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사람들이 자꾸만 보은한다-68화 (68/122)

68. 16화 감각 회복 (2)

스파링을 마치고 집에 돌아온 나는 방에 들어와 이세계와 소통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가동시켰다.

‘당장 호출을 해야겠어.’

화면 우측 상단의 톱니바퀴를 누르면 세이라 황녀를 비롯한 이르젠 제국 일원들의 얼굴이 쭉 떴고 이를 한 번 더 클릭하면 자동으로 호출이 되게끔 되어 있었다.

‘어? 쪽지가 와 있네?’

호출 기능을 실행시키려고 손을 움직이려던 그때, 화면 정중앙에 메시지가 뜬 걸 발견했다.

<아르마이스 님, 션 교수가 아르마이스 님의 훈련을 도와드릴 수 있는 획기적인 프로그램을 개발했다고 합니다. 그러니 메시지를 확인하시는 대로 저희에게 연락을 주시기 바랍니다.

-미르헨 총장->

‘이런 빨리 연락을 드려야겠다. 총장님께서 기다리시겠어.’

글을 쓰느라 시스템을 오랫동안 가동시키지 않았던 탓에 메시지는 무려 일주일 동안 확인이 되지 않은 상태였다.

[오, 아르마이스 님.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습니까?]

내가 호출 버튼을 누르자 미르헨 총장님은 기다렸다는 듯이 모습을 드러냈다.

“죄송합니다, 총장님. 최근에 새로운 소설을 론칭하느라 미처 메시지를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죄송하실 거 없습니다. 저희도 다 이유가 있겠거니 생각했습니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 이런 누구랑 같이 있나 보군요. 나중에 다시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그의 등 뒤로 누군가 부산하게 움직이는 것을 본 나는 황급히 화면을 종료하려 했다. 그러자 미르헨 총장은 손을 빠르게 저으며 괜찮다는 제스처를 보였다.

[경황이 없어서 미처 말씀을 못 드렸군요. 션 교수 여기로 와서 아르마이스 님께 인사를 드리세요.]

[이런, 아공간 시스템을 연결하다 보니 인사드리는 걸 깜빡했네요. 아르마이스 님, 일전에 인사드렸던 션 다이스라고 합니다. 절 기억하시겠습니까?]

션 다이스 교수는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인사했다.

“당연하지요. 교수님이 만든 아카이브 덕분에 이득을 본 게 한두 개가 아닌데 어떻게 잊겠어요.”

[하하, 아르마이스 님께 보탬이 되었다니 다행입니다. 마침 새로 개발한 프로그램을 시스템에 연결하는 작업을 마친 참인데, 한번 사용해 보시겠습니까?]

“새로운 프로그램이요?”

카산트 대륙 최고 공학자가 개발한 프로그램은 내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하고도 남았다.

[예, 아르마이스 님으로부터 개인 훈련에 도움이 될 만한 방안을 찾아보라는 지시가 떨어진 이후 총장님과 밤잠을 설치며 고민하여 만든 것입니다.]

“저 말씀 중에 죄송하지만, 저는 그저 부탁을 드린 거니까 부담은 갖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이세계의 존재들로부터 조건 없는 지원을 받는 상황에서 지시라는 단어는 어울리지 않았다.

비록 전생에 내가 큰 공을 세웠다고는 하나 수혜자들의 후손들을 부릴 명분 따위는 없다고 생각했다.

[지시라는 단어가 불편하셨으면 죄송합니다. 앞으로는 용어에 주의하겠습니다.]

눈치가 빠른 션 교수는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휴우, 아니에요. 그냥 편한 대로 하세요.”

도리어 사과를 받은 나는 이 이상 이야기해서 좋을 게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항상 느꼈지만, 이들이 나에 대해 갖는 마음은 맹목적 신념에 가까웠기에 수평적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시간이 다소 걸릴 수밖에 없었다.

[네 그럼 지금부터 새로운 프로그램을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 총장님과 저는 아르마이스 님이 현재 수련하고 계시는 복싱이라는 투기술에 어울리는 훈련 방법을 모색했고 그 결과 ‘일루션’을 개발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번에 새로 만든 프로그램의 이름인가 보네요.”

[그렇습니다. 현실과 유사한 아공간을 바탕으로 만든 프로그램이라서 이름을 일루션으로 정했습니다.]

션 다이스 교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프로그램을 실행하면 아공간이 펼쳐진다는 말씀인가요?”

