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사람들이 자꾸만 보은한다-93화 (93/122)

93. 22화 아시안 게임 (4)

“이번 경기는 쉽지 않았어. 우즈베키스탄에 이런 걸출한 인재가 있을 줄이야…….”

“뭘 새삼스럽게 그래요. 대회 참가 전에도 라티포프가 제일 강적이라고 말씀하셨잖아요.”

토미야스는 수건으로 땀을 닦으며 감독에게 말했다.

그는 우즈벡의 라티포프 선수와의 준결승을 막 치르고 온 참이었다.

“이겨서 다행이긴 하다만, 결승에서 맞붙을 상대의 기세가 만만치 않아서 걱정이다.”

“그 강진우라고 하는 한국 선수를 말씀하시는 거죠?”

“예선부터 준결승까지 4연속 KO로 승리를 거뒀어. 입수한 자료에 따르면 이 정도로 강한 놈은 아니었는데…….”

일본 감독은 코칭 스태프의 분석을 한참 상회하는 나의 실력에 우려를 드러냈다.

“오늘 붙었던 라티포프랑 강진우랑 붙으면 누가 이길까요?”

“둘의 실력이 비슷해서 컨디션에 따라 결과가 달라진다고 볼 수 있지. 하지만 둘 중 하나를 굳이 뽑으라고 한다면 라티포프 쪽이 조금 더 우세하지 않을까 싶어. 왜냐하면 라티포프에게는 강진우에게 없는 경험이라는 게 있거든.”

쌍방의 실력이 동등하다면 실전 경험을 더 쌓은 쪽이 유리할 거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럼, 걱정하실 필요가 전혀 없겠네요. 강진우보다 강한 라티포프를 제가 이겼으니까요.”

“듣고 보니 그렇네. 그래, 이런저런 생각하지 말고 들어가서 푹 쉬고 결승전 대비하자.”

“몸 상태 체크해서 괜찮다고 하면 가볍게 런닝이라도 뛰려고요.”

“너무 무리하지 마라. 당장은 괜찮을지 몰라도 몸에 후유증이 남아 있을 수도 있으니까. 그리고…….”

토미야스와 감독은 대화를 나누며 경기장을 빠져나갔다.

‘내일모레면 결승인데 긴장한 기색은 하나도 없고 아주 천하태평이네. 아무렴 어때, 녀석을 쓰러뜨리고 금메달만 따면 되는 거 아니겠어?’

나는 관장님과 함께 토미야스가 경기하는 모습을 모두 지켜보고 있었다.

“진우야, 이번엔 진짜 큰일이다.”

“왜요? 무슨 일이라도 있나요?”

“그렇게 집중해서 경기를 보고도 모르겠어? 웬만하면 이런 말 안 하려고 했는데 토미야스의 실력이 내 예상을 한참 뛰어넘었어.”

“토미야스가 잘하는 건 인정하지만, 저도 못지않게 잘하지 않았나요?”

불과 2시간 전에 태국 선수와 준결승을 치르고 온 상태였다.

상대는 직전 아시안 게임에서 동메달을 딸 정도로 강자였으나, 국가 대표 선발전 때 아시안 게임 은메달리스트였던 선수를 이긴 경험이 있어서 여유롭게 시합에 임했다.

그리고 결과는 예선전 2경기와 8강전과 마찬가지로 녹아웃 승리였다.

“오케이, 네가 아까 멋있게 승리한 건 인정할게. 하지만 이런저런 거 다 감안해도 지금처럼 해서는 토미야스를 이길 수 없어.”

“흠, 그렇군요. 관장님, 볼일도 다 본 것 같은데 이제 슬슬 호텔로 돌아갈까요?”

“호텔로 돌아가는 건 둘째치고 결승전 대비해서 나 모르게 세워 둔 대책은 있어? 오늘 경기를 봐서 알겠지만, 특단의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금메달을 따는 게 쉽지 않을 거다.”

“결승 시합이 코앞인데, 왜 이렇게 부정적인 말씀만 하세요. 그냥 평소처럼 해도 토미야스 정도는 이길 수 있으니까 마음을 편안히 드셨으면 좋겠네요.”

