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 20화 실력 행사 (4)
‘저 자식은 누군데 날 자꾸 쳐다보는 거야?’
나는 건너편에 앉은 박민범이 계속 날 쳐다보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왜 그러는지는 몰라도 환영하는 것 같지는 않네. 일단 숙소로 돌아가서 좀 쉬어야겠다.’
호전적인 눈빛을 계속 보내는 바람에 불쾌감이 올라왔지만, 첫날부터 소란을 피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게다가 난 이곳에서 막내였기 때문에 되도록 행동을 조심할 필요도 있었다.
식사를 빠르게 마무리하고 방에 들어온 나는 가볍게 스트레칭을 한 후 일루션을 실행했다.
“캐릭터 I랑 붙게 해 줘.”
<캐릭터 I와 대전을 실시하도록 하겠습니다. 사용자께서는 무대에 올라와 전투 준비를 하십시오.>
내일 감독님의 지휘 아래 테스트를 치러야 한다는 생각이 들자 쉬고 싶은 생각이 싹 사라졌다.
나는 미르헨 총장님과 브루스 단장님이 추가로 보내 준 새 캐릭터들을 점검하고 실전 감각을 끌어올리기 위해 가상 스파링에 돌입했다.
* * *
새벽 5시 30분.
나는 아침 훈련을 소화하기 위해 일찌감치 일어나 샤워를 하고 운동복으로 환복했다.
‘방을 혼자 쓰니까 잘 때도 편하고 엄청 좋네.’
원래 숙소는 2인 1실이 원칙이었으나 룸메이트가 모두 정해진 상태였기 때문에 홀로 방을 쓰게 되었다.
삐이익-삐이익
센터 앞에 마련된 운동장에는 집합을 알리는 호각 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나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천천히 뛰어갔다.
“오늘은 오랜만에 체력 훈련을 할 예정이야. 6시 정각에 산악 구보를 실시할 거고 그 이후에는 400m 인터벌 훈련을 할 거니까 몸들 풀어라.”
“예.”
선수들은 대답을 한 뒤 저마다 자리를 잡고 스트레칭을 했다.
“강진우.”
“네, 감독님.”
백민규 감독은 선배들을 따라 스트레칭을 하고 있는 나를 조용히 불렀다.
“지금부터 할 훈련들은 국가 대표라면 당연히 소화할 수 있어야 하는 것들이야. 조금 있다가 애들 하는 거 보면 알겠지만, 진천에서 다들 몸 상태를 끌어올려서 이 정도 훈련쯤은 가뿐할 거야.”
“저도 최선을 다해서 선배님들을 따라갈 수 있도록 해 보겠습니다.”
나는 결의에 찬 얼굴로 각오를 밝혔다.
“말처럼 잘할 수 있을지는 보면 알겠지. 테스트는 지금부터 시작이니까 열심히 해 봐.”
“예.”
“돌아가서 스트레칭해.”
할 말을 마친 백민규 감독은 다른 선수들을 살피러 돌아갔다.
“자. 다들 몸 잘 풀었지.”
“네!”
“항상 하던 것처럼 산 정상 찍고 돌아오는 거다. 뭐 이제는 그럴 놈은 없겠지만, 늦게 들어오는 사람은 벌칙이 있으니까 참고해라.”
“저, 감독님. 질문이 있습니다.”
“벌칙이 뭔지 궁금해서 그러냐? 별거 없어. 다른 선수들보다 많이 뒤처진 것 같으면 다시 한번 더 뛰어갔다 오는 게 벌칙이다.”
백민규 감독은 내가 어떤 질문을 할지 짐작하고 대답했다.
산악 구보가 일반 평지를 달라는 것보다 체력 소모가 크다곤 하지만, 소싯적에 달리기 좀 했다는 사람들이라면 충분히 할 수 있는 운동이었다.
그러나 선수촌에서 실시하는 산악 구보는 바깥의 그것과 차원이 달랐다.
부상이 발생할 확률이 높은 코스를 제하고는 전력에 가까운 힘으로 산을 오르내려야 했기에 운동 구력이 많은 사람도 한 번만 갔다 오면 탈진에 가까운 상태가 되었다.
감독님은 다른 선수의 경우 같은 훈련을 수차례 진행한 터라 충분히 훈련을 견뎌낼 것으로 생각한 반면에 나는 금방 나가떨어질 것으로 예상했다.
“네, 명심하겠습니다. 그런데 산을 오르는 코스는 어떻게 되나요?”
“아, 넌 처음이라서 모를 수도 있겠구나. 그냥 선배들 뛰는 거 보고 따라서 올라가. 그리고 만약에 많이 뒤처져서 다른 사람들이 네 시야에 벗어났다 해도 산 곳곳에 표지판을 세워 뒀으니까 길을 잃을 일은 안 생길 거다.”
