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 22화 아시안 게임 (1)
도쿄 아시안 게임이 목전으로 다가왔다.
복싱 대표 팀을 비롯한 전 종목 선수단은 개막식 2주 전부터 일본으로 건너가 마무리 훈련을 소화하고 있었다.
‘이곳에서 복싱 경기가 열린다는 거지?’
요코아미 잇초메에 있는 료고쿠 국기관.
국기관은 일본스모협회 소유의 건물로 평상시에는 스모 시합이 열리는 곳이지만, 아시안 게임 기간에는 복싱 경기가 열릴 수 있게 안배가 되어 있었다.
“야, 너만 이렇게 따로 나와도 돼? 이러다 괜히 징계라도 받는 거 아니야?”
백성철 관장님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에게 물었다.
나는 계체량이나 시합 참여와 같이 코치진과 함께 있어야 할 때를 제외하면 자유를 보장받은 상태라 막간을 이용해 밖을 나올 수 있었다.
관장님은 나의 요청으로 일본에 오셨는데, 간단한 경비를 제외한 교통비, 숙박비는 내가 제공해 드리고 있었다.
“훈련 다 받고 나온 거라 상관없어요. 그리고 이틀 후에 있는 개막식 이후부터는 자유예요.”
“민규한테 미리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뭔가 적응이 안 된다. 그나저나 돈은 어디서 나서 호텔까지 잡은 거야?”
국기관 근처에 호텔을 잡아 준 덕분에 관장님은 편안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제가 소설 쓴다고 말씀드린 적 있었나요?”
“응, 저번에 말했었잖아.”
“거기서 나오는 돈으로 해 드리는 거예요. 그것보다 어떤 경기를 관람할지 정하셨나요?”
“훗, 걱정하지 마라. 알짜 경기들로 스케줄을 짰으니까 나만 따라오면 돼.”
백성철 관장님은 내 일정과 겹치지 않는 선에서 메달 확보가 유력한 선수들의 경기 시간과 날짜를 모두 알아 놓은 상태였다.
아시안 게임은 총 7체급의 경기가 열리지만, 동 시간대에 시합이 이루어지는 경우가 대다수여서 실력자들의 정보를 수집하려면 스케줄을 잘 짜는 게 중요했다.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꼭 제 매니저 같네요.”
“나중에 월드 스타가 될 몸인데 못 할 것도 없지. 대신 월급이나 든든히 챙겨 주라고.”
백성철 관장은 제자의 농담에 유쾌한 반응을 보였다.
“앞으로도 항상 저랑 함께해 주세요.”
“자식, 부탁하지 않아도 네 곁에 꼭 붙어 있을 생각이니까 징그러운 소리는 하지 마라.”
“경기장 구경도 다 했으니 전 이만 들어가야겠어요.”
관장님과 함께 국기관을 돌다 보니 어느새 숙소로 돌아갈 시간이 다 되었다.
“먼저 들어가. 난 마저 구경하고 호텔로 돌아갈게.”
“예, 그럼 개막식 때 뵙겠습니다.”
‘시합까지는 대충 10일 정도 남은 건가?’
복싱 경기는 개막식을 하고 일주일이 더 지난 뒤에야 열릴 예정이었다. 남자 복싱 경기는 중간에 휴일을 제외하면 격일로 경기가 이루어졌는데, 웰터급의 경우 개막 9일 차에 시합이 개시되어서 개막 8일 차에 열리는 복싱 경기는 관람할 수 있었다.
나는 개막식 이후부터는 관장님과 아침 훈련을 하고 남은 시간은 일루션으로 가상 스파링을 할 생각이었다.
‘계획대로만 하면 큰 문제는 없을 거야.’
토미야스와 라티포프 중 누구와 결승에서 만나게 될지는 모르지만, 월등한 실력을 갖출 수만 있다면 상대가 누구냐는 건 크게 고민할 일이 아니었다.
* * *
개막식 날이 되었다.
아시아 45개국 대표 선수들은 개막식 참석을 위해 도쿄 국립 경기장에 집결했다.
“와, 이번에 아주 작정하고 준비했나 봐.”
“그러게 퀄리티가 웬만한 올림픽 개막 공연보다 더 나은 것 같아.”
일본 총리의 개회사가 끝나고 축하 공연이 펼쳐지자 선수들은 이를 구경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휴,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
공연에 정신이 팔려 있는 선배들과 달리 난 개막식에 별 관심이 없었다.
잠시 후, 각 나라 선수들은 경기장에 입장하여 퍼레이드를 시작했다.
“와아아!”
‘분위기가 장난이 아닌데?’
스타디움을 꽉 채운 관중들이 일시에 함성을 지르자 나도 모르게 감정이 고조되었다.
