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 20화 실력 행사 (5)
센터 내에 있는 강당은 전국 체전을 열어도 손색이 없을 정도의 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시합을 치를 수 있는 여러 개의 링과 이를 구경할 수 있는 관중석까지 과연 대기업에서 투자한 시설답게 웅장한 규모와 화려함을 자랑했다.
“왔으면 이쪽으로들 와서 앉아라.”
백민규 감독은 쭈삣쭈삣 서 있는 선수들을 향해 말을 걸었다.
‘휴우, 다행이다.’
‘야간 훈련은 정신 교육으로 퉁치시려나?’
강당 구석에 세팅된 의자를 본 선수들은 안도의 한숨을 쉬며 자리에 앉았다.
“오늘 평소보다 강하게 훈련을 진행했음에도 다들 잘 따라 줘서 고맙다. 아무리 뛰어난 테크닉을 가진 선수라도 체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밑천이 금방 드러나기 마련이야. 이렇게 고생한 기억들이 결정적인 순간 너희에게 메달을 안겨 줄 수 있으니까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 보자.”
감독님은 고생한 선수들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눈치챈 친구들도 있겠지만, 금일 훈련을 강하게 진행한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상준아.”
“네, 감독님.”
호명을 당한 선수는 대답했다.
“막내랑 같이 훈련해 보니까 어때? 쓸 만하겠어?”
“훈련 첫날이라서 금방 나가떨어질 줄 알았는데, 끝까지 버티더라고요.”
“맞아요. 선수촌에서 열심히 훈련을 받은 저희와 별반 차이가 없었습니다.”
옆에서 듣던 다른 선수도 문상준 선수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훗, 나도 체력 부문에서는 너희들과 마찬가지로 합격점을 줬다. 하지만, 그것만으론 아직 부족해. 강진우.”
“예.”
“네가 볼 때 이곳과 바깥의 가장 큰 차이가 뭐라고 생각하냐?”
“실전 감각입니다.”
나는 질문을 받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말을 내뱉었다.
“오, 알고 있었구나?”
“예, 선배님들처럼 최상위 레벨 선수들이 한곳에 모여 있으면 그만큼 양질의 스파링을 벌이기가 바깥보다 용이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 체력이나 테크닉 같은 경우에는 훈련 프로그램만 잘 짜면 충분히 바깥에서 키울 수 있지만, 실전 감각만큼은 상당히 어렵지.”
선수촌 바깥에도 탑티어 선수들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프로 챔피언들부터 전직 국가 대표 선수들까지, 마음만 먹으면 여기 있는 분들에게 뒤지지 않은 사람들을 충분히 만날 수 있었다.
그러나 매일 붙어 있어 원할 때 언제든지 스파링을 할 수 있는 선수촌 선수들보다는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말인데, 신고식도 할 겸 간단하게 스파링을 하면 어떨까? 새로 들어온 신입이 복싱을 얼마나 잘하는지 확인을 해 봐야 할 것 아니야. 강진우.”
“네, 감독님.”
“강제로 스파링을 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고. 네 생각은 어때?”
“하겠습니다.”
스파링도 테스트의 일환이었기 때문에 피할 수 없었다.
나는 감독님의 물음에 곧장 답변을 드리며 의지를 밝혔다.
“오, 좋아. 창영아. 진우랑 붙기에 적합한 친구로 누가 있을까?”
“음, 진우가 웰터급이긴 해도 체격이 좋으니까 웰터부터 미들급 사이의 선수들로 붙이면 될 것 같습니다.”
“저, 제가 하면 안 되겠습니까?”
김창영 선배와 감독님이 대전 상대를 두고 고민을 하던 그때, 박민범이 손을 번쩍 들고 자신이 하겠다고 나섰다.
“너랑 진우는 체급 차이가 너무 많이 나서 안 돼.”
“문승대 선배도 웰터급이신데 저랑 가끔 스파링을 합니다. 그리고 아까 보니까 몸도 충분히 올라왔고 체격도 좋아서 충분히 가능할 것 같은데요?”
“키만 비슷하면 뭐해. 펀치력에서 차이가 엄청 날 텐데, 게다가 지금 아직 감량도 안 한 상태잖아.”
선배는 실전 감각을 끌어올리지 않은 상황에서 윗 체급 선수와 붙는 건 이치에 맞지 않다고 생각했다.
‘시합은 몰라도 스파링 정도면 할 만할 것 같은데?’
미스 매치라고 생각하는 선배와 달리 나는 박민범과 스파링을 하는 게 꺼려지지 않았다.
현재 내 키는 183cm로 69kg급인 웰터급에서는 장신에 속했다.
키에 비해 체중이 적게 나가면 그만큼 근육량도 줄기 마련이고 이는 펀치력의 감소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나의 경우에는 시스템에 의해 힘 스탯이 고정되어 있어서 저체중임에도 불구하고 펀치력이 유지되는 편이었다.
