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사람들이 자꾸만 보은한다-89화 (89/122)

89. 21화 기회 (3)

“이쪽에 앉아라.”

“네, 감독님.”

나는 감독님 건너편에 배치된 의자에 착석했다.

“날이 따뜻해진 걸 보니 아시안 게임까지 얼마 안 남았구나.”

“센터에 들어온 날 제법 쌀쌀했던 것 같은데 벌써 봄이 되었네요.”

“뭐든 그래. 하나에 열중하다 보면 시간은 화살처럼 흘러가기 마련이거든. 그건 그렇고 창영이한테 들었는데, 나에게 할 말이 있다면서?”

이번 면담은 나의 요청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예, 다름이 아니라 향후 일정에 대해서 논의드릴 게 있어서 왔습니다.”

“일정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흠……. 일단 들어나 보자.”

백민규 감독은 대표 팀에 있으면서 일정을 논의하러 온 선수는 처음이었기에 의아한 기분이 들었다.

“제가 알기로 일본에서 2주가량 훈련을 진행한다고 들었습니다.”

“맞아, 낯선 환경에서 경기력이 나오려면 적응 과정은 필수니까 말이야.”

“일본에 도착 후 첫 2주간은 착실히 훈련에 참여하겠습니다. 하지만 그 이후에는 훈련이나 시합 준비에 있어서 저에게 재량을 일임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쓰읍, 진우야. 아니다 우선 이유나 먼저 들어 보자.”

감독님은 훈계하려던 걸 멈추고 이유를 먼저 들어 보기로 했다.

“저희 관장님께 들어서 아시겠지만, 저는 시합에 맞춰서 하는 특유의 루틴이 있습니다.”

“안 그래도 성철이가 며칠 전에 그 이야기를 하더라. 뭐 이미지 트레이닝을 통해 시합에 대한 감각을 최대한 끌어올린다지?”

관장님께서는 원활한 면담을 위해 미리 밑밥을 깔아 주신 상태였다.

“그렇습니다. 전국체전 때부터 매번 하던 루틴이라 갑자기 못 하게 되면 경기력에 영향을 미칠 것 같아서 이렇게 부탁드리는 겁니다.”

나는 고개를 숙이며 나지막이 말했다.

“이미지 트레이닝은 훈련 끝나고 방에서 혼자 해도 되는 거잖아. 그리고 매일 훈련장에서 하는 쉐도우 복싱도 이미지 트레이닝인데, 굳이 떨어져 지내겠다는 이유가 뭐냐?”

쉐도우 복싱은 그 특성상 가상의 적을 염두에 두고 몸을 움직이는 것이기 때문에 이미지 트레이닝으로 봐도 무방했다.

“이렇게 말씀드리면 건방지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제가 하는 이미지 트레이닝은 다른 선수들의 그것과는 질적으로 다릅니다. 그리고 상대 전력 분석도 더 심도 있게 할 계획이라서 개막 이후에는 개인 시간을 반드시 확보해야 합니다.”

‘일루션이 있으니까 거짓말하는 것도 아니잖아.’

얼핏 들으면 터무니없는 소리로 들릴 수도 있었으나 마냥 근거 없는 말은 아니었다.

일류 복서의 쉐도우 복싱을 보면 실제 적과 붙는 것과 같은 생동감을 느낄 수 있다고 하나 ‘일루션’을 활용한 가상 스파링과 비교하면 효과 면에서 턱없이 부족했다.

따라서 다른 선수들의 이미지 트레이닝과 질적으로 다르다는 말이 거짓이라고 보긴 힘들었다.

“질적으로 다른 이미지 트레이닝이라…… 그걸 나보고 믿으라는 거야?”

“믿기 어려우신 건 잘 압니다. 하지만,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혼자 숙고하는 시간을 못 가지면 원하는 경기력이 나오지 못할 겁니다.”

“참네, 이거 완전히 협박이네 협박이야.”

팀 내 유일한 금메달 후보인 나의 말이기에 감독으로서도 외면하기는 쉽지 않았다.

“불편하게 들리셨다면 죄송합니다.”

“아니다. 네가 그렇게 말한다면 다 이유가 있겠지. 그냥 다른 부분에서 걱정이 되는 게 있어서 그러는 거니까 신경 쓰지 마라.”

“다른 선수들하고 형평성 문제 때문에 그러시는 겁니까?”

나는 감독님 입장에서 특정 선수의 편의를 봐주게 되면 선수단 통솔에 지장이 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훗, 네가 뭘 하든 다른 애들은 아마 토를 달지는 않을 거다.”

“아, 그런가요?”

“그동안 선배들을 어떻게 구워삶았는지 몰라도 너에 대해서는 다들 칭찬 일색이야.”

“감사한 일이네요.”

지난 몇 주간, 미션 수행을 이유로 사람들의 환심을 사려고 갖은 노력을 다했던 나다.

