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사람들이 자꾸만 보은한다-73화 (73/122)

73. 17화 국가 대표 선발전 (2)

‘경기까지 10분 정도 남았네.’

개회식을 마치고 관장님과 가볍게 몸을 풀며 시합을 기다리고 있었다.

대회 첫 경기인만큼 긴장될 법도 했지만, 이상하리만치 마음은 차분했다.

시합이 임박하여 링 주변에서 대기를 하던 중에 정선호 선수와 마주쳤지만, 마음 안에는 아무런 동요도 발생하지 않았다.

영상 분석과 50차례의 스파링에서 충분히 봤기 때문일까, 나는 정 선수를 처음 봤음에도 불구하고 긴장은커녕 친근감마저 느끼고 있었다.

“진우야, 듣고 있어?”

“아, 예.”

“곧 시합인데, 왜 이렇게 넋이 빠져 있어.”

“잠시 생각할 게 있어서 그랬어요. 죄송합니다.”

“아무튼, 지난 주말에 전술 훈련 했던 거 까먹지 말고 시합 때 잘 써 먹어 봐.”

“네, 관장님.”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앞으로도 일루션을 잘 활용해야겠어. 실전 감각을 올려 주는 것뿐만 아니라 심리적인 효과도 대단한 것 같아.’

인간은 원래 미지의 상대에게 두려움을 느끼는 법이다.

특히 상대의 명성이 높고 실력이 뛰어날수록 긴장감을 다스리는 게 더욱 어려워진다.

하지만 50번 이상 스파링을 경험하고 난 뒤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싸움이 반복됨에 따라 두려움은 익숙함으로 변할 것이고 시간이 더 지나면 친근감을 느끼는 것도 충분히 가능할 것이다.

지금 내가 그러는 것처럼 말이다.

‘고삐리 주제에 간이 제법 큰데?’

정선호는 내가 자신을 응시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다.

제아무리 전국체전을 우승했다고 해도 기라성 같은 선수들 사이에서는 기가 죽기 마련인데, 여유만만한 태도를 보이고 있어 내심 감탄하는 중이었다.

‘딱 보니까 세상 무서운 줄 모르는 풋내기네. 나도 저 나이 때는 딱 저랬지.’

그는 나의 여유로운 태도가 패배를 경험하지 않은 데서 기인했다고 생각했다.

“양 선수 모두 링으로 올라가 주세요.”

나와 정선호 선수는 진행 요원의 안내에 따라 링으로 올라갔다.

“시합은 알다시피 3분 3라운드로 진행됩니다. 불필요한 클린치나 버팅 행위는 채점에 불리하게 작용하니까…….”

50대 후반으로 보이는 심판은 주의 사항을 일러 주었다.

‘아시안 게임 은메달을 거저 얻은 건 아니구나.’

심판이 주의 사항을 이야기하는 동안 나는 정선호 선수의 스탯을 현자의 눈으로 확인해 보았다.

그 결과, 동체 시력, 체력은 LV 5로 측정됐고 민첩성은 물음표로 표시된 것으로 보아 나보다 더 나은 수준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다른 스탯들이 비벼 볼 만하다는 거야. 그건 그렇고 갑자기 심장이 빨리 뛰는 게 긴장이 좀 되네.’

지역 대표 선발전부터 고등부 전국체전까지는 스탯의 우위로 상대를 찍어누를 수 있었지만, 국가 대표 경력이 있는 선수들이 대거 출전하는 이번 선발전에서는 일어나기 어려울 듯했다.

땡-

코너에 서서 상념에 잠겨 있던 나는 시합 개시를 알리는 종소리를 듣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예상대로 움직여 주는군.’

정선호 선수는 으레 그랬던 것처럼 경쾌하게 스텝을 밟으며 서서히 중앙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파팍-

공격 범위에 다다르자 번개 같은 잽이 그의 손에서 터져 나왔다.

예상보다 높은 민첩성 때문에 가상 스파링 때보다 핸드 스피드가 좀 더 빨랐지만, 이미 눈으로 익혀 뒀던 패턴이었기에 가드를 하기에는 크게 무리가 없었다.

‘가드가 생각보다 견고하네?’

비록 초반에 활용하는 잽 공격이 견제 목적이라고는 하지만, 한 대의 유효타도 만들어 내지 못한 건 엄청나게 드문 일이었다. 마음이 답답해진 정선호는 왼손으로 잽을 날리는 척하다가 가드를 걷어 낸 후 오른손 스트레이트를 그대로 날렸다.

팡-

“와! 방금 카운터 치는 거 봤어?”

링 주변에서 경기를 보고 있던 김민우 기자는 안면에 들어오는 라이트 스트레이트를 피하며 크로스 카운터를 날리는 날 보며 탄성을 질렀다.

