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 17화 국가 대표 선발전 (1)
마지막 스파링을 함께할 캐릭터는 문승대 선수를 구현하여 만든 것으로 국대 선발전에서 만날 선수들 중에 가장 까다로운 상대였다.
그는 아웃파이팅, 인파이팅 가리지 않고 모두 잘하는 전형적인 올라운드 파이터로 현대 복싱 트렌드와 부합하여 복싱 관계자들과 기자들로부터 많은 관심을 받는 선수였다.
지난해에 있던 올림픽에 출전해서 준결승까지 진출했지만, 아쉽게도 4위에 그쳤고 동메달까지 주어지는 군 면제 기회를 아깝게 놓쳤다.
따라서 아시안 게임에 임하는 그의 각오는 다른 선수들보다 더 절실한 면이 없지 않았다.
땡-
종소리와 함께 대전이 시작되었다.
문승대의 형상을 한 캐릭터는 현란한 풋워크와 경쾌한 몸놀림을 선보이며 펀치 세례를 퍼부었다.
‘흐음, 이런 식으로 나온다 이거지?’
나는 이 경기에 앞서 49번의 스파링을 소화한 상태였기 때문에 기관총처럼 쏟아지는 주먹에도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대응할 수 있었다.
문승대의 연타는 이제까지 경험해 본 것들 중에서 가장 위협적이었지만, 스파링을 통해 적응을 마친 나에게는 크게 문제 되지 않았다.
<상대의 HP가 모두 소모되었습니다.>
<재경기를 원하십니까?>
“아니 괜찮아.”
2라운드가 채 지나기도 전에 스파링은 끝이 났다.
50번에 달하는 스파링과 영상을 꼼꼼히 분석해 둔 덕분에 캐릭터가 어떤 패턴으로 공격을 해도 나에게는 전혀 위협이 되지 않았다.
가벼운 타격의 경우 양팔을 이용하여 적절히 가드했고 힘이 실린 강한 공격에는 스텝을 활용하여 데미지를 입지 않도록 노력했다.
‘스파링이 거듭될수록 대처하기가 쉬워지는 것 같아. 하지만 방심하지 말자. 상대 선수들이 실제 경기에서 어떻게 나올지는 모르니까 말이야.’
선수들의 동작을 거의 완벽하게 구현했다 해도 실제 경기에서 움직임을 모두 예측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됐다.
물론 가상 스파링을 할 때는 캐릭터의 움직임을 손바닥에 올려놓은 듯 손쉽게 예측했으나 동작들을 일일이 스캔하여 생긴 현상일 뿐, 현실에서 이루어질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생각보다 시간이 얼마 안 지났네?’
시스템을 종료하고 눈을 뜬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가볍게 스트레칭을 했다.
꽤나 긴 시간 동안 접속한 느낌이었지만, 아직 밤 11시에 불과했다.
<아르마이스의 의지가 발동되었습니다.>
<미션이 완료되었음을 알려 드립니다.>
방금의 스파링을 마지막으로 미션을 모두 수행한 내 눈앞에 미션 완료를 알려 주는 화면이 떴다.
<보상: 복싱 관련 스킬 경험치 +50%, 통찰력 경험치 +50%>
<보상을 받으시겠습니까? Y/N>
보상을 받겠냐는 물음에 난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얼마 있지 않아 화면에서 빛이 쏟아졌고 스탯 보정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40%…… 70%…… 100%
보상 수여가 완료되자 어드바이저는 자동으로 활성화되어 스탯의 변화를 알려 줬다.
<보상이 적용됨에 따라 레벨이 오른 스탯이 있습니다. 확인하시겠습니까?>
“응, 확인할게.”
<레벨이 오른 스탯으로는 통찰력과 동체 시력이 있습니다. 통찰력의 경우 원래는 LV 4였으나…….>
내 대답을 들은 어드바이저는 스탯의 변화를 친절하게 설명해 줬다.
‘흐음, 이번에는 딱히 발현되는 능력이 없나 보네?’
일전에 통찰력 레벨이 올랐을 때는 타인의 스탯을 확인할 수 있는 능력이 개안됬지만, 이번에는 어찌 된 노릇인지 별다른 변화가 발생하지 않았다.
<통찰력이 오름에 따라 타인의 스탯을 확인할 수 있는 범위가 이전보다 늘어났습니다.>
‘그럼 나보다 레벨이 더 높은 사람의 스탯도 확인할 수 있다는 이야기야?’
<그렇습니다. 원래 현자의 눈으로는 자신의 레벨보다 높은 스탯은 확인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통찰력이 높아지면 확인할 수 있는 범위가 늘어나지요.>
‘범위가 늘어나는 기준은 정확히 어떻게 돼?’
<가벼운 예시로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현재 아르마이스 님의 상상력 레벨은 3입니다. 하지만 통찰력 레벨이 5로 오른 덕분에 5 이하의 상상력 레벨을 가진 사람들까지는 스탯을 확인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흠, 대충 무슨 말 하는지 알겠어.’
