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 15화 여동생 (7)
‘현영이를 도와준답시고 함부로 설쳤다간 큰일 나겠어.’
상사의 심기를 읽은 김민규 이사는 식은땀을 흘리며 생각했다.
그동안 질투심 많은 조카의 장단을 맞추느라 지연이에게 불이익을 줬지만, 이제는 그만둘 때였다.
회사에 아무 기여도 않는 그가 큰소리를 낼 수 있는 유일한 이유인 박태민 대표의 눈 밖에 나는 건 자살 행위에 가까웠기 때문이었다.
“김 이사님. 너무 그렇게 고민하실 거 없어요. 그냥 평소대로 하시는데, 지연이를 좀 신경 써 달라는 이야기니까요.”
“예, 대표님.”
생각에 잠겨 있던 김민규 이사는 얼른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저, 제가 혹시 기분을 상하게 했다면…….”
“그런 거 없으니까 걱정하지 마시고 식사하세요.”
“네, 알겠습니다.”
박태민 대표가 손을 저으며 괜찮다는 제스처를 보이자 김 이사는 언제 그랬냐는 듯 활기찬 태도를 되찾았다.
‘무능력자라고 쓸모가 없는 건 아니니까.’
이규석 사장과 미팅을 한 이후, 비서를 시켜 내막을 알아본 결과, 김민규 이사가 장난을 치고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그러나 이사회가 열릴 때 무조건적인 지지 의사를 보내는 그를 내치는 것은 본인에게도 좋지 않았기에 이 정도 선에서 상황을 마무리한 것이었다.
“진우야, 왜 그렇게 임원들이랑 맞서는 거야? 그러다가 지연이한테 피해가 가면 어쩌려고.”
엄마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에게 말했다.
“저도 제 행동이 과했다는 건 알아요. 하지만, 가족들이 지연이 상황을 인지하고 있는 걸 알려 줘야 저쪽에서도 함부로 못 할 거라고요.”
“후, 금방 알아들을 사람이면 애당초 지연이한테 그러지도 않았을 거야.”
“나름 생각이 있어서 이야기를 꺼낸 거니까 마음 편하게 드세요.”
나는 엄마의 등을 쓸어 주며 진정시켰다.
“조금 과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진우 말이 틀린 건 아니잖아. 난 솔직히 속이 다 시원하더라.”
옆에서 이야기를 듣던 아버지는 자연스럽게 대화에 참여했다.
“속이야 시원하지만, 후환이 두려워서 그렇지.”
“방금 대표 말을 들어 보니까 우리 지연이한테 힘을 실어 주려고 하는 것 같아.”
“너무 낙관적으로 생각하는 거 아니야?”
“팀장한테 지연이 관련해서 지시 내리는 거 못 들었어? 내가 볼 땐 앞으로는 잘 풀릴 것 같으니까 식사나 하러 가자고.”
아버지의 말을 들은 엄마는 그제야 안심이 되는지 짐을 챙기고 식당으로 갈 준비를 했다.
“안녕하세요.”
“어? 대표님, 안녕하세요.”
박태민 대표는 우리에게 다가와 인사를 했다.
“지연이 때문에 걱정 많으셨죠?”
“아, 네. 애가 원래 말수가 많은 앤데 힘들어하더라고요.”
“꼼꼼히 살폈어야 했는데, 제 책임입니다.”
그는 한동안 지연이를 두고 부모님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저, 괜찮으면 아드님과 대화를 해도 될까요?”
“네?”
“아, 물론입니다. 용건 끝나시면 저희한테 연락만 주십시오.”
“진우도 밥은 먹어야지.”
“대표님이랑 알아서 하겠지.”
아버지는 대표의 행동을 보고 그의 호의가 나와 관련이 있음을 눈치챘다.
“그래요, 가서 먼저 드시고 계세요.”
“알겠다. 우리도 슬슬 나가자.”
다른 가족들이 방을 나가는 것을 확인한 아버지는 가족들을 데리고 자리를 떴다.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떻게 괜찮으시면 대표실로 이동을 하실까요?”
“저야 괜찮지만, 대표님께서는 식사를 하셔야 하지 않습니까?”
“먹을 것을 이미 준비해 뒀습니다. 자, 올라가시죠.”
박태민 대표는 빙긋 웃으며 나를 데리고 대표실로 향했다.
‘선배님 집무실이랑은 차원이 다르네.’
대표실에 들어온 나는 화려한 방 내부에 감탄했다.
