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 16화 감각 회복 (5)
“아직 멀었냐?”
“거의 다 했어요.”
일찌감치 준비를 마친 백성철 관장님은 붕대를 감고 있는 날 보며 채근했다.
“봐 봐. 마음만 먹으면 금방 하잖아.”
“훗, 그러게요. 관장님께서 옆에서 지켜보시니까 손이 더 빨리 움직이는 것 같아요.”
나는 씽긋 웃으며 관장님 말에 호응했다.
“진우야.”
“네?”
“개인 훈련 어떻게 했는지 물어보면 알려 줄 거냐?”
그는 약속대로 스파링에 임하긴 했지만, 변변한 스파링 파트너도 없이 혼자 실전 감각을 올리겠다 장담한 제자가 영 못 미더웠다.
“딱히 특별한 게 없어서 들어도 시시하기만 할걸요.”
“뭔데 말해 봐.”
“관장님께서 보내 주신 영상 분석하고 이미지 트레이닝을 했습니다.”
“그리고?”
백성철 관장은 제아무리 개성과 고집이 강한 제자라 해도 5일이라는 시간을 이미지 트레이닝에만 할애할 정도의 바보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흠, 또 뭐가 있을까? 아, 화요일부터 관장님이 진행하신 새벽 훈련도 소화했잖아요.”
“…….”
“관장님, 일단 스파링을 해 보고 판단을 하는 건 어떨까요?”
나는 입을 떡 벌린 채 황당해하는 관장님을 보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후, 그래. 일단 해 보고 이야기를 나누든가 하자.”
그는 한숨을 깊게 내쉬며 수긍하는 자세를 취했지만, 속으로는 크게 실망한 상태였다.
중학교 1학년 때 복싱에 입문한 이래로 재능이 있다고 평가받는 사람들을 숱하게 보았다.
그리고 본인도 당대에 유명한 지도자들로부터 챔피언의 재목이라는 소리를 수없이 들었기에 천부적인 재능을 갖고 태어나게 해 준 하늘과 부모님께 감사한 마음으로 살았다.
하지만, 지난 6월에 들어온 제자를 만난 이후 자신이 천재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을 아득히 뛰어넘는 인재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게다가 성실한 훈련 태도와 좋은 인성까지 갖췄기에 세계 챔피언을 노릴 재목이라고 생각했다.
‘후우, 오랜만에 제대로 된 녀석이 들어왔다고 생각했는데…….’
백성철 관장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스파링 개시를 기다리는 나를 쳐다봤다.
거의 2달의 기간을 허송세월로 보낸 상황에서 이미지 트레이닝만으로 실전 감각을 올렸다고 호언장담하는 내 모습이 그의 눈에는 자만으로 비쳤던 것이다.
땡-
“관장님, 시작할까요?”
“어, 어 그래.”
상념에 빠져 멍하니 있던 관장은 제자의 목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긴말할 것 없어. 여기서 변화된 모습을 보여 주면 돼.’
나는 관장님께서 크게 실망하셨다는 것을 현자의 눈을 통해 이미 알고 있었다.
지난 4개월간 좋은 모습을 보여 준 덕분에 나 이전에 체육관 유망주였던 김정욱 때처럼 기대를 모두 내려놓는 상황까지는 안 갔지만, 굳건했던 신뢰에 균열이 생긴 상태였다.
훅- 훅
본격적으로 스파링이 시작되자 우리는 빠르게 공방을 주고받았다.
‘뭐야? 공격이 제법 날카롭잖아?’
처음 스파링에 임할 때만 해도 가드를 모두 내린 채 느긋한 자세를 견지하던 관장은 내가 이전 대결 때와 완전히 달라졌음을 한 번의 공방으로 알아챘다.
‘날 맞히진 못했지만, 모든 주먹이 죄다 급소를 노리고 있어. 그리고 공격 템포도 더 빨라져서 전처럼 가지고 놀기는 힘들겠어.’
제자의 기량이 다시 돌아온 것을 눈치챈 관장은 가드를 올린 뒤 스텝을 밟기 시작했다.
잠시 나를 보며 템포를 조절하던 그는 앞 손 잽으로 페이크를 주다가 복부를 향해 힘껏 스트레이트를 날렸다.
팡!-
둔탁한 타격음이 체육관에 울려 퍼졌다.
“윽.”
나는 백 스텝으로 펀치를 피하려 했지만, 예상보다 빠른 공격에 복부를 그대로 얻어맞았다.
배에 가해진 충격으로 인해 허리를 펴기 어려웠고 호흡마저 곤란한 지경에 빠졌지만, 이대로 무너지는 모습을 보인다면 호언장담했던 게 다 거짓이 되기 때문에 이를 꽉 깨무는 수밖에 없었다.
