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사람들이 자꾸만 보은한다-74화 (74/122)

74. 17화 국가 대표 선발전 (3)

현자의 눈으로 확인한 정선호 선수의 스탯은 놀라움 그 자체였다.

힘을 제외한 동체 시력, 체력은 나와 비슷했고 민첩성은 나보다 더 높은 수치를 기록하고 있었다.

민첩성이 높다는 것은 순발력과 스피드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음을 의미했고 이 점은 내가 경기를 풀어 나가는 데 큰 어려움을 제공했다.

‘저 발이 문제야.’

순발력이 아무리 좋다고 해도 연타 공격을 모두 피해 내는 건 무척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빠른 풋워크를 가진 정선호는 상대의 펀치가 자신에게 도달할 것 같은 느낌이 들면 멀찍이 뒤로 물러나 약을 올리곤 했다.

이후, 나는 그의 장점인 풋워크를 없애고 피할 공간을 줄이기 위해 상대를 구석으로 몰음과 동시에 실력을 숨겨 방심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마침내 내가 의도했던 상황이 연출되자 시합은 극적으로 반전되었다.

“야, 거기서 뭐 해. 빨리 빠져나와!”

‘하아, 그게 말처럼 쉬우면 진작 그렇게 했겠지.’

정선호는 링 아래에서 자신을 다그치는 코치를 보며 한숨을 깊게 쉬었다.

분명 2라운드까지만 해도 손바닥 위에 놓은 것처럼 상대를 압도했었다. 그런데 어찌 된 영문인지 3라운드에 접어들자 링 구석에 갇혀 옴짝달싹 못 하는 형상이 되고 말았다.

“진우야, 때려, 때려!”

백성철 관장은 빈틈이 훤히 보임에도 공격하지 않는 제자를 답답하게 바라보며 소리쳤다.

하지만, 나는 관장님의 말씀에 아랑곳하지 않고 잔주먹으로 재미를 보는 데만 집중했다.

‘어차피 KO가 안 나면 이길 수 없어.’

구석에 몰린 정선호 선수는 1, 2라운드와 달리 내 공격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했다.

게다가 그의 사소한 습관과 공격 패턴 등을 모두 숙지한 상황이라 상대가 내 펀치를 운 좋게 피하더라도 퇴로를 막고 공격을 이어 가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솔직히 마음만 먹으면 당장 녀석을 다운시킬 자신이 있었다.

몸을 트는 방향부터 가드를 하는 방식까지 꿰뚫고 있었기에 피하는 방향을 예측하고 큰 거 한 방만 먹이면 쓰러뜨릴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만약에 상대가 몸을 일으킨다면 그때부터 큰 문제가 발생했다.

‘이 바닥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이야. 다운을 시켜도 다시 일어난다면 지금 같은 기회는 다시 오지 않을 거야.’

상대가 만약에 현재의 위기에서 벗어난다면 코너로 몰리는 상황을 만들지 않을 거라는 것은 누구나 예상할 수 있었다.

물론, 다시 시도해 볼 수 있긴 하나 정선호가 아웃복싱에 능하다는 것을 고려하면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윽…… 날 가지고 노는 것도 아니고 이게 뭐야?’

정선호는 내가 묘하게 데미지를 컨트롤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안면과 복부에 잽과 스트레이트를 맞아 휘청거리는 통에 허점이 크게 노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상대는 치고 들어오지 않았다.

심지어 3라운드 중반에는 훅으로 간장을 제대로 얻어맞아 그로기 상태에 빠졌을 때도, 나는 가벼운 잽으로 툭툭 건들기만 할 뿐 끝장을 보진 않았다.

‘하아, 이제 조금만 더 버티면 된다.’

그는 나에게서 이상한 기류가 흐르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지만, 쏟아지는 주먹을 견디느라 생각을 할 겨를조차 없었다.

“50초만 더 버티면 돼.”

‘좀 창피하지만 뭐 어때? 일단은 이기고 보자.’

자신의 선수가 핀치에 몰렸다는 것을 이제야 눈치챈 상대 팀 코치는 3라운드 종료가 얼마 안 남았음을 알려 주며 독려했다.

그리고 정선호도 고등학생 신인에게 밀렸다는 부끄러움은 밀어 두고 버티기 작전에 돌입했다.

‘오히려 잘됐어.’

순발력과 반사 신경을 믿고 가드를 느슨히 하던 상대가 양팔을 안면에 둔 채 방어 모드에 들어가자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나는 가드하기 어려운 옆구리를 공략하다가 팔이 내려오면 안면을 가격하는 식으로 끊임없이 정선호를 압박했다.

“와, 진짜 미치겠네. 이제 30초밖에 안 남았어!”