백성철 관장님의 호들갑에도 난 심드렁한 반응만 보였다.

“참 이거 미치겠네. 이대로 붙었다가는 십중팔구 질 게 뻔하니까 내가 이러는 게 아니냐? 아무래도 안 되겠어. 백 감독이랑 상의를 해서 전략을 짜든가 해야지.”

“제가 알아서 할 테니까 그러실 필요 없어요. 그리고 감독님이랑도 이야기를 이미 마쳤으니까 무슨 말씀을 하셔도 변하는 건 없을 거예요.”

“휴우, 알았다.”

그는 제자가 한번 내린 결정을 번복하는 일이 없다는 것을 알았기에 설득을 포기하기로 했다.

“볼일도 다 본 것 같으니 이만 숙소로 돌아가자.”

“예, 관장님.”

용건을 마친 우리는 호텔로 돌아왔다.

‘이제 결승전만 치르면 아시안 게임도 끝이네. 그나저나 참 대담한 놈이야. 오늘 경기에서도 본 실력을 약간 숨기는 느낌이 있었어.’

관장님 앞에서 태연한 척했으나 라티포프와 토미야스의 시합은 말 그대로 굉장했다.

둘은 그동안 호적수를 못 만났던 한이라도 풀려는 것처럼 난타전을 주고받았다.

테크닉, 파워 모든 면에서 우열을 가리기 힘들었지만, 승부를 갈랐던 것은 속도였다.

토미야스는 뛰어난 스피드를 바탕으로 치열한 공방 안에서 유효타 수의 우위를 가져갔고 그 결과 판정승으로 승리를 거머쥘 수 있었다.

‘관장님께서 걱정하시는 것도 무리는 아니야. 내가 KO로 이겼던 상대 중에는 토미야스 아니 라티포프보다 강한 녀석은 하나도 없었으니까.’

백민규 감독님은 라티포프를 토미야스와 버금갈 정도로 강한 선수라고 평하신 바 있었다.

하긴 아시아를 넘어 세계 무대에서도 두각을 드러내고 있는 우즈베키스탄의 국가 대표이니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르지.

그리고 내 느낌에 토미야스는 준결승에서도 전력을 다한 느낌이 아니었다. 즉, 아직 숨겨 놓은 비장의 한 수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였다.

‘상관없어. 100%는 아니어도 90% 이상은 끌어냈으니까. 그리고 현자의 눈으로 스탯을 확인해 놓은 상태라 기상천외한 전략만 준비해 오지 않는다면 아무 걱정 없어.’

토미야스가 결승전에서 예상 밖의 경기 운영을 들고나온다 해도 내 쪽에서 대비를 잘하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을 터였다.

방에 들어온 나는 환복을 한 뒤 침대에 누웠다.

<일루션이 실행되었습니다.>

<스캔 모드로 수집된 새로운 정보가 있습니다. 확인하시겠습니까?>

<사용자의 요청에 따라 캐릭터를 생성하겠습니다.>

<현재 작업 진행 중입니다. 30%…… 50%……>

더 이상의 고민은 필요 없었다.

결승전까지 최선을 다해 준비하고 시합 날에 모든 걸 쏟아 내면 될 뿐이었다.

“토미야스랑 스파링할게.”

<토미야스와 대전 모드를 실시하겠습니다.>

<사용자께서는 무대 위로 올라와 전투 준비를 해 주십시오.>

캐릭터에 처음으로 실존하는 사람의 이름을 붙였다.

아시안 게임 금메달이 걸려 있는 만큼, 정성을 다하고 싶어서였다.

한편, 무대 중앙에는 토미야스의 형상을 한 캐릭터가 서서히 떠올랐다. 그리고 잠시 후, 가상 스파링의 시작을 알리는 안내 방송이 나왔다.

<토미야스와의 대전을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땡-

가상 공간에서는 신체에 어떠한 물리적 데미지도 가해지지 않았다.

