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사람들이 자꾸만 보은한다-84화 (84/122)

84. 20화 실력 행사 (3)

“이런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진우야, 가서 잘하고 힘든 일 있으면 언제든지 연락해라.”

관장님은 시간을 확인하더니 들어가라고 손짓을 했다.

“먼 길인데 같이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자식, 고마운 줄 알면 아시안 게임에서 금메달 따라.”

“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나는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후우, 먼저 들어가라 난 여기 한 바퀴 쭉 돌아보다 가야겠어.”

“알겠습니다. 서울 조심히 올라가세요.”

제자를 두고 먼저 떠나는 게 내키지 않았던 백성철 관장은 내가 들어가는 것을 지켜본 후에야 서울로 출발했다.

‘지은 지 얼마 안 돼서 그런가 확실히 깔끔하네.’

센터 본관으로 들어간 나는 감독님이 계시는 방을 확인한 후 발걸음을 옮겼다.

똑- 똑

“누구세요?”

문을 노크하자 방에서 굵은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늘 만나 뵙기로 한 강진우라고 합니다.”

“들어와라.”

백민규 감독의 부름에 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관장님이 왜 조심하라고 하신지 알 것 같네.’

백민규 감독은 두 다리를 책상 위에 올리고 양손은 깍지를 낀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눈빛이 날카로운 게 예사 분은 아닌 것 같았다.

게다가 한기가 가시지 않은 날씨에도 츄리닝 바지에 나시만 대충 걸쳐 입고 있던 그는 웬만한 선수보다 더 두꺼운 팔뚝을 지니고 있어 초면인 사람이 위압감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자리에 앉아라.”

“네, 감독님.”

나는 캐리어를 벽 한쪽에 세워 두고 책상 맞은편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만나서 반갑다. 곧 있으면 식사 시간이니까 사담은 뒤로 미루고 본론으로 들어가자. 아시안 게임까지 두 달밖에 안 남았는데 몸 상태는 어떠냐?”

“밖에서 꾸준히 운동을 한 덕분에 컨디션은 어느 때보다 좋습니다.”

“하긴, 성철이에게 배웠으면 기본은 돼 있겠지. 그나저나 서류가 어딨더라?”

백민규 감독은 대화를 중단하고 탁상 한쪽에 쌓은 서류를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찾았다. 너 이게 뭔 줄 알아?”

“잘 모르겠습니다.”

“네가 우리에게 제출한 훈련 계획서다. 아까 애들 훈련시키느라 제대로 못 살펴봤는데 지금 한번 봐야겠어.”

입촌 연기를 위해 작성한 서류에는 훈련을 어떤 방식을 진행할 건지에 대한 내용도 기입해야 했다.

나는 관련 내용을 대충 읽긴 했으나 전반적인 서류 작성을 관장님께서 맡으셨기 때문에 상세한 사안은 잘 모르는 상태였다.

“산악 훈련을 통한 체력 증진이라 구식이긴 해도 체력을 늘리는 데 효과는 끝내주지. 하지만 아시안 게임이나 올림픽은 규칙 특성상 프로 시합보단 체력의 중요성이 떨어진다. 차라리 선수촌에 일찍 입소해서 스파링을 많이 소화하는 게 경기력 향상에 훨씬 효과적이었을 거다.”

“네.”

감독님께서는 현재 나에 대한 인상이 좋지 않은 상황이라 여기서 말대답을 하는 건 현명하지 못한 행동이었다.

따라서 나는 최대한 말을 자제하며 묵묵히 감독님 말씀을 경청했다.

“신청 사유도 그래. 요즘 생활 체육화다 뭐다 하지만, 국가 대표 선수가 학업을 핑계로 정식 훈련을 빠지는 경우는 없었어. 그리고 1, 2월이면 방학 시즌이었을 텐데 굳이 입촌을 연기해야 됐나?”

“1월부터 학업을 중단하면 아시안 게임까지 거의 5개월 동안 공부를 못 하게 되는 거라서 어쩔 수 없었습니다.”

“후우, 네가 부모님 밥 먹어 가며 편하게 운동하는 동안 선배들은 죽어라 훈련받으며 실력 끌어올렸어. 아무리 타당한 이유가 있더라도 나라를 대표하는 선수라면 우선순위를 확실히 정해야지 이렇게 하고 싶은 것 다 하고 살면 국제 대회에서 어떻게 좋을 성적을 내겠어?”

“사정이야 어쨌든 걱정 끼쳐 드린 부분은 사과드리겠습니다.”

내가 소설도 쓰고 밖에서 안락한 생활을 하는 동안 다른 선수들은 구슬땀을 흘린 건 사실이었기 때문에 일단은 한 발 물러서기로 했다.

“너, 승대 알지?”

“문승대 선수 말입니까?”

