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사람들이 자꾸만 보은한다-67화 (67/122)

67. 16화 감각 회복 (1)

“진우냐?”

“네, 관장님. 어, 이리 주세요. 제가 하겠습니다.”

“됐어, 어차피 거의 다 끝나 가던 참이다.”

체육관을 들어가니 밀대로 바닥을 닦고 있는 관장님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얼른 뛰어가 청소를 도와드리려 했지만, 관장님께서는 손을 저으며 괜찮다는 제스처를 보였다.

“3주 후면 국가 대표 선발전인 건 알고 있지?”

“네, 관장님.”

“그래, 준비는 잘되고 있어?”

백성철 관장은 제자를 오랫동안 보지 못했기에 몸 상태가 어떤지 몹시 궁금했다.

“아무래도 혼자 있다 보니까 기량을 점검하기가 어렵더라고요.”

훈련을 못 했다고 하면 혼이 날 게 뻔했기에 적당한 말로 얼버무렸다.

“말하는 꼬라지 보니까 훈련을 제대로 안 한 것 같은데? 전국체전 우승이 기특해서 개인 시간을 많이 줬더니 복싱에 완전히 소홀해졌구나.”

“죄송합니다. 지금부터라도 열심히 하겠습니다.”

관장님이 눈을 부릅뜨고 추궁하자 난 솔직하게 잘못을 시인했다.

‘사정이 있었지만, 지금 상황에선 어떤 이야기를 해도 혼나기만 할 거야.’

‘복싱으로 전설이 되다’ 원고를 마무리하고 타 플랫폼에 신작을 론칭하느라 정신없는 나날을 보낸 나였다.

“후, 일단 가볍게 미트 훈련 먼저 해 보자. 저쪽 가서 스트레칭 먼저 하고 있어.”

“네, 관장님.”

난 어깨에 멘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고 거울 앞에서 몸을 풀었다.

“준비됐으면 시작하자.”

“예.”

백성철 관장님은 미트 글러브를 손에 낀 채 평소 하던 패턴들을 주문했다.

“원투 스웨이 스트레이트.”

한동안 글러브를 끼지 않아 처음엔 어색한 느낌이 있었지만, 곧 적응을 마친 나는 관장님이 주문한 대로 펀치를 뻗어 냈다.

“딱 보니까 아예 손 놓고 있었네. 진우야, 곧 있으면 시합인데 어떻게 하려고 그러냐?”

“그래도 이 정도면 감각 유지는 된 거 아닌가요?”

“나랑 완전히 반대로 생각하고 있군.”

“많이 엉망이었나 보네요…….”

“펀치 궤적이나 자세는 훌륭하지만, 실전 감각이 크게 떨어진 상태야. 후우, 시합이 얼마 안 남았는데 이걸 어떻게 하지?”

백성철 관장님은 침울해하는 내 모습은 아랑곳하지 않고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저, 관장님 말씀에 토를 다는 건 아닌데요. 막상 스파링 해 보면 조금 다르지 않을까요? 오늘은 그렇고 당장 내일부터 스파링을 계속하면…….”

“내일까지 갈 게 뭐 있어. 글러브 끼고 올 테니까 스파링할 준비 해.”

“아, 네.”

나는 선반에 놓인 헤드기어를 머리에 쓰고 스파링 준비를 했다.

‘오랫동안 체육관에 안 나와서 그런가 걱정이 많으신 것 같아. 좋은 모습 보여 드려서 안심시켜 드려야겠어,’

관장님의 우려를 종식시키고 다시 신뢰를 찾는 가장 방법은 스파링에서 실력이 녹슬지 않았음을 입증하면 될 일이었다.

안목이 뛰어나신 분이라 말을 허투루 들으면 안 됐지만, 잘할 자신이 있었기에 긴장도 크게 되지 않았다.

“준비됐어?”

“예, 관장님.”

“3분 3라운드로 진행할 거니까 최선을 다해라.”

“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차분하게 대답했다.

띵-

종소리와 함께 스파링은 시작되었다.

관장님은 양손을 길게 늘어뜨린 채 여유롭게 내 주변을 돌았다.

‘너무 방심하시는 것 같은데?’

체육관에 입문한 이래로 관장님과 총 9번의 스파링을 경험했고 오늘 것까지 하면 정확히 10번째 스파링이었다.

처음에는 가드 위에 펀치를 적중시키는 것도 어려워했지만, 스파링이 거듭될수록 관장님의 스타일에 적응했고 어설프게나마 클린 히트가 나올 때도 있었다.

물론 관장님의 전력을 끌어낸 적이 한 번도 없었기에 몇 방 맞힌 것으로 위안을 삼긴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오늘처럼 아예 노가드로 시합에 임하시는 건 처음 봤기 때문에 자존심이 상했다.