“알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당연히 뒤처질 거라고 생각하시는 것 같네. 뭐 상관없어. 내 실력을 보여 드리면 그만이니까.’
겉으론 공손하게 대답했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 강한 승부욕이 올라오고 있었다.
지난 2달간, 나도 손가락만 빨았던 것은 아니었다.
백성철 관장님의 지도 아래 꾸준히 훈련을 진행했고 매일 가상 스파링도 실시하여 어느 때보다 자신감이 넘치는 상태였다.
“얼굴을 보니까 더 궁금한 건 없는 모양이군. 자, 그럼 바로 시작해 볼까?”
백민규 감독은 목에 찬 호루라기를 입에 갖다 대었다.
삐이익-
선수들은 호각 소리와 동시에 센터 뒤편에 있는 산으로 뛰기 시작했다.
산 초입에 접어든 나는 선배들을 따라가며 주변을 살피었다.
‘굳이 이정표를 살피지 않아도 되겠어.’
선수들이 틈만 나면 달린 덕분에 산에는 사람의 발이 닿아 생긴 오솔길이 형성되어 있었다.
처음에는 코스를 익히기 위해 선배들 꽁무니를 쫓던 나는 점점 피치를 끌어올렸다.
“멍청한 새끼. 누군 저렇게 못 달려서 그러는 줄 아나.”
“헉헉, 그러게. 아직은 초반이라 괜찮겠지만, 좀 있다가 나가떨어질걸?”
내가 선두로 치고 나갔음에도 사람들은 코웃음만 칠 뿐이었다.
운동으로는 최상위 레벨인 국가 대표 선수들도 이 산에 적응하기까지 꼬박 2주라는 시간이 걸렸다.
그런데, 이제 막 들어온 놈이 동네 뒷동산마냥 거침없이 내달리니 황당한 감정이 들 수밖에 없었다.
“헉, 헉.”
나는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는 것을 느끼며 산을 뛰어오르고 있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힘들잖아. 그래도 어쩔 수 없어. 중간이라도 가려면 이렇게라도 해야 돼.’
초반에 급히 페이스를 올린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산악 레이스를 하기 전에 선배들의 체력 스탯을 확인해 보니 나보다 떨어지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내 체력 레벨은 5로 일반인을 훨씬 상회하는 수준이었으나 국가 대표들 사이에서는 딱 평균에 해당하는 수치였다.
하지만, 감독님께 깊은 인상을 심어 드리려면 평균보다 좋은 퍼포먼스를 선보일 필요가 있었기에 초반부터 페이스를 끌어올리기로 결정했다.
이른 시점에 선두로 치고 나가면 나중에 추월을 당하더라도 상위권으로 레이스를 마무리 지을 확률이 높았기 때문이다.
“내 저럴 줄 알았다. 병신 같은 새끼.”
선수촌 내에서도 체력이 좋기로 소문난 박민범은 시야에 내가 들어오자 고소하다는 듯이 말했다.
“헉헉, 야, 그래도 정상이 지척인데 계속 1등 유지한 것도 대단한 거 아니야? 그나저나 넌 지치지도 않냐?”
“내가 옛날부터 체력 하나는 끝내줬잖아. 야, 좀만 더 힘내 저 새끼 보니까 곧 있으면 방전될 것 같아.”
박민범은 친구를 격려하면 조금씩 속도를 올렸다.
‘슬슬 내려들 오는구만.’
백민규 감독은 산 입구에 서서 내려오는 선수들을 하나둘 지켜보고 있었다.
“오, 밖에서 운동 좀 했다더니 거짓은 아니었구나.”
“후우…… 아직 많이 부족합니다.”
나는 쟁쟁한 선배님들 사이에서 4등으로 레이스를 완주했다.
복싱 남자 국가 대표는 총 7명이었는데, 훈련을 도와준다는 목적으로 들어온 상비군까지 합하면 총 열두 명의 선수가 함께 운동을 하고 있었다.
비록 1등은 하지 못했지만, 열두 명의 엘리트 선수들 중 4등은 꽤나 고무적인 성과라고 볼 수 있었다.
‘훗, 처음 산악 구보를 한 걸 고려하면 상당히 잘한 편이야. 생각보다 근성이 있는 놈 같은데, 좀 더 지켜볼까?’
감독님은 말없이 나를 지켜보다가 다른 선수들을 체크하기 위해 자리를 떴다.
“창영아.”
“네, 감독님.”
대표팀 최고참인 김창영 선수는 감독님의 부름에 대답했다.
“마무리 운동하고 아침 먹으러 가라.”
“알겠습니다. 감독님 말씀 들었지? 다들 이쪽으로 모여.”
김창영은 철봉이 있는 곳으로 선수들을 모은 후 풀업과 푸쉬업을 실시했다.
“원래 말수가 없는 편이야?”