간단한 잔심부름부터 훈련장 청소까지 궂은일을 도맡아서 했고 선배님들께 먼저 다가가 인사를 드리는 등 호감을 살 수 있는 일이면 뭐든 가리지 않았다.

“그뿐이 아니야. 우리 대표단 안에서 공공연하게 네 실력을 인정하는 분위기가 조성된 상황이라 따로 개인 훈련을 한다고 토를 달 선수는 없을 거야.”

“그렇군요.”

만약에 감독과 코치가 붙어 전담 지도를 했다면 특혜로 비칠 수도 있었겠지만, 선수 혼자 알아서 하겠다는 건 감독 재량으로 허락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저, 그러면 어떤 게 걱정된다는 말씀이신가요?”

“뭐긴 뭐겠냐. 당연히 메달 획득 여부지.”

감독님은 찻잔에 따라 놓은 차를 마시며 대답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반드시 금메달을 따서 감독님을 기쁘게 해 드리겠습니다.”

“진우야, 너도 시합 많이 뛰어 봐서 알겠지만, 막판에 컨디션 조절을 어떻게 하냐에 따라서 메달의 색이 변한다. 솔직히 말할게. 우리 코치들하고 분석을 해 봤는데, 우즈베키스탄하고 일본 선수를 제외하면 네 적수가 될 만한 애들은 없어. 잠시만 기다려라.”

갈증을 느낀 백민규 감독은 한쪽에 놓은 다기를 가져와서는 찻잔에 들이부었다.

“다방면으로 분석을 해 보니까 우즈베키스탄의 라티포프 선수하고는 백중세고 일본의 토미야스에게는 살짝 밀린다는 결론이 나왔어. 진우야.”

“네, 감독님.”

“너만의 루틴이 있다는 건 알겠지만, 마지막까지 어떻게 다듬냐에 따라서 금메달 획득도 가능한 상황에서 혼자 시합을 준비하는 건 리스크가 너무 크다.”

그는 팀 내 유일한 금메달 후보인 내가 잘못된 선택을 할까 두려웠다.

“현재 저와 토미야스의 실력 차이가 한 달 안으로 메꿀 수 있는 건가요?”

“가능성이 높은 건 아니지만, 해 보지도 않고 포기할 수는 없어. 네가 지난 몇 주간 보여 준 성장세를 생각하면 난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토미야스는 이름값에 걸맞은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복싱 세계 챔피언이었던 아버지와 유도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인 어머니를 둔 토미야스는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부터 체계적인 훈련을 받은 진짜배기였다.

‘장난이 아니잖아?’

감독님으로부터 영상 자료를 건네받고 혼자 방에 들어와 녀석의 시합을 처음 시청했던 순간이 뚜렷이 기억난다.

세계 챔피언에 뒤지지 않는 탄탄한 기본기와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노련한 시합 운영은 나의 그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작년부터 복싱을 배웠다며 변명할 수도 있지만, 대회가 코앞으로 다가온 상황에선 무의미한 행위에 불과했다.

“제가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던 건 선배님들의 전폭적인 지원이 있어서 가능했습니다.”

“네가 스파링을 많이 소화한 이후로 실력이 급상승하긴 했지. 좋아, 오늘부터 스파링 일정을 빡빡하게 잡아 봐야겠어.”

“시합을 목전에 둔 상황인데 선배님들께서 부담을 느끼시지 않을까요?”

시합을 목전에 둔 상황에서 강도 높은 스파링을 감행할 선수는 많지 않았다.

“맞는 말이야…….”

내 말을 들은 감독은 턱에 손을 괸 채 고민에 빠졌다.

“선수촌에 복귀하기 전에 스파링했었던 걸 기억하시나요?”

“물론이지. 그때 다들 깜짝 놀랐었잖아.”

나는 센터에 있는 동안 선배들의 동작을 스캔한 것을 바탕으로 가상 스파링에 열중했고 미션을 완료하는 데 성공했다.

선수촌 복귀 5일 전, 감독님은 선수들의 기량을 점검하기 위하여 강당에 선수들을 불러모은 뒤 무작위로 스파링을 시켰다.

‘본때를 보여 줘야겠어.’

박빙의 승부를 벌였던 선배부터 고전을 면치 못했던 선배까지 쟁쟁한 분들이 나와의 스파링을 기다리고 계셨지만 전혀 긴장하지 않았다.

미션 보상으로 복싱 관련 스탯이 오른 덕분에 선배님들을 압도할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날, 선배님들은 내가 대표 팀에서 실력이 가장 뛰어나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셨다.

“저를 믿고 맡겨 주시면 그때 보여 드렸던 모습을 아시안 게임에서 재현할 수 있습니다.”

“…….”

백민규 감독은 제자의 열변에도 불구하고 고민이 되는지 차만 홀짝거리며 침묵을 지켰다.

그리고 5분쯤 지났을까, 그는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좋다. 개막식 이후부터는 자유니까 네가 원하는 대로 해 봐.”

“감사합니다, 감독님.”

“휴우, 알았으니까 이만 들어가 봐라.”

