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 22화 아시안 게임 (2)
“일루션 업데이트를 담당할 전용 부서가 따로 생긴다고요?”
[네, 아르마이스 님께서 지시하신 정보 수집 효율성 제고와 시간의 흐름을 늦추는 부분에 대해서 지속적인 업데이트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해서 부서를 따로 창설했습니다.]
‘대박이다. 앞으로는 굳이 일일이 말씀드릴 필요가 없다는 이야기잖아.’
교수님께서 언급하신 부분은 업데이트가 될수록 좋은 것들이어서 나한테는 더할 나위 없이 기쁜 소식이었다.
[정보 수집의 경우에는 단순히 캐릭터 생성을 빨리 하는 것을 넘어 인공 지능을 통한 예측 기능도 강화할 예정입니다.]
“예측 기능 강화요?”
[일전에 상대가 실력을 숨기려고 마음먹으면 스캔이 어렵다고 말씀드린 적이 있는데 기억하십니까?]
“네, 총장님한테 전해 들었던 걸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현재 저희 연구 팀에서는 데이터베이스에 구축된 다양한 인물 정보를 기반으로 상대의 사소한 습관 하나하나 분석하여 행동을 미리 예측하는 연구를 지속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딥 러닝이랑 비슷한 개념이잖아. 만약에 연구만 잘 이루어지면 숨은 실력까지도 모두 뽑아낼 수 있겠어.’
딥 러닝은 분류가 이루어진 데이터와 사물을 기반으로 예측을 용이하게 해 주는 기술이다.
실제로 수년 전에 바둑 최고수와 AI가 대국을 벌인 적이 있었는데, 당시 AI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양의 기보를 저장한 뒤 최선의 수를 뽑아내는 딥 러닝 방식을 활용하여 인간을 이긴 바가 있었다.
“노력해 주신 만큼 좋은 성과가 있었으면 좋겠네요.”
[열심히 하다 보면 성과는 자연스럽게 따라오겠지요. 그리고 말씀드린 것 외에도 편의를 향상시킬 수 있는 기술들을 다각도로 연구하고 있으니 기대해 주시길 바랍니다.]
“교수님과 연구 팀의 노고에 항상 감사드립니다.”
나는 교수님께 정중히 감사의 뜻을 표했다.
[제가 오히려 아르마이스 님께 감사드릴 따름입니다. 덕분에 지원금을 많이 받아 원하는 연구를 실컷 할 수 있게 됐으니까요.]
이르젠 연구소는 최근 나를 도와준 공을 인정받아 황실로부터 많은 지원금을 타 내는 데 성공했다.
“매번 신세만 진 것 같아서 마음이 무거웠는데, 교수님 말씀을 들으니까 마음이 편안해지네요.”
[아르마이스 님의 그런 마음 씀씀이가 행운을 불러들인 걸 겁니다. 이런, 보고만 드린다는 게 시간을 많이 잡아먹었네요. 전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네, 조심히 들어가세요.”
작별 인사를 나눈 지 얼마 되지 않아 허공에 떠 있던 화면은 사라졌다.
‘후우, 내일부터 무척 바빠지겠어.’
내일이면 도쿄 국기관에서 복싱 경기가 시작된다.
웰터급 경기는 모레부터긴 했지만,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서는 관장님과 함께 부지런히 경기장을 돌아다녀야 했다.
‘오늘은 일찍 자자.’
나는 바쁜 일정을 고려하여 평소보다 일찍 잠에 들었다.
* * *
다음 날이 되었다.
백성철 관장님은 경기 시간에 맞춰 날 데리고 국기관에 들어왔다.
“이쪽에 앉아라.”
“이 자리는 어떻게 구하신 거예요?”
우리가 앉은 곳은 관람석 중에서도 링과 상당히 가까이 붙어 있는 곳이었다.
“네가 무조건 앞자리로 맡으라고 해서 이 사람 저 사람 다 동원해서 간신히 얻어 냈어. 그리고 참고로 라이트 웰터급, 미들급 메달권 선수가 이 링에서 예선전을 치른다.”
“그 부분까지는 생각 못 했는데 대단하시네요.”
관장님께서 티켓팅 과정부터 섬세하게 일을 처리해 주신 덕분에 이리저리 옮겨 다니지 않고 편하게 경기를 관람할 수 있게 되었다.
“저 그런데 진우야. 웰터급도 아니고 다른 체급의 경기를 보는 이유가 있을까? 어련히 이유가 있겠거니 하면서도 조금 이해가 안 돼서 말이야. 그리고 솔직히 난 시합을 관전하러 온 이유도 모르겠어. 시합 전날에 이러는 경우는 사실 드물잖아.”
“…….”
“내가 괜한 이야기를 꺼냈네. 어? 저기 선수들 입장한다.”
제자가 입을 다문 채 아무 말도 안 하자 관장은 자연스럽게 화제를 바꿨다.