나는 토미야스와 전면전을 벌이기 위해 지근거리로 곧장 들어갔다.

삐익- 삐익-

‘젠장, 이게 무슨 꼴이야.’

근접 거리에서 난타전을 벌인 지 2분도 채 지나지 않았지만, HP는 어느새 1/5밖에 남지 않은 상태였다.

머리 위에 떠오른 HP바는 붉은색 기운을 띠며 반짝거렸고, 일루션은 나의 패배가 임박했음을 알리는 경고음을 울려 댔다.

“아, 맞다! 잠깐만, 대전 모드를 중단해 줘.”

<사용자의 요청에 따라 대전 모드를 중단하겠습니다.>

일루션의 대답한 지 얼마 있지 않아 토미야스는 사라졌고 무대 주변에 있는 조명들이 모두 켜졌다.

“일전에 못 받은 보상을 지금 적용시켜 줘.”

<아르마이스의 의지가 발동되었습니다.>

<적용이 보류된 보상이 있습니다.>

<보상: 복싱 관련 스탯 경험치 +50%>

<사용자의 요청에 따라 보상이 적용됩니다.>

‘깜빡 잊고 있었어.’

토미야스에게 전력을 숨기기 위한 일환으로 보상을 받지 않았음을 뒤늦게 깨달은 나였다.

<보상 적용이 완료되었습니다.>

<이번 보상으로 레벨이 오른 스탯이 있습니다. 확인하시겠습니까?>

‘응.’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화면을 주시했다.

‘동체 시력과 민첩성이 한 등급씩 올랐네? 이 정도 스탯이면 결승전에서 약간 무리를 해도 되겠는데?’

동체 시력은 기존의 레벨 5에서 6으로 그리고 민첩성은 무려 레벨 7로 향상되었다.

토미야스의 본 실력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진 않지만, 아까까지만 해도 나를 고전하게 만들었던 캐릭터는 쉽게 이길 수 있을 것이다.

나는 토미야스와의 일전에서는 이전 경기들과 마찬가지로 근접 난타전을 벌일 계획이었다.

이번 시합은 타 체급 결승전들과 비교도 안 되는 관심을 받고 있어서 임펙트 있는 경기력을 보일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OX사뿐만 아니라 다른 에이전시들도 결승전을 지켜보겠지?’

토미야스의 경기는 15%를 상회하는 시청률을 기록하고 있었다. 일본의 인구가 1억 2천 6백만이니까 적어도 1,800만 명이 경기를 시청한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관중석 곳곳에는 그를 응원하는 현수막이 곳곳에 붙어 있어서 통계 수치를 고려하지 않더라도 인기가 많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었다.

물론 나도 주변에서 쏟아지는 격려 메시지와 관장님이 매일 아침 보내 주시는 보도 자료를 통해 내가 국내에서 나름 이슈가 되고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토미야스의 그것에 비하면 태양 앞의 반딧불에 불과했다.

게다가 전문가와 언론에서도 금메달 유력 후보로 토미야스를 꼽고 있어 상대적으로 주목을 못 받는 실정이었다.

“아까 중단했던 스파링 다시 할게.”

<사용자의 요청에 따라 대전 모드를 재개하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현재 캐릭터를 소환 중에 있습니다.>

‘누가 주인공이 될지는 이틀 후에 판가름 될 거야.’

원래 승리란 건 반전을 통해서 거머쥐었을 때 더 짜릿한 법이었다.

사람들이 토미야스에 열광할수록 내 안의 필승 의지는 더욱 불타올랐다.

* * *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결승전 날이 되었다.

국기관 입구에는 경기를 보기 위해 입장하려는 사람들로 장사진을 이루고 있었다.

“결승전이라서 그런가, 사람들이 엄청 많네요.”

“오늘 하루 안에 남자 여자 전 체급 금메달이 결정되는데, 그럴 만도 하지.”

나는 이른 아침부터 국기관에 나와 컨디션을 관리하고 있었다.

“관중석이 미어터지겠네요.”