“오, 이거 속이 부글부글 끓는 모양인데?”

백성철 관장은 자신을 바라보는 제자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다는 것을 알아챘다.

“언제까지 보고만 있을 거냐? 계속 그렇게 서 있을 거면 내가 먼저 간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묵직한 공격이 안면에 들어왔다.

왼손 잽에 이은 왼손 훅은 관장님의 장기로 그동안 많이 봤던 패턴이었다.

90kg에 육박하는 사람이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경쾌한 스탭과 경량급 선수에 필적할 만한 핸드 스피드는 나를 당황시키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LV 4에 달하는 동체 시력 덕분에 그의 움직임은 훤히 내 눈에 들어왔고 머릿속으로 다음 공격에 대한 예측도 쉽게 이루어졌다.

팡-

“윽…….”

“와, 이거 생각했던 것보다 문제가 더 심각한데?”

‘뭐지? 분명히 눈에 보였는데?’

공격을 피한 다음 카운터펀치를 날릴 심산으로 백 스텝을 밟았지만, 관장님의 주먹은 이미 헤드기어에 적중한 상태였다.

“계속할래?”

“넵.”

“그래, 어차피 감 살리려면 이런 식으로라도 계속 해야지.”

제자가 다칠까 싶어 스파링을 중단하려던 관장은 남은 3주간 감각을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이 방법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고 계속 감행하기로 했다.

‘하아, 답답하다. 한 달 쉬었다고 실력이 이렇게 퇴보되나?’

실제 시합과 같은 긴장감으로 스파링에 임했지만, 이후에도 달라진 것은 없었다.

관장님의 공격은 눈에 보였지만, 적절히 대응하지 못했고 뻔한 공격을 번번히 허용하여 급기야 다운까지 되고 말았다.

“후우, 오늘은 일단 여기까지 하자.”

“네…….”

“화장실 가서 찬물로 세수라도 좀 하고 와.”

“알겠습니다.”

‘내 이럴 줄 알았어. 체전 우승했다고 너무 놓아두니까 이 꼴이 된 거잖아.’

백성철 관장은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화장실로 가는 내 뒷모습을 보며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머리는 좀 괜찮아?”

“살짝 띵하긴 한데 크게 문제는 없는 것 같아요.”

턱에 스트레이트를 맞은 탓에 아직도 골이 울리는 듯했지만, 애써 태연한 척하며 대답했다.

“네가 볼 때 오늘 스파링 어땠던 것 같아.”

“잠깐 쉬었다고 실력이 이렇게 줄을 줄 몰랐습니다. 관장님께서 평소보다 더 살살해 주셨던 것 같은데도 대응이 잘 안 되더라고요.”

“훗, 내가 봐주면서 한 걸 용케 알아차렸구나.”

“관장님 동작이 전보다 느려 보여서 눈치챘습니다. 후, 당장 오늘부터 운동 시작해서 신체 능력을 끌어올려야겠어요. 몸이 생각을 못 따라가니까 진짜 답답하네요.”

나는 패인에 대해 나름대로 분석한 것을 이야기했다.

하지만 관장님은 내 분석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영상 분석은 잘해도 자신은 잘 못 돌아보네.”

“네?”

“진우야, 아까 내가 뭐라고 그랬어.”

“그게…… 아! 실전 감각을 끌어올려야 한다고 하셨어요.”

미트 훈련 후, 관장님께서 하셨던 말을 떠올리며 대답했다.

“맞아. 지금 너에게 가장 필요한 건 실전 감각을 회복하는 거야.”

“흠, 그렇군요.”

‘눈에 보이는 공격을 못 피한 건 육체 능력이 떨어져서 그런 거 아닌가?’

관장님께서는 스파링에서 잘 못 했던 이유로 실전 감각을 말씀하셨지만, 나에게는 크게 와닿지 않았다.

“대답이 시원치 않은 거 보니까 내 말을 못 믿는 모양인데?”

“관장님 말씀은 믿지만, 머릿속에서 이해가 잘 안 돼서요.”

“좋아, 그러면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 줄게. 네가 한 달 만에 실력이 이렇게 떨어진 건 역설적으로 네가 천재라서 그런 거야.”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그의 영문 모를 소리에 나는 눈을 크게 뜨고 반문했다.

“복싱 경력이 6개월도 안 되는 사람이 전국체전에서 우승한 케이스에 대해 들어 본 적 있어?”

“저야 옛날에는 복싱에 대해 관심이 없었으니까 잘 모르죠.”

“내가 아는 바로 그런 사람은 없어. 처음 체육관에 왔을 땐, 기본기만 살짝 있는 초짜의 움직임을 보여 주던 네가 한 달 만에 전국체전 은메달리스트를 스파링에서 이겼어. 보통 사람들에게 이런 일들이 상식적으로 가능할 것 같아?”

