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 21화 기회 (2)
<아르마이스의 의지가 발동되었습니다.>
<미션이 생성되었습니다.>
<목표: 동료 선수들의 정보를 모두 스캔하고 가상 스파링을 실시하십시오.>
<보상: 복싱 관련 스탯 LV UP.>
‘완전 혜자 미션이잖아.’
스탯이 오를수록 향상 폭은 줄어들기 마련인데, 레벨 업 보상이라니…….
선배님들의 동작을 스캔하고 이에 맞춰 생성된 캐릭터들과 가상 스파링을 하는 건 고단한 일이었지만, 보상의 내용이 워낙 좋아 즐거운 마음으로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앞으로 적극적으로 스파링을 부탁드려야겠어.’
시스템 업그레이드가 이루어지는 대로 스파링을 진행할 계획이라서 선배님들께 미리 말씀드릴 필요가 있었다.
나는 어느 선배님 먼저 요청을 드릴지 고민하며 남은 하루를 보냈다.
* * *
다음 날이 되었다.
이틀은 걸릴 줄 알았던 업그레이드는 총장님께서 신경을 써 준 덕분에 마무리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계획한 대로 선배들을 찾아가 스파링을 요청했는데 의외로 기회는 빨리 찾아왔다.
“마침 나도 몸 좀 풀려고 했는데 잘됐다. 조금 있다가 감독님께 말씀드리고 시합이랑 똑같이 3라운드로 하자.”
“감사합니다, 선배님.”
스파링에 응한 선배는 라이트 웰터급으로 나보다 체중이 5kg 정도 덜 나갔지만, 체격이 좋으신 편이어서 무리만 안 하면 서로에게 적합한 상대였다.
잠시 후, 정규 훈련을 모두 마치고 오후 4시가 되었다.
선배와 나는 스파링을 하기 위해 강당으로 왔다.
“몸 좀 풀다가 10분 후에 링에서 보자.”
“네, 알겠습니다.”
우리는 각자의 방식으로 워밍업을 한 후 링에 마주 섰다.
‘스캔 모드 켜 줘.’
<일루션이 실행되었습니다.>
<사용자의 요청에 따라 스캔 모드를 실행합니다.>
원래라면 일루션을 작동시키면 얼마 있지 않아 암전이 발생하고 가상 현실이 펼쳐져야 정상이었다.
그러나 미르헨 총장님과 션 교수님이 시스템 업데이트를 완료하여 스캔 모드 기능을 장착한 이후로는 현실 세계에서 실시간 스캔이 가능해졌다.
<스캔 대상을 설정해 주십시오.>
시스템이 말을 함과 동시에 내 시야에 인물을 담을 수 있는 테두리가 들어왔다.
나는 스파링에 앞서 스캔 모드를 수차례 작동시켜 봤기 때문에 선배의 모습을 테두리 안에 손쉽게 집어넣었다.
<대상이 설정되었습니다.>
‘좋았어 슬슬 시작해 볼까?’
모든 작업을 마친 나는 스텝을 밟으며 종이 울리기를 기다렸다.
땡-
종소리와 함께 스파링이 개시되었다.
나는 박민범 때와 달리 가벼운 마음으로 스파링에 임했다.
반면에 선배는 그동안 갈고 닦은 기술을 연마한다는 기분으로 진지하게 스파링을 했다.
“후우, 확실히 스텝이 좋아. 민범이가 고전했던 게 우연이 아니라니까?”
“미트랑 샌드백 치는 것만 봤을 때는 몰랐는데 패턴도 다양하고 펀치도 다채로우신 것 같아요.”
라운드 사이 휴식 시간을 1분으로 설정했기에 대화 시간은 충분한 편이었다.
1라운드를 마친 나는 선배가 자신의 밑천을 모두 드러낼 수 있게 작업에 들어갔다.
“에이, 다른 애들도 다 할 수 있는 건데 뭘.”
“아니에요. 페인트 주는 것도 그렇고 확실히 다른 선배님들보다 수가 다양하셔서 상대하기가 까다롭더라고요.”
“이제 1라운드 한 거 가지고 뭘 그래.”
선배는 대답과 달리 얼굴에는 화색이 넘쳐 흐르고 있었다.
“저, 괜찮으시면 선배님이 보유하신 기술들을 보고 싶습니다.”
“훗, 자식. 평소엔 말도 별로 없던 놈이 이렇게 말을 잘할 줄은 상상도 못 했네. 시간 됐으니까 스파링하러 가자.”
“네, 선배님.”
아부를 잘해서였을까, 선배는 1라운드 때보다 더 적극적인 움직임을 보여 주었다.
‘너무 잘하려고 하면 안 돼.’
내 목적은 어디까지나 선배의 동작들을 스캔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상대가 기량을 펼치기 용이한 수준으로 스파링에 임해야 했다.