백성철 관장은 시합 종료가 임박한 상황에도 제자가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자 머리를 손으로 뜯으며 언성을 높였다.

‘슬슬 승부를 걸어 보자.’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깨달은 나는 앞 손으로 가드를 툭툭 치다가 혼신의 힘을 다하여 복부에 훅을 꽂아 넣었다.

“헉…….”

시합 내내 느껴 보지 못했던 강력한 펀치가 옆구리에 들어오자 정선호의 허리는 기역 자로 꺾였다.

하지만 이걸로는 안심할 수 없었다.

나는 허리를 숙여 어깨를 상대 복부에 집어넣어 쓰러지지 않게 만든 후 복부를 향해 다시 한번 강타를 꽂아 넣었다.

“악!”

간장에 타격을 맞은 정선호는 엄청난 통증에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옆으로 쓰러졌다.

‘허억, 허억 제발 일어나지 마라.’

“원, 투, 쓰리…….”

심판은 바닥에 누워 있는 정선호 선수를 보며 카운터를 세다가 상태가 심각함을 인지하고 게임이 종료됐음을 알렸다.

“국대 선발전에서 KO가 나오는 게 말이 되냐?”

김민우 기자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혀를 내둘렀다.

“경기를 뒤집으려면 KO밖에 없다고 생각은 했지만, 이걸 진짜 해낼 줄은 상상도 못 했어.”

평소에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은 김현철 기자도 뜻밖의 결과에 크게 놀랐다.

“진우야, 고생했다.”

백성철 관장은 수건으로 손수 땀을 닦아 주며 힘든 경기를 마친 제자를 챙겼다.

“제가 할게요.”

“후우, 진짜 너 때문에 한 5년은 더 늙은 것 같다. 금방 끝낼 수 있었으면서 왜 이렇게 시간을 끈 거야?”

그는 제자에게 수건을 넘긴 뒤, 안도의 한숨을 몰아쉬었다.

“링 위에 올라갈 때만 해도 해 볼 만하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시합이 시작되니까 장난이 아니더라고요.”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너스레를 떨었다.

“어쩐지, 긴장을 너무 안 한다 했다. 아시안 게임 은메달리스트가 꽁으로 되는 줄 아냐?”

“그러게요. 이틀 뒤에 붙을 상대가 누군진 몰라도 대비를 더 철저히 해야겠어요. 관장님, 이제 다음 스케줄은 어떻게 되는 건가요?”

“이 근처에 내가 아는 병원이 있는데, 일단 거기 가서 몸 상태 체크부터 하자.”

“네, 관장님.”

오늘 경기는 이전의 것들에 비해 훨씬 격렬했기에 몸 상태를 확인해 볼 필요가 있었다.

관장님은 몇 가지 질문을 던지며 내 컨디션을 체크한 뒤, 날 데리고 차량으로 이동했다.

첫 경기를 무사히 치렀지만, 바로 이틀 후에 경기가 있어 기뻐할 틈 따위는 없었다.

‘흠, 병원에 가기 전에 문승대의 스탯을 확인했어야 했는데 실수했어.’

병원에서 괜찮다는 진단을 받은 나는 집에 돌아오자마자 ‘일루션’을 켜고 훈련에 매진했다.

다음 상대는 예상했던 대로 올림픽에서 아깝게 메달을 놓친 문승대였다.

이미 수십 차례 이상의 가상 스파링을 거쳤기에 경험은 충분히 쌓았으나 문승대의 역량이 내 예측을 뛰어넘을 수 있었기 때문에 방심할 순 없었다.

* * *

수요일이 되었다.

오늘은 웰터급을 포함한 전 체급의 국가 대표가 결정되는 날로 많은 기자들이 체육관을 누비고 있었다.

“오늘 경기는 어떨 것 같아?”

“서로 어떤 전략을 짰냐에 따라서 결과가 달라지겠지만, 만약 평소대로 시합을 한다면 강진우 선수가 승리할 것 같아.”

김현철 기자는 친구의 물음에 차분히 대답했다.

“문승대 선수를 너무 과소평가하는 거 아니야? 아무리 아시안 게임 은메달리스트를 이겼다고 해도, 상대는 올림픽 준결승까지 진출했던 강자라고.”

“테크닉이랑 파워 면에서는 문승대 선수가 국내 최고인 건 맞아. 하지만 속도만 놓고 봤을 땐, 강진우 선수를 능가한다고 보기 어려워.”

“참나, 스피드가 부족한데 올림픽 4위를 어떻게 하냐? 아마추어 시합에선 힘센 놈보다 빠르고 기술 좋은 놈이 우세하다는 건 다 아는 사실이잖아.”

김민우 기자는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반문했다.