“뭐, 드문 일이긴 할 것 같네요.”

설명을 위해 꺼낸 말이었지만, 날 극찬하는 내용이었기에 멋쩍은 기분이 들었다.

“드문 정도가 아니라. 기적이라 이야기해도 무방하지. 하지만 이런 기적에도 부작용이 있기 마련이야.”

“부작용이요?”

“너에게는 복싱이 쉽게 느껴지겠지만, 나는 기본 동작 하나를 몸에 익히기 위해 최소 한 달에서 두 달의 시간이 걸렸어. 즉, 기술을 몸에 체득하기 위해 쌓아 올린 시간의 양이 너와 차원이 다르다는 거지.”

“과연, 그렇네요.”

나는 관장님이 어떤 의도로 이야기를 꺼냈는지 알아차렸다.

“딱 보니까 내가 무슨 말 할지 눈치챈 것 같은데?”

“빠르게 쌓은 만큼 빠르게 무너진다는 말씀을 하고 싶은 거잖아요.”

“눈치 하나는 정말 귀신 같다니까?”

“저, 관장님. 질문이 있습니다.”

“응, 말해 봐.”

“쌓아 올린 게 무너진 거면 실전 감각이 아니라 기본기를 다듬는 게 더 낫지 않나요?”

습득 과정에 투입된 시간이 적었기에 실력이 떨어졌다고 판단한 나는 기본으로 다시 돌아가는 게 해답이라고 생각했다.

복싱을 포함한 모든 투기 종목의 근간은 누가 뭐래도 기본기였기 때문이다.

“아까 체육관에 도착해서 몸 풀 때 쉐도우 하지 않았어?”

“네.”

“잠깐이긴 했지만, 그 정도 폼이면 나쁜 편은 아니야.”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할 말이 없네요.”

관장님의 한마디에 내 주장은 가볍게 논파되었다.

“인터넷 영상으로 혼자 수련한 사람 중에 기본기가 잡혀 있는 자들이 없지는 않아. 하지만, 익혔던 동작을 실전에 적용하는 건 다른 문제야.”

그는 실제 시합에서 본 실력을 끄집어내는 데 실전 감각이 중요함을 강조하고 있었다.

“흠, 그럼 당장 내일부터 쉬지 않고 스파링을 해야겠네요.”

“그러고 싶긴 한데, 마땅한 파트너가 없어.”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요? 전국체전 때까지만 해도 스파링 파트너 찾기 쉬웠잖아요.”

관장님 주변 지인들 중, 코치를 하거나 체육관 운영을 하시는 분들이 적지 않은 걸 고려하면 스파링 파트너를 구하는 게 어려울 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네가 붙어야 할 선수들은 이전에 붙었던 상대들하고는 차원이 달라. 괜히 어쭙잖은 사람들하고 스파링하는 건 안 하는 것만도 못해.”

국가 대표 선발전에 참가하는 선수들은 전국체전 선수들은 명함을 못 내밀 정도로 화려했다.

전국체전 대학부, 일반부 우승자부터 세계선수권 메달리스트까지 엘리트 체육의 정점에 서 있는 선수들에게만 참여가 허락되었다.

“그래도 아예 안 하는 것보다는 낫지 않을까요?”

“아시안게임 은메달리스트도 참여하는데 아무나랑 스파링하면 쓰겠어? 굵직한 대회에서 우승 경력이 있는 네임드를 구해야 하는데, 그러려면 시간이 좀 걸릴 거야.”

“스파링 파트너를 못 구할 수도 있겠네요.”

시합이 3주밖에 안 남은 터라 재수 없으면 스파링 파트너를 아예 못 구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나랑 박 코치가 최대한 짬을 내야겠지.”

“체육관 관리는 누가 하고요?”

“평일은 좀 어렵고 주말에 몰아서 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휴우, 한시라도 빨리 감각을 올려야 하는데 미치겠네.”

관장님은 답답한지 한숨을 깊게 몰아쉬었다.

“저도 집에 가서 방법을 고민해 볼게요.”

나는 집에 돌아가는 대로 미르헨 총장님과 션 다이스 교수와 대화를 나누기로 결심했다.

개인 훈련에 도움이 되는 방안을 모색한다고 한 게 3주 전이니 지금쯤이면 해결책을 찾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진우야. 회복 다 됐어?”

“네, 지금은 괜찮아요.”

“너도 알겠지만, 우리가 시간이 없다. 기왕 이렇게 만난 거 스파링이나 더 하자.”

“예, 바로 준비할게요.”

대화를 마친 우리는 다시 글러브를 끼고 스파링을 했다.

이날 나는 관장님과 2번의 스파링을 더 하고서야 집에 돌아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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