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사람들이 자꾸만 보은한다-75화 (75/122)

75. 17화 국가 대표 선발전 (4)

“이게 어떻게 된 거야? 현철아 넌 봤어?”

대화를 하느라 상황을 보지 못한 김민우 기자는 다급한 목소리로 친구에게 물었다.

그러자 김현철 기자는 넋이 나간 얼굴로 천천히 고개만 끄덕였다.

“원, 투, 쓰리…….”

심판은 손가락으로 숫자를 표시하며 카운트를 세고 있었고 나는 코너에 서서 바닥에 쓰러진 문승대 선수를 차분하게 지켜보는 중이었다.

‘노림수가 제대로 먹혀들었어.’

아웃복싱 위주로 안전하게 경기를 진행했던 건 나름의 이유가 있어서였다.

타고난 하드 펀처인 문승대와의 근접전을 피하기 위한 포석도 있었지만, 라운드가 끝날 때마다 허점을 드러낸 것도 다 계산된 행동이었다.

빠른 스텝과 잽 위주의 공격이 계속되자 문승대는 점점 초조해졌고 경기를 뒤집기 위해 과감한 공격들을 시도했다.

설마 하는 마음으로 날린 펀치가 의외로 적중하자 자신감이 붙기 시작했고 급기야 간단한 잽에도 몸이 따라 나가기에 이르렀다.

‘완전히 속은 것 같네. 한번 시도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어.’

상대 선수가 속아 넘어갔다고 확신한 나는 일부로 허술하게 잽을 날렸고 상대의 공격을 몇 대 맞아 줬다.

그리고 기세가 오른 문승대의 동작이 커지던 순간, 틈을 파고 들어가 번개 같은 카운터 공격을 날리는 데 성공했다.

‘으윽, 젠장. 완전히 당해 버렸군.’

턱에 훅과 어퍼컷 2연타를 얻어맞은 문승대는 링 줄을 부여잡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타고난 힘이 좋고 기술 습득 능력이 좋아 아마추어보다는 프로에서 더 잘할 거라는 평가를 받는 그였다.

따라서 지난 올림픽에서 4위에 그쳤을 당시에도 프로로 전향하라는 주변의 조언이 적지 않았다.

현재 69kg급이 한국에서 핫한 체급이라고 하나 문승대의 적수가 될 만한 상대는 현 국내 챔피언 차성길밖에 없는 상황이라 프로로 전향하는 건 꽤 나쁘지 않은 길이었다.

그러나 초등 6학년 때부터 엘리트 복싱을 배웠던 문승대는 WBC나 WBA 같은 단체의 챔피언이 되는 것보다 올림픽 메달이 더 간절했다.

왜냐하면 엘리트 체육의 정점에 있는 무대가 다름 아닌 올림픽이었기 때문이다.

‘훗, 이거 올림픽은커녕 아시안 게임도 못 나가게 생겼네.’

문승대는 비틀거리는 몸을 추스르며 자조 섞인 미소를 지었다.

“식스, 세븐, 에잇. 자세 취하고 똑바로 서 보세요.”

심판은 간신히 균형을 잡고 서 있는 문승대에게 질문했다.

“계속할 수 있겠습니까? 오케이, 파이트!”

문승대가 가드를 올린 뒤 고개를 끄덕이자 심판은 팔을 올리며 경기를 재개했다.

“문승대 선수는 지금부터 죽기 아니면 살기로 달려들 거야.”

“오, 그럼 지금부터 경기가 재밌어지겠는데?”

김현철 기자의 말을 들은 김민우는 눈을 반짝이며 시합을 관전했다.

그러나 화끈한 난타전을 펼칠 거라는 그의 기대와 달리 나는 1, 2라운드 때와 마찬가지로 아웃복싱으로 일관했다.

잽 위주로 펀치를 날리다가 가끔씩 스트레이트를 섞어 주는 식으로 안전하게 경기를 풀어 나갔다.

“에이 뭐야, 아까랑 완전 판박이잖아.”

김민우 기자는 실망감을 감추지 못하며 말했다.

“아니야, 이전 라운드 때보다 움직임이 훨씬 날카로워졌어.”

“그런가? 솔직히 잘 모르겠는데?”

“방금까지만 해도 문승대 선수에게 쫓기는 느낌이 있었는데 지금은 여유가 넘치잖아.”

“흠, 듣고 보니까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친구의 설명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아리송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전 경기에서도 그렇고 상대가 뭘 할지 꿰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야. 흐흠, 겉으론 허술해 보여도 관록은 무시 못 하겠네.’

김현철 기자는 내가 보여 주고 있는 경기 운영이 백성철 관장님의 작품이라고 생각했다.

상대 선수를 분석하거나 게임 플랜을 짜는 건 통상적으로 코치의 역할이었기 때문이다.

“헉, 헉.”

문승대는 혼신의 힘을 다한 공격들이 번번이 무위로 돌아가자 체력이 급속도로 떨어졌다.

