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 22화 아시안 게임 (3)
시합 개시 후 이루어진 짧은 공방부터 상대 선수의 다운까지 일련의 사건들은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인도네시아의 왈리 선수는 종소리와 동시에 빠르게 쇄도하는 나를 보고 크게 당황했다.
‘뭐, 뭐야?’
그는 견제 잽으로 나를 막으려 했으나 거리가 예상보다 많이 좁혀진 탓에 엉겁결에 훅을 날렸다.
퍼억-
나는 관자놀이로 들어오는 주먹을 더킹으로 가볍게 피한 다음, 레프트 바디로 상대의 간장을 후려쳤다.
“윽…….”
왈리는 호흡이 멎을 것 같은 엄청난 통증을 느꼈지만, 여기서 머뭇거리는 모습을 보이면 녹아웃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생각에 사력을 다하여 펀치를 날렸다.
하지만, 허우적대는 상대의 공격을 허용할 내가 아니었다.
나는 손쉽게 왈리의 펀치를 피한 후 스트레이트로 상대의 턱을 가격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설마 다운당한 건가?’
왈리는 추가 펀치를 허용한 탓에 순간적으로 의식을 잃었다가 바닥에 쓰러질 때 받은 충격으로 정신이 들었다.
지난 4년간 아시안 게임 하나만 보고 달려왔기에 이대로 포기할 수 없었다.
그는 링 줄을 부여잡고 어떻게든 몸을 일으키려 했다.
“포, 파이브, 식스, 세븐, 에잇……. 계속할 수 있겠습니까?”
심판의 물음에 왈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파이트!”
나는 심판의 수신호를 보자마자 거리를 좁힌 뒤 펀치 연타를 날렸다.
“진우야, 급하게 하지 마!”
백민규 감독은 고함을 지르며 제자를 만류했지만, 나는 이를 무시하고 상대의 가드 위를 무차별적으로 두들겼다.
“다운! ……포, 파이브, 식스…….”
인도네시아 선수는 비틀거리는 몸을 추스르고 파이트 자세를 취하려 했지만, 끝내 바닥에 고꾸라지고 말았다. 그러자 심판은 양손을 교차하며 시합 종료를 알렸고 그렇게 첫 시합은 마무리되었다.
“자, 받아라.”
“예, 감독님.”
링에서 내려오자 감독님께서 수건을 나에게 건네주셨다.
“진우야, 경기 운영을 왜 이렇게 위험하게 하는 거야? 상대 실력이 너보다 아래였기에 망정이지 그런 식으로 했다가는 네가 당할 수도 있어.”
“감독님이랑 관장님이 주신 자료를 보고 왈리 선수 정도는 충분히 압도할 수 있겠다는 자신이 들어서 모험을 한번 해 봤습니다. 사전에 어떤 식으로 경기를 운영할지 알려 드렸어야 했는데 말씀 못 드린 점은 죄송합니다.”
선수의 경기 운영에 관한 부분은 보통 코치진과 협의를 하고 결정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특히 국가 대표처럼 감독과 선수 간의 상하 관계가 뚜렷한 곳에서 제멋대로 경기를 치르다가는 호통을 듣기 십상이었다.
“자료를 분석하고 내린 판단이면 그나마 다행이구나. 하지만, 우리가 준 자료들 대부분은 수개월 이전에 작성된 것들이라 리스크가 없지 않아. 당장 너만 해도 선수촌에 입소하고 나서 실력이 엄청 늘었잖아.”
“주의하겠습니다.”
방금 시합에서 내가 과감하게 돌진했던 이유는 왈리 선수의 스탯이 전반적으로 나보다 낮은 것을 현자의 눈으로 확인한 후에 한 행동이라 리스크는 거의 없었다.
이처럼 시합 전에 상대 선수의 실력을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을 감독님께서 아신다면 좋겠지만, 해당 사안을 말씀드릴 수 없기에 일단은 알겠다고 대답하는 수밖에 없었다.
“후우, 어쨌든 첫 시합 치르느라 수고했다. 피곤할 테니까 이만 들어가. 아, 메디컬 체크는 따로 할 필요 없겠지?”
“방금 경기 보셨잖아요. 지금 몸에 땀이 거의 안 나서 샤워도 할까 말까 고민 중입니다.”
“훗, 그래. 성철이가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환복하고 얼른 가 봐라.”
“예, 감독님. 오늘도 고생하셨습니다.”
나는 감독님께 꾸벅 인사를 드린 후 환복을 하러 갔다.
* * *
“시합도 치렀는데 들어가서 쉬는 게 낫지 않아?”
관장님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에게 물었다.
“오늘까지만 조금 무리하려고요.”
우리는 호텔로 돌아가지 않고 국기관에 남아 다른 시합들을 관전하기로 했다.
타 선수들의 정보를 수집하여 캐릭터 생성에 활용하기 위함도 있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건 토미야스의 경기를 보는 것이었다.
‘예선전이라 본 실력이 다 나오진 않겠지만, 그래도 정보를 수집해 놓으면 무조건 도움이 될 거야.’