문승대는 지난 국가 대표 선발전에서 만났던 선수로 꽤나 까다로운 상대였다.

“네가 없는 동안 승대를 상비군 자격으로 불러서 훈련시켰어.”

“그렇군요.”

“대답은 청산유수군. 개인적으로 전문 코칭 스태프와 최상의 시설을 갖춘 선수촌보다 더 나은 훈련 장소는 없다고 생각한다.”

“동감합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감독님 말씀에 동의했다.

“이런 이야기를 하게 돼서 유감이지만, 네 실력이 어느 정도 인지 파악이 안 된 상태에서 아시안 게임 출전을 확정시키긴 어려울 것 같아.”

“국가 대표 자격이 박탈될 수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조금 의외네요. 선발전 우승으로 획득한 자격인데, 감독님께서 이를 좌지우지할 수 있다는 게…….”

대화 내내 조용히 경청하던 나는 처음으로 감독님 말씀에 비판적인 의견을 냈다.

“서운할 수 있다는 건 알아. 하지만, 협회 관계자분들도 알고 계시는 이야기니까 각오는 해 두는 게 좋을 거다.”

“알겠습니다.”

“네가 선발전에서 승대를 이기긴 했지만, 압도적인 승리라고 보기 어려웠다. 그리고 네가 바깥에서 편하게 지내는 동안 승대는 밤낮 가리지 않고 훈련에 매진했어.”

“안 본 사이에 실력이 많이 느셨겠네요.”

나는 다소 심각한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남 일처럼 태연하게 대응했다. 그러자 백민규 감독은 눈썹을 꿈틀하더니 강한 어조로 말을 내뱉었다.

“크흠, 승대는 지난 올림픽에서 준결승까지 진출했던 선수야. 즉, 아시안 게임에서 메달을 획득할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는 이야기지.”

“하지만 저에게 패배하셨죠.”

“건방진 놈. 주변에서 널 두고 최연소 국가 대표네 엄청난 재능이네 백날 떠들어 대도 기본을 갖추지 못한 녀석에게 기회를 주고 싶은 생각은 없다. 네 실력이 출중하다는 건 인정하마. 하지만, 이번 선발전에서 압도적인 모습을 보여 주지 못한 것도 사실이잖아?”

‘이게 무슨 억지야. 국가 대표 선발전에서 압도적인 모습을 보여 줄 수 있는 선수가 몇이나 되겠어?’

국가 대표 선발전에는 체급별 최강자들이 나오는 자리로 약간의 실력 차이는 있겠지만, 압도적인 경기력으로 우승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나마 라이트 헤비급이나 헤비급처럼 선수 인프라가 적은 체급에선 압도적인 기량으로 국가 대표에 선발되는 경우가 종종 발생했으나 활동 선수가 많은 다른 체급에서 한 수 위의 기량으로 선발전을 씹어 먹는 일은 많지 않은 편이었다.

“아시다시피 저희 체급에 쟁쟁한 선배님들이 계셔서 고전한 건 사실입니다.”

“그래서 내가 궁금한 거다. 네 체급에 널 대체할 수 있는 선수들이 많은데 무슨 배짱으로 훈련을 빠진 거냐?”

“믿지 못하시겠지만, 선수촌에 없다고 해서 복싱을 소홀히 하지는 않았습니다.”

“밖에서 죽어라 해도 선수촌 훈련에 비하면 질적으로 떨어지니까 하는 말 아니냐? 후우, 좀 있으면 식사 시간이니까 일단 숙소에 가서 짐을 풀어라.”

더 이상의 대화가 무의미하다고 판단한 감독은 손을 저으며 나가라고 했다.

그러나 이대로 물러날 수 없던 나는 조심스러운 태도로 간청했다.

“감독님, 딱 한 번만 기회를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무슨 기회?”

“제가 말로 백날 떠들어 봤자 소용없다는 걸 알았습니다. 만약 감독님께서 기회를 주시면 선발전 때보다 훨씬 발전했다는 것을 입증하겠습니다.”

원래는 미션이나 수행하자는 마음으로 감독님께 과제를 받아 내려 했지만, 막상 면담을 해 보니 상황은 심각했다.

분위기를 보니 감독님은 나보다 문승대를 적임자라 여기고 있었고 여차하면 아시안 게임에 출전하지 못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흠…… 하긴, 어렵게 선발전에서 우승한 선수에게 기회를 안 줄 수는 없지.”

“감사합니다, 감독님.”

“감사는 이르다. 내일부터 네 기량을 점검하는 테스트를 할 건데, 만약 거기에 통과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할 거냐?”

백민규 감독은 엄한 얼굴로 나에게 질문을 던졌다.

“벌을 내리든 뭐든, 말씀하시는 걸 모두 따르겠습니다.”

