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사람들이 자꾸만 보은한다-65화 (65/122)

65. 15화 여동생 (6)

“한 리서치 기관에 따르면 아이돌 그룹으로 데뷔하기 위해서 연습하는 기간이 최소 5년 이상 길면 8년에서 9년까지 걸린다더군요. 따라서…….”

“하시고 싶은 말씀이라는 게 지연이가 실력이 떨어져서 비중을 줄일 수밖에 없었다라는 건가요? 뭔가 특별한 이유가 있을 줄 알았는데 실망이네요.”

나는 박다훈 팀장의 말을 끊고 심드렁한 반응을 보였다.

‘어린놈의 자식이 건방지게…….’

그는 부아가 치밀었으나 꾹 참고 침착하게 대화를 이어 갔다.

“학생이라서 아직 모르는 모양인데, 요즘 들어 업계 관계자들이 외모를 많이 본다고 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무엇보다 실력입니다.”

“그 말씀은 지연이가 비주얼만 좋지 실력은 부족하다는 이야기나요?”

“휴, 굳이 내 입으로 그런 말을 하고 싶지는 않네요. 그리고 정 억울하면 티비라도 좀 보세요.”

“네? 갑자기 웬 티비요?”

박다훈 팀장의 뜬금없는 소리에 황당해진 나는 어이가 없다는 듯 반문했다.

“티비 켜면 허구한 날 하는 게 경연 프로그램인데 학생처럼 비주얼로 사람을 뽑으면 그 프로그램이 어떻게 되겠어요?”

“제가 언제 비주얼을 강조했다고 그러세요.”

“그럼 자꾸 말을 빙빙 돌리지 말고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해 보세요.”

그는 팔짱을 낀 채 여유만만한 태도로 물었다.

“제가 회사에 오기 전에 팬 카페랑 커뮤니티를 잠깐 살펴봤는데, 팀 내에서 지연이 비중이 줄어든 걸 두고 이야기하는 팬이 적지 않더군요.”

“훗, 여기 있는 다른 팀원들도 팬이 있습니다. 전반적인 퀄리티가 올라가도 몇몇 팬들이 반발하는 건 어쩔 수 없는 현상이지요. 저, 그것보다 궁금증이 풀렸으면 이제 그만 하시는 게 어떻습니까? 다른 가족들도 있는데 너무 과한 거 같아서요.”

“그래, 진우야. 그만 앉는 게 좋을 것 같아.”

팀장의 이야기를 들은 엄마는 조심스럽게 내 옷깃을 잡아끌었다.

‘다들 어지간히 짜증이 나나 보네.’

우리 가족을 제외한 다른 부모님들은 나를 못마땅하듯 쳐다보고 있었다.

장하나 실장과 내막을 아는 소수의 직원들은 안타깝다는 눈길을 보냈지만, 내 편을 들어 주기에는 상황이 애매하여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걱정 마세요. 여기까지만 하고 그만할게요. 팀장님 말씀대로 지연이 팬들이 극성을 부린 것일 수도 있다는 점 인정합니다. 하지만 지금 인터넷에 지연이 왕따 의혹 사진들도 돌고 있던데 아시나요?”

“찌라시 사진 몇 장 가지고 뭘 그렇게 호들갑입니까?”

박다훈 팀장은 어깨를 으쓱하며 대수롭지 않다는 제스처를 취했다.

출중한 외모와 실력을 갖춘 동생은 데뷔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가장 큰 팬덤을 형성했고 기자들과 대중의 관심을 한 몸에 받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를 질투한 이현영은 외삼촌을 통해 의도적으로 동생을 배제시켰고 급기야 행사나 음악 프로를 소화할 때도 말 한마디 섞지 않는 미숙한 태도를 보였다.

다른 팀원들은 이런 그녀의 행동이 옳지 않다는 것을 알았으나 눈 밖에 벗어나면 불이익을 줄 게 뻔했기 때문에 덩달아 말을 섞지 않았고 이로 인해 지연이는 외로운 나날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뭐 의혹인지 진실인지는 두고 보면 알겠죠. 그리고 팀장님께서는 지연이가 부족하다고 평가했지만, 커뮤니티를 보면 춤과 가창력 면에서도 지연이를 칭찬하는 팬들이 제법 많습니다.”

“이거 오해가 있으신 거 같네요. 지연이에 대한 평가는 제 주관으로 이루어진 게 아닙니다. 기획팀 직원들이 한데 모여 객관적인 평가를 내린 사안에 대해서 몇몇 팬들의 의견을 들이미시니까 할 말이 없네요.”

“팬 카페에 가 보신 적은 있나요? 카페 최상단에 지연이의 포지션에 대해 의혹을 제기하는 글이 올라와 있는데, 안 보셨습니까?”

나도 단순히 내 동생이라서 거듭 이야기하는 건 아니었다. 팬 카페에는 추천을 많이 받은 글이 상단에 올라오는데, 가장 많은 추천을 받은 글은 다름 아닌 지연이에 관한 글이었다.