“일일이 설명하려면 말이 너무 길어질 것 같아서 말씀을 못 드린 거예요.”
“길게 말해도 상관없으니까 제발 나한테만이라도 알려 줘라.”
백성철 관장은 눈을 반짝이며 얼른 말하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괜히 길게 이야기했다가는 서로가 피곤할 것 같으니까 간단히 말씀드릴게요. 오늘 제가 이곳에 온 이유는 배움과 분석이에요.”
“배움과…… 분석? ……아무튼 계속 말해 봐라.”
“다른 선수가 어떻게 경기를 풀어 나가는지 분석하면서 복싱을 배우는 거라고 생각하시면 돼요.”
나는 관장님과 내내 붙어 있어야 할 것을 고려하여 급하게 이유를 급조했다.
“내일이 시합인데 분석하고 배운다고?”
“죄송하지만, 이 이상 드릴 말씀은 없습니다. 대신 경기장에서 달라진 모습을 보여 드릴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휴우, 그래. 네가 알아서 잘하겠지.”
그는 시합이 하루 남은 상황에서도 천하태평인 제자의 모습에 한숨이 절로 나왔지만, 이런 일이 처음은 아니라 크게 당황하지도 않았다.
‘국가 대표 선발전 때도 이미지 트레이닝을 한다는 명목으로 훈련을 빠졌었지.’
과거 선발전을 준비할 당시에도 대회 직전까지 훈련을 주 2회만 실시한 적이 있었다.
내가 준비가 착착 되어 가고 있다며 호언장담을 해서 넘겼지만, 백성철 관장의 속은 수없이 많이 뒤집혀 졌다.
그러나 막상 선발전이 열리고 결과를 보니 우승을 거머쥔 건 제자였다.
이후, 백성철 관장은 제자의 입에서 이해가 되지 않는 말이 나와도 일단 들어 보는 습관이 생겼다.
잠시 후, 선수 입장이 끝나고 경기가 개시되었다.
양 선수들은 서로를 신중하게 바라보며 공방을 거듭하고 있었다.
“그건 뭐예요?”
1라운드가 끝나고 휴식 시간이 되었다.
나는 관장님께서 수첩에 무언가를 적는 것을 보고 질문을 던졌다.
“네가 분석과 배움이라며. 일본까지 왔는데 관광만 하다 돌아갈 수는 없잖아.”
관장님은 뭐라도 도우려는 마음에 선수의 특징과 경기 양상을 나름대로 적는 중이었다.
“아침 훈련이랑 스케줄 관리해 주시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도움이 됩니다. 관장님은 그냥 편안하게 앉아서 경기를 관람하시면 돼요.”
“나더러 손가락만 빨고 있으라는 거냐?”
“꼭 그렇다기보단 관장님께서 지금도 고생하고 계시니까 경기 정도는 편안하게 관람해도 되지 않을까 싶어서 드리는 말씀이에요.”
나는 행여나 관장님의 기분이 상하지 않을까 싶어 조심스럽게 말씀을 드렸다.
‘괜히 긁어 부스럼은 만들 필요가 없지.’
옆에서 분석을 도와주려는 마음은 고마웠지만, 관장님의 성격상 자신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개진할 확률이 높았다.
스캔 모드로 선수들의 정보를 수집하고 호텔에 돌아가면 가상 스파링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 불필요한 것으로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 * *
오후 4시.
마지막 시합까지 관람을 마친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호텔로 발걸음을 옮겼다.
국기관에서 호텔까지 도보로 10분밖에 걸리지 않았기 때문에 오가기에 매우 편리했다.
“진짜 대단하다.”
“예? 갑자기 왜요?”
뜬금없는 관장님의 말씀에 의아해하며 물었다.
“네가 집중력이 좋은 건 알았지만, 경기 보면서 말을 한마디도 안 할 줄은 몰랐다.”
“아, 그 말씀을 하시는 거였어요.”
시합 내내 스캔 모드를 작동시킨 후 선수들의 움직임을 관찰하느라 관장님과 대화를 나눌 겨를이 없었다.
“그래도 경기 끝날 때마다 말도 걸어 드리고 했잖아요.”
“그것마저 없었으면 일찌감치 호텔로 돌아갔겠지. 아, 이 시합이란 게 원래 같이 보면서 의견도 주고받고 하는 게 재민데 말이야.”
“생각할 게 많아서 앞으로도 그건 어려울 것 같아요. 어? 이야기하다 보니까 벌써 호텔이네요.”
“그래, 아무튼 컨디션 관리 잘하고 내일 보자.”
오늘부터 가상 스파링을 실시할 계획이었기 때문에 관장님께는 개인 시간을 보내겠다고 미리 말씀드린 상태였다.
‘오늘 벌써 7명을 했으니까 내일이면 정보 수집이 끝나겠어.’
각 나라의 대표가 나온 만큼, 출전한 선수들 중에는 기량이 출중한 자들이 적지 않았다.