나는 손에 든 태극기를 흔들며 경기장 내의 뜨거운 열기를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뭐야? 공연을 또 하는 거야?”
“아까 했던 건 맛보기고 지금부터 하는 게 진짠가 봐.”
선수 퍼레이드가 끝나고 본격적인 공연이 시작되었다.
펑-펑-펑
스타디움 주변으로 폭죽이 터짐과 동시에 전통 의상을 입은 사람들이 경기장으로 밀려 들어왔다.
일본은 자신들의 문화를 느낄 수 있는 전통 공연부터 홀로그램 기술을 활용한 3D 캐릭터 콘서트까지 다채로운 공연으로 관중들의 눈을 즐겁게 했다.
공연은 30분가량 계속됐고 뒤이어 이어진 성화봉송식까지 마친 후에야 개막식은 마무리되었다.
“진우야,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연락해. 그리고 첫 시합은 오후에 있으니까 점심 먹기 전에는 우리랑 합류해야 하는 거 잊지 말고.”
“네, 감독님.”
“어떤 대회든 첫 시합이 가장 중요하니까 전날에 컨디션 관리를 잘해야 된다.”
“새겨듣겠습니다.”
나는 선수단 숙소에서 감독님과 대화를 나누는 중이었다.
“그동안 해 온 것도 있고 성철이도 옆에 있으니까 잘할 거라 믿는다. 딱 한 가지 시합 직전에 널 케어할 수 없다는 게 마음에 걸리는구나.”
백민규 감독은 시합이 임박할 때면 수시로 선수들의 상태를 체크하고 섬세하게 관리해 주는 타입이었다.
“다른 선배님들은 감독님과 함께 하는데 저만 혼자 하겠다고 요란을 떨어서 죄송합니다.”
효과적인 훈련과 원활한 미션 수행이라는 명분이 있다해도 선수단 이탈이 무리한 행동이라는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나는 아쉬워하는 감독님께 고개를 숙인 채 미안한 마음을 표현했다.
“아니다.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알아서 잘할 거라고 믿는다.”
“야, 이놈아. 인사는 적당히 하고 짐 나르는 것 좀 도와라.”
감독님과 한참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등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야, 제자랑 마지막으로 인사 좀 나누겠다는데 그냥 혼자 하면 안 되냐?”
“어쭈? 최근에 훈련 좀 같이했다고 내 제자를 가로채려 하네? 그리고 시합 날에 어차피 볼 건데 무슨 마지막은 마지막이야?”
백성철 관장님은 손에 든 짐을 차에 넣으며 볼멘소리를 내뱉었다.
“아무래도 관장님을 도와드려야 할 것 같아요.”
“저 녀석은 나이를 먹어도 불평불만 하는 건 그대로구나. 혹시 성철이가 힘들게 하거나 귀찮게 하면 언제든지 돌아와도 되니까 마음 편히 지내.”
“풋, 감사합니다, 감독님.”
감독님의 농담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
“괜한 소리 듣기 싫으면 빨리 가서 도와야겠다.”
“네, 그럼 들어가 보겠습니다.”
나는 감독님께 꾸벅 인사를 드리고 관장님과 함께 짐을 옮겼다.
“내가 있는 호텔로 가면 되지?”
“예, 관장님.”
우리는 차에 짐을 모두 실은 후 호텔로 이동하는 중이었다.
“아까 보니까 민규가 무척 아끼는 것 같더라? 널 바라보는데 눈에서 꿀이 떨어지더라고.”
“제가 어디 가서 미움받는 타입은 아니잖아요.”
“자식, 칭찬 좀 해 줬다고 그새 또 기고만장하기는. 그나저나 너 요즘 운동은 안 하고 외모에만 신경 쓴 거 아니야?”
“네? 아니에요. 제가 그동안 얼마나 열심히 했다고요.”
관장님의 뜬금없는 말에 난 손을 저으며 부인했다.
“애가 순진한 건지, 눈치가 없는 건지. 선수 숙소에서 여자 선수들이 널 얼마나 쳐다봤는 줄 알아?”
“아, 전 또 뭐라고…….”
여성의 눈길을 받는 건 대현복싱센터에 있을 때부터 늘상 있던 일이라 나에게는 놀랄 만한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최근 들어 날 바라보는 시선이 부쩍 더 늘은 것은 사실이었다.
‘아마 스탯 레벨이 올라서 그런 걸 거야.’
최근에 매력 관련 미션을 연달아 두 개나 클리어한 덕분에 레벨 3에서 5까지 끌어올릴 수 있었다.
“쓰읍, 아무리 봐도 이상해. 운동하는 놈의 얼굴이 아니란 말이야.”
“그건 또 무슨 말씀이세요?”
