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사람들이 자꾸만 보은한다-81화 (81/122)

81. 19화 대비 (3)

“어? 드디어 저를 믿어 주시는군요.”

“크흠, 예전부터 널 믿고는 있었어. 단지 방법이 좀 특이해서 궁금했을 뿐이야.”

“저, 지난 주에 촌외 훈련 신청서를 제출하신 걸로 아는데 혹시 어떻게 됐는지 알 수 있을까요?”

관장님이 의심을 거둬들인 걸 확인한 나는 입촌 연기건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여쭤봤다.

“너 오자마자 이야기한다는 걸 깜빡했다. 원래는 너한테 직접 연락이 갈 텐데, 내가 지인에게 미리 연락해서 어떻게 처리됐는지 알아봤어. 내부에서 논란이 일긴 했지만, 8주 동안 입촌을 연기해 주기로 결정됐다.”

“1월 중순 경에 입촌 예정이니까 8주면 3월에는 입소를 해야 한다는 말이네요.”

“8주면 다른 선수들은 꿈도 못 꾸는 특혜니까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자.”

제자가 불만족스럽다는 투로 대답하자 관장님은 고개를 저으며 나를 달랬다.

“이것도 관장님께서 노력하셔서 간신히 얻어 낸 건데, 이 이상 욕심을 부릴 수는 없죠.”

“옛날이었으면 신청만으로도 징계를 받았겠지만, 요즘은 운동한다고 모든 걸 작파하는 건 피하는 분위기라 간신히 통과시킬 수 있었어.”

“감사합니다, 관장님.”

나는 고개를 숙이며 감사의 마음을 표했다.

엘리트 체육에서 생활 체육으로 지향점이 바뀐 게 영향을 줬다고는 하나 협회와 복싱 업계에 많은 인맥을 갖고 있는 관장님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꼼짝 없이 1월에 입촌해야 했을 것이다.

“감사한 줄 알면 개인 훈련 소홀히 하지 마. 아무튼 다음 주 월요일부터 훈련 시작이니까 각오하고 와.”

“예, 알겠습니다.”

대화를 마친 우리는 근처 음식점에서 간단히 점심을 해결한 후 헤어졌다.

‘입촌 전까지 준비를 철저히 해야겠어.’

입촌하고 아시안 게임까지 약 두 달간 소설을 쓸 수 없다는 것을 감안하면 분량을 미리 확보할 필요도 있었다.

나는 남은 8주를 어떻게 보낼까 고민하며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 *

소설을 쓰고 복싱 훈련에 전념하다 보니 시간은 쏜살같이 흘러갔다.

<아르마이스의 의지가 발동됩니다.>

<미션이 완료되었음을 알려 드립니다.>

<보상으로 민첩성, 힘, 체력, 동체 시력의 경험치가 50% 오릅니다.>

<경험치가 오름에 따라 레벨 변동이 발생하였습니다. 확인해 보시겠습니까?>

“응, 확인할게.”

마지막인 8번째 캐릭터와 30번의 스파링을 모두 마친 순간, 미션 완료를 알리는 창이 눈앞에 떴다.

나는 일루션에 접속한 상태라 주변 눈치 없이 편하게 말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훗, 열심히 한 보람이 있네.”

우연의 일치였을까, 경험치가 늘음에 따라 방금 언급된 스탯들이 모두 레벨 업을 했다.

경험치가 느는 것만으로도 실력 향상이 됐지만, 레벨이 오를 때 느낄 수 있는 변화는 차원이 달랐다.

체력, 동체 시력, 힘이 무려 LV 5에 달했고 민첩성은 LV 6으로 올라서 일전에 붙은 적이 있는 문승대 선수와 정선호 선수를 만나도 어렵지 않게 이길 자신이 생겼다.

‘이 정도면 백민규 감독님도 꼬투리 잡지는 않겠지?’

관장님 말씀에 따르면 백민규 감독은 바깥에서 기량을 끌어올릴 수 있다는 내 말을 믿지 않는다고 했다.

양질의 트레이닝 시설과 전담 코치진 그리고 언제든지 스파링을 할 수 있는 수준급 선수들까지 선수촌이 바깥보다 훈련하기 용이하다는 건 명백한 사실이었다.

따라서 어떤 논리적인 사유로 핑계를 대기보단 실질적으로 실력을 끌어올려 감독님께 입증하는 게 그 무엇보다 중요했다.

“이런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나?”

시간을 확인한 나는 일루션을 종료한 뒤 급하게 옷을 챙겨 입고 나갈 준비를 했다.

오늘 저녁은 가족들과 식사를 하기로 약속이 돼 있었다. 그동안 미션 수행과 글을 쓰는 데 바빠 부모님과 함께 시간을 거의 보내지 못했고 곧 있으면 입촌을 해야 하는 상황을 고려하면 나름 의미가 있는 자리라고 할 수 있었다.