나는 토미야스의 움직임을 하나하나 스캔하여 당장 오늘 밤부터 가상 스파링에 돌입할 예정이었다.
“자식, 하여간 경기만 시작하면 초집중 모드란 말이야.”
백성철 관장은 말없이 경기를 관람하는 제자를 보며 중얼거렸다.
사실, 내 시합 전에 있던 몇몇 경기들을 관람한 덕분에 미션 수행에 필요한 선수 10명의 정보는 일찌감치 수집해 놓은 상태였다.
‘기왕 하는 거 최대한 스캔을 더 해 둬야겠어.’
아시안 게임에 출전한 선수들은 나라를 대표하는 사람들인 만큼 가상 스파링의 상대로는 그 가치가 충분한 분들이었다.
따라서 미션과 상관 없이 정보를 더 수집한다 해도 나로서는 손해 볼 건 없었다.
“진우야, 이것 좀 먹어라.”
“어? 웬 샌드위치예요?”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하잖아.”
“감사합니다.”
잠시 후에 토미야스의 시합이 있어서 경기장에 한시도 시선을 떼고 싶지 않았지만, 손수 샌드위치를 가져다주신 관장님의 정성을 외면하긴 어려웠다.
“잘 먹었습니다.”
“천천히 좀 먹어라. 입에 쑤셔 넣네 쑤셔 넣어.”
“…….”
토미야스가 시합장에 들어온 것을 본 나는 손에 들고 있던 샌드위치를 입에 꾸겨 넣은 다음 스캔 모드를 발동시켰다.
‘몸 푸는 동작까지 모두 눈에 담아야 돼.’
나는 허공에 대고 가볍게 휘두르는 주먹도 스캔한다는 각오로 토미야스의 움직임을 자세히 관찰했다.
* * *
토미야스는 우승 후보답게 3라운드 내내 한 치의 빈틈도 허용하지 않고 판정승으로 예선 1차를 통과했다.
이후에도 우리는 타 선수들의 경기를 관전했고 오후 5시가 돼서야 호텔에 돌아올 수 있었다.
“내일은 하루 종일 방에만 있겠다고?”
“네, 아마 오늘부터는 제 시합이랑 토미야스 경기를 관전할 때만 제외하고 방에만 있을 것 같아요.”
관장님과 나는 호텔 로비에 있는 소파에 앉아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복싱 시합은 격일로 치러지기 때문에 내일은 아무 일정이 없는 상황이었다.
나는 지난 이틀간 스캔한 정보들을 활용하여 온종일 가상 스파링만 할 계획이었다.
“설마, 이미지 트레이닝을 하겠다는 건 아니지?”
“오, 저랑 함께 계시더니 눈치가 느셨네요?”
“설마가 사람 잡는다더니……. 알았으니까 필요한 거 있으면 전화해.”
백성철 관장은 눈을 질끈 감으며 말했다.
‘휴, 시합 대비를 이미지 트레이닝으로만 하는 선수가 있다고 하면 누가 믿어는 줄까?’
그는 이미지 트레이닝만으로 실력을 올린다는 제자의 말을 믿으면서도 한편으로는 걱정이 되었다.
“저 그러면 부탁이 하나 있긴 한데요.”
“뭔데 말해 봐라?”
“중간중간에 먹을 것 좀 갖다 주시면 안 돼요?”
“야, 그런 건 네가 알아서 해결해도 되잖아. 이놈이 이젠 스승에게 밥 배달을 시키려고 하네?”
“아, 왜 이렇게 화를 내세요. 필요한 거 있으면 말하라고 해서 말씀드린 건데. 그냥 해 본 말이니까 신경 쓰지 마시고 푹 쉬세요.”
나는 황급히 관장님의 기분을 살펴 드렸다.
“으휴, 매일 아침에 도시락이랑 샌드위치를 갖다 놓을 테니까 전자레인지로 데워 먹든가 해라.”
“아니에요. 수고스럽게 그러실 필요 없어요.”
“됐어, 임마. 마음 바뀌기 전에 감사합니다 하고 받아.”
“감사합니다.”
“하여간 날이 갈수록 능청만 는다니까? 로비 직원한테 말하면 전자레인지 대여해 주니까 받아서 올라가라.”
“네, 관장님.”
관장님은 인사하는 나를 보며 손짓을 한 뒤 엘리베이터를 타고 방으로 올라갔다.
‘죄송하긴 하지만, 시간을 아끼려면 어쩔 수 없어.’
내가 생각해도 관장님께 밥을 가져다 달라고 하는 건 말도 안 되는 부탁이었다.
그러나 우승을 하기 위해서는 촌음을 아껴야 했기에 며칠만 신세를 지기로 했다.
“안녕하세요, 501호에서 지내고 있는 사람인데요. 제가…….”
관장님이 가신 것을 확인한 후, 로비에 있는 직원에게 전자레인지를 문의했다.
자동 번역 기능으로 인해 유창한 일본어 구사가 가능했고 기기 대여는 일사천리로 이루어졌다.
‘바로 시작하자.’
나는 방에 들어오자마자 전자레인지를 한쪽에 두고 일루션을 실행했다.
