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사람들이 자꾸만 보은한다-94화 (94/122)

94. 22화 아시안 게임 (5)

“상대의 유효타를 최대한 줄이고 약점을 공략하는 방식으로는 승리를 장담하기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상대의 유효타를 최대한 줄이려면 아웃복싱을 구사해야 했는데, 토미야스도 아웃복싱에 일가견이 있는 선수라 상호 간에 유효타를 만들기 어려워질 것이다.

그리고 만약 경기가 내 예상대로 진행이 되면 홈 이점이 있는 토미야스에게 유리할 거라는 판단이 들었다.

“네 말대로 강공으로 밀어붙이면 승산은 있고? 진우야, 듣기 싫겠지만 토미야스는 너보다 한 수 위의 전력을 갖고 있어. 승리를 장담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란 말이야.”

백민규 감독은 안타까운 목소리로 제자를 타일렀다.

“듣고 보니 감독님 말씀이 맞는 것 같아요. 결승전만큼은 감독님과 코치님들이 하신 말씀을 참고하면서 시합에 임하겠습니다.”

‘감독님께는 죄송하지만, 경기는 내 식대로 풀어야겠어.’

시합에 앞서 사소한 언쟁은 불필요했기에 부득이하게 거짓말을 했다.

“경기가 아직 많이 남았으니까 푹 쉬고 있어라.”

“예, 전 그럼 눈 좀 붙이겠습니다.”

“잘 생각했다. 결승전이라고 계속 긴장 상태로 있을 필요는 없지.”

감독님은 선수 대기실에 날 남겨 두고 자리를 떴다.

‘시합 전까지 가상 스파링을 계속해야겠다.’

나는 소파에 누워 눈 주변을 수건으로 덮은 후 일루션을 실행했다.

지난 이틀간, 토미야스의 형상을 띤 캐릭터와 이백오십 판 가까이 스파링을 진행하여 자신감은 하늘을 찔렀으나 그렇다고 막간의 시간을 멍하니 보낼 수는 없었다.

“저, 사람 좀 봐. 완전 강심장이잖아?”

“그러게 예선전도 아니고 결승전인데 잠이 오나?”

얼마 있지 않아 대기실에 선수들이 하나둘 들어왔다.

결승 시합만 남아서 방 안이 북적거리지는 않았으나 중간중간에 코치 스태프들도 왔다 갔다 하는 상황이라 잠을 자기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사용자의 요청에 따라 토미야스와 대전 모드를 실시합니다.>

<사용자께서는 무대 위로 올라오셔서 준비해 주십시오.>

‘시합까지 4시간 정도 남았으니까 딱 20판 정도만 더 해 보자.’

경기 직전에는 감독님과 가볍게 워밍업을 해야 했기 때문에 가상 공간에 너무 오래 머물러 있으면 안 됐다.

나는 스파링 도중에도 틈틈이 시간을 체크하는 것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 * *

‘훗, 처음엔 힘들었는데, 이젠 상대가 아예 안 되잖아?’

나는 바닥에 쓰러진 캐릭터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맨 처음 대전할 때만 해도 움직임 하나하나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쩔쩔맸으나 지금은 게임 자체가 성립되지 않을 정도로 실력 격차가 어마어마했다.

‘딱 한 번만 더하고 나가자.’

아무리 강심장을 가진 나라지만, 결승전을 앞둔 상황에서 초조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피나는 연습만이 불안감을 잠재울 유일한 방법이라 생각하며 재대결을 신청하려던 순간 사방에서 경고음이 울리며 안내 방송이 나왔다.

<경고! 경고! 외부에 있는 누군가가 사용자에게 위해를 가하고 있습니다.>

“이런,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나?”

아공간 한쪽에는 현실 세계의 시간이 표시됐는데, 확인해 보니 시합까지 얼마 안 남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진우야, 진우야!”

“어, 얘가 왜 이러지? 이거 병원에 데려가야 하는 거 아니야?”

백성철 관장은 흔들어 깨워도 일어나지 않는 나를 보며 우려를 표했다.

“얼굴이 편안한 걸 보면 아픈 것 같지는 않아. 그건 그렇고 애를 어떻게 관리했길래 이렇게 피곤해하는 거야?”

“너 설마 진우가 이러는 게 나 때문이라는 거야?”

백민규 감독이 눈을 흘기며 묻자 관장은 황당해하며 반문했다.

“너 때문이라는 게 아니라 묻는 거잖아.”

“그걸 왜 나한테 물어?”

“그럼 누구한테 물을까? 진우랑 같이 있었던 사람이 너밖에 없는데.”

“흠…….”

백성철 관장은 속에서 부아가 치밀어올랐지만, 친구의 말에도 일리가 있기 때문에 화를 꾹 참았다.

“민규야, 미안하다. 진우가 알아서 잘할 줄 알고 관리를 잘 못한 것 같다.”