대리석으로 이루어진 바닥은 방에 청량한 느낌을 조성했고 바깥 풍경이 보이는 통유리에는 붉은 융 커튼이 부착되어 있어 흰 벽면과 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한쪽 벽면에는 정부로부터 받은 각종 표창장과 공로 상장이 붙어 있었고 책상 위에 부착된 고급스러운 선반에는 위스키와 양주가 가지런히 진열되어 있었다.
“간단하게 스테이크 어떻습니까?”
“네, 좋습니다.”
“회사 근처에 있는 레스토랑에서 테이크아웃을 해 왔는데, 맛이 좋아 종종 먹곤 합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박태민 대표는 갈색 종이백에서 수프가 든 용기를 꺼낸 후 전자레인지에 수프를 데웠다.
“조촐하지만, 맛있게 드세요.”
“잘 먹겠습니다.”
나는 집무실 한 켠에 마련된 테이블에 앉아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일회용 포크와 나이프, 플라스틱 용기에 든 수프까지 거대 기업의 대표가 먹는 식사로는 어울리진 않았지만, 그가 말한 것처럼 맛 하나만큼은 일품이었다.
“식사는 어떻게 입에 맞으셨나요?”
“덕분에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
“지연이 때문에 걱정 많으셨죠?”
식사가 어느 정도 마무리되자 박 대표는 동생 이야기를 꺼내며 대화를 시작했다.
“평소에 활달하고 말이 많은 편인데, 요즘 들어 침울해하는 것 같아서 걱정을 좀 했습니다.”
“이미 아시겠지만, 현영이라는 친구가 질투심 때문에 장난을 쳤던 모양입니다. 앞으로 이와 같은 상황이 반복되지 않도록 직접 신경을 쓸 예정이니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는 에둘러 말하지 않고 현재 벌어진 일에 대해서 툭 까놓고 이야기했다.
“지난 2달간 동생이 무척 힘들어했습니다.”
“그 점은 진심으로 사과드리겠습니다. 그래도 이후에는…….”
“지연이는 힘든 상황 속에서도 가족들 앞에서 그만두겠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내 마음을 달래려는 대표님의 마음을 읽었지만, 따지려는 의도로 이야기를 꺼낸 게 아니었기에 무례를 무릅쓰고 말을 이어 갔다.
“심지어 저희 아버지는 가수 생활을 그만두고 일상으로 돌아오기를 바랬습니다. 그러나 동생은 이런 일로 자신의 꿈을 포기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런 일이 있었군요.”
박태민 대표는 고개를 끄덕이며 진지하게 이야기를 경청했다.
“저도 그렇고 지연이도 괴롭혔던 팀원에게 앙갚음하려는 마음은 추호도 없습니다. 우리가 원하는 건 과거에 있었던 일은 뒤로하고 예전처럼 서로 아껴주고 단결하는 모습을 되찾는 것입니다.”
보통의 사람이라면 자신에게 지속적으로 피해를 줬던 사람을 용서하는 경우는 드물 것이다. 왜냐하면 당장은 뉘우치는 모습을 보일지라도 사람의 근본은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연이의 경우에는 박태민 대표가 직접 케어하기로 했기에 구태여 끝을 볼 필요가 없었다.
“이 사장이 작가님을 두고 나이에 비해 조숙하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은 이유가 있었군요. 이렇게 마음을 넓게 써 주시니 제가 더 잘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박 대표는 열일곱의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성숙한 나의 언행에 진심으로 감복했다. 그는 아까까지만 해도 진우 군이라 부르며 편하게 불렀지만, 어느새 작가라는 호칭을 쓰며 존중하는 태도를 보였다.
‘참 신기한 일이야. 누가 가르쳐 주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이야기해야 상대의 호감을 살 수 있을지 알겠어.’
통찰력과 지능의 상승은 대인 관계 능력의 향상을 불러일으켰다.
상대를 파악하는 능력과 적절한 해결책을 고안하는 능력이 오름에 따라 상황에 맞는 적절한 대처가 가능해진 것이다.
“대표님께서 알아서 잘해 주실 거라고 믿습니다.”
“훗, 알겠습니다. 그건 그렇고 작가님께 여쭤보고 싶은 게 있는데…….”
“뭐 궁금하신 거라도 있으십니까?”
“규석이랑은 어떻게 알게 된 겁니까?”
“일전에 우리 학교에서 소설 공모전이 열린 적이 있습니다. 선배님께서는 공모전 심사 위원 자격으로…….”
나는 이규석 선배와 인연을 맺게 된 과정을 간략하게 말해 줬다.
“참 신기한 일이네요. 저랑 알고 지낸 지 30년이 넘었지만, 작가님처럼 가깝게는 못 지냈거든요.”
박태민 대표는 생각보다 평범한 만남 과정에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선배님께서 워낙 겸손하시고 허심탄회하게 사람을 대하셔서 저 말고도 많은 후배들이 따릅니다.”
