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사람들이 자꾸만 보은한다-70화 (70/122)

70. 16화 감각 회복 (4)

어느 저명한 연구 단체에서 스포츠 종목별로 난이도를 비교 분석한 적이 있었다.

많은 사람들은 국가 대표들이 모여 있는 선수촌에서도 힘들다고 정평이 나 있는 레슬링이나 유도가 1위를 차지할 줄 알았지만, 뜻밖에도 복싱이 가장 힘든 운동으로 선정되었다.

포털에서 뉴스를 봤을 때는 설마 그 정도일까 생각했지만, 오늘 나는 복싱이 얼마나 힘든 운동인지 여실히 느끼고 있었다.

‘후우, 이거 생각보다 엄청 힘들잖아?’

상대 선수의 역량을 확인한 뒤 동작을 모방하는 작업은 상상 이상으로 힘든 작업이었다.

방어하거나 공격 모션을 취하는 방식부터 시합 중에 드러나는 사소한 습관까지 상세히 체크를 해야 스파링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캐릭터를 생성할 수 있었다.

나는 상대의 움직임을 머릿속에 집어넣고 분석을 마친 뒤 한 동작 한 동작 정성스럽게 따라 했다.

‘내가 너무 쉽게 생각했나 봐. 시간이 이렇게 오래 걸릴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어.’

정선호 선수에 대한 작업을 아직 반밖에 하지 못했는데, 현실 속 시간은 어느새 새벽 4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아공간의 시간이 바깥 시간보다 천천히 흐른다는 것을 감안하면 투자한 시간이 적지 않았지만, 해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남아 있었다.

션 교수님으로부터 ‘일루션’의 존재를 듣고 처음 계획을 세울 때만 해도 스파링 파트너 문제를 쉽게 해결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경기 영상에서 나오는 선수의 동작을 모방한다는 것은 스탭과 핸드 스피드부터 타격의 힘까지 그대로 구현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고 이는 실제 경기에 임하는 수준의 집중력을 요구했다.

‘후우, 일단 학교는 가야 하니까 잠깐이라도 눈을 붙이자.’

브루스 단장님으로부터 배운 호흡법을 사용하면 밤을 새고 등교를 해도 크게 문제 될 건 없었지만, 작업을 할 때 생각보다 많은 심력이 소모돼서 컨디션을 조절하는 편이 여러모로 좋았다.

‘일루션’을 종료하고 아공간을 빠져나온 나는 방바닥에 좌정하고 호흡에 집중했다.

끊임없이 분석하고 검토하느라 복잡한 머릿속을 깨끗이 비우고 잠자리에 들어야 피로 회복에 훨씬 유리했기 때문이다.

‘한 2시간은 잘 수 있겠네.’

20분의 명상을 마친 나는 침대에 눕자마자 골아떨어져 버렸다.

* * *

“진우야, 몸은 어떻게 좀 괜찮아?”

“어? 아, 그냥 집에 가서 쉬면 괜찮아질 것 같아.”

학교를 마치고 하교하는 길, 재웅이는 걱정스러운 눈길로 날 쳐다보고 있었다.

이날 오후는 클럽 활동 시간이었고 부원들은 여느 때처럼 김지아 선배의 지시에 따라 글을 썼다.

“선배님, 저 몸살 기운이 좀 있는 것 같은데 쉬면 안 될까요?”

“어, 그래. 많이 아프다 싶으면 양호실에 가서 쉬어도 되니까 네가 알아서 해.”

“아니에요, 엎드려서 좀 쉬면 괜찮아 질 것 같아요.”

평소에 성실한 모습을 보여 준 덕분이었을까, 선배는 내 말을 한 치도 의심하지 않았다.

이후, 나는 몸이 아프다는 것을 핑계로 책상에 내내 엎드려만 있었는데 이는 사람들의 눈을 속이고 아공간에 접속하기 위해서였다.

일루션이 실행되면 사용자의 의식은 수면과 유사한 상태로 접어들기 때문에 외부의 소리와 자극에 둔감해졌다.

따라서 웬만한 자극이나 소음으로는 미동도 하지 않았기에 옆에 앉아 있던 재웅이 입장에선 걱정이 들 수밖에 없었다.

“활동 끝난 지 한참 지났는데도 계속 엎드려 있길래 큰일이라도 난 줄 알았어.”

“어젯밤에 잠을 설쳐서 그런가 소리가 하나도 안 들리더라고.”

재웅이가 계속 신경을 써 주긴 했지만, 나로서는 적절한 거짓말로 그의 마음을 안심시키는 것 외에는 딱히 할 말이 없었다.

“들어가서 푹 쉬어.”

“오케이, 내일 보자.”

나는 아파트 근처까지 함께 와 준 재웅이에게 작별 인사를 한 후 집으로 들어왔다.