“휴, 아니야. 진우 성격이 어디 보통이냐. 분명히 너한테 간섭하지 말라고 했겠지. 그나저나 이걸 어떻게 하지? 5분 후에는 입장을 해야 하는데…….”

“아직 시간이 있어서 다행이네요.”

“……뭐야? 너 언제부터 일어나 있었어?”

감독님은 눈을 휘둥그레 뜨고 물었다.

“두 분이 어찌나 크게 말씀하시는지 안 깰 수가 없더라고요. 곧 있으면 결승전이라면서요. 안에 시합 복을 입고 있어서 바로 나가도 될 것 같아요.”

나는 눈에 낀 눈곱을 떼며 태연하게 말했다.

“어제 뭘 했길래 20분을 흔들어 깨워도 안 일어나? 너 이 자식 우리가 얼마나 걱정…….”

“죄송한데, 저 잠시만 화장실 좀 빨리 다녀오겠습니다.”

관장님께서 화를 내시려 하자. 도망치듯 화장실로 피신했다.

* * *

“와아아아!”

“토미야스, 파이팅!”

감독님과 함께 시합장에 들어오는 순간, 우레와 같은 함성이 귓등을 강타했다.

“사람들이 어마어마하게 왔네요.”

“어디 사람들뿐이냐, 카메라들도 많은 걸 보니 기자들도 엄청 온 것 같다.”

백민규 감독은 국기관을 빽빽이 채운 사람들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어젯밤에 잠깐 뉴스를 봤는데, 우리 경기를 집중 조명하는 곳이 적지 않더라고요.”

“아시안 게임이 큰 대회이긴 하지만, 언론에서 이 정도로 관심을 보이는 건 처음 봤어.”

“이게 뭐 저 때문이겠어요. 다 저 녀석 덕분이죠.”

나는 링 쪽으로 걸어 나오는 토미야스를 바라보며 말했다.

“꼭 그런 것 같지는 않던데? 너한테 일부로 말 안 했는데 언론사 몇 곳에서 너한테 인터뷰 제의가 들어왔었어.”

“아, 그래요?”

“요즘 네가 일본 매스컴에 자주 오르내리다 보니까 팬이 생긴 것 같아. 뭐 이상하지도 않지. 내가 봐도 토미야스보단 진우 네가 훨씬 잘생겼으니까.”

토미야스는 곱상한 외모를 가진 덕분에 일본 여성들에게 인기가 좋았다. 게다가 나이도 어리고 실력까지 뛰어나니 매스컴의 관심을 받지 않을래야 안 받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결승 상대로 올라온 상대를 살펴보니 토미야스와 여러모로 닮은 점이 많았다.

열여덟이라는 나이부터 뛰어난 경기력 그리고 화려한 외모까지 자신들이 밀고 있는 스타에 비해 부족한 게 하나도 없었다.

그리고 한국 국적을 갖고 있다는 점도 일본에서 화제를 끌기에 좋았다.

예로부터 한일전은 양국의 사람들이 좋아하는 테마였기 때문이다.

“감독님께서 이렇게 절 높게 평가하시는 줄은 몰랐네요.”

“크흠, 곧 시합이니까 쓸데없는 소리는 여기까지 하자. 어쨌든 잘하고 와라.”

“걱정 마세요.”

나는 씨익 웃으며 대답을 한 뒤 천천히 링 위로 올라갔다.

“토미야스! 토미야스!”

‘열기가 장난이 아니네.’

관중들의 응원 소리가 너무 큰 나머지 시합 개시를 알리는 종소리가 제대로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

연맹 관계자는 관중들이 진정할 때까지 잠시 기다릴까 했지만, 소리가 잦아들 기미가 보이지 않자 그대로 시합을 진행시켰다.

‘일단은 전력을 좀 살펴볼까?’

원래는 이제까지 했던 것처럼 시합 개시와 동시에 초살을 내려고 했다.

하지만, 돌다리도 두드리고 가라고 하지 않던가, 토미야스 같은 강자에게 성급한 모습을 보였다가는 역으로 내가 당할 수도 있었다.

게다가 링 아래에 계시는 감독님의 당부도 있어서 초반 1분 정도는 탐색전으로 경기를 풀어 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바로 들이닥칠 줄 알았는데 의외네?’

토미야스는 가드를 바짝 올리고 거리를 두고 있는 날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후, 지루한 공방이 이어졌다.

파파팡-

양 선수는 쉴 새 없이 잽을 주고받으며 빈틈을 찾고 있었다.

상대의 가드를 애써 걷어 내고 잽을 치거나 들어오는 펀치를 스웨이로 가볍게 피한 뒤 곧바로 반격을 가하는 등 최대한 유효타를 만들려고 노력했지만, 양쪽 모두 방어적인 경기 운영을 고수하고 있는 탓에 의미 있는 타격은 단 한 대도 나오지 않았다.