그는 선수들 사이에서도 체력이 좋기로 유명했으나 KO 직전까지 몰렸던 상황에서 급하게 페이스를 올리는 바람에 숨이 턱끝까지 차오르고 말았다.

땡 땡-

시합 종료를 알리는 종소리가 울렸다.

패배를 직감한 문승대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고 난 덤덤한 얼굴로 판정을 기다렸다.

“고생했다.”

“저보단 관장님이 고생하셨죠.”

결과는 예상대로 나의 승리였다.

강도 높은 시합을 연이어 치른 탓일까, 링에서 내려온 나는 주변에 배치된 의자에 그대로 주저앉았다.

“좀 있다가 메달 수여식 끝나면 근처에서 고기라도 먹자.”

“예, 관장님.”

“돼지고기는 질리게 먹었으니까 오늘은 소고기로 먹자.”

“감사합니다!”

백성철 관장은 제자를 흐뭇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자식, 국가 대표는 나도 못 해 본 건데 정말 대단하네. 말년에 제자 잘 만나서 호강하게 생겼어.’

그는 프로 세계에선 동양 챔피언까지 해 본 실력자였으나 아마추어 복싱하고는 인연이 없었다.

고등학교 때 참가했던 전국체전에서도 은메달에 그쳤고 국대 선발전에도 참가했지만, 상비군에 뽑힌 게 전부였다. 운동을 하는 사람이라면 가슴에 태극 마크를 한 번쯤은 달아 보고 싶어 했고, 이는 백성철 관장도 마찬가지였다.

국내와 동양 챔피언을 했음에도 왠지 모를 허전함을 느꼈던 관장은 제자 덕분에 속이 후련해졌다.

“곧 시상식이 열릴 예정이니 준비해 주시길 바랍니다.”

“알겠습니다.”

진행 요원의 말을 들은 나는 땀으로 젖은 시합 복을 벗고 일반 트레이닝복으로 갈아입었다.

“사진 찍겠습니다.”

메달 수여식은 간단하게 진행됐고 곧이어 포토 타임이 이어졌다.

‘어? 평소보다 기자들이 훨씬 많은 것 같은데?’

이전 전국체전에서 우승을 한 이후로 나와 접촉하려는 기자들이 부쩍 늘었으나 관장님께서 인터뷰를 모두 거절하신 탓에 뜨거웠던 관심은 차갑게 식어 버렸다.

신인에 불과한 선수가 인터뷰를 계속 거부한다는 건 취재를 해야 하는 기자 입장에선 썩 유쾌한 일은 아니었다. 심지어 몇몇 기자들은 앞으로 나와 관련된 기사는 쓰지 않겠다며 불쾌한 감정을 드러내는 자들도 있었다.

그러나 열일곱에 불과한 선수가 아시안 게임 은메달리스트와 지난 올림픽에 참가했던 베테랑을 꺾은 건 이변을 넘어 기적에 가까운 사건이었기 때문에 제아무리 악감정이 있던 기자들도 외면할 수 없었다.

“저는 만평일보 심덕현 기자입니다. 괜찮으시면 인터뷰 잠깐 가능할까요?”

“조금 있다가 저희랑도 인터뷰를 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포토 타임이 끝나기 무섭게 기자들은 날 에워싸고 인터뷰를 요청했다.

“관장님. 예, 알겠습니다.”

인터뷰에 앞서 허락을 받으려던 나는 관장님이 손으로 오케이 사인을 보내시는 걸 확인했다.

‘이젠 메이저 언론사들도 관심을 가져 주는 구나.’

예전에는 우승을 거둬도 주로 지역지나 인터넷 신문사 기자들이 찾아왔다면 오늘은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는 일간지나 공영 방송 기자들이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저, 혹시 서울 데일리의 김현철 기자님 계신가요?”

나는 김현철 기자에게 우선권을 주기 위해 그의 이름을 불렀다.

김현철 기자는 다른 자들이 인터뷰 거절을 이유로 기사 한 줄 써 주지 않을 때 유일하게 호의적인 글을 써 준 사람이었다.

파급력을 따진다면 김 기자님이 아닌 타 언론사 기자와 인터뷰를 하는 게 옳았지만, 데뷔한 이래로 계속 관심을 가져 준 사람에게 끌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저, 여깄습니다.”

“저는 일단 김현철 기자님과 인터뷰를 진행할 겁니다. 추후 인터뷰는 저쪽에 계시는 백성철 관장님과 논의하시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멀찍이 서서 이야기를 듣던 백성철 관장은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며 눈이 휘둥그레졌다.

방금 경기를 마친 상황에서 이 많은 사람들과 인터뷰를 나누는 건 사실상 어불성설이었다.

“거 참, 잠깐이면 되는데 되게 그러네.”

“예전부터 엄청 비싸게 굴잖아. 치사해서 정말.”