나는 통찰력 레벨이 현자의 눈에 어떤 작용을 하는지 단숨에 알아차렸다.
특정 스탯 중 레벨5를 초과한 것이 있다면 현재의 통찰력 수준보다 더 넓게 상대방의 스탯을 확인할 수 있었지만, 그게 아니라면 통찰력 레벨은 일종의 상한선 역할을 한다는 말이었다.
‘내일은 아침부터 체육관을 가야니까 일찍 자자.’
토요일 오전에는 국가 대표 선발전을 위한 마지막 훈련이 예정되어 있었다.
선발전이 이틀 앞으로 다가온 만큼, 스파링은 약식으로 진행하고 남은 시간은 전술 훈련을 하는 데 할애될 예정이었다.
‘일루션’을 통해 대응 방안을 몸으로 직접 체득한 상황이라 전술 훈련을 할 필요가 있을까 의문이 들었지만, 관장님의 혜안과 경험은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에 군소리 안 하고 따르기로 했다.
툭-
전등 스위치를 끄자 방은 칠흑같이 어두워졌다.
보통 때와 일찍 침대에 누운 나는 편안한 마음으로 잠을 청했다.
* * *
이틀이 지나고 선발전 당일이 되었다.
지난 주말 동안 마무리 훈련을 했는데, 관장님께서는 실력이 크게 늘었다며 칭찬을 아끼시지 않으셨다.
토요일은 메스 스파링과 전술 훈련을 병행했으나 일요일은 컨디션 조절 차원에서 새벽 훈련만 소화하고 내내 휴식을 취했다.
그리고 오늘, 만반의 준비를 마친 우리는 선발전이 열리는 한세대학교 체육관으로 향하고 있었다.
“체중은 맞췄어?”
“예, 집에서 쟀을 때는 문제 없었어요.”
“내년 아시안 게임만 끝나면 체급을 올려야겠어. 지금 네 키에 70kg 언저리에서 선수 생활 하는 건 말도 안 되는 거야.”
내 키는 183cm에 달했기에 체급 내에서도 최장신에 속했다.
“마른 것 치곤 펀치 파워가 쓸 만하다고 하셨잖아요.”
“그니까 나도 신기하다고 몇 번 말했잖아. 보통 사람들은 체중이 많이 빠지면 펀치력이 감소하기 마련인데 넌 어느 정도 유지가 되니까 말이야.”
신체 구조상 중량이 줄면 파워가 감소하는 건 자연스러운 이치였으나 미션 수행을 통해 힘 경험치 50%를 늘린 나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이야기였다.
“관장님. 여쭤볼 게 있어요.”
“뭔데?”
“토요일 날, 스파링하셨을 때 실력이 늘었다고 칭찬해 주셨잖아요.”
“야, 그게 언제적 일인데 아직도 마음에 담아 두고 있는 거야. 그런 생각은 빨리 털어 내고 시합에 집중해야지.”
백성철 관장은 제자의 물음에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관장님 칭찬 한마디로 방심할 정도로 어리석지는 않습니다.”
“그럼 왜 묻는 건데?”
“토요일 훈련 때 열심히 하긴 했어도 그렇게 잘했다는 생각은 안 들어서요. 솔직히 말해서 어지간히 잘한 거로는 칭찬 안 하시잖아요.”
지난 5개월간 관장님과 함께 훈련을 하는 동안 칭찬을 들은 적이 거의 없었다.
나이트 아린의 지도와 미션 수행으로 괄목할 만한 성장을 보여 줬을 때도 나의 잠재력을 높게 평가했을 뿐, 내 실력에 대한 논평은 일절하지 않으셨다.
그런 관장님이 지난 토요일 훈련 때는 이례적으로 내 복싱 실력을 칭찬해 주시니 나로서는 궁금한 게 당연했다.
“초보자 시절에 쑥쑥 크는 건 누구나 할 수 있지만, 물이 오른 상태에서 실력을 다듬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야. 어때, 이거면 설명이 됐지?”
“예, 관장님.”
‘수준이 높아질수록 발전하기 어려워진다는 말씀이네.’
나는 관장님의 속내를 짐작하며 공손히 대답했다.
‘이제 막 복싱의 맛을 알았을 뿐이야, 고작 칭찬 한마디로 안주해서는 안 돼.’
백성철 관장은 지난 스파링에서 제자가 유망주를 넘어 챔피언에 도전할 만한 재목이 되어 가고 있음을 실감했다.
그는 끊임없이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 주는 제자의 모습에 순간 감탄했으나 행여나 자만할까 싶어 말을 조심하려 했다.
“다 왔다, 내리자.”
“예, 관장님.”
목적지에 도착한 우리는 차에서 내렸다.
“선발전 말고 다른 대회들도 열리나 봐요.”
“이 체육관이 국가 대표 선발전만 하기에는 아깝지 않겠어?”