“어때? 이제 강진우 선수가 좀 달라 보이지?”

“흐음, 내가 예상했던 것보단 훨씬 잘하긴 하지만, 정선호 선수랑 비교하면 아직도 약간 부족해 보여.”

김현철 기자가 의기양양한 태도로 물었으나 그는 여전히 정 선수를 나보다 높게 평가하고 있었다.

“인정하긴 싫지만, 속도랑 순발력 면에서 강진우 선수가 밀리는 건 사실이야. 아마 이전 경기들처럼 실력으로 찍어누르는 양상은 나오기 어려울 것 같아.”

“그래도 열일곱의 나이라는 걸 감안하면 괴물 신인인 건 틀림없어. 솔직히 저 나이대에 국대 경력이 있는 선수와 비빌 수 있다는 게 말이 되는 이야기냐고.”

김민우 기자는 승부의 향방을 떠나서 경기에서 보여 준 내 재능만큼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뭐야? 이걸 반응한다고?’

한편, 회심의 공격이 먹히지 않은 것을 넘어 반격까지 당한 정선호 선수는 속으로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그는 엄청난 순발력으로 허리를 젖혀 훅 공격을 간신히 피했지만, 간담이 서늘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잠시 후, 1라운드가 끝이 났다.

“진우야, 왜 이렇게 소극적으로 해.”

백성철 관장님은 링 아래에서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생각했던 것보다 몸놀림이 좋아서 연습 때 움직임이 잘 안 나오는 것 같아요.”

“야, 몇 대 맞아 주고 들이받아.”

“예?”

“이제까진 운 좋게 난타전이 없었지만, 어떻게 매 시합마다 깔끔하게 이기겠어. 내가 경기를 보니까 저놈이 네가 예측한 대로 움직이고 있긴 하더라. 근데 문제는 상대가 예상보다 순발력이 좋아서 결정타를 못 먹이는 거잖아.”

“혹시 묘수라도 있으세요?”

관장님이 1라운드를 소화하며 들었던 생각들을 정확하게 말씀하시자 나는 귀가 솔깃해졌다.

“일단은 최대한 가드를 굳건히 하고 데미지를 줄이면서 녀석을 방심하게 만들어.”

“알겠습니다.”

3라운드 채점제 경기에서 2라운드를 그냥 내주라는 관장님의 말씀이 이해가 되진 않았지만, 밑져야 본전이라는 심정으로 대답했다.

땡-

2라운드 개시를 알리는 종이 울렸다.

정선호 선수는 1라운드 말미에 있던 역카운터 공격에 긴장감을 한껏 끌어올린 상태였다.

1라운드 때와 마찬가지로 잽 공격으로 포문을 열었지만, 빈틈이 보인다고 쉽사리 들어가지 않았다.

그러나 간단한 페이크 공격에도 내가 당황하는 기색을 보이자 점점 자신감이 상승하기 시작했다.

‘이 자식, 1라운드 때랑 움직임이 완전 딴판이잖아? 제법 강한 놈인 줄 알았는데 내가 착각을 한 건가?’

그는 자신의 풋워크를 따라오지 못하고 헛손질을 남발하는 나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후, 조금씩 코너 쪽으로 몰아 보자.’

나는 정타를 몇 대 허용한 탓에 호흡이 가쁘고 몸이 무거워져 감을 느꼈지만, 끊임없이 전진 스텝을 밟으며 상대를 코너에 몰아넣으려고 했다.

관장님께서 따로 주문하신 내용은 아니었으나 휴식 시간에 말씀하실 때 짐작 가는 전략이 있기 때문에 내린 결정이었다.

“이미 끝났어.”

“흠…….”

밖에서 경기를 지켜보던 김민우 기자는 정선호가 1, 2라운드를 가졌다고 생각했고 남은 3라운드에서도 이변이 발생할 확률은 적다고 보았다.

판정에서 밀리고 있는 상황에서 경기를 뒤집으려면 KO밖에 없는데, 누적된 데미지도 별로 없는 상황에서 순발력이 좋은 정 선수를 끝장낸다는 건 거의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슬슬 다른 경기 보러 가자. 어차피 더 봤자 의미가 없잖아.”

“난 끝까지 볼 거니까 먼저 가 있어.”

김현철 기자는 고개를 저으며 시합을 계속 지켜보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사실 그도 친구의 말처럼 내가 경기를 역전할 것으로 보진 않았다. 그러나 2라운드 들어서 일방적으로 밀리는 양상이 되자 석연치 않다는 생각이 들어 왠지 발걸음이 떼지지 않았다.

“이야, 이건 관심을 넘어서 애정 수준 아니야?”

