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 21화 기회 (1)
똑- 똑
“들어와.”
“네.”
감독님의 부름에 문을 열고 들어갔다.
“곧 자야 되니까 커피는 그렇고 차라도 한잔할래?”
“네, 감독님.”
“자, 마셔라.”
백민규 감독은 다기에 든 차를 찻잔에 부으며 마실 것을 권했다.
“감사합니다.”
“그래, 선수촌에는 늦게 들어왔지만, 성철이랑 준비를 확실히 한 것 같구나. 체력만 좋은 줄 알았는데, 기술적으로도 나무랄 게 없었어.”
“관장님께서 시키는 것만 했을 뿐입니다.”
“단순히 시켜서 될 수준이 아니야. 성철이가 몇 달 전쯤에 천재가 한 명 들어왔다고 했는데, 그 말이 맞았어.”
스파링은 불과 1라운드밖에 진행되지 않았지만, 감독님은 나의 재능을 한눈에 파악하고 있었다.
“저, 그럼 테스트는 합격인 겁니까?”
“훗, 합격인 거 알고 찾아온 거 아니야?”
“솔직히 말씀드릴까요?”
“하하, 자식 넉살은. 그나저나 너 민범이랑은 어떻게 할 거야? 정 힘들 것 같으면 나한테 말해. 조치를 취해 줄 테니까.”
감독은 박민범이 나에게 악감정을 갖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다.
“괜찮습니다. 같이 지내면서 천천히 풀면 되죠.”
“녀석이 속이 좁아서 쉽지 않을 거다.”
“상관없습니다. 저 싫어하는 사람 하나 있다고 스트레스받거나 하는 성격은 아니라서요.”
“전부터 말했던 거지만, 참 맹랑하단 말이야.”
“죄송합니다.”
나는 감독님의 마음을 간신히 얻은 상황에서 실수를 했나 싶어 사과를 드렸다.
그러나 감독님은 개의치 않아 하시며 말을 이어 갔다.
“칭찬한 거니까 신경 쓰지 않아도 돼. 그건 그렇고 숙소 혼자 쓰니까 외롭지? 아까 보니까 창영이랑 친하게 지내는 것 같은데 같이 쓰게 해 줄까?”
“기존에 같이 쓰시는 분이 있는데 괜히 번거롭지 않을까요?”
미르헨 총장님과 브루스 단장님과 소통을 하려면 혼자 있어야 했기 때문에 굳이 함께 있을 생각은 없었다.
“원래 신입은 최고참이랑 방을 쓰는 게 관례라 누구도 토를 달진 않을 거다. 그리고 창영이가 사람이 좋아서 같이 있으면 너한테 도움도 많이 될 거고.”
“저, 감독님. 그냥 지금처럼 방을 혼자 쓰면 안 될까요?”
“흠, 그래? 알았다. 그냥 그럼 그 방 계속 써라.”
“어, 정말 그래도 되나요?”
너무나 쉽게 허락하는 감독님의 모습에 어안이 벙벙해졌다.
“사실 내 입장에서도 굳이 안 바꾸는 편이 여러모로 편하거든. 룸메이트들끼리 정도 들었을 텐데, 갑자기 변화가 생기면 좀 그렇잖아.”
“맞는 말씀이십니다.”
“아무튼, 아까 말한 대로 테스트는 합격이니까 아시안 게임까지 열심히 해 보자.”
“네, 최선을 다해서 열심히 하겠습니다.”
감독님께서 손을 내밀며 말씀하시자 나는 이를 맞잡으며 공손히 대답했다.
‘하아, 피곤하다. 얼른 들어가서 자야겠어.’
긴 하루였다.
훈련 자체가 힘들었던 것도 있지만, 테스트가 끝났다는 생각에 긴장이 풀리면서 피로감이 몰려왔다.
나는 곧장 방으로 돌아간 후, 취침에 들어갔다.
* * *
센터에 들어온 지 3주가 지났다.
감독님의 지도 아래 훈련을 받다 보니 시간이 쏜살같이 지나갔다.
‘호흡법이 이럴 땐 참 유용하네.’
저녁을 먹고 방에 들어온 나는 방바닥에 앉아 브루스 단장님이 알려 준 대로 호흡을 하고 있었다.
얼핏 보면 명상과 가까운 이 행위는 원래 마력을 모으기 위한 수행법으로 피로 회복 기능이 있어 훈련을 마치면 종종 행하고 있었다.
덕분에 생전 경험하지 못한 강한 강도의 훈련도 피곤한 기색 없이 수행할 수 있었고 선배님들 사이에서는 철인이라는 별명도 얻게 되었다.
우우웅-우우웅
책상 위에 올려놨던 핸드폰이 울리자 곧바로 집어 들어 통화 버튼을 눌렀다.
“네, 관장님. 전화받았습니다.”
“잘 지내?”