“문승대 선수가 느리다는 게 아니야. 강진우 선수랑, 정선호 선수가 웰터급 체급치고 무척 빠르다는 거지. 아무튼 시합을 보면 이해가 갈 테니까 슬슬 출발하자.”

“오케이.”

김현철 기자는 친구와 함께 웰터급 결승전이 열리는 링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후, 준비한 대로만 하면 문제없을 거야.’

나는 결승 시합을 치르기 위해 링 위에 올라와 있었다.

코너 반대편에는 문승대 선수가 명상을 하는 것마냥 눈을 감고 종소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마 시합에서 만나서 다행이다. 만약 프로였으면 이기기 어려웠을 거야.’

링에 오르기 전에 문승대 선수의 스탯을 확인해 봤다.

결과는 놀라웠다.

힘, 체력 등 여러 부문에서 나보다 앞섰다.

하지만 이런 그에게도 약점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영상 분석을 했을 때 짐작했지만, 문승대의 민첩 레벨은 나보다 뒤떨어졌다.

즉, 첫 시합 때와 달리 스피드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다는 말이었다.

땡-

종이 울림과 동시에 1라운드가 시작되었다.

나는 경쾌하게 스텝을 밟으며 아웃복싱으로 포문을 열었다.

‘나에 대해 연구를 많이 했나 보네.’

문승대는 잽 위주의 공격으로 경기를 푸는 날 보며 생각했다.

스웨이, 더킹, 위빙 등 회피 기술이 뛰어나고 가드까지 견고하여 정타를 허용하진 않았지만, 본의 아니게 방어하는 양상을 보여 포인트 면에선 나에게 뒤지고 있었다.

1라운드가 거의 끝나 갈 시각.

다소 초조해질 수 있는 시간대임에도 문승대의 눈은 먹이를 노리는 사냥감처럼 빛나고 있었다.

‘부족한 스피드를 몸놀림으로 커버하네.’

문승대는 웬만한 공격들은 앞 손으로 쳐 내다가 스트레이트처럼 다소 묵직한 공격이 들어오면 환상적인 상체 움직임으로 유유히 피해 냈다.

‘훈련한 걸 한번 써먹어 볼까?’

나는 어제 관장님과 준비한 대로 안면에 잽을 집중시켜 상대의 시선을 고정시킨 후, 기습적으로 복부에 스트레이트를 날렸으나 이를 간파한 문승대는 사이드 스텝을 밟은 뒤 카운터펀치를 날렸다.

팡!

가드와 주먹이 부딪치면서 커다란 펀치 음이 발생했다.

수십 차례의 가상 스파링 덕분에 본능적으로 방어해 내는 데 성공했으나 펀치력이 워낙 강했던 탓에 가드한 팔에 통증이 느껴졌다.

“와, 저 정도 펀치력이면 한 대만 제대로 걸려도 끝이겠어.”

“문승대 선수가 확실히 강하긴 하지만, 1라운드를 지배한 건 여전히 강진우 선수야.”

김현철 기자는 친구의 감탄에도 냉철한 태도를 견지했다.

“그래도 2, 3라운드는 다르지 않을까? 문승대 선수가 처음에는 허둥지둥하긴 했어도 금세 적응을 했잖아.”

“강진우 선수가 비록 어리긴 하지만, 게임을 허투루 풀어 가는 타입은 아니야.”

“나름의 포석이 있다는 이야기지?”

“훗, 같이 다니더니 눈치가 많이 늘었네.”

김민우 기자의 말에 김현철은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

대화를 하다 보니 1라운드는 어느새 끝이 났고 잠시 후 2라운드가 시작되었다.

경기의 양상은 1라운드 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나는 공격 패턴만 살짝 바꾼 후 아웃복싱을 구사했고 문승대 선수는 초반에 고전하다가 말미쯤에 적응을 하여 반격을 가하곤 했다.

하지만, 포인트제로 운영되는 경기 방식을 생각하면 승부는 여전히 나에게 유리한 상황이었다.

“나, 생각이 바뀌었어.”

“뭐가 바뀌었는데?”

경기 내용을 메모하던 김현철 기자는 펜을 내려놓고 친구를 바라봤다.

“아무리 재능이 뛰어나도 나이가 너무 어려서 기존 선수들을 뛰어넘기에 시기상조라고 생각했거든, 그런데 막상 경기를 보니까 실력, 운영 모든 면에서 내 예상을 완전히 뛰어넘어 버렸어.”

“강진우 선수는 오늘보다 내일이 더 기대되는 선수야.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와아아!”

대화를 나누던 기자들은 주변 사람들이 환호성을 지르자 빠르게 고개를 돌렸다.

“뭐, 뭐야.”

“이게 어떻게 된 거지?”

김현철 기자와 김민우 기자는 링에서 벌어진 상황을 보고 입을 다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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