“어렵게 믿어 주신 만큼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편히 쉬십시오.”

힘든 결정을 내리신 탓일까, 감독님의 얼굴에는 피곤한 기색이 가득했다.

나는 허리를 숙이며 감사 인사를 드린 후 감독실에서 나왔다.

‘판은 깔렸으니까 지금부터 잘해야 돼. 어, 갑자기 뭐지?’

감독실을 나와 오후 훈련을 하러 발걸음을 옮기려던 그때, 눈앞에 화면이 떠올랐다.

<아르마이스의 의지가 생성되었습니다.>

<미션이 생성되었습니다.>

<목표: 아시안 게임에 참가하는 선수 중 열 명을 선정하여 가상 스파링을 진행하십시오.>

<보상: 복싱 관련 스탯 경험치 +50%>

‘아시안 게임까지 한참 남았는데 벌써 미션을 주네? 뭐 나로서는 나쁠 거 없으니까 수락하자.’

나는 별 고민 없이 미션을 받아들였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까 끝내주는 아이디어잖아?’

아시안 게임에 출전하는 선수와 가상 스파링을 하려면 먼저 스캔하는 과정이 필요했다. 이를 위해서는 상대 선수의 모션을 육안으로 담아내는 과정이 필요한데, 방금 감독님께 자유 시간을 확보받은 상황이라 충분히 가능했다.

게다가 만약 토미야스의 시합을 관전하여 정보를 스캔한다면 준결승이나 결승에서 만나기 전에 최소 수십 차례 이상, 가상 스파링을 진행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 흥분되는 감정을 진정시키기 어려웠다.

‘훈련 끝나면 총장님을 바로 만나야겠어. 그리고…….’

획기적인 방안을 찾은 기쁨도 잠시, 나는 미션 수행을 위하여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 * *

선수촌 숙소.

감독님의 배려 덕분에 선수촌에서도 혼자 방을 쓰고 있었다.

나는 책상에 앉아 연락을 연락이 오기를 기다렸다.

<아르마이스 님. 공무가 많아 조금 늦었습니다.>

밤 10시가 다 된 시각, 미르헨 총장은 황망한 표정을 지으며 등장했다.

“저도 이제 막 숙소에 들어온 참이라 괜찮습니다. 일전에 문의드린 사안은 알아보셨나요?”

안부 인사는 생략하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마침 아카데미 업무로 션 교수를 만날 일이 있어서 스캔 모드 시 정보 수집을 더 쉽고 빠르게 할 방도가 있냐고 물어봤습니다.>

“뭐라고 답변하시던가요?”

<1주일만 주시면 업데이트를 해 드리겠다는 확언을 받았습니다.>

미르헨 총장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정말 다행이네요.”

지금의 스캔 모드로 캐릭터를 생성하기 위해서는 상대와 최소한 3번 이상은 겨뤄 봐야 했다.

하지만 아시안 게임에서 선수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서는 단순 관람만으로도 정보 수집이 가능해야 했기에 스캔 시스템의 업그레이드가 시급한 상황이었다.

<단, 상대가 일부로 실력을 숨길 시에는 방도가 없다고 했습니다.>

“작정하고 감추는데 도리가 있겠어요? 그 부분은 제가 감안하고 사용해야지요.”

<추후에 개선의 여지가 발견되면 바로 연락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총장님. 저 때문에 일 보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하하, 아닙니다. 또 필요한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불러 주십시오. 이만 들어가겠습니다.>

내가 서둘러 대화를 마치려는 기색을 보이자 미르헨 총장님은 눈치껏 빠르게 퇴장했다.

‘최대한 시간을 아껴야 해.’

나는 노트북을 연 다음 웹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다음 주부터는 소설 쓰는 것을 뒤로 미루고 복싱 훈련에 매진해야 했기 때문에 연재 분량을 최대한 많이 확보해야 했다

게다가 미션 수행을 위해 읽어야 할 책들도 몇 권 남은 상태라 게으름을 피울 여유 따위는 없었다.

‘벌써 새벽 2시야? 하아…… 어떻게 하지. 그만하고 잘까? 아니다, 그냥 오늘은 밤을 새우고 내일 푹 쉬자.’

센터 마지막 날에 강도 높은 체력 훈련을 소화한 탓에 내일까지는 회복을 목적으로 하는 훈련들 위주로 진행될 예정이었다.

훈련 일정이 부담스럽지 않다는 것을 떠올린 나는 서랍에서 책을 꺼낸 다음 부지런히 읽기 시작했다.

<아르마이스의 의지가 발동되었습니다.>

<사용자에게 통찰력 경험치가 50% 부여됩니다.>

‘이게 웬 떡이야.’

매력 미션을 수행하기 위해 읽었던 책들이 통찰력 향상에 도움이 됐나 보다.

예상치 못한 보상을 받자 그동안 쌓인 피곤함이 모두 사라지는 기분이 들었다.

책 읽기는 동이 틀 때까지 계속되었고 기상 시간이 다 돼서야 책을 덮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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