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 19화 대비 (2)
‘분명히 내 말을 들은 것 같은데, 왜 이렇게 접속이 느린 거야?’
침대에 누워 접속을 기다리던 나는 아무런 변화도 감지되지 않자 답답한 마음이 들었다.
<아르마이스의 의지가 발동되었습니다.>
<미션이 생성되었습니다.>
<목표: 새로 등록된 캐릭터들과 스파링을 하십시오.>
<보상: 복싱 관련 스탯 경험치 +50%>
‘미션 때문에 접속이 늦어졌던 거구나. 그나저나 갈수록 경험치를 얻는 게 힘들어지는 것 같아.’
레벨이 높아질수록 경험치 획득이 어려워지는 건 당연한 이치였다.
브루스 단장님이 보여 줬던 목록에는 못해도 다섯 이상의 투사들이 적혀 있었고 추가로 데이터를 더 보내 준다고 했기 때문에 미션 완료까지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릴 것으로 예상됐다.
‘일단 시작해 보자.’
어차피 해야 할 것이라면 하루라도 빨리 시작하는 편이 좋을 것이다.
나는 머리를 굴려 봤자 의미 없다는 것을 알았기에 일루션에 접속하여 새로 생성된 캐릭터들을 살펴봤다.
“와, 이거 생각한 것보다 훨씬 대박인데?”
총장님에게 받은 데이터를 기반으로 생성된 캐릭터들이 홀로그램 형태로 쭉 떴다.
내가 손가락으로 홀로그램을 터치하면 캐릭터의 신체 사이즈와 기본 스탯이 표시되었고 옆으로 넘기면 다른 캐릭터들도 살펴볼 수 있어 여러모로 편했다.
“항상 느끼는 거지만, 총장님께서 일 처리 하나는 확실히 하신단 말이야.”
일루션에 접속한 상태라 굳이 속으로 생각할 필요는 없었다.
캐릭터의 스탯 구성은 현자의 눈으로 확인할 때의 그것과 똑같았는데, 이는 총장님이 과거에 내가 미션과 스탯에 대해 언급했던 것을 염두에 두고 개발을 해서 가능한 일이었다.
이번에 새로 만들어진 캐릭터는 총 5개로 하나하나가 다른 특징을 갖고 있었다.
뛰어난 동체 시력과 민첩성을 바탕으로 아웃복싱을 하는 녀석이 있는가 하면, 엄청난 맷집과 힘을 기반으로 한 인파이팅 유형의 캐릭터도 존재했다.
“A랑 스파링을 할게.”
<사용자의 지시를 받아 대전 모드를 실행시키겠습니다. 곧 있으면 캐릭터 A가 중앙에 나타나니 준비를 해 주시길 바랍니다.>
브루스 단장은 목록 속 인물들의 이름을 편의상 A, B, C로 명명했다.
원래라면 알파벳이 아닌 이르젠 제국의 문자로 표시되어야 했으나, 데이터가 전송되는 과정에서 자동으로 번역되어 알파벳으로 표기되었다.
‘브루스 단장님이 제대로 훈련시킨 모양인데?’
이미 스탯을 확인했기 때문에 보통 실력이 아닐 거라는 것은 짐작했지만, 복싱을 능숙하게 구사하는 건 다른 문제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가상 스파링에 들어가니 캐릭터 A는 일류 복서 못지않은 현란한 몸놀림을 보여 줬고 나는 어느새 실제 대결을 하는 것과 같은 집중력으로 스파링에 임하고 있었다.
<남은 스파링 횟수: 29회.>
‘스파링 대상이 많아서 걱정했는데, 횟수라도 줄어서 다행이야.’
국가 대표 선발전을 준비를 위해 가상 스파링을 할 때는 캐릭터별로 50회의 스파링을 소화해야 했으니 30회면 횟수 측면에서 많이 줄었다고 볼 수 있었다.
<데이터 다운이 완료되었습니다.>
<새로운 캐릭터 F가 막 생성되었습니다. 확인해 보시겠습니까?>
“윽, 그새 또 데이터를 보내셨잖아?”
브루스 단장님은 내가 좋아하는 모습을 보이자 작업 속도를 더 끌어올렸고 대화를 마친 지 채 1시간이 지나기도 전에 새 데이터를 보내 주었다.
캐릭터가 생길 때마다 30번의 추가 스파링을 해야 했지만, 그렇다고 그만 보내 달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미션 수행을 쉽게 하기 위해 꼼수를 부렸다가 어떤 보상도 받지 못하게 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하아, 물 좀 마시고 오자.’
이후, 10번 이상의 가상 스파링을 더 소화한 나는 일루션을 종료한 뒤 물을 마시러 거실로 나갔다.
거실 등이 꺼진 것을 보니 부모님은 이미 주무시는 모양이었다.
나는 부엌 찬장에서 컵을 꺼낸 후 정수기 버튼을 누르고 물이 채워지기를 기다렸다.