“인터뷰를 원하거나 진우에 대해 물어보고 싶은 게 있으시면 저한테 오세요. 제가 이래 봐도 코치라서 저 친구에 대해 모르는 게 없답니다.”

몇몇이 불만스러운 기색을 드러내자 백성철 관장은 기자들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아까 그놈들은 무조건 제외야. 인터뷰는 메이저 언론사 한두 곳이랑 진행하고 나머지는 내가 커버하자. 자, 어디랑 먼저 하면 좋을까?’

처음 부탁을 받았을 땐 어이없어하던 관장님은 어느새 자기 일처럼 열정을 갖고 기자들을 대했다.

“관장님께서 강 선수를 많이 아끼시는군요.”

“훗, 그러게요. 사전에 합의된 게 아니라 화내실 줄 알았는데 감사하네요.”

나는 기자들과 대화를 나누는 관장님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저, 괜찮다면 제 친구와 함께 인터뷰를 진행해도 되겠습니까?”

“네, 물론이지요.”

“하하, 감사합니다. 성동일보 김민우 기자입니다.”

친구 옆에서 쥐 죽은 듯 가만히 있던 김민우 기자는 활짝 웃으며 나에게 악수를 건넸다.

“오늘따라 기자님들이 유난히 많으시네요.”

“다른 경기 보시던 분들까지 죄다 몰려서 그렇게 보이는 겁니다.”

“저 하나 때문에 보던 경기도 팽개치고 여기로 왔다고요?”

김현철 기자의 설명에 난 의아해하며 반문했다.

“고등학교 1학년이 국제 무대에서 입증된 선수들을 꺾었는데 이게 어디 보통 일이겠습니까?”

“거기다가 비주얼까지 훌륭하니 안 오고는 배길 수가 없었겠지요. 제가 볼 땐 포털 상단에 기사가 실릴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정말인가요?”

김민우 기자의 말에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커졌다.

내 이름을 포털에 검색하면 서울 데일리와 몇몇 언론사가 쓴 기사들이 나오긴 했으나 포털 스포츠란에 노출이 된 적은 극히 드물었다.

그나마 만평일보에서 내 이름을 언급해 줘서 포털 기사에 나올 수 있었는데, 전국체전 우승자 명단에 낀 수준이라 기사라고 하기도 민망했다.

“하하, 그렇습니다. 제 예상이지만, 기사가 올라오는 순간 금방 유명세를 타실 것 같습니다. 강진우 선수님한테는 화제를 끌 수 있는 요소가 적지 않거든요. 운이 좋으면 티비 출연 제의를 받을 수도 있고요.”

“아, 네.”

나는 뭔가를 이루기 전에는 티비나 광고 출연 같은 것은 할 생각이 없었기에 밋밋한 반응을 보였다.

“혹시, 매스컴에 노출되시는 게 부담스러우십니까?”

이런 내 모습을 지켜보던 김현철 기자는 조심스럽게 물어봤다.

“꼭 그런 건 아니지만 아직은 복싱에 집중해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저도 그 말씀에 동의합니다. 그러나 출연 제의가 들어오면 어느 정도는 받아 주셨으면 하네요.”

“대중들에게 복싱을 홍보하기 위해서인가요?”

“네, 강진우 선수처럼 스타성이 강한 분이 티비나 기사에 자주 노출될수록 복싱계 입장에선 좋으니까요.”

속내를 들킨 김현철 기자는 순순히 인정했다.

“기자님께서 말씀하신 취지는 이해하지만, 저는 복싱을 그저 즐기고 싶을 뿐 복잡하게 생각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아, 물론입니다. 이런 부분도 있다는 거지 선수님이 부담을 느낄 필요는 없습니다.”

내 말을 들은 그는 황급히 손을 저으며 말했다.

솔직히 나도 기자님의 말씀이 옳다고 생각했다. 공익적인 측면에서 도움을 준다는 명분 외에도 복서로서 크게 성공하려면 판을 키우는 편이 여러모로 좋았으니까.

하지만, 구태여 내 입으로 누굴 돕겠다며 나서고 싶지는 않았다.

좋아해서 하는 일이라도 그게 의무가 되면 스트레스였기 때문이다.

“그럼 슬슬 인터뷰를 시작할까요.”

“네, 좋습니다. 우선 선발전 우승 소감을 먼저 들어 보겠습니다.”

내가 화제를 전환하자 김현철 기자는 자연스럽게 질문을 던졌다.

인터뷰는 약 10분간 진행됐고 이후에도 다른 기자들과 대화를 나누느라 30분가량의 시간이 소모됐다.

“야, 뭐가 그렇게 오래 걸리냐?”

“죄송해요. 이제 끝났으니까 빨리 밥 먹으러 가요.”

“훗, 그래.”

관장님은 씽긋 웃으며 대답했다.

이날 우리는 관장님이 잘 아는 소고깃집에 가서 든든히 배를 채우고 집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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