선배의 지시에 따라 운동을 하고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는데, 옆에 있던 김창영이 말을 걸어왔다.
“어제 막 들어온 거라 경황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하긴, 훈련 따라가랴 적응하랴 힘들긴 하겠다. 그래도 걱정한 것치곤 훈련 잘 따라오던데?”
“감사합니다, 선배님.”
이곳에 온 이후 처음으로 따뜻한 말을 들어서였을까, 나는 진심으로 그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백성철 선배님한테 복싱을 배웠다면서?”
“어? 저희 관장님을 아세요?”
뜻밖의 이름이 선배의 입에서 나오자 호기심이 생겼다.
“음, 그냥 동네에서 같이 놀던 동생이랄까? 성철 선배네 친동생이 나랑 친구여서 얼굴 뵌 적이 몇 번 있거든.”
“내일이나 모레 중으로 관장님께 연락을 드릴 때 선배님을 만났다고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래, 혹시 나중에 센터 오시게 되면 알려 줘.”
30대라는 다소 늦은 시기에 헤비급 국가 대표가 된 김창영은 형편이 어려울 때 백성철 관장으로부터 적지 않은 지원을 받은 바가 있었다.
그는 처음에 내가 입촌을 연기했다고 들었을 때, 다른 선수들처럼 부정적으로 생각했지만, 관장님의 제자라는 것을 우연히 안 이후로 적응을 도와주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여기 있는 애들 중에 가끔 예민하게 구는 녀석들이 있을 텐데 그런 거 개의치 말고 운동만 열심히 하면 돼.”
“그렇군요.”
“어쨌든 앞으로 훈련하면서 자주 보게 될 거니까 서로 친하게 지내자.”
“감사합니다, 선배님.”
“훗, 그래.”
김창영은 깊은 속내를 나누지 않았음에도 후배에게 호감을 느끼고 있었다.
이는 내가 특출나고 매력이 있어서라기보단, 관장님께서 베푼 은덕에 대한 공을 대신 받았다고 하는 편이 맞았다.
“아침 훈련은 이것으로 끝이야. 다들 고생했고 들어가면 샤워 먼저 해. 좀 있다가 11시에 훈련 있으니까 컨디션 관리 알아서들 잘하고.”
김창영 선배는 선수들에게 간단한 당부의 말을 전한 다음, 해산시켰다.
“진우야.”
“예.”
“밥 먹을 사람 없으면 나랑 같이 먹자.”
“아, 그래도 되나요?”
“당연하지, 좀 있다가 8시 30분에 식당 앞에서 보자.”
“네, 선배님.”
혼자 먹는다고 우울하거나 힘든 건 아니었지만, 이왕이면 누군가와 함께 식사를 하는 편이 나에게도 좋았다.
‘두 달 동안 혼자 다녀야 되나 했는데, 안 그래도 되겠어.’
삭막할 줄 알았던 센터 생활에 새로운 인연이 싹트는 순간이었다.
* * *
훈련을 받다 보니 시간은 흘러 어느새 저녁 시간이 되었다.
김창영 선배는 아침 이후로 매끼마다 나와 식사를 함께하고 있었다.
“진우야 컨디션 어때?”
“첫날이라서 아직은 괜찮은 것 같습니다. 저 그런데 훈련을 오늘처럼 매일 하나요?”
아침 훈련 이후, 점심 먹기 전에 한 번 그리고 오후에 한 번, 지금까지 총 3번의 훈련이 진행됐다.
나는 겉으로는 태연한 척하고 있었지만, 훈련 강도가 이 정도로 강할 줄은 몰랐다.
“오늘은 체력 단련 위주로 훈련이 진행돼서 그런가 다른 날보다 빡센 편이긴 해.”
“세 번까지는 어떻게 해서 버텼는데 네 번째 훈련은 어떻게 버텨야 하나 걱정이네요.”
“그러게, 훈련이 아무리 많은 날도 최대가 3번이었는데 갑자기 왜 이러시지?”
‘나 때문이라고 말하면 안 되겠지?’
백민규 감독이 단언한 대로 테스트는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는 중이었다.
그는 산악 구보, 400m 인터벌 그리고 헬스 기구를 활용한 순환 운동까지 강도 높은 훈련을 진행했고 그때마다 나를 관찰하며 기량을 점검했다.
“그래도 마지막이니까 힘내 보려고요.”
“네 말이 맞아. 힘들다고 징징대 봤자 뭐가 달라지겠어?”
김창영 선배는 고개를 끄덕이며 내 말에 공감했다.
저녁 식사를 마친 우리는 숙소로 돌아와 휴식을 취했다.
[아, 아. 안내 말씀드리겠습니다. 10분 후에 야간 훈련이 있을 예정이니 선수들은 강당으로 집합하시길 바랍니다.]
나는 방송이 끝나기 무섭게 자리에서 일어나 신발을 신고 밖으로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