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사람들이 자꾸만 보은한다-69화 (69/122)

69. 16화 감각 회복 (3)

‘관장님은 도착하셨으려나?’

일요일 오후 6시, 나는 영상 자료를 받기 위해 정선 체육관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아직 이른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해는 지고 있었고 나무에 붙어 있던 단풍잎은 모두 떨어져 겨울이 가까워졌음을 알려 주고 있었다.

“관장님 저 왔어요.”

“사무실로 들어와라.”

백성철 관장님은 일찌감치 체육관에 도착하여 지인들에게 받은 자료를 검토하고 있었다.

“영상 보고 계셨어요?”

“응, 오래된 자료는 재생이 안 되는 것들도 있거든.”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 관장님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고 난 근처에 있는 의자를 끌어다가 그의 옆에 앉았다.

“비디오 테이프로 된 건 없나 보네요.”

“은퇴한 선수나 레전드들의 자료나 비디오로 보지 요즘은 다 핸드폰으로 촬영해서 비디오 형태의 자료는 없다고 봐야 해. 아무튼 이것들 구하느라 고생 좀 했다. 각 선수별로 최근 2년 치 영상을 뽑아 놨으니까 잘 활용해라.”

국가 대표 선발전은 나를 포함해서 총 4명의 선수가 치렀기 때문에 3명분의 자료만 확인하면 됐다.

“이런 자료들은 어떻게 구하시는 거예요?”

“얘네들 정도 되면 자료를 수집하려는 주변 경쟁자들이 많은 법이야.”

“그렇군요.”

“방금 자료들 싹 확인해 봤는데 하자 있는 건 없는 것 같으니까 네 메일에 다 보내 줄게.”

“감사합니다, 관장님.”

“그건 그렇고 나한테 따로 할 말이 있다며?”

자료 업로드를 마친 관장님은 대화를 하기 위해 테이블로 자리를 옮겼다.

“네, 선발전 준비 관련해서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잘됐네. 마침 나도 너한테 훈련 스케줄에 대해 이야기할 참이었거든.”

백성철 관장은 서랍을 연 뒤 안에 있던 스케줄 표를 테이블 위로 꺼냈다.

‘이런 벌써 훈련 계획을 다 짜셨구나. 어떻게 하면 좋을까.’

나는 주중 저녁에는 ‘일루션’을 활용한 가상 스파링 훈련을 계획하고 있었기 때문에 난감한 기분이 들었다.

“새벽에는 예전에 했던 것처럼 체력 훈련 위주로 진행할 거야. 실내랑 야외 훈련을 번갈아 가면서 할 건데, 이미 해 본 것들이니까 어떻게 할지 굳이 설명 안 해도 되겠지?”

“예.”

“진우야.”

“네?”

“너 무슨 일 있어? 대답이 왜 이렇게 맥아리가 없어?”

백성철 관장은 걱정스러운 눈길로 쳐다보며 물었다.

“아, 그게 아까 드릴 말씀이 있다고 했잖아요.”

“일단 내 이야기 먼저 끝내고 들으면 안 될까?”

“알겠습니다.”

“휴우, 뭐 중요한 거야? 뭔데 말해 봐.”

시원치 않은 답변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그는 제자의 이야기를 먼저 들어 보기로 했다.

“해야 할 일이 좀 생겨서 주중에 시간을 내기가 어려울 것 같아요.”

“뭐라고?”

“사정이 있어서 말씀드릴 수 없지만, 평일에는 개인 훈련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대신 새벽 훈련은 참석하는 방향으로 할게요.”

“진우야, 네가 아무리 엄청난 재능을 가졌다고 해도 대회에 임하는 자세가 너무 불량하다는 생각은 안 드냐? 그리고 훈련에 관한 사항은 코치인 내가 정하는 게 옳지, 지금 너처럼 통보식으로 정하는 건 이치에 맞지 않아.”

평소 장난기 어린 언행으로 허물없는 모습을 보였던 관장님은 이전에 보여 주지 않았던 엄한 태도로 날 꾸짖었다.

“딱 1주일만 시간을 주세요.”

“대회까지 20일 정도 남았는데 훈련을 1주일 더 미루자고?”

“평일에 개인 훈련을 하는 대신 다음 주 토요일에 관장님께 테스트를 받을게요.”

“그래서?”

그는 팔짱을 낀 채 제자를 보며 되물었다.

“관장님께서 보셨을 때 실력이 늘었는지 안 늘었는지 판단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만약에 불합격이면 어떻게 할 건데?”

“그렇게 되면 부모님과 선생님께 말씀을 드려서 학교 수업을 모두 빼고 훈련에 집중하겠습니다.”

“그게 가능해?”

“시도는 안 해 봤지만, 어차피 정규 수업 일수만 채우면 되는 거라서요. 그리고 국가 대표에 선발되면 학교 입장에서도 큰 명예라 진지하게 검토해 주실 거예요.”