“헉, 헉 수고 많았다.”
“고생하셨습니다.”
약속했던 3라운드가 모두 끝이 났다.
“저녁 식사까지 시간이 많이 남았는데, 간단하게 미트 치기라도 할까요?”
“좋아, 그렇게 하자.”
“선배님 먼저 하시죠.”
나는 자연스럽게 미트 글러브를 손에 끼고 펀치를 받을 준비를 했다.
‘최대한 동작들을 뽑아내야 돼.’
선배에게 미안하지만, 미트 훈련의 목적은 스파링 때와 마찬가지로 정보 수집이었다.
팡-팡
잠시 후, 경쾌한 타격 음이 강당에 울려 퍼졌다.
우리는 1시간가량 훈련을 더 진행하고 나서야 각자 방으로 돌아갔다.
* * *
‘직접 미션을 선택하는 건 오랜만이다.’
하루 일과를 모두 마치고 방에 돌아온 나는 스탯 창을 연 다음 매력 항목을 클릭했다.
그러자 현재 스텟 수치와 다음 레벨 업을 위해 채워야 할 경험치 그리고 미션 버튼이 화면에 나타났다.
‘레벨 3이라…… 경험치 50%가 있긴 하지만, 다른 스탯에 비해서 레벨이 너무 낮아. 빨리 미션을 수행해서 올려야겠어.’
프로 복서로서 성공을 하려면 뭐니 뭐니 해도 실력을 갖추는 게 첫째였다.
압도적인 실력을 갖춘 복서는 업계 최고가 되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으나, 스타성이 결여되어 있으면 실력이 떨어지는 선수보다 돈을 덜 벌 수도 있었다.
선수의 수입과 연결되는 입장 수익과 PPV 판매량은 스타성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복서로서 흥행력을 갖추기 위해서 매력을 높여야 하는 건 두말할 필요 없는 사실이었다.
나는 스탯 옆에 있는 미션 버튼을 지체 없이 눌렀다.
<사용자의 요청에 따라 미션이 생성되었습니다.>
<목표: 현재 있는 곳에서 열 명의 사람들과 우호 관계를 맺으십시오.>
<보상: 매력 레벨 UP>
‘이거 쉽지 않겠는데?’
현자의 눈을 사용하면 사람들이 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파악할 수 있었다.
우호 관계는 신뢰 관계 바로 아래 단계로 꾸준한 만남과 대화를 통해 친해지면 달성할 수 있는 단계였다.
선수, 코치진, 직원 등 센터에 상주하는 인원이 적지 않아서 얼핏 보면 쉬운 미션으로 여길 수 있으나 그건 착각이었다.
제한된 공간에서 생활하기에 꾸준한 만남과 일상적인 대화까지는 어떻게든 만들어 볼 수 있었지만, 사적으로 친해진다는 건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감독님과 창영이 형하고는 이미 우호 이상의 관계를 맺었는데, 이것도 카운트가 되는 건가?’
<기존의 인맥은 카운트가 되지 않으니 참고하시길 바랍니다.>
‘쳇, 깐깐하기는. 그나저나 누구한테 먼저 말을 걸어 볼까? 아, 매일 보는 식당 아주머니랑 친해지는 게 쉽겠어.’
센터 식당에서 근무하시는 분들은 선수들을 자식처럼 여기며 친근하게 대해 주었다.
이 외에도 매일 훈련 때 만나는 선배님들과 친해지는 것도 어렵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선후배 사이의 기강을 중시하는 분들이긴 하나 예의를 갖추고 싹싹하게만 굴면 금방 마음을 얻을 수 있었다.
‘최대한 빨리 미션을 완료하고 추가 미션을 수행해야겠어.’
보상을 받아 레벨이 오른다 해도 스탯 레벨은 4에 불과했다.
지금까지의 경험상 레벨 5는 찍어야 매력이 높은 자들 사이에서도 변별력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더 이상의 고민은 시간 낭비였다.
나는 곧바로 미션을 수락했다.
* * *
4월이 지나고 5월이 되었다.
대현복싱센터에서 훈련을 하던 선수들은 진천에 있는 선수촌으로 모두 돌아왔다.
감독님께서는 1주일 동안 선수촌에서 마무리 훈련을 한 뒤 일본으로 넘어가 적응에 돌입한다고 했다.
“네가 그렇게 궁금해하던 선수촌 밥맛이 어때?”
“제가 아니라 저희 관장님께서 궁금해하셨어요. 전 솔직히 센터 밥이랑 비슷한 것 같은데요?”
나는 김창영 선배와 점심 식사를 함께하고 있었다.
“요즘 틈만 나면 책만 읽네? 윽, 무슨 책이 이렇게 두꺼워.”
“몽테뉴의 수상록이라는 책이에요.”
“무슨 내용인데?”
