다.
“크흠, 조카가 속해 있는 팀인데, 당연히 잘해 드려야지요. 사실 우리 회사에 ‘라비’말고도 여러 팀이 있지만, 현재 저에게 1순위는 ‘라비’입니다.”
“이사님이 계셔서 너무 든든하네요.”
“그러게요. 다른 아이돌들은 데뷔하고 공중파 예능에 나오기까지 1년이 넘게 걸리는 경우도 있는데 우리 애들은 지난주에 벌써 예능 방송도 나오고 그러잖아요.”
“애들아, 내가 너희들 어떻게든 성공하게 해 줄 거니까 딴 생각하지 말고 다음 곡 연습 열심히 해야 한다.”
“네, 이사님.”
“감사합니다!”
부모들이 앞다퉈 아부하는 모습에 기고만장해진 김 이사는 온갖 젠 체를 하며 잘난 척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지연이를 제외한 팀원들도 김민규의 비위를 맞추는 데 열성이었다.
김 이사를 중심으로 한참을 떠들던 사람들은 장하나 실장의 등장에 조용해졌다.
“김민규 이사님, 안녕하세요.”
“오, 장 실장님. 오랜만입니다. 이거 오늘 무슨 날인가? 실장님께서 먼저 와서 인사를 다 해 주시다니 참 희한한 일이네요.”
이 둘은 회사 내에서 사이가 좋지 않기로 유명했다.
밑바닥에서부터 차근차근 올라와 실장직에 오른 장하나는 운 하나로 이사직에 오른 김민규를 좋아하지 않았다.
‘후, 박 대표님은 왜 저런 사람에게 이사직을 제안하신 걸까?’
김민규가 초기 자본 투자로 적지 않은 지분을 갖고 있다고는 하나 TM도 시간이 흐름에 따라 엄청나게 성장했기 때문에 기껏해야 3~4% 정도의 지분만 갖고 있었다.
게다가 회사 내부 사정은 잘 모르면서 실무를 담당하는 직원들에게 갑질을 해 대는 터라 장하나 실장이 좋아할래야 좋아할 수가 없었다.
“곧 있으면 발표를 시작할 거라 자리에 착석해 달라고 이야기하러 온 겁니다.”
그녀는 임원들이 앉는 곳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차갑게 말했다.
“민규야, 그냥 우리랑 같이 여기서 듣자.”
“그래요, 어차피 학부모 간담회인데 딱딱하게 굴게 뭐 있어요.”
“여기 자리 있네. 이사님, 이쪽으로 오세요.”
옆에서 듣던 이현영네 엄마가 눈에 쌍심지를 켜고 입을 열자 주변에 있던 다른 엄마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맞장구를 쳤다.
“흐흠, 저는 실장님 말씀을 듣고 싶은데 부모님들께서 이렇게 원하시니 어쩔 수가 없네요.”
김민규 이사는 어깨를 으쓱하며 얄밉게 굴었다.
그러자 장하나 실장은 눈을 가늘게 뜨더니 나지막이 말을 이어 갔다.
“조금 있다가 박태민 대표님이 오시기로 한 거 아시죠?”
“대표님께서 오신다고요?”
“네, 대표님께서 오셨는데 이사님이 부모님들과 앉아 만담이나 나누고 있으면 어떻게 생각하겠어요.”
“…….”
박태민 대표가 온다는 말에 기세등등하던 김민규 이사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그리고 장하나 실장은 이런 그를 잠시 바라보더니 다가가 귓속말을 하였다.
“이사님, 대표님께서 품위 없는 행동 싫어하는 거 아시잖아요. 부모님들과의 대화는 발표가 끝나고 하는 게 어떨까요?”
“그, 그렇게 합시다.”
그녀로부터 박태민 대표의 이름이 나오자 김민규 이사는 당황해하며 임원석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대표님이 이 자리에 오신다고?’
한쪽에서 이들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던 나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이규석 선배님은 며칠 전에 박태민 대표를 만나 알아듣게 말씀을 하셨다고 했다.
따라서 어떻게든 그와 만나 지연이에 관한 논의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막상 회사에 오니 대표의 모습은 보이지 않아 선배님께 연락을 취해야 하나 고민을 하던 찰나였는데, 그가 간담회에 온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모든 걱정이 싹 사라졌다.