[사용자가 프로그램을 켜게 되면 자동으로 가상 배경이 떠오를 거라 이용하기 어렵지 않을 겁니다. 아, 참고로 밖에 있는 사람이 볼 땐 사용자가 수면 상태에 빠진 것처럼 보일 수 있기 때문에 사용할 때 유의해 주시길 바랍니다.]

“아공간에 있을 땐 외부의 소리는 들리지 않는 건가요.”

[네, 그렇습니다.]

‘집에 아무도 없을 때나 잘 때 사용하는 게 좋겠어.’

부모님이 방에 들어오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지만,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었다.

“일루션은 어떤 식으로 작동하는 건가요?”

[네, 우선 상대의 신체 정보를 기입하고 전투 모드를 클릭하시면 자연스럽게 대전 상태로 전환하게 됩니다.]

“신체 정보라고 하면 키랑 몸무게를 임의로 설정할 수 있다는 이야긴가요.”

[맞습니다. 미르헨 총장님께서 경기 전에 상대 선수의 정보를 알 수 있다고 하셔서 해당 기능을 넣어 봤습니다.]

“대박이네요. 이 기능이라면 저에게 많은 도움이 되겠어요.”

똑같은 신체 능력을 가졌더라도 신장과 리치에 따라 구사하는 복싱 스타일이 달라지기 때문에 신체 사이즈를 설정할 수 있다는 건 나에게 큰 이점이었다.

[신장과 체중 외에도 외모에도 변화를 주는 게 가능하니까 입맛대로 캐릭터를 설정하시길 바랍니다.]

“네, 교수님.”

해당 기능들은 게임에서 많이 봤던 것들이라 크게 놀랍지는 않았다.

이후에도 션 교수는 작동법에 대해 상세히 설명했고 나는 펜으로 메모해 가며 열심히 경청했다.

“총장님, 교수님 고생 많으셨습니다. 최근에 실전 감각이 떨어져 고민이었는데 이 프로그램 덕분에 모두 해결하게 됐어요.”

[일루션 외에도 아르마이스 님께 유용한 프로그램을 개발 중이니 기대해 주시길 바랍니다.]

션 교수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일루션’은 게임 속 튜토리얼 기능과 여러 면에서 유사했지만, 몇 가지에서 차이를 보였다.

첫째는 타격감이었다. 통증이 유발되지 않는다는 것만 제외하면 현실 속 전투와 동일한 감각을 느낄 수 있게 만들어 실제로 복싱을 하는 것과 거의 차이가 없었다.

둘째는 시간이었다.

아공간의 시간은 현실 속 시간보다 느리게 흘렀기 때문에 시간 부족 문제도 해결할 수 있게 되었다.

교수님 말씀에 따르면 아공간에서의 1시간이 현실의 30분이라고 하니 적지 않은 시간을 확보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교수님, 이제 슬슬 아르마이스 님께 말씀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네? 어떤 거를…… 아, 맞다. 죄송합니다. 지금 바로 알려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미르헨 총장이 나지막이 말하자 들떠 있던 션 교수는 아차 하는 얼굴로 허둥지둥대었다.

[저, 아르마이스 님. 제가 미처 알려 드리지 못 한 게 있습니다.]

“네, 말씀하세요.”

[개발 시간이 워낙 짧았던 탓에 캐릭터에 전투 능력까지는 부여하지 못했습니다.]

“…….”

설명을 들은 나는 순간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전투 능력이 없는 상대와 대련한다는 건 아무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문제를 해결했다는 생각에 홀가분해졌던 마음은 다시 착잡해졌고 이는 표정으로 드러나 버렸다.

[죄, 죄송합니다. 아르마이스 님. 처음부터 말씀을 드렸어야 했는데, 깜빡하고 말았습니다.]

내 얼굴이 굳어진 것을 본 션 교수는 미안한 마음에 말을 더듬기까지 했다. 그러자 미르헨 총장은 당황한 그를 대신하여 설명에 나섰다.

[교수님, 제가 설명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네, 총장님.]

[아르마이스 님, 일루션이 미완의 프로그램인 건 사실이나 아예 사용을 못 하는 건 아닙니다.]

“무슨 방법이라도 있는 겁니까?”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해결책을 찾아낸 미르헨 총장이었기에 일말의 희망을 가져 보기로 했다.

[일루션에는 스캔 기능이 있어서 캐릭터에 능력을 넣는 게 가능합니다.]

“자세히 말씀해 주실 수 있으세요.”

[물론입니다. 아르마이스 님이 스캔 기능을 실행시키면 스캔되는 대상의 동작과 능력을 측정한 다음 이를 캐릭터로 구현하는 게 가능해집니다.]