“에이씨, 이게 뭐야 재미없게.”

“준결승까지만 해도 화끈하게 하더니 갑자기 왜 저러지?”

“그러다가 토미야스한테 당할까 봐 그런 거지 뭐.”

상대의 호흡, 자세 등 서로에게 눈을 떼지 않으며 고도의 수 싸움이 이루어지고 있어서 복싱을 아는 사람이라면 흥미를 갖고 관전했겠지만, 대다수의 관중은 피 튀기는 난타전을 기대했기에 실망감을 드러내는 자들이 적지 않았다.

‘그래, 그렇게만 해라.’

백민규 감독은 제자가 신중히 시합에 임하자 속으로 쾌재를 부르고 있었다.

토미야스에게 밀리는 양상이 되겠다고 생각했지만, 예상외로 대등한 시합이 이루어지자 잘하면 금메달을 딸 수도 있겠다는 희망이 생겼다.

그리고 1라운드 1분 30초가 막 지났을 무렵, 탐색전 양상을 띠던 경기는 전면전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아니, 진우야! 가만히 있으면 안 돼. 움직여, 움직여!”

부지런히 스텝을 밟으며 잽 위주로 공방을 주고받던 내가 양발을 지면에 붙이고 난타전을 벌일 자세를 취하자 감독님은 다급하게 소리를 질렀다.

‘훗, 역시 사람 성격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니까?’

토미야스는 1라운드 중반이 되도록 나에게서 빈틈을 발견하지 못하여 초조했던 상황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상대가 가드를 반쯤 내리고 들어오라는 제스처를 취하니 막힌 속이 뻥 뚫리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팡-

토미야스의 스트레이트가 가드 위를 강타하자 경쾌한 타격 음이 발생했다.

‘왜 갑자기 저런 무모한 짓을 하는 거야?’

백성철 관장은 주먹을 으스러질 듯 쥐며 한탄했다.

“토미야스를 상대로 정면 승부를 벌이다니……. 잘하면 1라운드에 끝날 수도 있겠어.”

“라티포프도 전면 난타전을 시도하다가 손해 본 것을 분명히 봤을 텐데, 왜 저런 선택을 했을까?”

“왜긴, 왜겠어. 폼 좀 잡고 싶었던 거겠지. 바보 같은 놈. 아까처럼만 했으면 3라운드까지는 갔을 텐데 말이야.”

일본 관중들은 토미야스의 승리를 확신하고 느긋하게 경기를 관전했다.

휙-휙-휙

‘씨발, 제발 좀 맞아라!’

쏟아지는 연타를 보며 즐거워하는 관중들과 달리 토미야스는 자신의 펀치가 번번이 빗나가자 죽을 맛이었다.

후욱-

상대가 반격할 것을 염두에 두지 않고 내내 공격을 퍼붓던 토미야스는 갑작스럽게 들어온 라이트 훅을 더킹으로 간신히 피했다.

이후, 후속타가 들어올 것을 염려하여 재빨리 자세를 추스르고 나를 쳐다봤다.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어. 응? 이 새끼 뭐야? 왜 갑자기 실실 쪼개는 거지?’

그는 자세가 흐트러져 허점을 드러냈음에도 불구하고 제자리에 서서 여유롭게 웃고 있는 내 모습에 순간적으로 이성을 잃었다.

“윽…….”

토미야스는 자신을 비웃는 상대에게 한 대 먹여 줄 심산으로 힘껏 주먹을 날렸으나 준비 동작 없이 바로 날라오는 잽에 고개가 그대로 젖혀졌다.

땡-

“스탑, 양 선수 모두 코너로.”

심판은 종소리와 동시에 1라운드 종료를 선언했다.

“고생했다.”

백민규 감독은 코너에서 휴식을 취하는 제자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관중들이 갑자기 조용하네요?”

“자국 선수가 밀리는 모습을 봤는데, 기분이 좋을 수는 없겠지.”

“저, 지시를 따르지 않아서 죄송합니다.”

나는 감독님께서 경기 중에 고함을 질렀던 것을 떠올리며 말했다.

“죄송할 거 없다. 선수 실력을 제대로 파악 못 한 내 탓이 더 크니까.”

관중들에게는 1라운드가 백중세로 보일 수도 있으나 감독님은 내 실력이 토미야스의 실력을 크게 상회하고 있다는 것을 이미 눈치챈 상태였다.

“이제 역으로 상대가 계속 도망을 다닐 것 같은데, 어떻게 대처할 거냐?”

“그래도 여기가 자기 홈그라운드인데 그런 행동을 할까요?”

“잠깐 자존심을 굽혀서 금메달을 딸 수만 있다면야 뭐든 할 수 있지 않겠어?”

“음, 그 부분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네요.”

상대가 방어적으로 경기 운영을 하리라곤 상상도 안 했던 터라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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