‘후, 가면 또 어른들이 이것저것 물어보시겠네.’

이번 저녁 식사에는 우리 가족 외에 부모님 지인들도 참석하기로 되어 있었다.

이들은 부모님과 대학 동문 사이로 옛날에 동아리 활동을 함께했었다고 한다.

한국대학교 내에서도 꽤 유명한 동아리라 부원들 숫자가 적지 않았으나 보통 만날 때는 친하게 지냈던 사람들끼리 만나는 편이라고 했다.

어렸을 적부터 만났던 사이라 서로 허물없었고 그만큼 격 없는 질문도 편하게 오가는 편이었다.

그러다 보니 자식 간 비교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는데, 이전까지 별 볼 일 없던 나는 모임에 갈 때면 모욕 아닌 모욕을 들어야 했다.

“성빈이가 들어간 국제중학교에 쟁쟁한 집안 자식들이 많이 있더라고. 예전에 입학식에 가니까 재벌 집 사모랑 국회 의원들이 참석하더라니까?”

“원래 끼리끼리 어울린다고 하잖아. 이번에 민정이도 수학 경시 대회에서 상 탔는데, 학원 강사 말에 따르면 나중에 고등학교 들어갈 때 스펙으로 활용할 수 있데.”

“국제 경시 대회 입상이니까 나중에 과학고나 영재고등학교 들어갈 때 도움이 될걸? 그나저나 진우는 요즘 어때?”

“그냥, 다른 애들처럼 학원도 보내고 과외도 시키긴 했는데, 그냥 본인 하고 싶은 거 시키려고.”

“야, 그래도 좋은 학교를 나와야 인맥을…….”

당시 나는 눈앞에 있는 음식을 먹으며 모르는 척했으나 대화 내용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모임이 끝난 이후 달라진 모습을 보여 주겠다며 잠시 공부에 열중한 적도 있었지만, 공부 머리가 없었던 탓에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에효, 뭐 어떻게든 되겠지. 일단 가 보자.’

외출 준비를 마친 나는 택시를 타고 약속 장소로 향했다.

* * *

서울 동대문구에 위치한 유명 호텔에 도착한 나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스카이라운지로 향했다.

“안녕하십니까?”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직원 하나가 응대를 하기 위해 나에게 다가왔다.

“혹시 일행이 있으실까요?”

“예, 저녁 7시 박명길로 예약을 했다고 들었는데요.”

“잠시만요, 네 이쪽으로 따라오시죠.”

직원은 예약 현황을 확인한 후 나를 방으로 안내했다.

드르륵-

“어, 진우 왔구나.”

“안녕하세요.”

나는 손을 흔들며 인사를 건네는 박명길 아저씨에게 꾸벅 인사를 했다.

그는 한국대 행정학과 출신으로 이른 나이에 행정고시에 응시하여 합격했고 현재는 정부종합청사에 일하는 중이었다.

“최근에 김성회 의원을 만난 적이 있는데 조만간 정부에서 재산세 조정에 들어갈 거래.”

“그래?”

“알다시피 올해 부동산 가치가 급증했잖아. 따라서…….”

“진우야, 수프 식으니까 어서 먹어.”

엄마는 나를 보며 자상하게 말을 건넸다.

“예.”

‘아저씨는 변하게 없으시네.’

어른들은 무미건조한 얼굴로 아저씨가 하시는 말씀을 들으며 식전 수프를 드시고 계셨다.

박명길은 평소 친구들과 만날 때면 자신의 영향력을 과시하기 위해 고위 관료나 유명 인사들을 만난 이야기를 꺼내곤 했는데 이는 행정부에서도 영향이 크다는 기획재정부 소속이라는 이유도 있었지만, 백제호텔 부사장으로 있는 부인의 인맥이 더 큰 역할을 했다.

‘와, 확실히 위치가 좋아서 그런가 야경 죽인다.’

VIP룸에서 보는 서울의 밤 풍경은 말 그대로 환상적이었다.

가로등이 깔려 운치 있는 분위기를 자랑하는 한강과 뒤편으로 쭉 펼쳐진 강남의 전경까지 이 모든 것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백제호텔은 국내에서 가장 인지도가 높은 곳으로 서울을 포함한 전국 대도시에 지점을 갖고 있었는데, 현재 우리가 있는 곳은 가장 퀄리티가 좋다고 평가받는 한남동에 위치한 호텔이었다.

“경치 좋지? 진우도 성공해서 여자 친구랑 이런 데도 오고 해야지. 안 그래?”

“애한테 그런 소릴 하고 그래? 나중에 대학 들어가면 재윤이랑 같이 놀 수 있게 방 잡아 줄게.”

박명길의 말에 김선화가 가볍게 핀잔했다.