“쉽게 이야기해서 가능성만 있지 확실하지는 않다는 말이구나.”

“반드시 되게 하겠습니다.”

관장님께서 미심쩍은 눈길을 보내며 말씀하셨지만, 나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결의에 찬 얼굴로 의지를 보였다.

“흠, 자신감 하나는 보기 좋네.”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시면 제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입증하겠습니다.”

‘일루션을 활용하면 주말 테스트는 무난히 통과할 수 있을 거야.’

션 다이스 교수와 미르헨 총장님이 개발한 일루션을 이용하면 실력이 빠르게 오를 거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거였다.

하지만 이 내막을 모르는 관장님은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거짓이냐 아니냐가 문제가 아니라 무슨 방법으로 일주일 만에 실력을 끌어올린다는 거야? 네 생각에 효과가 있어 보여도 전문가 눈에는 아닐 수도 있다는 걸 왜 모르냐?”

백성철 관장은 제자가 진실을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일주일을 허송세월할 수 있다는 생각에 섣불리 제안을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관장님이 보내 주신 영상을 분석하고 그걸 토대로 전략을 짤 생각입니다.”

“전략은 내가 짜 줘도 되잖아.”

“단순 분석만 하는 거면 따로 시간을 낼 필요가 없겠지요. 상대에 대한 대응 방안을 몸으로 체화시켜서 돌아오겠습니다.”

“휴우, 난 모르겠다. 네가 알아서 해라.”

이 이상의 대화를 해봤자 소용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관장은 한숨을 크게 내쉬고 사무실로 들어갔다.

‘죄송합니다, 관장님.’

나는 문을 열고 들어가는 관장님을 향해 인사를 한 뒤 체육관을 빠져나왔다.

* * *

밤 10시.

부모님은 내일 출근을 위해 일찌감치 안방에 들어가 휴식을 취하고 계신다.

집에 돌아와서 간단하게 끼니를 때운 후 방에 들어와 컴퓨터를 켰다.

‘이건가?’

포털에 접속하여 메일함을 열어 보니 관장님께서 보내 주신 메일이 가장 상단에 떠 있었다.

나는 주저 없이 이를 클릭하고 파일들을 다운받았다.

‘전국체전 때 나온 선수들하고는 아예 비교가 안 되는데?’

메일에는 관장님께서 참고하라고 보내 준 선수들의 약력이 적혀 있었는데 고등부 체전에 참석한 사람들하고는 비교 자체가 성립되지 않았다.

고등학교 때 전국체전 우승한 것은 기본이고 거기에 추가하여 대학부 전국체전과 일반부 전국체전 우승까지 추가한 선수도 있었다.

올림픽 때 아쉽게 4위로 그친 선수, 지난 아시안 게임 은메달리스트 등 선수 면면이 너무 화려하여 불안감을 느낄 정도였다.

‘일단 영상을 보고 판단하자. 미리 쫄아서 좋을 건 하나도 없어.’

챔피언이 되기로 한 사람이 상대의 이름값에 주눅 드는 것만큼 한심한 일은 없을 것이다.

나는 머리를 흔들며 잡념을 털어 낸 뒤 파일을 실행했다.

‘확실히 격이 다르긴 하다.’

고등부 전국체전을 준비했을 때도 상대 선수의 영상을 분석한 적이 있지만, 실력 면에서 크게 앞섰기에 선수의 습관을 찾는 걸 중심으로 관찰을 했었다.

이렇게 말하면 자만하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겠지만, 이 모든 건 KO율을 높이기 위한 포석이었다.

보통의 아마추어 경기에서는 보호구를 착용하기에 KO가 나오는 경우가 드물었다.

하지만 상대의 습관을 훤히 아는 상태라면 움직임을 쉽게 예측할 수 있었기에 KO를 만드는 게 마냥 어려운 건 아니었다.

‘흠, 이 선수는 풋워크가 정말 좋네. 스피드랑 순발력은 나도 자신 있는데 같이 아웃복싱으로 할까? 아니야. 잽, 바디를 섞는 방식으로 몸통에 데미지를 줘서 기동력을 없애는 게 더 나을지도 몰라.’

화려한 경기를 만들고 싶은 마음으로 자료를 분석했던 과거와 달리 지금의 나는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하게 영상을 시청하고 있었다.

영상 속 선수들의 움직임은 세계 랭커들과도 크게 차이가 없어 보였다.

비록 복싱 인기가 많이 떨어졌다고 하나 우리나라에서 탑을 달리는 선수들의 실력은 결코 무시받을 수준이 아니었다.

‘후우, 이제야 하나 끝났네. 그럼 슬슬 캐릭터를 만들어 볼까?’

벽에 걸린 시계는 어느새 새벽 2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10시부터 2시까지 4시간 동안 영상을 시청한 끝에 한 선수에 대한 분석을 마칠 수 있었다.