“야, 괜찮냐?”
“상관없습니다. 그럼 계속하겠습니다.”
“됐어, 어차피 1라운드 끝났어.”
땡-
관장님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라운드 종료를 알리는 종이 울렸다.
“감각을 끌어올렸다는 게 거짓은 아니었구나. 이 정도 수준이면 전국체전 때랑 별 차이 없겠어. 아니 조금 더 낫다고 봐도 무방할 거야.”
“후, 다행이네요.”
테스트에 떨어지면 부모님과 선생님께 수업을 빼게 해 달라는 요청을 해야 했는데, 이는 상당히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이제 1라운드를 마친 것뿐이라 섣불리 판단하긴 어려웠지만, 관장님의 표정을 봤을 땐 실망감이 많이 사라진 듯 보였다.
“다행이라고 하긴 일러, 아직 5라운드가 더 남았잖아.”
“예, 남은 스파링도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리고 국가 대표 선발전은 전국체전과 비교할 때 참여하는 선수의 수준 면에서 차원이 달라. 즉, 네가 예전 기량을 회복했다고 해도 안심할 수 없다 이 말이야.”
백성철 관장은 제자의 실력이 돌아온 게 기뻤으나 선발전이 끝날 때까지는 긴장감을 유지해야 했기에 칭찬을 삼가는 중이었다.
“안 그래도 그 부분을 많이 신경 쓰고 있습니다. 감독님께서 보내 주신 영상 자료를 분석했는데, 확실히 고등부 선수들하고는 격이 다르더라고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관장님 말씀에 동의했다.
“그래서 2라운드부터는 스파링 방식을 조금 바꿀 생각이다.”
“뭘 어떻게 바꾸신다는 거예요?”
“네가 개인 훈련을 하는 동안 나름대로 영상 분석을 해 놨거든. 지금부터는 네가 만날 선수들과 유사한 스타일로 복싱을 할 거니까 참고해라.”
그는 원래 템포를 서서히 올리는 방식으로 스파링을 진행하려고 했지만, 내가 생각보다 준비가 잘되어있자 바로 선발전 준비에 들어가기로 결심했다.
“이렇게 갑자기요?”
“왜? 이미지 트레이닝만 해서 많이 쫄리나 봐?”
“조금 놀란 것뿐이지 자신이 없다고는 안 했습니다.”
“훗, 어디 그게 말뿐인지 근거가 있는지 한번 확인해 볼까?”
시종일관 굳은 얼굴로 있던 관장님은 씽긋 웃으며 익살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화가 좀 풀리신 것 같아서 다행이다.’
나는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스파링 준비를 하는 관장님을 보면서 미소를 지었다.
땡-
종소리와 함께 스파링이 재개되었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관장님께서 어떤 선수를 흉내 내는지 차분히 관찰했다.
‘다른 선수면 살짝 곤란할 뻔했는데, 운이 좋네.’
선발전에 참가하는 세 명의 선수 중 완벽하게 분석을 끝낸 건 정선호 선수뿐이었다.
물론 남은 두 선수의 경우에도 영상 분석 정도는 해 놨지만, 세밀한 동작 하나하나 모두 기억하고 있는 정선호에 비하면 부족한 감이 없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행여나 분석을 미처 다 못한 선수의 움직임이 나올까 걱정하던 나는 관장님의 동작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풋워크부터 잽을 하는 방식까지 정선호 선수의 복싱을 모방하는 게 명백해 보였기 때문이다.
‘녀석, 분석 하나는 철저히 했나 보군.’
종이 울린 지 2분이 지났다.
2분의 시간은 서로의 실력을 가늠하는 것을 넘어 유효타가 발생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백성철 관장은 초반에는 정선호가 하는 것처럼 아웃복싱 위주로 조심스럽게 경기를 운영하다가 내가 범위 안으로 들어오면 번개 같은 카운터 공격을 날렸다.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손이 닿을 것 같으면 귀신같이 빠져나갔고 오히려 역카운터를 맞는 경우도 종종 발생하였다.
퍽-
“후우, 드디어 잡았네.”
내내 헛손질을 하던 관장은 안면에 펀치를 적중시키곤 혼잣말을 했다.
‘위험했어.’
순간적으로 허리를 젖힌 덕분에 충격을 많이 완화했지만, 관장님의 펀치력이 워낙 강해서 골이 울리는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후에도 관장님은 아웃복싱으로 재미를 보기 위해 발을 부지런히 움직였고 나는 상대를 코너에 몰기 위해 견제타를 부지런히 날렸다.
그리고 끝내 관장님을 코너로 몰아넣는 데 성공했다.
‘정선호는 이곳에서 항상 약점을 드러냈어.’