“지금부터 여기 계신 기획팀장님이 우리 회사가 어떤 방식으로 ‘라비’를 지원하고 있고 어떤 비전을 갖고 있는지 간략하게 설명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조 팀장님, 나와서 발표하세요.”
“네, 실장님.”
장하나 실장은 김민규 이사가 자리에 앉은 것을 확인하자 곧바로 프레젠테이션을 진행시켰다.
“안녕하세요, TM엔터테인먼트 기획팀을 담당하고 있는 조정윤이라고 합니다. 저희가 하는 일은 구성원의 개성을 살릴 수 있는 팀 컨셉 기획과…….”
실장님의 호명을 받은 조정윤 팀장은 미리 준비한 PPT 파일을 실행시킨 뒤 발표를 진행했다.
그는 처음 팀을 결성했을 때 세웠던 회사의 목표와 이를 위해 팀원들을 어떤 방식으로 육성했는지 등을 차분하게 이야기했다.
“TM이 이런 건 진짜 잘하는 것 같아. 사실, 지연이 보내 놓고 뭐 하는지 제대로 들은 적이 없잖아.”
“소통이라는 측면에선 확실히 칭찬받을 만하네요.”
엄마의 말에 난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했다.
보통의 엔터 회사에서 가족들과 활발히 소통하는 곳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 정도로 적극성을 보이는 곳은 들어 본 바가 없었다.
“올 9월에 발표된 신곡의 최고 성적은 3위입니다. 비록 1위를 하지 못해서 아쉽긴 하지만, 매달 한 팀 이상의 신인들이 쏟아지는 가요계의 현실을 고려했을 때 나쁜 성적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그리고 최근에 뮤직비디오를 시청한 네티즌들을 분석한 결과 아시아권 국가보다 유럽과 남미에서 인기를 끌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보통 해외 쪽은 중국이나 일본을 생각하는데 신기하네.”
“요즘은 KPOP이 북미 시장에서도 유행이라고 하잖아. 우리 애들도 운만 따라 주면 글로벌 스타가 될 수 있다고.”
부모님들은 화면에 뜬 통계 자료를 보며 설왕설래하였다.
이후에도 조정윤 팀장은 여러 자료를 보여 주며 ‘라비’의 현주소와 나아갈 방향에 대해 상세히 말해 주었다.
“이상으로 발표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조정윤 팀장님, 수고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장하나 실장은 자연스럽게 마이크를 받아 사회를 진행했다.
“다음으로 질의응답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원래는 여기 계신 기획팀장님이랑 제가 질문을 받을까 했는데요. 김 이사님께서 부모님들이 궁금할 게 많을 거라며 ‘라비’의 프로듀싱을 담당하는 박다훈 팀장님을 직접 이곳으로 데려왔다고 합니다. 박 팀장님. 나와서 인사를 해 주시죠.”
“안녕하세요. 저는 TM엔터테인먼트 제작4팀을 맡고 있는 박다훈 팀장입니다. 궁금한 게 있으면 뭐든 물어보세요.”
박다훈 팀장은 기다렸다는 듯이 단상 위에 올라갔다.
그는 김민규 이사가 인사팀에 입김을 넣어 뽑은 사람으로 변변한 히트곡 하나 없는 자였다.
노래를 만드는 능력이 다소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팀장직을 유지할 수 있었던 건 TM엔터테인먼트에 유능한 작곡가들이 많은 덕분이었다.
‘김민규 이사도 그렇고 박 팀장도 그렇고 우리 회사의 암 같은 존재들인데 대표님은 왜 가만히 놔두시는 걸까?’
장하나 실장은 그를 못마땅하게 바라보며 생각했다.
박다훈 팀장은 팀 내 작곡가들에게 일을 던져 주고 결제하는 것 외에는 아무런 기여를 하지 않는 무능한 자였다.
따라서 알게 모르게 그에 대한 비판 여론이 작곡가들 사이에서 형성되어 있었고 경영지원실장인 그녀의 귀에 들어올 정도로 평판이 안 좋았다.