“감량 안 한 건 저 친구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그리고 정식 시합도 아니고 기량만 확인해 보는 거잖아요.”
“이럴 땐 당사자의 의견을 물어보면 문제가 금방 해결되지. 어때? 민범이랑 할 수 있겠어?”
백민규 감독은 씨익 웃으며 나를 쳐다봤다.
“예,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말할 줄 알았다. 자, 두 선수는 나와서 스파링할 준비 해라.”
“알겠습니다.”
“네, 감독님.”
나와 박민범은 자리에서 일어나 곧 있을 스파링을 위해 몸을 풀었다.
“네가 볼 땐 누가 이길 것 같아?”
선수 중 하나가 문승대에게 다가가 물었다.
그는 국가 대표 선발전에서 날 상대한 이력이 있는 데다가 상비군으로 있으면서 박민범과 스파링을 해봤기에 승부의 향방을 가늠할 수 있었다.
“처음부터 우리랑 함께 훈련을 했다면 모르겠지만, 지금 당장은 민범이가 유리하지.”
“하긴,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민범이가 지는 그림이 안 그려지네.”
“하지만 12온스 글러브에 3라운드로 진행되는 스파링에서 강진우를 이기는 건 쉽지 않을 거야. 결국 까 봐야 알 수 있다는 거지.”
문승대는 샌드백을 치며 몸을 예열하는 나를 보며 덤덤히 말했다.
“스파링이라고 대충 하지 말고 최선을 다하길 바란다. 스파링은 실제 시합처럼 3분 3라운드로 진행할 거다. 질문 있나? 없는 것 같으니 바로 시작하자.”
백민규 감독은 자신의 물음에 답하지 않고 서로를 노려보고 있는 선수들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분위기를 보니까 세게 해도 뭐라고 안 하실 것 같아.’
새로 들어온 후배를 손봐 주고 싶던 박민범은 최선을 다하라는 감독의 말에 쾌재를 부르고 있었다.
땡-
종소리와 동시에 스파링이 시작되었다.
박민범은 가드를 바짝 올린 후, 성큼성큼 나에게 다가왔다.
파팡-
나는 원투 스트레이트를 날리며 상대의 내구력이 어느 정도인지 살펴봤다
‘그래도 국가 대표라 이거지?’
힘 스탯이 LV 5로 상승한 이후, 캐릭터들과 가상 스파링을 하면 싱겁게 경기가 종료될 때가 많았다.
일전에는 견제 용도로 쓰이던 잽이 파괴력을 지니게 되자 방심하다가 얻어맞은 상대는 그대로 그로기 상태가 되기 일쑤였다.
그러나 그동안 파워 펀쳐들과 많이 대전해 온 박민범에게는 전혀 통하지 않았다.
‘삐쩍 말라서 별거 없을 줄 알았는데, 주먹이 꽤 쓸 만하잖아?’
가드 위로 강력한 타격이 연달아 꽂혔음에도 불구하고 박민범의 표정에는 일말의 동요도 보이지 않았다.
이처럼 겉으로 보이는 모습은 여유로움 그 자체였지만, 그는 내심 본인 체급에서나 느낄 수 있는 강력한 펀치에 적지 않게 놀란 상태였다.
“순발력 하나는 끝내준다. 1분가량 지났는데도 클린 히트 하나 나오지 않았어.”
“빠른 스피드를 바탕으로 링을 넓게 쓰는 전략이라…… 나쁘지 않지만, 그동안 민범이에게 저렇게 대응하다가 당한 놈들이 한둘 아니잖아.”
“난 솔직히 예상외로 신입이 잘하는 것 같은데? 저 정도 스텝이랑 몸놀림이면 경량급에서도 탑티어에 들 수 있겠어. 그리고 소리를 들었을 때 펀치도 꽤 묵직해 보여.”
선수들은 링 위에서 벌어지는 스파링을 보며 저마다 논평을 주고받았다.
‘쥐새끼 같은 놈. 언제까지 그렇게 도망 다닐 수 있는지 보자.’
박민범은 쏟아지는 연타 공격을 받아 내며 계속 전진했지만, 지근거리에 들어오는 순간 귀신같이 빠져나가는 내 모습에 약이 오르기 시작했다.
그는 사이드 스텝으로 빠져나가려는 나를 강제로 껴안더니 훅과 어퍼컷과 같은 숏 펀치를 날렸다.
퍼억- 퍼억
“스톱!”
백민규 감독은 엉켜 붙어 있는 우리를 강제로 떼어냈다.
‘확실히 강하긴 하네. 복부에 몇 대 맞은 거치곤 데미지가 상당하다. 그나저나 스파링치고는 너무 진지한 거 아니야?’
나는 조금 전 행동으로 감독님께 주의를 듣고 있는 박민범을 보며 생각했다.