나는 가드를 바짝 올린 채 전면전을 준비했다. 그러나 관장님은 이런 나를 비웃기라도 하듯 스텝을 밟고 유유히 빠져나갔다.
“거기서 그렇게 하시면 안 되죠.”
“왜, 뭐 문제라도 있어?”
“방금 그 상황에서 정선호 선수는 그렇게 안 한다고요.”
“야, 나도 나름대로 분석하고 움직인 거야.”
땡-
라운드 종료를 알리는 종이 울렸지만, 대화는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아웃복싱 하다가 코너에 몰리면 큰 거 한 방 날리고 빠져나가려고 하잖아.”
“그건, 파워 타입의 선수를 만났을 때 이야기죠. 제가 알기로 정선호 선수는 본인보다 체격이 작거나 힘에서 밀리지 않으면 인파이팅으로 전환되는 버릇이 있어요.”
“흠, 그랬던가?”
“못 믿으시겠으면 지난 아시안 게임 준결승 경기 한번 시청해 보세요. 제 기억에 태국 선수랑 붙는 거였는데, 힘에서 해볼 만하니까 터프하게 경기를 운영하더라고요.”
“듣고 보니까 네 말이 맞는 것 같다.”
백성철 관장은 제자의 확신에 찬 태도에 희미했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장신에 마른 체형의 소유자인 정선호는 긴 리치를 활용하여 아웃복싱으로 재미를 보다가 상대의 펀치가 견딜 만하다고 느끼면 과감하게 돌진하는 인파이터 기질도 갖고 있었다.
“정선호 선수는 맷집이 좋은 편이 아니라서 평소에는 거리를 두며 잽 위주로 경기를 풀지만, 동체 시력하고 순발력이 워낙 좋아서 파워가 약한 상대를 만나면 과감해지는 경향이 있어요.”
“그래서 네가 틀렸다고 한 거였구나.”
내 설명을 들은 관장님은 바로 수긍하는 태도를 보였다.
본래 중량급에서 활동하던 관장님은 나랑 비교할 때 파워나 체격 면에서 우위에 있었기에 방금 상황에서라면 코너를 빠져나가려 하기보다는 같이 맞불을 놓는 게 맞았다.
“자식, 어차피 잘할 거면서 왜 이렇게 걱정하게 만든 거야?”
관장님은 실전 감각을 되찾은 것을 넘어 상대 선수 파악까지 완벽하게 해낸 날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으셨다.
“진작에 이런 모습을 보여 드렸어야 했는데, 걱정 끼쳐 드려서 죄송합니다.”
“죄송할 게 뭐 있어. 선발전 끝날 때까지 성실하게 훈련하면 그걸로 된 거야.”
“예, 관장님. 저 근데 앞으로도 평일에는 개인 훈련을 해도 될까요?”
미션 수행을 위해 소화해야 할 가상 스파링이 많이 남았기 때문에, 선발전까지는 계속 ‘일루션’에 접속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물론이지. 내가 지도하는 것보다 더 빠르게 발전할 수 있는 길이 있다면 마다할 이유가 어딨겠어?”
그는 흔쾌히 내 요청을 받아들였다.
“학교랑 해야 할 일이 조금 있어서 그런 거지 제 방식이 더 훌륭해서 그런 건 아니에요. 전 아직 관장님의 도움이 많이 필요하다고요.”
“하하, 녀석 안 본 사이에 입담도 많이 늘었네?”
관장님은 기분이 좋은지 내 어깨를 두드리며 호탕하게 웃었다.
“자, 남은 라운드도 마저 해야지.”
“네, 관장님.”
대화를 마친 우리는 글러브를 끼고 남은 라운드를 모두 소화했다.
“몇 대 얻어맞은 것 빼고는 나쁘지 않았어.”
“동작이 비슷해도 실력이 다른데 어떻게 해요.”
“하여간 말은 청산유수예요. 지금부터 딱 30분 후에 미트 치기 할 거니까 잘 쉬고 있어.”
“예.”
스파링을 마친 나는 몇 가지 훈련을 더 받고 나서야 집에 돌아올 수 있었다.
* * *
12월이 되었다.
낙엽이 져 앙상한 가지만 남은 거리의 가로수들과 시시때때로 부는 차가운 바람은 겨울이 왔음을 알려 주고 있었다.
‘이제 한 번만 더하면 끝이다.’
지난 2주일 동안 미션 수행에 몰두한 덕분에 세 선수에 대한 모든 분석을 마칠 수 있었고 50번씩 스파링을 하는 미션도 이젠 딱 하나만 남은 상황이었다.
“대전 모드 실행시켜 줘.”
<대전 모드를 가동하겠습니다.>
지시를 받은 ‘일루션’은 무대 위로 캐릭터를 생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