“네 시합 때는 특히 더 그럴 거야. 일본 언론뿐만 아니라 해외 언론사들 중에서도 웰터급 결승전을 주시하고 있는 곳이 적지 않거든. 어쩌면 세상에 널 알릴 수 있는 좋은 기회일 수도 있어. 그러니까 링 위에서 네가 어떤 선수인지 한번 보여 줘 봐.”

“예, 관장님.”

백성철 관장님은 내 어깨를 두드리며 격려해 주었다.

“선수 부담되게 그런 소리는 왜 하는 거야?”

옆에서 이야기를 듣던 백민규 감독은 못마땅해하는 얼굴로 볼멘소리를 했다.

그는 시합이 임박했음에도 관중석으로 가지 않고 내 옆에 있는 백 관장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번 경기가 매스컴의 관심을 받는 건 다 아는 사실인데, 뭘 그렇게 호들갑을 떨어?”

감독님의 핀잔에 기분이 상한 관장님은 눈을 크게 뜨며 황당하다는 듯 반문했다.

“감독님 괜찮습니다. 저보다는 토미야스가 부담을 훨씬 더 느낄 테니까요.”

나는 가운데에 서서 둘 사이를 중재하고 나섰다.

“흠, 그건 맞아. 어차피 관중들 대부분이 일본 사람들이라 토미야스 입장에서는 반드시 이겨야 한다는 중압감이 무척 클 거야. 그리고…….”

“진우야, 널 응원하러 온 사람들도 적지 않으니까 기죽지 말고 힘내라.”

“아, 네.”

‘저 양반이 진짜…….’

백 감독은 말을 끊는 것도 모자라 자신의 말을 은근하게 반박하는 백성철 관장의 모습에 속이 부글부글 끓기 시작했다.

“성철아, 난 진우랑 가볍게 워밍업 할 예정이니까 이만 가라.”

“참네, 시합하려면 한참 남았는데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됐고. 진우야, 좀 있다가 미트 훈련 진행할 거니까 스트레칭하고 있어.”

“으이구, 치사해서 간다 가.”

관장님은 친구를 잠시 흘겨보다가 관중석으로 자리를 옮겼다.

“강진우, 너 왜 아까부터 실실 웃는 거야?”

“두 분이 친하게 지내시는 게 보기 좋아서요.”

“야, 누가 들으면 오해할 수도 있으니까 그런 말 하지 마라. 후우, 그건 그렇고 생각해 둔 전략이라도 있어?”

감독님은 조심스럽게 나에게 물었다.

“결승전 때 쓸 전략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래.”

“지금까지 했던 것과 똑같습니다. 시작과 동시에 치고 나가서 박살을 내야죠.”

“하아, 진우야. 내가 웬만하면 간섭 안 하려고 했는데, 토미야스는 전에 네가 상대했던 녀석들하고 달라.”

“알고 있습니다.”

감독님의 우려 섞인 말씀에도 나는 태연한 반응을 보였다.

“딱 한 번만 내 말대로 경기를 운영하는 건 어때?”

“들어 보고 판단하겠습니다.”

“좋아. 어제 코치들과 상의를 했는데…….”

현재 우리나라 선수 중 결승전에 오른 사람은 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감독님을 포함한 코치님들은 오늘 경기를 위해 지난 이틀 동안 머리를 맞대고 전략을 짰다.

“흠, 가드를 견고히 해서 유효타를 최대한 내주지 말고 판정승으로 이겨 보자는 말씀이시네요.”

“그래, 자존심이 상하긴 하지만, 상대 실력이 워낙 뛰어나서 그거 말고는 대책이 잘 서지 않는 상황이야.”

“현명한 판단이시긴 하지만, 감독님과 코치님들이 간과한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그게 뭐냐?”

백민규 감독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현재 아시안 게임이 열리는 곳이 일본이라는 점입니다. 아시안 게임 연맹에서 공정하게 심판진을 구성했다고 해도 홈 어드벤티지가 은밀히 적용되는 건 주지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애매모호하게 판정으로 가면 불리하다는 이야기구나.”

제자의 말에 그의 얼굴은 순식간에 굳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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