“그래? 내가 말하는 걸 모두 따르겠다고?”

그는 나를 맹랑하다는 듯 쳐다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좋다. 만약 테스트에서 떨어지게 된다면 국가 대표직을 스스로 그만둬라.”

“알겠습니다, 감독님.”

“훗, 생각보다 간덩이가 크구나. 다시 한번 대답할 기회를 줄 테니까 신중하게 답해라.”

특별한 사유 없이 자의로 국가 대표직을 그만둔다는 것은 협회 임원들을 포함한 여러 복싱 관계자들에게 찍힌다는 것을 의미했다.

나의 경우, 다른 선수들보다 매스컴의 관심을 많이 받았기에 언론에서 다룰 확률이 높았고 그만큼 사회적 파장도 더 클 것이다.

그렇게 되면 괘씸죄가 추가되어 대표 자격 박탈은 물론이고 앞으로 영영 선발전에 참여할 수 없게 될 수도 있었다.

“어차피, 이러나저러나 감독님의 마음을 얻지 못하면 아시안 게임 출전이 어렵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테스트를 통과하지 못한다면 국가 대표를 포기하겠습니다.”

“생각보다 시원스러운 면이 있구나. 오케이. 그럼 서로 합의가 된 걸로 알고 내일 테스트를 진행하겠다.”

“테스트를 통과하게 되면 어떻게 되는 건가요?”

“거기까지 생각해 보진 않았지만, 국가 대표 선수로서 대우는 확실히 받을 수 있겠지?”

백민규 감독은 책상 위에 올려놨던 서류를 다시 정리하며 말했다.

“자, 볼일 다 마쳤으면 숙소로 가서 좀 쉬다가 저녁 먹어라.”

“오늘 야간 훈련이 예정되어 있던데 어떻게 할까요?”

“사람들한테 이야기해 둘 거니까 오늘은 밥 먹고 푹 쉬어.”

“네, 감독님.”

나는 꾸벅 인사를 한 뒤 방을 빠져나갔다.

‘그래도 패기는 있네. 어쨌든 내일이면 진국인지 말뿐인 놈인지 판명이 되겠어.’

백민규 감독은 나와의 협상이 만족스러웠는지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는 기본을 중시하는 자로 규율에 어긋나는 행동을 용납하지 않았다.

내가 어떤 상의도 없이 촌외 훈련을 신청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감독은 선수촌에 들어오자마자 문승대를 호출했고 아시안 게임에 출전시키기로 마음을 먹었다.

하지만, 그 전에 먼저 내 국가 대표 자격이 취소되어야 했는데 그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감독의 권한이 강하다고는 하지만, 정당한 사유로 입촌을 연기한 선수를 함부로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덥석 제안을 받아들이고 스스로 국가 대표를 포기하겠다고 하니, 쾌재를 부르지 않을 수 없었다.

‘봐서, 똘똘한 놈 같으면 잘 활용하면 되지 뭐.’

백민규 감독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식당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 *

“쟤가 강진우야?”

“입촌 연기했다더니 이제 막 들어왔나 보네.”

국가 대표 선수들은 식당에 들어온 날 보고 설왕설래했다.

몇 달 전부터 함께 훈련을 받으며 친분을 쌓은 덕에 선수들은 저마다 친한 지인을 앞에 두고 밥을 먹었지만, 센터 내에 아는 사람이 없는 나는 한쪽에서 홀로 먹는 수밖에 없었다.

“몸도 안 만들어진 상태일 텐데, 훈련은 따라올 수 있으려나?”

“그런 건 본인이 알아서 하겠지. 그나저나 진짜 잘생겼다. 난 이제까지 선수촌에서는 배구 선수들이 가장 잘생긴 줄 알았는데, 이젠 그 타이틀이 복싱으로 넘어오게 생겼네.”

여자 선수들은 밥을 먹다 말고 날 구경하며 외모를 극찬했다.

“나이도 어린 것 같은데, 왔으면 인사를 해야지. 구석에 처박혀서 뭐 하는 거야?”

커다란 덩치를 가진 남자는 사람들의 말소리를 듣고 짜증을 냈다.

사내의 이름은 박민범으로 라이트 헤비급 국가 대표였다.

‘기생오라비같이 생긴 놈이 뭐가 좋다고.’

박민범은 대표 팀 내에 좋아하는 여자 선수가 있었는데 그녀가 날 보며 얼굴을 붉히자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었다.

“이제 열여덟인데 뭘 알겠어, 냅둬 그냥.”

“야, 누구는 10대 시절 없었는 줄 알아? 하여간 마음에 안 들어. 나중에 같이 훈련받을 일이 생기면 본때를 보여 줘야겠어.”

친구는 애써 달래보려 했지만, 화가 난 그를 진정시키기에는 역부족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