“실장님, 거 진행을 왜 이렇게 잘 못하십니까? 학생, 고집 그만 부리고 자리에 앉아.”

이야기를 듣던 김민규 이사는 짜증 섞인 말투로 장하나 실장을 쏘아붙였다.

“진우 군, 마음은 알겠지만, 일단…….”

“그리고 말씀 들어 보니까 팬들과 대중의 안목을 너무 무시하시는 것 같던데 어떻게 그러실 수가 있죠? 팀장님이 아무리 전문가라고 하지만, 소비자의 취향과 기호를 외면하는 건 잘못됐다고 보는데요.”

장하나 실장이 점잖게 나를 말리려 했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어 갔다.

“거, 참. 말이 안 통하시네. 이봐 학생. 보자 보자 하니까 너무 한 거 아니야? 지연이가 동생이라서 아끼는 마음은 알겠는데, 매너를 좀 지키자고.”

논쟁으로는 도저히 이길 수 없다고 판단한 박다훈 팀장은 급기야 반말을 하며 주변에 호소했다.

“그만해라 좀. 거기 지연이 부모님. 아들 좀 자제시켜 주세요.”

팀장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이현영네 엄마는 맞장구를 치며 입을 열었고 이에 질세라 김민규 이사도 한마디 거들었다.

“장 실장님 이게 뭐 하는 겁니까? 진즉에 대화 중단시키고 진행하시라니까요. 잠시 후에 회사 투어도 해야 하는데 불편해서 같이 못 다니겠네.”

“강진우 군이 나이가 어리다고 해서 함부로 할 순 없지요. 그리고 가만히 들어 보니까 틀린 말도 별로 없던데요 뭘.”

“뭐라고요?!”

장하나 실장이 퉁명스럽게 받아치자 김민규 이사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노발대발했다.

끼이익-

“부모님들 앞에서 왜 이렇게 시끄럽습니까?”

“대, 대표님.”

“안녕하십니까, 대표님.”

문 열리는 소리와 함께 박태민 대표가 세미나실에 등장했다. 그는 50대 후반의 나이로 이규석 선배와 동갑이었지만, 세련된 스타일과 젊어 보이는 외모 덕분에 40대 정도로밖에 안 보였다.

“자식들 떠나보내고 노심초사하시는 부모님들께서 이런 모습을 보면 기분이 어떠시겠습니까?”

“죄송합니다.”

“앞으로 조심하겠습니다.”

김민규 이사와 장하나 실장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그리고 박 팀장.”

“아, 네. 대표님.”

“기획4팀의 의견은 충분히 존중하지만, 앞으로는 여론의 동향도 잘 살피도록 하세요. 바로 옆 동네에서 대표라는 사람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아시죠?”

“시정하겠습니다, 대표님.”

박태민 대표는 다른 기획사 대표가 자기 입맛대로 아이돌 그룹을 만들었다가 폭망한 사례를 언급하며 팀장을 타일렀다.

‘밖에서 듣고 계셨나 보군.’

‘이런 젠장, 못 볼 꼴을 보였잖아.’

대표의 뼈 있는 말에 이사를 포함한 직원들은 착잡한 마음이 들 수밖에 없었다.

“안녕하세요. TM엔터테이먼트 박태민 대표입니다. 방금 우리 직원들이 추태를 부린 점은 대신해서 사과드리겠습니다. 곧 있으면 점심시간인데, 조금 있다가 식당으로 이동해서 식사를 하시죠. 이래 봐도 우리 회사가 밥맛이 좋기로 업계에서 소문이 자자하답니다.”

“맞아, TM 사내 식당이 맛있기로 유명하잖아.”

“대표님까지 저렇게 말씀하시니까 왠지 기대되네.”

박태민 대표는 세미나실 내에 감도는 냉랭한 분위기를 전환했다.

“쉐프님이 재료부터 조리법까지 각별히 신경 써서 만든 거라 나쁘지 않을 겁니다. 저 아까 질의응답을 진행하고 계셨던 거 같은데 지금부터는 제가 직접 질문에 답해 드리겠습니다.”

그의 말을 들은 나는 조심스럽게 손을 올렸다. 그러자 박 대표는 곧바로 반응을 보였다.

“진우 군 이야기는 많이 들었으니까 다른 분들에게 기회를 드릴까요?”

“네, 알겠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는 태도를 취했다.

‘알아서 처리해 주시겠지.’

사실 그가 방에 입장했을 때 현자의 눈을 발동시켜 나에 대한 감정이 어떤지 파악했다.

박 대표는 나에게 개인적인 호감을 가진 건 아니었지만, 모종의 이유로 나와 친해지고 싶어 했다.

따라서 당장 내 말을 일축한다고 일희일비할 필요는 없었던 것이다.