‘미션에 따른 보상이 아니더라도 실력 향상에 큰 도움이 되겠어.’
다양한 유형의 캐릭터들과 스파링을 함으로써, 실전 경험이 빠르게 쌓여 감을 느낄 수 있었다.
대다수 사람들의 육체 능력은 20대 후반에 정점을 찍고 이후에는 조금씩 하락세를 겪기 마련이다.
그러나 가끔씩 세월을 역행하여 30대 중후반이 되어서 챔피언 자리에 등극하는 선수들이 있다.
이들은 비록 젊은 시절 때보다 신체 능력이 감소했지만, 그동안 쌓아 왔던 경험으로 시합을 풀어 나갈 수 있는 노하우를 지니고 있었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일루션’은 나에게 선물과도 같았는데, 이유로는 크게 두 가지가 있었다. 첫째 앞서 언급한 베테랑 선수들처럼 풍부한 경험을 쌓을 수 있다는 점이 있고, 둘째는 타격을 허용함으로 인해 생기는 누적 데미지를 피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마지막에 했던 놈은 정말 강적이었어. 이번 기회에 나보다 강한 선수하고 대적하는 법도 익혀야겠어.’
브루스 단장님이 보내 준 캐릭터 F는 모든 면에서 나보다 월등한 기량을 갖고 있었다.
국가 대표 선발전 때 일부 스탯이 나보다 뛰어난 선수를 만난 적은 있었지만, 녀석과 같은 압도적인 상대는 사실상 처음이었다.
스파링 내내 가드를 올린 채 방어에만 급급했고 녹아웃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라운드 내내 도망만 다녔다.
‘내일은 집에서 가상 스파링만 해야겠어.’
촌외 훈련이 허가되면 선수촌 입소가 늦어질 수도 있었기에 스스로 아시안 게임을 대비할 필요가 있었다.
나는 내일 부모님이 나가시자마자 일루션에 접속하기로 계획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 * *
연말이 지나고 새해가 밝았다.
남들은 새해에 좋은 일이 가득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해돋이를 보러 가거나 가족들과 오붓한 시간을 보내는 데 한창이었으나 나는 지난 일주일간 방에 틀어박혀서 가상 스파링을 하는 데, 열중했다.
덕분에 6개의 캐릭터 중, 4개의 캐릭터와 스파링을 마칠 수 있었고 보상과 별도로 스탯이 상승하는 기쁨도 누릴 수 있었다.
‘동체 시력이랑 정신력이 50%씩 증가했어. 이대로면 LV 5도 금방 찍겠네. 그나저나 추가로 데이터를 더 보내 주신다고 하셨는데 이걸 어떻게 하지?’
4번째 캐릭터과 스파링을 막 마쳤을 무렵, 투사 2명에 대한 데이터 수집을 추가로 마쳤다는 총장님의 메시지를 받았다.
나는 총장님께 감사하다는 답신을 보냈으나 과제가 늘어난 탓에 속으로는 죽을 맛이었다.
“진우야, 뭐 해 안 들어오고.”
“네, 관장님.”
생각에 잠겨 걷다 보니 어느새 체육관에 도착해 있었다.
오늘은 나의 요청으로 관장님께서 오전부터 체육관에 나와 계셨다.
“신정은 잘 보냈어?”
“그냥 가족들이랑 집에서 평범하게 보냈어요.”
“뭐, 사람들 사는 게 거기서 거기지 뭐. 그건 그렇고 무슨 일 때문에 날 보자고 그런 거야?”
백성철 관장은 녹차가 들어 있는 종이컵을 나에게 건네며 질문을 던졌다.
“훈련 계획에 대해서 상의드릴 게 있어서요.”
“응, 이야기해봐.”
“관장님께 미처 말씀드리지 못한 게 있었는데요. 제가 사실…….”
나는 관장님께 처음으로 웹소설을 쓴다는 것을 밝혔다.
이런저런 사정을 말씀드리지 않는다면 이번 겨울 방학 전체를 특훈에 활용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소설을 쓴다는 건 잘 알겠어. 그러면 정확히 네가 원하는 게 뭐야? 설마 모든 훈련을 개인 훈련으로 대체하려는 건 아니겠지?”
“관장님과 훈련은 계속할 생각입니다. 다만 전국체전 때처럼 전 시간을 훈련에 할애하기는 좀 어렵지 않을까 해서 말을 꺼낸 거고요.”
“평일 오전이랑 토요일 하루는 나에게 할애해라. 이 이상은 양보 못 한다.”
백성철 관장은 팔짱을 낀 채 완고한 얼굴로 말을 내뱉었다.
“예, 알겠습니다.”
“참네, 거기서 바로 알았다고 하니까 괜히 김빠지네.”
“관장님께서도 양보를 많이 하셨는데 이 정도는 당연히 들어드려야죠.”
“이제 알겠다. 선수촌 들어가면 소설 연재에 지장이 생길까 봐 촌외 훈련을 신청했구나?”