“제가 말하는 건 그런 차원이 아닙니다. 3일 전쯤인가요? 규석이와 미팅을 하는데 작가님 이야기를 하면서 사안을 잘 처리해 달라고 간곡히 부탁하더군요.”
“아, 네…….”
이야기를 들은 나는 속에서 뭉클한 감정이 올라왔으나 겉으로는 덤덤하게 반응했다.
“겉은 부드럽지만, 사람 관계에 있어서 매우 신중한 친구가 이렇게까지 나선 것은 이례적인 일입니다.”
“선배님께서 절 좋게 봐 주시니 감사하네요. 저, 그런데 선배님과 친하게 지내는 것이 그렇게까지 궁금해할 만한 일인가요?”
나는 다소 당돌할 수도 있는 질문을 그에게 던졌다.
오래 알고 지낸 지인에게 호기심을 갖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으나 박 대표의 태도는 호기심을 넘어 너무 진지했기 때문이다.
“설마 규석이네가 어떤 집안인지 모르시는 겁니까? 이런, 생각해 보니 작가님께서 당연히 모를 수밖에 없네요.”
그는 내가 워낙 어른스럽게 굴었기에 고등학생이라는 것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선배님네 집안이 많이 대단한가 보네요.”
“이런 이야기는 당사자한테 직접 들어야 하는데 말씀해도 될지 모르겠네요.”
“어차피 그런 걸 염두에 두지 않고 만난 사이라 말씀하셔도 상관없습니다.”
“하긴 그렇겠네요. 규석이네 집은 구한말 때부터 대대로 명문 집안으로 유명했습니다. 증조할아버지인 이만석 선생님은…….”
호사가 기질을 갖고 있는 박태민 대표는 이규석 선배의 집안 내력을 자세히 설명해 줬다.
이야기를 요약하면 이랬다.
선배네 아버지는 선친 때부터 내려오던 부를 활용하여 ‘한국 교과서’를 창립했고 정계에도 몸을 담아 5선을 지낸 원로 정치인이었다.
그리고 할아버지께서는 해방 직후, 초대 법무부 장관을 했던 분이셨고 남동생도 현재 여당 중진 의원으로 활동하는 중이었다.
“한국 교과서면 국내에서도 손꼽히는 출판 회사인데, 왜 굳이 따로 회사를 설립하셨을까요?”
“규석이가 옛날부터 집안일에는 관심이 없었거든요. 원래 국회 의원도 동생이 아니라 본인이 할 수 있었는데 그걸 거부했던 녀석입니다. 그리고 제가 알기로 1학년 때까지는 법학과를 다니다가 국문학과로 전과한 걸로 알고요.”
‘AJ기획이랑 TM에서 왜 선배님께 잘 보이려고 하는지 이제야 이해가 간다.’
메이저 언론사 간부 경력과 잘나가는 출판사 사장이라는 직함만으로는 거대 기업들을 움직인다는 건 다소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박 대표님의 설명을 들으니 일련의 상황들이 조금씩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이외에도 집안에 훌륭하신 분들이 여럿 더 있으셔서 정재계에 있는 사람들이라면 규석이네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지요.”
“그렇군요.”
이후에도 그는 선배님에 관한 이야기를 늘어놓았고 나는 흥미롭게 이를 경청했다.
* * *
시간은 흘러 11월 중순이 되었다.
TM엔터테인먼트를 다녀온 이후로 지연에게 가해졌던 괴롭힘은 모두 멈췄다.
학부모 간담회 이후, 동생을 만나지 못했지만, 전화상으로 들리는 지연이의 목소리가 예전처럼 밝은 것으로 보아 모든 일이 잘 풀렸음을 알 수 있었다.
‘국가 대표 선발전이 코앞인데, 션 교수님은 뭘 하시고 계신 걸까?’
개인 훈련을 하고 싶다는 핑계로 복싱 체육관에 안 나간 지 벌써 한 달이 지났다.
브루스 단장님으로부터 호흡법을 배운 것을 마지막으로 격기술 수업은 끝났기에 새로운 훈련법이 필요했다.
이런 내 상황을 알게 된 미르헨 총장님은 션 교수님과 의논을 하여 방안을 마련해 오겠다고 장담했고 난 기약 없는 연락을 묵묵히 기다리는 중이었다.
‘휴, 관장님께는 뭐라고 말씀드리는 게 좋을까? 훈련 조금씩 했었다고 거짓말을 해야 하나?’
주말을 맞아 오랜만에 체육관을 가게 된 나는 관장님께 할 말을 생각하며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