“내가 강진우 선수 팬이라고 말 안 했나? 솔직히 네 말대로 정선호 선수가 이길 확률이 높은 건 알아. 그래도 남은 라운드를 어떻게 풀어 나갈지 궁금해지는 것도 사실이야. 일전에 봤을 때 상당히 샤프하다는 느낌이 있었거든.”

“결과를 떠나서 어떻게 대응할지 궁금하다는 소리네. 네가 이렇게까지 말하니까 나도 괜히 보고 싶어지는데?”

김민우 기자는 친구의 선수 보는 안목이 특별하다는 것을 잘 알았기에 경기를 조금 더 지켜보기로 했다.

한편, 2라운드를 마친 나는 숨을 헐떡이며 코너에 앉아 있었다.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내쉬어.”

백성철 관장은 나에게 심호흡을 권하며 데미지를 회복할 것을 지시했다.

“우선은 회복이 시급하니까 말하지 말고 들어. 아까 녀석을 계속 코너로 모는 것 같던데 아주 잘했어. 너 경기를 어떻게 풀어야 하는지 알고 있는 거지?”

나는 숨을 몰아쉬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네 플랜대로 해 봐.”

관장은 다른 건 몰라도 상대 선수 분석과 게임 플랜을 짜는 데 있어서는 제자의 능력을 인정했다.

내가 본인과 똑같은 생각을 한다고 확신한 그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그대로 자리로 돌아갔다.

‘판정으로 가면 십중팔구 패배하게 될 거야.’

나는 2라운드 때와 마찬가지로 안면을 양팔로 가드한 후, 정선호 선수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이제 보니까 기본도 안된 녀석이었잖아.’

정선호는 배가 훤히 비어 있는 것을 확인하고 잽과 스트레이트를 섞어 주며 복부를 공략했다. 그는 백 스텝을 밟으며 여유 있게 펀치를 쏟아 냈고 3라운드에서도 포인트 우위를 가져가려 노력했다.

‘바보 같은 자식, 코너에 몰면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한 거야?’

훅과 스트레이트 같은 큰 공격을 쏟아부었음에도 내가 가드를 견고히 한 채 전진 스텝을 밟자 어느새 코너에 몰리고 말았다.

2라운드 때만 해도 사이드 스텝으로 유유히 코너를 빠져나갈 수 있었지만, 자신의 움직임을 읽는 것 같은 기민한 압박에 꼼짝없이 갇힌 정선호는 위기에 몰렸음에도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전 라운드에서 주먹을 섞으면서 상대의 기량이 자신보다 떨어짐을 확신했기 때문이다.

‘예상대로 움직여 줘서 다행이다.’

나는 양 가드 사이로 상대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끊임없이 스텝을 밟으며 아웃복싱을 구사하던 정선호는 구석에 몰리자 양발을 지면에 붙이고 몸을 흔들기 시작했다.

자신의 실력이 더 우위에 있음을 확인하자 아웃복싱에서 인복싱으로 전환을 한 것이다.

“쯧쯧, 이거 완전히 농락당하게 생겼네.”

“농락?”

김현철 기자는 친구의 혀 차는 소리에 고개를 돌리고 질문을 던졌다.

“정선호 선수가 인복싱 스탠스를 취했다는 건 상대를 실력으로 압도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는 거야.”

“괜히 방심하다가 역으로 당할 수도 있어.”

“훗, 조금 있으면 내 말이 뭔지 알게 될 거야. 정선호 선수가 유리한 상황임에도 스텝을 멈췄다는 건…… 뭐, 뭐야?”

김민우 기자는 순식간에 이루어진 근접 공방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나를 압도할 것이라는 그의 예상과 달리 정선호 선수가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관자놀이와 턱에 정타를 허용한 정선호는 내 펀치를 막느라 허둥지둥대고 있었다.

상황은 이랬다.

순발력과 스피드 면에서 우위가 있다고 판단한 정선호는 나에게 유효타 한 대도 허용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는 가드를 느슨히 한 채 현란한 상체 움직임을 보이며 천천히 다가왔고 나는 이에 부응이라도 하듯 펀치를 쏟아 냈다.

처음 2, 3대는 스웨이와 더킹으로 공격을 피해 냈지만, 공방이 계속될수록 퇴로가 막힘을 느꼈다.

‘분명 나보다 느린데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정선호는 몸이 움직이는 방향으로 펀치가 들어오자 평정심을 잃어 갔다.

‘이제야 좀 할 만하네.’

나는 시합이 개시된 이후 처음으로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3라운드에 접어들어 속도에 익숙해졌을 뿐만 아니라 수십 차례의 가상 스파링으로 얻은 수읽기 능력이 근접전에 돌입하자 빛을 발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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