나는 컴퓨터를 종료한 뒤, 침대에 누워 일루션을 실행시키려 했다.

‘응, 뭐지?’

침대에 누워 프로그램을 실행시켜려던 그때, 미션 생성을 알리는 화면이 눈앞에 떠올랐다.

<아르마이스의 의지가 발동됩니다.>

<미션이 생성되었습니다.>

<목표를 설정합니다.>

<보상이 설정됩니다.>

<목표: 세 선수에 대한 캐릭터를 생성하고 스파링을 각각 50번씩 수행하십시오.>

<보상: 복싱 관련 스킬 경험치 +50%, 통찰력 경험치 +50%>

‘오 이게 웬 떡이야?’

어차피 해야 할 일인데, 보상까지 받을 수 있게 됐으니 나로서는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스탯 레벨이 오르니까 보상이 좀 짜네.’

스탯 레벨 4 이상부터는 한 번의 미션으로 레벨이 오르는 경우는 거의 없는 것 같았다.

나는 화면을 끈 뒤 곧바로 일루션을 실행했다.

‘윽, 뭐야.’

시스템을 가동하자 번쩍하는 섬광이 발생했다.

‘설명은 들었지만 진짜 신기하다.’

섬광이 가시고 시야가 확보되자 이전에 보지 못했던 이질적 풍경이 내 눈에 들어왔다

난생처음 보는 꽃들과 나무, 그리고 저 멀리 보이는 은빛을 띠는 산까지 모든 게 나에게는 새로운 것들이었다.

‘여긴 어디야?’

<일루션 시스템에 입장하신 걸 환영합니다. 현재 아르마이스 님께서는 카산트 대륙 전체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명산인 실버마운틴을 보고 계십니다.>

“헐, 지금 내가 카산트 대륙의 풍경을 보고 있는 거야?”

현재 난 아공간에 있는 상태라 생각으로 의사소통을 할 필요는 없었다.

<그렇습니다. 이 외에도 카산트 대륙의 여러 절경들이 저장되어 있으니 원하시면 언제든지 말씀하시길 바랍니다.>

“교수님께서 신경을 많이 쓰셨나 보네. 그것보다 캐릭터 생성을 어떻게 하는지 좀 알려 줘.”

<캐릭터를 생성하도록 하겠습니다.>

<캐릭터의 기본값을 설정해 주세요.>

시스템이 말하는 기본값은 신체적 특징을 일컫는 것이었다.

나는 분석을 마친 선수의 키와 리치를 기입한 후, 머리 색깔과 스타일, 피부 톤 등을 조정하여 최대한 비슷한 외모의 캐릭터를 생성했다.

<다음으로 스캔 기능을 작동하겠습니다.>

캐릭터 생성이 완료되자 커다란 연무장이 눈앞에 떠올랐다.

<사용자께서는 연무장으로 올라와 주시길 바랍니다. 스캔은 연무장에 발을 딛는 그 순간부터 시작됩니다.>

‘연무장에서 스캔이 이루어지나 보네.’

나는 목소리의 지시에 따라 무대에 올라간 다음 상대 선수의 복싱 스타일을 그대로 구현했다.

‘잽을 날리며 견제하다가 카운터성 공격을 많이 날렸던 것 같아.’

첫 분석 대상이었던 정선호 선수는 아시안 게임 은메달리스트로 전형적인 아웃 복서였다.

잽 견제로 포인트를 쌓으며 재미를 보다가 상대가 치고 들어오면 카운터펀치를 날리고 순식간에 빠져나가는 식으로 경기를 풀어 나갔다.

‘같은 아웃 복서를 만났을 때는 스피드를 더 올렸었지.’

나는 관장님이 보내 준 자료들을 떠올리며 정선호 선수의 세세한 움직임까지 완벽하게 따라 하려고 노력했다.

“테스트 모드 실행시켜 줘.”

<테스트 모드를 실행하겠습니다.>

테스트 모드는 지금까지 내가 보여 줬던 모션들을 확인할 수 있게 도와주는 기능이었다.

잠시 후, 연무장 위에 아까 만든 캐릭터가 나타났다.

‘흐흠, 아직 많이 부족한데?’

정선호와 똑 닮은 캐릭터는 내가 했던 동작들을 바탕으로 복싱을 선보였다.

영상 속 선수의 복싱 동작은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던 반면에 캐릭터의 움직임은 여러모로 어색한 감이 있었다.

“테스트 모드 종료하고 스캔을 다시 켜 줘.”

<테스트 모드를 종료하고 스캔 기능을 작동하겠습니다.>

‘아까 보니까 백 스텝 밟는 과정이 굉장히 어색했던 것 같아.’

스캔 기능이 켜진 것을 확인한 나는 방금 발견한 미흡한 부분들을 보완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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