“저야 항상 똑같죠.”
“최근에 민규한테 연락이 왔는데 어떻게 너 같은 제자를 거뒀냐며 엄청 부러워하드라. 훗, 선수 생활 접고 사는 낙이 없었는데, 네 덕에 요즘 살 맛이 난다.”
백성철 관장은 제자가 친구에게 인정받자 자신의 일처럼 좋아했다.
“이게 다 관장님께서 잘 가르쳐 주셔서 가능한 거죠.”
“자식, 갈수록 실력이 늘어야 하는데 말솜씨만 늘어서 걱정이라니까?”
“사실을 말한 것뿐인데 말솜씨랄 게 뭐 있어요.”
“하하, 너 나한테 받고 싶은 거라도 있어? 오늘 왜 이렇게 아부를 하고 그러지?”
관장은 제자의 넉살에 웃음을 터뜨렸다.
“아니에요. 제가 성공해서 관장님 뭐라도 해 드려야죠. 저, 그런데 오늘 왜 통화하자고 하신 거예요?”
“아, 그게 이번에 아시안 게임에 누가 출전하나 좀 알아봤거든.”
“예.”
“너, 이번에 일본 대표 선수로 누가 나오는지 알아?”
“일본 언론에서 천재라고 엄청 다루는데 누가 모르겠어요. 토미야스를 말씀하시려는 거잖아요.”
토미야스는 일본 웰터급 국가 대표로 열여덟의 나이에 쟁쟁한 선배들을 꺾고 아시안 게임에 출전하게 되었다.
감독님께서 얼핏 말씀하신 바로는 언론에서 과하게 다루는 면이 없지 않아 있지만, 실력만큼은 진짜라고 했다.
경량급을 제외한 체급은 보통 우즈베키스탄이나 카자흐스탄처럼 중앙아시아 국가가 금메달 후보로 거론되는데, 웰터급에서 가장 유력한 금메달 후보는 바로 토미야스였다.
“그래, 바로 그 토미야스 때문에 너에게 전화를 건 거다. 너 토미야스가 아시안 게임 이후에 바로 프로로 전향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 있어?”
“처음 듣는 이야기입니다.”
“내가 녀석을 보니까 인물도 제법 괜찮고 실력이 뛰어나더라고 게다가 나이도 열여덟이라 어린 편이잖아. 이렇게 이야기하니까 꼭 누구랑 닮은 것 같지 않아?”
“잘 모르겠는데요.”
관장님께서 나를 염두에 두고 말씀하신 걸 알았지만, 스스로 말하기 민망했던 나는 능청을 피우며 답변을 피했다.
“쑥스러워하기는, 내가 보니까 놈이 여러모로 너랑 이미지가 겹쳐. 아무튼 다시 본론으로 돌아오면 최근에 OX에서 토미야스를 주시하기 시작했어.”
“OX가 뭔데요?”
“OX는 세계적인 복싱 에이전시 회사야. 회사에 소속된 세계 챔피언만 넷에다가 영업력도 좋아서 챔피언급이 되면 웬만한 경기를 라스베가스에서 개최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곳이지.”
프로 복싱에서 에이전시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것은 두말할 것 없는 사실이었다.
아무리 세계 챔피언이라도 마케팅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거나 흥미로운 매치 업을 잡지 못하면 생활고에 시달릴 수 있는 게 복싱 세계의 현실이었다.
“에이전시도 에이전시지만 선수 자체가 흥행력이 없으면 제아무리 OX라도 소용없어요.”
“너 내가 예전에 했던 말 기억해?”
“무슨 말씀을 하셨죠?”
“네 경기가 묘하게 사람을 끌어들이는 힘이 있다고 했잖아.”
“말씀하시니까 기억이 나네요.”
관장님은 내 시합이 열릴 때마다 사람들이 몰린다며 스타성이 있다고 말씀해 주신 바 있었다.
“이제 슬슬 감이 오지 않니?”
“세계적인 에이전시가 아시안 게임을 주시하고 있으니까 활약을 해서 눈도장을 받으라는 말씀이시잖아요.”
나는 관장님의 물음에 지체 없이 대답했다.
“그래, 임마. 어차피 우리도 아시안 게임 끝나면 프로로 전향하기로 했잖아. 이왕 할 거 OX 같은 회사랑 같이 일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어.”
“하지만, 저는 토미야스의 경우와 달라요.”
“뭐가 다르다는 거냐?”
백성철 관장은 제자와 토미야스가 다방면에서 유사하다고 생각했기에 내 말이 언뜻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일본은 우리나라보다 격투기 시장이 훨씬 발달이 잘되어 있어요. 그 말은 토미야스가 OX랑 협업하지 않고 국내 경기만 뛰어도 부자가 될 수 있다는 말이고요.”
“음, 협상력 측면에서 너보다 더 우위에 있다는 이야기구나.”