선배는 내가 읽는 책에 호기심을 보였다.
“우정, 자유, 절제, 이기심처럼 인간 사회를 구성하는 가치나 여러 가지 사회 현상에 대한 통찰을 적은 책이에요.”
“우리는 아시안 게임만 생각하면 하루하루 피 말리는데 정말 대단하다. 하긴, 너는 여유를 좀 부려도 되지.”
복싱 센터에 있는 동안 열 명의 사람과 우호 관계를 맺는 데 성공한 나는 추가로 미션을 받았다.
시스템은 매력을 올리기 위한 미션으로 책 읽기 과제를 주었다.
‘흠, 매력적인 사람이 되려면 인간 자체에 대해서 더 알아야 한다는 거지? 일리가 있는 말이야.’
리스트에 적힌 책들을 보니 몽테뉴의 수상록, 버트란드 러셀의 행복론과 같이 인간에 대한 깊은 고찰을 엿볼 수 있는 것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뿐만 아니라 프로이드, 융, 아들러 같은 심리학 거장들이 쓴 도서들도 목록에 있어서 때아닌 독서를 즐기는 중이었다.
“여유라니요, 지금보다 더 열심히 해도 모자라는데요 뭘.”
“최근에 감독님과 면담을 하다가 선수들에 대해 평가하시는 걸 들었거든.”
“저에 관해서도 말씀하시던가요?”
나는 귀를 세우고 선배의 말에 집중했다.
“가만히 좀 있어 봐. 너 감독님께서 우리 대표 팀의 전력을 어떻게 평가하셨는지 기억나니?”
“저랑 이택진 선배만 동메달이 확실하고 나머지는 노력을 더 많이 하셔야 한다고 했잖아요.”
“그 말이 뭐겠어? 네가 있는 웰터급이랑 플라이급을 제외하면 남은 선수들은 메달권이 아니라는 말이잖아. 최근 몇 년 동안 중앙아시아 국가에서 복싱 인재가 쏟아져 나오는 바람에 전통 강호였던 우리나라는 밀리고 있는 게 현실이야.”
김창영 선배는 진지한 얼굴로 설명을 이어 갔다.
“그런데 감독님께서 이번 면담에 금메달 재목이 나왔다고 나한테 말씀하셨다니까?”
“그게 설마 전가요?”
“풋, 그래 감독님께서 말씀하신 금메달 유력 후보가 바로 너다. 아, 녀석 처음 만날 때만 해도 순둥순둥하던 놈이 왜 이렇게 능글맞아졌데?”
그는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며 말하는 후배의 모습에 웃음이 터져 나왔다.
“감독님께서 좋게 봐 주셔서 감사하지만, 어떻게 될지는 까 봐야 아는 거지요.”
“네가 금메달 후보라고 생각하는 건 비단 감독님만이 아니야. 우리도 복싱 기량으로만 따지면 네가 최고라고 생각한다.”
“다른 분들은 몰라도 박민범 선배는 인정하지 않을걸요? 와, 근데 제육볶음이 진짜 맛있네요. 이거 하나는 센터 식당에서 준 것보다 더 나은 거 같아요.”
선배님의 말씀에 기분이 좋아졌으나 내색을 하지 않으려는 마음에 일부로 말을 돌렸다.
“민범이도 네가 우리 대표단에서 최고라고 인정하던데?”
“네? 누가요? 박민범 선배가요?”
음식을 먹으며 딴청을 피우던 나는 눈을 크게 뜨고 반문했다.
“그래, 임마. 그리고 너한테 악감정 가졌던 것도 후회하고 있더라고.”
박민범은 내가 센터에 있는 내내 여자 선수들에게 한 치의 관심도 드러내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처음 봤을 때 감정적인 모습을 보여 줬음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찾아와 스파링을 요청하는 날 보면서 얼음장 같던 마음이 모두 녹은 상태였다.
“뭐, 저에 대한 감정이 풀리신 거는 눈치채고 있었어요.”
“감정이 풀린 정도가 아니라 너랑 친해지고 싶어 하더라니까? 아무튼, 기회가 되면 찾아가서 살갑게 인사해 봐. 민범이가 조금 거칠긴 해도 정이 많은 녀석이야.”
“네, 선배님.”
현자의 눈으로 나에 대해 호감을 갖고 계시는 것은 알았지만, 본인의 행동을 후회하고 계시는 줄은 몰랐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나눠야지.’
아시안 게임이 끝나면 다시 만날지도 모르는 사람에게 티 나게 다가가 친분을 맺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야, 너 1시에 감독님하고 면담 있다며. 지금 12시 50분이야.”
“선배님하고 대화 나누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네요. 전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나는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식기를 반납하고 감독님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똑똑똑-
“감독님, 저 왔습니다.”
“어 진우구나, 들어와라.”
나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