그러나 박태민 대표는 이와 같은 상황에서도 김민규 이사를 놔두었는데, 그 이유는 김 이사가 박 대표의 결정이라면 무조건적인 지지를 보냈기 때문이다.
무능하다고는 하나 대표가 경영상에 중요한 결정을 할 때마다 힘을 보탰기에 지금까지 자리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다음 신곡 컨셉은 어떻게 되나요?”
“오, 좋은 질문이네요. 이번 곡은 신인 가수라는 이미지 맞는 청량하고 상큼한 곡을 제작했다면 다음 곡은 역동적인 컨셉의 노래를 제작할 계획입니다. 그리고…….”
‘슬슬 시작해 볼까?’
나는 박다훈 팀장의 설명을 들으며 말할 기회를 잡고 있었다.
원래는 대표와 따로 긴밀히 이야기를 나눌까 생각했지만, 나이도 어린 나와 독대가 이루어질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그리고 곧 있으면 대표가 직접 세미나실에 온다고 했으니 미리 이슈를 꺼내 놓는 편이 여러모로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말씀 들으니까 참 안심이 되네요. 후속곡도 잘 만드셔서 애들 좀 잘 살펴 주세요.”
“하하,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사님과 제가 지금처럼 잘 챙기겠습니다.”
“말씀만으로도 고맙네요.”
이현영네 엄마는 박 팀장의 답변이 만족스러운지 만면에 미소를 띠고 있었다.
“자, 또 네. 거기 앉으신 분 질문해 주세요.”
박다훈 팀장은 손을 들고 있는 나를 발견하고 지목했다.
“안녕하세요. 저는 강진우라고 합니다. 데뷔곡에 대해서 질문드릴 게 있습니다.”
“말씀하세요.”
박다훈 팀장은 이름을 듣고 내가 지연이의 오빠인 걸 알아챘다.
그는 조금 전의 상냥한 태도와 달리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대답하고 있었다.
“최근에 ‘라비’가 출연했던 음악 방송들을 쭉 봤는데 이상한 게 있어서요.”
“뭐가 이상하다는 거죠?”
“9월에만 해도 제 동생의 보컬 분량이 상당히 많았는데, 10월 들어서면서 갑자기 확 줄었더라고요.”
“진우야, 그만해.”
“너 갑자기 왜 이래?”
직설적인 내 질문에 당황한 부모님은 황급히 날 말리려 했다. 그러나 나는 주변의 반응에 아랑곳하지 않고 질문을 이어 갔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는 센터에 아예 안 세우던데 이유를 들을 수 있을까요?”
“학생. 그건 내부 회의로 결정된 사안이라 말하기 어려워요. 그리고 지금 지연이도 이 자리에 있는데 굳이 이유를 듣고 싶습니까?”
박다훈 팀장은 입술을 한쪽으로만 씨익 올리며 말했다.
‘뭐야? 왜 그러지?’
나는 팀장의 말을 듣고 몸을 떨고 있는 동생을 발견했다.
두 손을 꼭 모은 채 바닥만 보고 있는 동생을 보니 이들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게 분명했다.
“네, 이유를 듣고 싶습니다.”
“뭐, 꼭 듣고 싶다고 하니까 어쩔 수 없네요. 우선 아이돌이 데뷔하는 과정에 대해서는 알고 계시나요?”
“쓸데없는 이야기는 각설하고 본론만 말씀하세요.”
날 어린애 취급하려는 박 팀장의 말을 일일이 받아 줄 생각은 없었다.
“크흠, 지연이가 연습생 시절이 무척 짧다는 건 알고 계시죠?”
“작년 9월에 입사했으니까 그럴 수밖에 없지요.”
나는 그가 어떤 의도로 이야기를 꺼냈는지 알아챘지만, 태연하게 대꾸했다.
“후우, 여기 계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지연이를 제외한 다른 팀원들은 적어도 3년 이상의 연습생 시절을 거쳤습니다. 따라서 팀원 간에 춤과 보컬의 실력 격차가 나타날 수밖에 없었고요.”
박다훈 팀장은 고등학생에 불과한 나의 당돌한 말투에 머리끝까지 화가 났으나 이내 감정을 정리하고 차분하게 설명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