“그것도 일정 부분 작용하긴 했습니다.”
나는 순순히 관장님의 말을 인정했다.
“자식, 그런 일 있으면 앞으로 편하게 말해. 난 또 네가 일부로 훈련 빼먹으려고 뺑끼 쓰는 줄 알았잖아.”
“훗, 제가 그럴 리가 없잖아요.”
관장님께서 의외로 시원스러운 모습을 보여 주자 마음이 편안해짐을 느꼈다.
“그나저나 입촌 전까지 실력이 많이 늘어야 할 텐데 걱정이다. 소문에 민규가 엄청 벼르고 있다던데…….”
“그분이 누구길래 걱정을 하시는 거예요?”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반문했다.
“저번에 말한 감독하는 친구 있잖아. 그놈 이름이 백민규야. 현재 선수촌에서 선수들을 훈련 시키고 있는데, 네가 촌외 훈련 신청서를 제출한 것에 화가 많이 났다고 들었어.”
“저라도 짜증이 날 것 같아요. 어떻게 하겠어요. 선수촌 들어가면 감당해야죠.”
선수촌 내에서 진행하기 어려운 훈련을 진행하고자 단체로 촌외 훈련을 신청하는 경우는 있어도 개인적인 사유로 신청하는 건 극히 드문 일이었다.
“나랑 그래도 안면이 있는 녀석이라 통화를 한 적이 있거든. 그놈 말로는 선수촌 입소 후, 기량을 점검할 건데, 아시안 게임에 뛸 정도가 아니라고 판단되면 국가 대표 자격 박탈을 검토하겠다고 하더라.”
“감독이 선발된 국가 대표의 자격을 박탈할 권한도 있나요?”
기분이 상한 것까지는 이해하나 국대 박탈을 운운하니 나도 모르게 언성이 높아졌다.
“널 대체할 선수들이 있는데 하려면 왜 못 하겠어?”
“상비군들을 말하는 거군요.”
“그래, 아무튼 네 입촌 시기가 다른 선수들보다 2달 정도 늦춰질 것 같으니까 기량 향상에 최선을 다해야 할 거야. 참고로 선수촌의 훈련 강도는 네가 여태껏 경험하지 못한 수준일 거다. 게다가 상비군과 국대 선수들끼리 스파링도 진행돼서 외부에서보다 훨씬 효율적으로 실력이 오를 거고.”
내심 제자의 마음이 바뀌길 바랐던 백성철 관장은 열변을 토했다.
하지만, 그런 스승의 마음과 달리 나의 태도는 태연자약하기 그지없었다.
“원래는 3달이라고 하셨는데, 1달 줄었네요. 2달이면 3월 초에는 입소해야겠네요.”
“야, 이 판국에 2달, 3달이 뭐가 중요하냐. 국가 대표 자리 빼앗기고 싶지 않으면 지금 당장 대책을 강구해야 돼.”
“저도 집에서 쉬면서 나름대로 대비책을 세워 뒀어요. 그리고 관장님께서 옆에 계시는데 뭐가 걱정이겠어요?”
“나름의 대비책이란 게 이미지 트레이닝을 말하는 건 아니겠지?”
“그것 포함해서 몇 가지 생각해 둔 게 있어요. 말 나온 김에 가볍게 훈련을 하면 어떨까요? 지난주에 개인 훈련을 열심히 했거든요.”
크리스마스를 포함한 연말 기간에 일루션을 붙들고 가상 스파링 삼매경에 빠졌던 나는 발전된 기량을 보여 드려 관장님의 걱정을 완화시키고 싶었다.
“그래, 오늘 미트 훈련부터 시작해서 매스 스파링까지 풀코스로 해 보자.”
“네, 관장님.”
나는 힘차게 대답한 후, 탈의실로 환복하러 갔다.
팡- 팡-
잠시 후, 미트를 치는 경쾌한 타격음이 체육관에 울려 퍼졌다.
“뭐야? 혹시 나 몰래 다른 체육관을 다니는 건 아니지?”
“제가 따로 운동한다고 말씀드렸잖아요.”
“쓰읍, 이 정도 타격감이 혼자 운동해서 나온다고?”
선발전 이후, 처음으로 실시하는 훈련임에도 불구하고 더 나은 몸놀림을 선보이자 관장님은 다소 놀란 것처럼 보였다.
‘안 본 새에 실력이 더 좋아졌잖아? 도대체 연말 기간에 뭘 하고 돌아다닌 거야?’
곧이어 벌어진 스파링에서도 실력이 늘었음을 입증하자 백성철 관장님은 나에 대한 의심을 모두 거둬들이기로 했다.
“이번 주말까진 잘 쉬고 월요일부터 같이 훈련하자.”
“훈련은 오전만 진행하는 건가요?”
“그래, 지금처럼 실력이 계속 는다면 굳이 하루 종일 나와 붙어 있을 필요는 없겠지.”
백성철 관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의 뜻을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