‘원고를 많이 써 둬서 다행이야.’

10월 초에 전국체전이 끝나고 신작을 론칭하기 위해 하루의 대부분을 글을 쓰는 데 소비했다.

그동안 부지런히 미션을 수행한 덕분에 글과 관련된 스탯 대부분은 레벨 5 이상을 찍었고 소설 쓰는 속도는 비약적으로 상승했다.

‘복싱으로 전설이 되다’ 원고를 일찌감치 마무리한 나는 신작과 ‘천마회귀’ 원고 작업에 박차를 가했고 그 결과 두 달 가까이 글을 쓰지 않아도 무리가 없는 수준으로 글을 비축할 수 있었다.

‘일루션을 실행시켜 줘.’

<일루션 시스템이 가동됩니다.>

<아공간 접속에 성공하였습니다.>

“휴, 슬슬 시작해 볼까?”

아공간에 접속한 나는 스캔 기능을 켠 뒤 정선호 선수의 남은 동작들을 구현하는 데 집중했다.

‘이제 겨우 한 명 끝냈네.’

바깥 시간으로 1시간, 아공간 기준으로 2시간이 지나서야 정선호 선수에 대한 작업을 마칠 수 있었다.

복싱의 기본 동작은 그 가짓수가 많지 않아 모션을 따라 하는 게 어렵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막상 작업에 들어가니 착각이었음을 금방 알 수 있었다.

같은 잽과 훅도 구사하는 사람마다 각도, 스피드, 타이밍이 모두 달랐고 상대 선수의 스타일에 따라서 대응 방식이 달라질 수 있는 부분이 발생하기 때문에 기입해야 하는 동작들이 예상보다 훨씬 많았다.

복싱의 심오함을 새삼 느낀 나는 잠시 휴식을 취하다가 정선호와 똑 닮은 캐릭터를 무대 위에 생성했다. 그리고 스캔 작업으로 입력된 동작들을 구현하도록 지시했다.

‘흐음, 이 정도면 그럭저럭 쓸 만하겠어.’

나는 스파링을 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테스트 모드를 가동했다.

캐릭터에는 이름을 정할 수 있는 기능이 있었는데, 난 상대 선수의 이름인 정선호를 그대로 사용했다.

정선호로 명명된 캐릭터가 테스트 모드에서 보여 준 움직임은 영상 자료의 그것과 차이가 조금 있긴 했지만, 스파링 상대로는 부족함이 없어 보였다.

“대전 모드 실행해 줘.”

<대전 모드를 가동하겠습니다.>

내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시스템은 지시를 이행했다.

무대 중앙에 정선호의 형상을 한 가상 인물이 스텝을 밟고 있었는데 트렁크만 입혀 놓으면 실제 복싱 선수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의 풋워크를 선보이고 있었다.

<시간을 설정하시겠습니까?>

“3분 6라운드로 진행해 줘.”

<알겠습니다.>

‘일루션’은 대답을 한 뒤 허공에 바 모양의 타이머를 띄웠다.

스파링의 형식에 딱히 제한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백성철 관장님의 지휘 아래 스파링이 진행될 때 통상적으로 3분 6라운드 룰로 진행되는 경우가 많았기에 이 방식을 선택했다.

그리고 미션 수행을 위해서라도 스파링 형식을 정할 필요가 있었기에 겸사겸사 3분 6라운드로 정했다.

<대전을 시작하겠습니다. 사용자께서 설정하신 대로 각 라운드당 시간은 3분이고 휴식 시간은 30초를 주도록 하겠습니다.>

“알겠어.”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을 한 뒤 천천히 스텝을 밟았다.

그러자 반대쪽에 서 있는 캐릭터도 가드를 올린 채 서서히 나에게 다가왔다.

파앙!-

가상의 정선호는 시합을 개시될 때 가장 많이 쓰는 패턴인 왼손 더블 잽으로 포문을 열었다.

‘와, 타격감이 장난이 아닌데? 카산트 대륙의 최고 공학자라는 칭호가 거저 얻어진 건 아니었구나.’

상대의 공격이 눈에 훤히 보였지만, ‘일루션’이 제대로 작동하는지 알기 위해 가드 위로 펀치를 느껴 보았다.

션 교수님은 타격이 적중될 때 현실과 같은 고통은 유발되진 않으나 밀림이나 진동과 같은 타격감은 최대한 살렸다고 말하셨는데, 당시에는 그게 가능할까 의심이 들었다.

아무리 카산트 대륙의 최고 공학자라 해도 가상의 인물에게 타격감을 부여하는 게 비현실적으로 들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막상 몸으로 체감을 하니 그의 말이 거짓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땡-

<1라운드가 종료되었습니다. 30초 동안 휴식을 취한 후 경기를 재개하도록 하겠습니다.>

라운드 별로 종소리가 들리게 사운드 설정을 해 놓은 덕분에 실제 스파링에 임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션 교수님이랑 미르헨 총장님께 감사 인사를 드려야겠는데? 이거라면 예전에 했던 스파링과 비교도 안 되는 효과를 볼 수 있겠어.’