운이 좋을 때는 양쪽 모두 실력이 있어서 한 경기에 두 명의 정보를 수집하는 경우도 있어서 예상보다 작업이 빨리 끝날 것처럼 보였다.
‘제대로 한번 해 보자.’
방에 들어와 편한 차림으로 환복을 한 나는 침대에 누운 후 일루션을 켰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암전이 발생하더니 아공간이 눈앞에 펼쳐졌다.
<사용자의 요청에 따라 일루션을 실행하였습니다.>
<스캔 모드로 수집한 정보가 있습니다. 확인하시겠습니까?>
“확인할 것 없이 바로 캐릭터를 만들어 줘.”
정보 확인이라 해 봤자 내가 육안으로 봤던 동작들을 모아 놓은 것에 불과했다.
<수집한 정보를 바탕으로 총 7기의 캐릭터가 생성되었습니다. 이름을 설정하시겠습니까?>
“그냥 순서대로 1, 2, 3, 4, 5, 6, 7로 해 줘.”
<사용자의 지시에 따라 캐릭터 명이 설정되었습니다.>
“캐릭터 1과 스파링을 할게.”
캐릭터 생성이 완료된 것을 확인한 나는 곧바로 가상 스파링을 시작했다.
<사용자의 지시에 따라 캐릭터 1과 대전 모드에 돌입합니다.>
<무대 중앙에 캐릭터 1이 생성됩니다.>
<사용자는 무대 위로 올라가 결투 준비를 해 주십시오.>
터벅- 터벅
‘첫 경기에서 본 캄보디아 선수로군.’
캐릭터는 모션 외에도 선수의 외양을 그대로 흉내 내어 만들었기 때문에 오늘 경기장에서 봤던 실제 선수와 매우 흡사했다.
땡-
종소리가 울림과 동시에 가상 스파링이 개시되었다.
‘지금 바깥 시간으로 6시니까 새벽 1시까지 쉬지 말고 해 보자.’
내일 시합이 있어 일찍 잠을 자는 게 맞았지만, 예선전인 만큼 풀 컨디션이 아니어도 통과할 자신이 있었다.
<2라운드가 시작되었습니다.>
‘좋아 다시 가 볼까?’
나는 미션 수행을 최대한 빨리 마친다는 각오로 거의 쉬지 않고 스파링을 계속 이어 갔다.
* * *
대망의 시합 날이 되었다.
“진우야 컨디션은 어때?”
“어느 때보다 좋습니다.”
나는 시합 3시간 전에 대표단에 합류하여 가볍게 워밍업을 하는 중이었다.
감독님은 나 외에도 시합이 있는 다른 선수들을 관리해야 했지만, 가장 유력한 금메달 후보인 날 위하여 손수 미트 글러브를 끼고 몸 푸는 것을 도와주고 있었다.
“성철이가 잘 지도해서 그런가 주먹이 확실히 날카로워졌어. 컨디션은 이만하면 됐고 아, 상대 선수 분석은 잘했어?”
“예, 지난주 내내 관장님하고 선수 분석을 해 놨습니다.”
백성철 관장님은 일본에 있는 내내 웰터급 선수들의 정보를 최대한 모은 후 분석 작업을 했다.
그리고 나는 관장님께서 심혈을 기울여 만든 자료를 지난 1주일 동안 철저히 숙지해 놓은 상태였다.
“잘했다. 이제 곧 시합인데 떨리냐?”
“살짝 긴장이 되긴 하네요.”
“걱정하지 마라. 준비한 대로만 하면 문제없을 거다.”
백민규 감독님은 내 등을 두들기며 격려해 줬다.
“진우야, 이기고 와라.”
“네, 감독님.”
시간은 흘러 드디어 내 차례가 되었다.
‘무조건 KO로 이겨야 돼.’
토미야스에게 관심을 보이는 OX사와 같이 세계적인 에이전시의 눈에 띄려면 금메달을 따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타 선수들을 월등히 뛰어넘는 경기력과 쇼맨십 그리고 관중을 열광시키는 스타성까지 갖춰야 이들의 이목을 사로잡을 수 있었다.
따라서 상대가 누구든 간에 무조건 녹아웃으로 이기겠다는 각오로 시합에 임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3라운드라……. 시간이 촉박하긴 하지만, 보호 장구가 없어서 불가능한 것도 아니야.’
2010년 아시안 게임 때까지만 하더라도 복싱 시합을 할 때 헤드기어를 착용했으나 그 이후부터는 마우스피스를 제외한 어떤 보호 장구도 착용이 금지되어서 KO가 발생할 확률은 훨씬 높아졌다.
땡-
종소리와 함께 시합이 개시되었다.
나는 자잘한 탐색전은 생략하고 상대와의 거리를 빠르게 좁혔다.
“방금 펀치 들어가는 거 봤어?”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자세히는 못 봤어.”
1라운드가 30초가량 지난 시점.
관중들은 링을 바라보며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