그녀는 앞서 내가 말한 박명길의 와이프였는데, 화려한 치장과 철저한 관리 덕분에 남편보다 적어도 10살 이상 어려 보였다.

“호텔에서 할 게 뭐가 있다고 방을 잡아 줘? 차라리 스키장 리조트나 그런 데를 보내 줘야지.”

“촌스럽게 진짜, 요즘 애들 사이에서 호캉스가 유행인 거 몰라? 그나저나 지연이는 못 온 거지? 재윤이가 보고 싶어 했는데 아쉽다.”

박재윤은 나와 동갑인 친구로 서울에 소재한 외국어 고등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지연이는 활동하느라 바빠서 못 왔어. 다음에 기회 되면 그때 보자.”

“아, 네.”

‘참네 지가 뭐라고 지연이를 보고 싶다 난리야?’

나는 그런 그를 탐탁지 않은 눈초리로 쳐다보며 생각했다.

어렸을 적부터 공부를 잘했던 박재윤은 부모의 전폭적인 지지와 무조건적인 사랑을 받고 자랐다.

이런 환경에서 자라서였을까, 그는 사람들을 대할 때 교만함이 흘러넘쳤고 능력과 외모에 따라 차등적으로 대하는 게 습관화되어 있었다.

옛날부터 뛰어난 외모를 자랑했던 동생은 어른들의 이쁨을 독차지했기에 녀석이 함부로 대하지 못했지만, 내세울 게 거의 없었던 나는 하천에 사는 송사리 정도의 취급을 받았다.

“진우야, 너 옛날에 글 쓴다고 하던데 잘되고 있어?”

“어, 그럭저럭.”

“중학교 때부터 쓰기 시작한 건데 왜 여태 소식이 없어? 너도 열심히 해서 ‘천마회귀’ 같은 글을 쓰면 좋잖아.”

박재윤은 타이르는 듯한 말투로 나에게 훈계했다.

‘그 천마회귀를 쓴 작가가 나란 걸 알면 표정이 볼만하겠는데?’

나는 당장이라도 사실을 밝혀 녀석의 코를 납작하게 하고 싶었지만, 그럴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에 잠자코 있기로 했다.

“성훈이는 왜 안 오지? 무슨 바쁜 일이라도 있나?”

아버지는 약속 시간을 한참 넘겼음에도 친구가 오지 않자 궁금하여 물었다.

“연락 못 받았어? 중국 쪽 바이어가 오늘 갑자기 보자고 해서 못 온다고 했잖아.”

“그런 일이 있었어?”

“아버지 회사 물려받은 지 얼마 안 돼서 업무 파악이 아직도 안 됐나 봐. 연락할 때마다 매번 바쁘다고 하더라고.”

“바쁘다는데 어떻게 해. 그냥 우리끼리 먹어야지 뭐.”

설명을 들은 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이며 식사를 다시 시작했다.

“가만 보면 너희 애들은 예체능에 특화된 것 같단 말이야.”

“정호 씨랑 수민 씨 봐 봐. 엄마 아빠가 인물이 좋으니까 애들도 인물이 좋잖아.”

김선화는 별생각 없이 대화를 이어 갔다.

그러나 박명길은 그녀의 말이 거슬렸는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말을 이어 갔다.

“수민이가 대학 다닐 때 인기가 많긴 했지. 넌 진짜 행운인 줄 알아야 돼. 대학 때 수민이 쫓아다니던 애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알아?”

“그냥 인연이 돼서 만난 거지 뭐.”

아버지는 겸연쩍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재수 없는 새끼.’

박명길은 온화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과 달리 속이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그는 대학 내내 우리 엄마를 좋아했고 환심을 사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했다. 그러나 본인보다 늦게 동아리에 들어온 아버지가 엄마와 사귀고 결혼까지 하자 배알이 꼴리는 걸 참을 수 없었다.

게다가 훤칠한 외모를 자랑하는 아버지와 달리 머리 좋은 거 말고 자랑할 게 없던 박명길은 세월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열등감을 갖고 있었다.

“그래도 명길이 너는 행정고시도 합격하고 선화 씨도 만났잖아.”

엄마는 박명길의 속이 좁다는 걸 알고 그를 달리기 위해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했다.

“크흠, 뭐 그렇긴 하지. 그건 그렇고 지금 조금 잘나간다고 공부를 소홀히 하면 안 돼. 연예인이나 운동선수가 돈을 잘 번다고 하지만, 학벌이나 자격증처럼 영속하는 게 아니잖아.”

“우린 그 부분에 대해서는 자율에 맡기기로 했어.”

아버지는 쓸데없는 이야기를 하는 명길의 모습에 기분이 상했지만, 애써 덤덤한 척을 했다.

하지만 그런 아버지의 마음은 아랑곳하지 않고 박명길은 말을 계속 쏟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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