딱 1라운드만 진행한 것뿐이라 섣부른 판단일 수도 있었으나 예전에 했던 스파링들보다 훨씬 낫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백성철 관장님께서는 스파링 파트너를 선정할 때 스타일, 체격, 실력과 같은 요소를 기준으로 맞붙을 상대와 가장 유사한 자가 있는지를 알아보셨다.

이와 같은 기준으로 보았을 때 현재 내가 상대하고 있는 정선호 형상의 캐릭터는 스파링 파트너로서 최고라고 할 수 있었다.

땡-

종소리와 함께 2라운드가 시작되었다.

‘스캔을 하는 것만으로도 시합에 큰 도움이 되겠어.’

눈앞의 상대는 현란한 아웃복싱을 구사하며 나를 공격 범위 안으로 끌어내려고 무진장 애를 썼다.

하지만 그의 모든 움직임은 이미 내 머릿속에 있었기 때문에 나에게는 큰 위협이 되지 않았다.

기존에는 영상 분석만으로 패턴과 습관을 파악했다면 지금은 동작을 모방하는 과정까지 추가하여 상대 선수에 관한 정보가 더 뚜렷하게 각인된 상태였다.

따라서 캐릭터가 다양한 페이크와 빠른 풋워크로 내 눈을 현혹하려 노력해도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었다.

퍼억-

스텝을 밟으며 견제 잽을 날리던 캐릭터는 내가 단숨에 거리를 좁힌 후 스트레이트를 날리자 얼굴이 뒤로 젖혀졌다.

‘오, 이러니까 꼭 게임 같잖아?’

나는 캐릭터 머리 위에 생성된 기다란 HP 바를 보고 감탄했다.

‘일루션’은 충격이 발생할 때마다 HP가 얼마나 깎였는지 실시간으로 알려 주었고 피가 조금밖에 안 남았을 때는 그로기 상태나 다운이 발생할 수 있게 설정되어 있었다.

“후우, 오랜만에 해서 그런가 좀 힘드네.”

3분 6라운드의 스파링을 마친 나는 무대 아래에 배치된 벤치에서 휴식을 취했다.

‘이르젠 제국의 기술력이 좋다는 건 들었지만, 이게 말이 되나?’

내 얼굴에는 격렬한 운동을 한 사람마냥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물론, 복싱 스파링이 다른 운동과 비교해도 체력 소모가 극심한 활동인 건 분명했지만, 내가 있는 이곳은 현실이 아닌 가상 공간이었다.

하지만, 내가 느끼는 피로감은 힘든 운동을 마쳤을 때의 그것과 차이가 전혀 없었다.

<아르마이스의 의지가 발동되었습니다.>

<미션 현황을 알려 드리겠습니다.>

<정선호. 1/50>

시스템은 정선호와의 스파링이 49번 남았음을 알려 주었다.

“대전 모드 실행시켜 줘.”

정선호 외에 남은 두 명의 선수에 대한 작업을 진행하려면 시간을 아낄 필요가 있었다.

나는 10분 정도만 휴식을 취한 후 자리에서 일어나 무대 위로 올라갔다.

<대전을 시작하겠습니다. 사용자께서 설정하신 대로…….>

“자잘한 설명은 스킵해 줘.”

<알겠습니다. 그럼 바로 선수를 입장시키겠습니다.>

일루션이 대답을 함과 동시에 무대 중앙에는 캐릭터가 생성되었고 나는 스파링 개시를 알리는 종소리를 차분히 기다렸다.

* * *

시간은 흘러 어느새 토요일이 되었다.

‘헉, 이게 얼마야…….’

스마트폰으로 계좌를 확인한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10월 수입에 대한 정산은 어제 이루어졌지만, 가상 스파링 작업을 하느라 미처 확인을 못 한 상태였다.

“진우야, 왔으면 인사를 해야지 문 앞에서 뭐 하고 있어?”

“아, 죄송합니다. 잠깐 확인할 게 있어서요.”

화면에 찍힌 엄청난 액수에 넋이 나가 있던 나는 백성철 관장님의 호령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준비는 잘했어?”

“말보다는 직접 보여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오늘은 약속대로 관장님과 스파링이 있는 날이었다.

“해 봤는데 결과가 시원치 않으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고 있지?”

“만약에 테스트를 통과 못 하면 시합 때까지 학교 수업을 모두 빼기로 했잖아요.”

“하여간 대답 하나는 잘해요. 가서 몸 좀 풀고 있어.”

“네.”

나는 대답을 한 후 거울 앞에 서서 스트레칭을 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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