“다음 곡에서 반응이 괜찮으면 내년 상반기나 하반기쯤 해서 해외 콘서트도 기획해 볼 예정이니 기대하셔도 좋을 겁니다. 그리고…… 아, 하마터면 깜빡할 뻔했네요. ‘라비’ 팀에 좋은 소식이 하나 있습니다.”

질의응답 시간을 마친 박태민 대표는 아차 하는 얼굴로 공지를 하기 시작했다.

“어제 AJ기획 임원진을 만나 업무 협약을 맺고 왔습니다. 영화, 드라마 제작 외에도 뮤직비디오 촬영도 전문적으로 하는 회사라 협력 관계를 맺으면 상호 간에 좋은 시너지를 낼 수 있다고 판단해서였죠.”

박태민 대표는 목이 탔는지 물을 한 모금 마신 후 이야기를 재개했다.

“어제 미팅에서 우리 회사에 소속된 연예인들과 협업할 수 있는 방향을 논하던 중, 콘텐츠 제작을 총괄하시는 분께서 ‘라비’에 대해 흥미를 보이시더군요.”

“AJ기획이면 대기업 아니에요?”

“맞아요. 근방에 있는 극장들도 다 AJ가 관리하잖아요. 정말 잘됐네요.”

“이거 잘하면 배우로 데뷔할 수도 있겠는데요.”

이현영네 엄마를 비롯한 몇몇 학부모들은 설레는 감정을 감추지 못했다.

“하하, 그렇습니다. AJ와의 협업을 통해 타 분야로의 진출이 용이해진 만큼 기회가 더 주어질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지연 양의 역할이 매우 중요해졌습니다.”

“네? 지연이요?”

새침한 표정을 지은 채 내내 가만히 있던 이현영이 벙찐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래, 지연이가 이번에 AJ에서 만드는 웹드라마에 출연하기로 했어. 공중파 방송은 아니지만, 이번 작품만 잘 소화하면 추후에 영화나 드라마에도 출연할 수 있을 거야.”

“저, 대표님.”

“네, 말씀하시죠.”

박태민 대표는 이현영네 엄마에게 발언권을 주었다.

“현영이가 그래도 명색이 팀 리더인데 배정받은 역할은 없나요? 그동안 팀을 위해서 공헌한 것도 적지 않은데…….”

“죄송하지만, 이번 결정은 AJ기획 총괄 디렉터 분께서 소속 연예인들 프로필을 일일이 점검하시고 내리신 겁니다. 지연이의 사진을 보시더니 딱 맞는 배역이 있다며 말씀하신 거라 제가 개입할 수 있는 부분이 딱히 없네요. 하지만, 지연이가 웹드라마에서 활약을 보이면 다른 팀원들도 기회가 돌아올 수 있으니까 지켜보도록 하죠.”

“하지만…… 아, 네 알겠습니다.”

그녀는 마음 같아서는 더 따지고 싶었지만, 동생인 김민규 이사가 고개를 젓는 걸 보고 그만두기로 했다.

“박 팀장님.”

“네, 대표님.”

“다음 곡 발표는 언제입니까?”

“아마 내년 2월쯤으로 알고 있습니다.”

박다훈 팀장은 두 손을 모은 채 공손히 대답했다.

“지연이는 내일부터 연기 수업도 받아야 하니까 다음 곡 준비하는 데 배려를 좀 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대표님.”

그는 박 대표가 어떤 의도로 말하는지 몰랐지만, 일단 알겠다고 말했다.

“요즘 10대와 20대 중심으로 웹드라마 수요가 늘고 있어서 인지도를 더 높일 수도 있어요. 지연이가 연기 활동을 병행해도 지장이 가지 않게 스케줄 조정에 신경을 쓰시고요.”

“명심하겠습니다.”

“팀장님, 이번 사안은 제가 각별히 신경 쓰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부디, 지연이가 스트레스받지 않게 유념해 주세요.”

박태민 대표는 팀장의 어깨를 두드리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아, 앞으로 조심하겠습니다.”

“하하, 뭘 그렇게 놀라십니까. 지금까지 그러셨던 것처럼 신경 좀 써 주시면 됩니다.”

대표의 의중을 이제야 알아들은 그는 긴장한 나머지 말을 더듬었다.

“다들 많이 시장하시죠? 장 실장님.”

“네.”

“팀원이랑 가족들 모시고 식당으로 이동하세요.”

“대표님, 제가 근처에 괜찮은 식당을 예약했는데 그쪽에서 식사를 하시면 어떻겠습니까?”

김민규 이사는 박 대표에게 다가가 손을 비비며 말했다.

“강진우 군이랑 긴히 할 이야기가 있어서 그건 어렵겠네요.”

“지연이 오빠랑 말씀이십니까?”

“왜요? 문제라도 있습니까?”

“아, 아닙니다. 편안한 시간 되십시오.”

박 대표 입에서 내 이름이 거론되자 순간 얼굴이 굳어졌던 김 이사는 금세 표정을 고치고 공손한 자세를 취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