<사용자의 요청에 따라 일루션이 실행되었습니다.>
<스캔 모드로 수집된 정보가 있습니다. 확인하시겠습니까?>
<수집된 정보를 기반으로 캐릭터가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
<총 8개의 캐릭터가 생성되었습니다. 이름을 지으시겠습니까?>
“8, 9, 10, 11…….”
캐릭터 명은 이전에 했던 것처럼 간단하게 아라비아 숫자로 지었다.
“캐릭터 5랑 스파링 할게.”
<사용자의 지시에 따라 대전 모드가 가동됩니다.>
<사용자께서는 무대 위로 올라와 전투 준비를 해 주시길 바랍니다.>
안내가 끝나기 무섭게 무대 중앙에 캐릭터가 떠올랐다.
‘오늘은 미션을 완료하는 데 집중하고 내일은 추가로 스파링을 진행하자.’
어제 하루 동안 미션을 절반 가까이 수행할 수 있었는데, 이는 션 교수님께서 가상 공간 내 시간 흐름을 늦춰 주신 덕분이었다.
최근 이루어진 업데이트로 인해 온종일 가상 공간에 있으면 4일을 훈련한 것과 같은 효과를 낼 수 있게 되었다.
게다가 가상 공간에서는 육체 피로가 발생하지 않았기 때문에 정신적인 스트레스만 잘 관리하면 쉬지 않고 가상 스파링을 할 수 있었다.
“대전 상대를 5에서 6으로 교체해 줘.”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캐릭터 6을 무대 위로 소환하겠습니다.>
‘5명만 더 처리하면 미션 클리어다. 빡세게 해서 싹 끝내 버리자.’
나는 이를 꽉 깨물고 미션 완료를 향해 쉬지 않고 달리는 중이었다.
* * *
‘휴우 직접 몸을 움직인 것도 아닌데 몸이 왜 이렇게 피곤하냐?’
10개의 캐릭터와 스파링을 마친 나는 일루션을 종료하고 현실로 돌아왔다.
창밖에 해가 뜨지 않은 것을 보니 아직 새벽인 것 같았다.
장시간 가상 공간에 있느라 무엇 하나 챙겨 먹지 못한 탓에 목에 타는 듯한 갈증이 느껴졌다.
‘왜 안 나오나 싶었다.’
냉장고에서 물병을 꺼내 입에 대려던 그때, 미션 완료를 알리기 위해 시스템이 가동되었다.
<아르마이스의 의지가 발동되었습니다.>
<미션이 완료되었음을 알려 드립니다.>
<보상: 복싱 관련 스탯 경험치 +50%>
<보상을 적용하시겠습니까? Y/N>
‘응, 적용할게. 아니다. 잠깐만 기다려 봐.’
원래라면 고민도 하지 않고 보상을 받았을 테지만, 토미야스와의 일전을 앞둔 상황이라 보통 때와는 사정이 달랐다.
‘상대도 실력을 숨기며 시합에 임하고 있는데 나라고 굳이 노출할 필요는 없지.’
보상을 받고 일부로 실력을 숨기는 방안도 있으나 잔뼈가 굵은 복서의 눈은 피할 수 없었다.
차라리 토미야스와의 일전까지는 현 실력으로 시합을 치르고 놈과의 대결 전날에 보상을 받아 상대를 당황시키는 편이 전략적으로도 훨씬 나았다.
“일본 웰터급의 떠오르는 신성 토미야스는 예상대로 수월하게 예선전을 통과했습니다. 상대였던…….”
잠시 휴식을 취하기 위해 티비를 켜자 토미야스에 관한 뉴스가 방영되고 있었다.
‘일본에서 인기가 많다라는 말이 허언이 아니었구나.’
기껏해야 1차 예선을 통과한 것뿐인데, 언론에서는 토미야스에 대해 꽤 비중 있게 다루고 있었다.
‘대회가 끝날 때쯤에는 방송에 저 녀석이 아니라 내가 도배되게 만들어야겠어.’
나는 티비를 끈 뒤 다시 일루션에 접속했다.
“캐릭터 15랑 스파링할게.”
<사용자의 지시에 따라 대전 모드가 가동됩니다.>
<사용자께서는 무대 위로 올라와 전투 준비를 해 주시길 바랍니다.>
“어디, 얼마나 잘하는지 한번 볼까?”
캐릭터 15는 토미야스의 정보를 토대로 형성된 것으로 원래는 다음 날에 스파링을 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뉴스에서 계속 녀석을 보여 주는 바람에 남들 다 자는 야심한 시각임에도 전의가 불타오르고 있었다.
“후우, 이게 다는 아니겠지만, 조금 아쉬운데?”
토미야스가 본인의 전력을 숨긴 탓에 가상 스파링은 일방적인 나의 승리로 끝났다.
“다시 할게.”
<캐릭터 15와 대전을 실시하도록 하겠습니다. 사용자께서는 전투 준비를 해 주시길 바랍니다.>
한번 불붙은 가슴은 좀처럼 꺼지지 않았고 가상 스파링은 동이 틀 때까지 계속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