“네, 게다가 일본에 팬도 많아서 한번 경기를 하면 PPV를 시청할 사람들도 저보다 훨씬 많을 거예요. 즉, 토미야스 하나로 발생할 수 있는 매출이 저에 비해 훨씬 많다는 말이죠.”
“그 부분은 생각을 못 했네. 하지만 네 말이 맞다 치더라도 사람은 기회를 스스로 만들 줄 알아야 돼.”
“기회를 만들라고요?”
“아시안 게임이 어떻게 보면 국제무대 데뷔전인 셈인데 거기서 네가 압도적인 퍼포먼스와 스타성을 보여 준다고 가정해 봐. 그러면 OX가 아니라 다른 에이전시에서 계약하자고 할 수도 있지 않겠어?”
‘현실성이 높진 않지만, 아예 근거가 없으신 건 아니야.’
나는 관장님 말씀에 점점 설득을 당하고 있었다.
“내가 볼 땐 이건 기회니까 고민을 좀 해 봐.”
“방금 든 생각인데 밑져야 본전이라고 OX의 눈에 들 수 있도록 노력해 볼게요.”
“그러려면 1회전부터 결승까지 임펙트 있는 모습을 보여 줘야 돼. 국가 대표 선발전 때처럼 어중간한 모습을 보였다가는 금메달을 따더라도 연락이 오는 일은 없을 거다.”
“명심하겠습니다.”
관장님의 말씀이 옳았다.
아무 밑천이 없는 상황에서 깊은 인상을 심어 줄 수 있는 방법은 월등한 경기력을 보여 주는 것 외에는 없었다.
“내가 선수촌에 들어갈 수 있으면 어떻게든 도와주겠지만, 지금으로서는 네가 스스로 실력을 키우는 수밖에 없어. 아무튼 훈련 열심히 잘 받고 또 연락하자.”
“예, 관장님.”
‘미르헨 총장님을 당장 만나야겠어.’
통화를 마친 나는 시스템을 실행한 뒤 총장님께 메시지를 보냈다.
30분쯤 지났을까, 눈앞에 화면이 떠오르더니 낯익은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르마이스 님 부르셨습니까?]
“안녕하세요, 총장님. 바쁘실 텐데 급하게 불러서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마침 아카데미 업무를 마치고 집에 도착한 참이라 여유가 있었습니다.]
미르헨 총장은 손을 저으며 괜찮다는 제스처를 취했다.
“혹시 일전에 말씀하신 업데이트가 완료됐는지 궁금해서 연락을 드렸습니다.”
[안 그래도 어제 션 교수로부터 업데이트 완료가 임박했다는 소식이 들어왔습니다.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지만, 늦어도 내일모레쯤이면 작업에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나는 총장님을 비롯한 이르젠 제국 인사들과 꾸준히 연락을 하고 있었다.
총장님과 션 교수님이 프로그램을 개발한 덕분에 단장님이 훈련 시킨 투사들의 데이터를 일루션에 전달하는 게 가능해졌으나 특정 개인에게 복싱을 일일이 가르쳐야 하는 수고로움 때문에 기능을 개선해야 한다는 논의가 전부터 이루어지고 있었다.
“영상 속 선수를 스캔하는 건 아무래도 어렵겠지요?”
[시간을 더 투자하면 가능할 수도 있겠지만, 지금의 기술력으로는 조금 힘들 것 같습니다. 대신 전에 말씀하셨던 것처럼 아르마이스 님께서 직접 상대하는 선수를 스캔하는 건 가능해졌습니다. 그리고…….]
가상 스파링 프로그램인 일루션의 효용을 높이기 위해서는 캐릭터 생성을 용이하게 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했다.
이에 나는 영상 속 사람의 동작을 스캔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요구했고 총장님과 션 교수님은 이를 위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개발에 몰두했다.
그 결과 내가 현실에서 직접 본 상대의 모션을 기반으로 캐릭터가 생성될 수 있는 새로운 기능을 추가하는 데 성공했다.
이는 내가 처음에 요구한 내용과는 달랐지만, 일류 선수들과 스파링을 많이 할 수 있는 현 상황에서는 상당히 유용하게 쓰일 수 있는 기능이었다.
“개발하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저보다는 션 교수가 고생이 많았지요. 대화를 마치는 대로 교수님께 연락을 드려서 조속히 업데이트가 마무리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개발에 더욱 박차를 가해서 아르마이스 님께서 원하시는 기능도 조만간 개발될 수 있게 노력을 아끼지 않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총장님.”
이후, 일루션에 관한 간단한 이야기가 서로 오간 것을 끝으로 대화는 마무리되었다.
‘예상대로 흘러가는군.’
화면이 종료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미션 창이 눈앞에 떠올랐다.
나는 갑작스러운 상황에도 전혀 동요하지 않고 미션의 내용을 살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