보통 스파링이라고 하면, 시합에 준할 정도의 강도로 진행하는 게 맞으나 기술 연습과 전술 훈련이 목적이기 때문에 상대를 쓰러뜨려야 하는 시합에 비해서 긴장감이 많이 떨어졌다.
하지만, 서로의 실력을 가늠해 볼 생각으로 스파링에 임한 나와 달리 녀석의 기세와 눈빛은 실전을 불방케 했다.
‘두고 보자.’
나는 스파링이 재개됨과 동시에 그대로 박민범에게 돌진했다.
“쟤가 죽고 싶어서 환장했나, 저게 뭐 하는 거야?”
“미친 거 아닌가? 민범이랑 인파이팅을 하겠다고?”
선수들은 이치에 맞지 않는 내 행동에 저마다 의구심을 드러냈다.
‘이 새끼가 돌았나.’
박민범은 눈에 살기를 띠고 자신에게 들어오는 날 보며 있는 힘껏 훅을 휘둘렀다.
퍽!-
“으윽…….”
내 펀치는 모두의 예상을 깨고 상대의 안면을 강타했다.
카운터펀치로 턱을 적중당한 박민범은 강한 충격에 신음 소리가 입에서 새어 나왔다.
타고난 맷집과 헤드기어까지 장착했다고 하지만, 예상치 못한 펀치에 맞게 되면 그 누구라도 흔들리지 않을 수 없었다.
퍽-퍽-퍽
나는 데미지를 회복하기 위해 몸을 잔뜩 웅크리고 있는 녀석에게 소나기 펀치를 날렸다.
전력을 다한 주먹을 연달아 날린 탓에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는 것 같았으나 이번 기회에 내가 만만한 놈이 아니라는 것을 확실히 심어 줄 필요가 있었다.
‘첫날부터 마음에 안 들었어. 어디 맛 좀 봐라.’
어제 입소했을 때부터 금일 훈련을 받을 때까지 녀석의 불편한 눈길을 계속 견뎌야 했던 나는 그동안의 울분을 해소하는 기분으로 펀치를 퍼부었다.
‘오케이, 넌 이제 죽었어.’
한편, 데미지를 회복한 박민범은 본격적으로 난타전을 벌이기 위해 거침없이 주먹을 휘둘렀다.
팡-
‘윽, 아직도 힘이 남아 있을 줄이야…….’
상당히 긴 시간 연타를 견딘 박민범이 가드를 풀고 펀치를 날리자 당혹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스피드 면에선 우위에 있었기 때문에 훅과 스트레이트와 같은 큰 공격들은 피할 수 있었으나 잽과 같은 스피디한 펀치를 모두 피해 내는 건 사실상 불가능했다.
순간적으로 팔을 올려 큰 펀치들을 막아 냈지만, 가드 너머로 충격이 전해져 안면이 얼얼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렇다고 기죽고 있을 수는 없었다.
나는 이를 꽉 깨물고 녀석의 펀치를 피한 다음, 옆구리에 훅을 꽂아 넣었다.
“이, 씨발.”
다운될 정도의 타격은 아니었지만, 한 수 아래라고 생각했던 나에게 연달아 펀치를 허용하자 박민범은 이성을 잃고 말았다.
급기야 쓰고 있던 헤드기어를 집어 던지고 나에게 달려들려던 찰나, 감독님의 호통 소리가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그만해! 스파링은 여기까지 할 거니까 다들 링에서 내려가라.”
백민규 감독은 별다른 이야기는 하지 않고 선수들을 처음에 있던 곳으로 데려왔다.
“민범아.”
“예, 감독님.”
“아시안 게임 나가서도 그따위로 행동할 거냐?”
“죄송합니다.”
“앞으로 일주일 동안은 정규 훈련이 끝나도 체력 단련실 가서 1시간 동안 따로 더 운동해라.”
“네, 알겠습니다.”
박민범은 고개를 푹 숙이며 대답했다.
“그리고 강진우.”
“네.”
“좀 있다가 감독실로 들어와. 할 이야기가 있다.”
“예, 감독님.”
“후우, 신고식치곤 좀 요란하긴 했지만 그래도 재밌었지? 오늘 하루 고생들 했으니까 이만 들어가서 쉬어라.”
할 말을 마친 백민규 감독은 유유히 강당을 빠져나갔다.
나는 감독님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선배들을 따라 숙소로 돌아왔다.
‘화면이 뜨는 걸 보니 테스트는 통과한 모양이야.’
샤워를 마치고 옷을 갈아입고 있는데 눈앞에 화면이 떠올랐다.
<아르마이스의 의지가 발동되었습니다.>
<미션이 완료되었음을 알려 드립니다.>
<보상: 힘, 체력 경험치 +50%>
<보상을 적용하시겠습니까? Y/N>
나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인 후, 감독님을 뵙기 위해 방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