“그렇긴 하네요.”
나는 넓찍한 체육관 내부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세대 종합 체육관 정문에는 복싱 시합이 있음을 알리는 커다란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체육관은 총 7일 동안 대관이 되었는데, 이곳에서는 국가 대표 선발전 외에도 주니어 대표 선발전과 협회 회장배 복싱 대회가 동시에 열리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곧 있으면 시합이니까 조금 있다가 몸 풀 준비해라.”
“예, 관장님.”
경기에 앞서 개회식을 비롯한 자잘한 행사들이 있었으나, 우리는 이미 시합에 모든 포커스를 맞추고 있었다.
나의 첫 경기 상대는 정선호 선수였다.
비록 지난 올림픽 선발전에서 문승대에 패배하여 체급 최강자라는 타이틀을 빼앗겼지만, 여전히 유력 우승 후보로 꼽히는 자였다.
“10분 후에 개회식이 열릴 예정이니 귀빈들은 자리에 앉아 주시길 바랍니다.”
장내 아나운서의 말이 들리자 떠들썩하던 체육관의 분위기는 조금 진정되었다.
그리고 잠시 후, 대한복싱협회 회장, 한세대 총장 등 고위 인사들은 무대 위에 배치된 의자에 착석했고 시간에 맞춰 개회식이 진행됐다.
“현철아 오랜만이다.”
“어, 민우야. 너도 취재하러 왔나 보네?”
국가 대표 선발전을 비롯한 여러 대회가 열리는 만큼, 상당수의 기자들은 체육관에 와 있는 상태였다.
이들은 개회식에 참석한 고위 인사들의 사진을 찍으며 기삿거리가 있는지 살피는 중이었다.
셔터를 연신 눌러 대며 사진을 찍는 사람들 중에는 서울 데일리의 김현철 기자도 있었는데, 그는 고등학교 동창이자 성동일보 기자로 일하고 있는 김민우 기자를 우연히 만나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오늘 남자부에서는 라이트급, 웰터급, 미들급 경기가 열리는데 뭘 보러 갈 거야?”
“당연히 웰터급 경기를 보러 가야지. 정선호, 문승대, 이재윤까지 거를 타선이 없잖아.”
김민우 기자는 친구의 질문에 일 초의 망설임 없이 곧바로 대답했다.
과거에 인기 있는 체급이라고 하면 라이트 플라이급이나 플라이급이던 시절도 있었지만, 현재는 내가 속한 웰터급이 가장 주목을 받는 체급이었다.
“강진우 선수도 있잖아.”
“아, 이제 열일곱밖에 안 된 그 친구 말이지? 재능이 뛰어나다는 이야기를 듣긴 했지만, 사실 국대 선발전에 나온 친구들 중 천재 소리 안 들어 본 애들이 어디 있나?”
김민우 기자는 어깨를 으쓱하며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그래도 최소한 상비군에는 들지 않을까 싶은데?”
“강진우 선수가 그나마 비벼 볼 만한 상대로는 이재윤 선수밖에 없는데 조금 어렵지 않을까? 이재윤 선수가 국제 대회 경험은 없어도 전국체전 대학부, 일반부 모두 우승했던 사람이잖아.”
“일반부 우승자가 고등부 우승자에게 지는 그림이 잘 안 그려지긴 하지. 하지만, 강진우 선수의 잠재력만큼은 진짜야. 내가 그동안 촉망받는 선수들을 많이 봤지만, 강 선수만 한 인재는 본 적이 없다고.”
“잠재력이 좋으면 뭐해. 정신 상태가 글러 먹었는데.”
“야, 운동선수가 운동만 하라는 법 있어? 복싱이 흥행하려면 대중들의 관심을 끌 요소가 필요한 거야.”
김현철 기자는 친구의 말에 살짝 격앙된 태도를 보였다.
10월 전국체전이 끝난 후 나를 주제로 한 기사들이 쏟아져 나올 때가 있었다.
전국체전 고등부 우승으로는 지면을 많이 할당받을 수 없어서 크게 화제가 되진 못했지만, 꽃미남 외모와 아이돌 여동생이라는 단어는 10대와 20대 팬들에게 반향을 일으키기 충분했다.
그러나 스포츠 선수는 실력으로만 말한다는 견해를 갖은 김민우는 인터뷰에 여동생이 언급된 것을 노이즈 마케팅으로 판단하여 나에 대해 안 좋은 선입견을 갖고 있는 상태였다.
“네가 뭐라 하든 실력을 입증하지 못한 선수한테는 관심이 없어.”
“이러지 말고 경기 보러 가자. 마침 첫 시합에 강진우 선수가 나오니까 보고 판단하라고.”
“보나 마나 정선호 선수가 이길 게 뻔한데 뭘 보러 가냐?”
“알겠으니까 좀 보러 가자고.”
김현철 기자는 친구의 팔을 낚아챈 후 경기를 보러 발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