“후, 다행이네요. 그런 방식이라면 캐릭터에 전투 능력을 넣는 건 일도 아닐 테니까요.”

상대 선수의 움직임에 관한 정보를 캐릭터에 넣어 주면 문제가 해결될 거라고 생각한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캐릭터에 정보를 넣는 게 그리 쉬운 건 아닙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정보를 입력하기 위해서는 스캔이 선행되어야 하는데, 이 말은 특정 인물이 아공간에 반드시 접속해야 함을 의미합니다.]

“그렇군요…….”

이곳에 사는 사람에게 카산트 대륙의 프로그램을 보여 주는 건 리스크가 너무 컸기 때문에 사실상 활용하기 어려웠다.

[저는 이르젠 제국의 기사들을 불러 접속을 시킨 다음 스캔을 뜨는 방향을 생각해 봤습니다.]

“저도 막 그 방법을 말씀드리려던 참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실천을 해 보셨습니까?”

[이런 말씀 드려서 송구하지만, 이곳의 기사들과 복서들의 실력 차이가 너무 커서 스캔을 떠봤자 활용하기 어렵다는 결론이 나오더군요.]

“흠, 걱정했던 부분을 그대로 말씀하시네요.”

나의 지능 스탯은 LV 5에 근접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안을 보는 힘이 훨씬 발전된 상태였다.

따라서 그가 무슨 말을 할지 전보다 쉽게 예측이 되었다.

[하지만,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닙니다.]

“좋은 방법이라도 있는 겁니까?”

[훗, 제가 해결책도 없이 이야기를 꺼낼 정도로 어리석은 사람은 아닙니다.]

나는 눈을 반짝이며 총장님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아르마이스 님이 사는 세상은 인터넷이라는 네트워크망 덕분에 정보 공유가 굉장히 쉬운 편입니다. 이 말은 상대 선수에 관한 영상 자료를 손쉽게 입수할 수 있다는 말이죠.]

“맞는 말씀이시긴 한데, 영상 자료로는 직접 스캔이 불가능하잖아요.”

[그건 아르마이스 님이 직접 익혀서 하시면 해결될 문제 아니겠습니까?]

“역시, 총장님이십니다. 조금 전까지 속이 엄청 답답했는데, 그 한마디에 속이 뻥 뚫리는 것 같네요.”

미르헨 총장이 여느 때처럼 혜안을 내놓자 난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이 아이디어를 활용하는 법은 굳이 설명드리지 않아도 되겠죠?]

“예, 영상 속 선수의 움직임을 그대로 구현해서 스캔을 뜨면 되잖아요.”

[맞습니다. 그럼 이 방법의 맹점은 뭘까요?]

“제 실력보다 뛰어난 상대에게는 효과가 없다는 점이겠죠.”

영상을 보고 상대 선수의 움직임을 따라 한다 해도 어디까지나 내 능력 범위 안에서만 구현이 가능했기 때문에 나보다 실력이 뛰어난 선수에 대해서는 대비하기 어려웠다.

[훗, 그렇습니다. 따라서 상대 선수의 역량을 먼저 확인한 뒤에 활용 방안을 고민하시는 편이 여러모로 좋을 겁니다.]

그는 자신의 말을 금방 알아듣는 내 모습에 흐뭇해하며 말했다.

이후에도 나와 총장님은 프로그램에 대해 간단히 이야기를 나누었고 잠시 후, 모든 대화가 마무리되었다.

“조언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는 뭘 해야 할지 머릿속에 계획이 서네요.”

[도움이 되었다니 정말 다행입니다.]

“교수님, 프로그램 개발하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덕분에 시합을 잘 치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다음에는 어떤 하자도 없는 완벽한 프로그램을 개발하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애당초 기간도 너무 짧았고 무리한 요구였으니까 너무 신경 쓰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전 이만 들어가 볼게요. 모두 안녕히 계세요.”

나는 결의에 찬 표정을 짓고 있는 션 교수님을 달래 드린 후 화면을 종료했다.

‘내일 당장 관장님을 만나야겠어.’

돌파구를 찾았으니 이제는 나아갈 때였다.

난 주머니에 있는 핸드폰을 꺼낸 다음 관장님께 전화를 드렸다.

“관장님, 혹시 통화 가능하세요, 다름이 아니라…….”

참전하는 선수들 대부분은 최소 전국 대회 우승자들이라 인터넷에 영상 자료가 있을 테지만, 관장님이 입수하는 자료의 퀄리티를 따라갈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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