“보통 운동선수들 보면 고생한 흔적이 있기 마련인데 넌 어째 가면 갈수록 피부에서 윤이 나냐?”
“타고난 거죠, 뭐.”
“하긴 네 여동생이 아이돌인 걸 보면 그럴 수도 있겠다.”
‘평소에는 예리하신 분인데 이럴 때 보면 참 단순하시단 말이야.’
나는 별생각 없이 내뱉은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관장님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 * *
개막식이 끝나고 일주일 동안은 평범한 하루의 연속이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관장님과 런닝을 하고 호텔 지하에 있는 헬스장에 가 가볍게 웨이트를 했다.
이후, 방에 들어와 가상 스파링을 진행하다가 저녁 식사를 마치면, 관장님이 계시는 룸으로 올라갔다.
“다시 원투 쓱-빡.”
팡-팡-팡
관장님이 쓰는 룸은 혼자 쓰기에 상당히 넓어서 미트 훈련을 진행해도 크게 손색이 없었다.
방 안에 있는 가구를 한쪽에 몰아넣은 뒤, 30분가량 미트 치기를 소화하고 다시 제자리에 갖다 놓는 식으로 훈련을 진행했다.
“헉, 헉. 덕분에 나도 운동 한번 제대로 하네.”
“고생하셨습니다.”
“그래 이만 들어가서 푹 쉬어라.”
“네, 관장님.”
나는 관장님께 인사를 드린 후 방으로 돌아왔다.
‘씻어야겠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관장님의 지시 아래 미트를 치는 건 상당히 많은 움직임을 요했다.
흠뻑 젖은 옷을 한쪽에 벗어 놓고 화장실에 들어가 찬물로 샤워를 했다.
[아르마이스 님, 안녕하십니까.]
“네, 교수님. 총장님 통해서 종종 안부만 전해 들었지 이렇게 뵙는 건 정말 오랜만인 것 같네요.”
머리를 말리고 침대에 누워 휴식을 취하던 중, 화면이 눈앞에 떠올랐다.
오늘은 일루션에 관련된 논의를 하기 위해 션 다이스 교수와 미팅을 하기로 한 날이었다.
[최근에 업데이트한 기능은 확인해 보셨습니까?]
“네, 예전에는 3번에서 4번 정도 스캔을 떠야 캐릭터가 생성되던 게 이제는 한 번의 스캔만으로도 가능해졌습니다.”
[시간이 워낙 없어서 작동을 제대로 할까 걱정했는데 다행입니다.]
“매번 무리한 요구만 드리는 것 같아서 죄송할 따름입니다.”
나는 일전에 션 교수님과 미르헨 총장님께 스캔 모드의 효율성을 높여 달라는 요청을 드린 바가 있었다.
원래라면 작업에 적어도 한 달 이상의 시간이 소요됐지만, 사정이 급박하다는 것을 안 교수님은 만사를 뒤로 제쳐 두고 개발 작업에만 매진하여 요청이 있은지 불과 일주일 만에 업데이트 작업을 완료할 수 있었다.
[황제 폐하께서 아르마이스 님에 대한 지원 업무는 모든 공무에 우선한다는 칙령을 내리셨기 때문에 부담 갖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 그리고 최근에 부탁하신 작업도 방금 막 마무리했습니다,]
“감사합니다, 교수님. 그럼 일루션과 바깥세상의 시간 관계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아공간 안에서의 시간은 바깥세상보다 2배가량 천천히 흘러갔다.
내가 그동안 가상 스파링을 선호했던 건 체력 소모 없이 실력을 증진할 수 있다는 점도 있었지만, 시간을 아낄 수 있다는 점이 더 크게 작용했다.
그러나 선수 10명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각 캐릭터당 30번의 스파링을 소화해야 하는 미션을 소화하기 위해서는 아공간 내의 시간 흐름을 더 늦출 필요가 있었다.
[제국 연구원들과 심혈을 기울여 연구한 끝에 시간의 흐름을 2배 더 늦추는 데 성공했습니다.]
“헉, 그러면 아공간에서 4시간 동안 있어도 바깥세상은 1시간밖에 흐르지 않는다는 이야긴가요?”
[그렇습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덕분에 대회를 무사히 치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복싱 시합이 격일로 이루어진다고는 하나 준결승이나 결승까지는 불과 일주일의 시간밖에 없어서 시간의 흐름을 늦추는 건 금메달을 따는 데 있어 매우 중요했다.
[아, 그리고 새로운 소식이 하나 더 있습니다.]
“어떤 건가요?”
[제국 연구소에서 업데이트 작업만 전담하는 부서가 새로 생겼습니다. 따라서 앞으로는 일루션의 업데이트 작업이 별도의 지시 없이도 종종 이루어질 겁니다.]
션 교수는 차분하게 설명을 이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