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사람들이 자꾸만 보은한다-95화 (95/122)

95. 22화 아시안 게임 (6)

“지금 와서 대책을 세우는 건 이미 늦었습니다.”

“그럼 어떻게 하려고?”

백민규 감독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제자를 보며 물었다.

“상대가 도망을 간다면 쫓아가서 때려눕히는 수밖에 없지 않겠어요?”

“그래, 가서 하고 싶은 거 다 해 봐라.”

스스로 실력이 있음을 입증한 제자에게 더 이상의 조언은 무의미했다.

감독은 제자의 어깨를 두드리고 덕담 몇 마디 건넨 다음 자리로 돌아왔다.

땡-

2라운드 개시를 알리는 종이 울렸다.

나는 아까와 마찬가지로 상대의 거리 안으로 들어가 정면 대결을 펼치려 했다.

그러나 토미야스는 견제 잽으로 약만 올린 후 백 스텝으로 끊임없이 거리를 벌렸다.

“쥐새끼 같은 놈이 요리조리 잘도 피해 다니네.”

백성철 관장은 관중석에 지켜보다가 가슴을 치며 답답해했다.

준결승이 끝나고 미션 보상을 받은 이후로 내 스탯은 토미야스의 능력치를 상회하고 있었다.

현재 내 민첩성은 레벨 7이고 토미야스는 6이기 때문에 속도 면에서 우위에 있는 것은 사실이나 레벨 하나 차이로는 작정하고 도망가는 상대를 잡기는 살짝 부족했다.

하지만, 나에게는 스탯 말고도 비장의 무기가 하나 더 있었다.

‘참 신기하단 말이야. 어떻게 이렇게 똑같이 움직일까?’

나는 토미야스의 형상을 한 캐릭터와 수백 차례의 가상 스파링을 소화한 덕분에 토미야스가 어떤 행동을 할지 예측이 가능했다.

라운드 초반에는 대놓고 도망가는 녀석의 움직임에 적응하느라 애를 먹었으나 시간이 좀 흐르자 상대가 어떤 행동을 할지 소상히 보이기 시작했다.

‘언제 코너로 몰렸지?’

토미야스는 자신이 링 구석에 몰아졌다는 사실에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이제까지 제대로 된 적수를 만나지 못한 탓에 방어적으로 경기를 운영해 본 적은 없으나, 아웃복싱에 일가견이 있어 나에게 유효타를 한 대도 허용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현실은 그의 기대와 너무나도 달랐다.

‘왜 이렇게 묘한 느낌이 들지? 이러다가 설마……. 후우 아니야, 다시 집중하자.’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자신을 응시하는 내 눈에서 포획을 확신하고 있는 사냥꾼의 눈빛을 느꼈다.

불길한 생각이 순간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지만, 여태껏 패배를 경험하지 않은 탓에 감정의 정체를 제대로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스톱.”

토미야스가 코너를 빠져나오기 위해 나를 붙잡고 드러누우려는 제스처를 취하자 심판은 급하게 이를 제지했다.

“야 이 새끼야 비겁하게 뭐 하는 거야? 어? 크흠…….”

“뭐야 저놈은?”

“갑자기 왜 저래?”

백성철 관장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를 지르다가 주변 관중들의 따가운 눈길에 조용히 다시 앉았다.

이후, 경기는 초반과 비슷한 양상의 연속이었다.

토미야스가 치고 빠지는 전술로 일관했다면, 나는 가드를 단단히 하고 이를 끝까지 추격했다.

그렇게 2라운드가 1분쯤 남았을까, 아웃복싱으로 요리조리 피해 다니던 토미야스는 코너에 몰린 것도 아닌데 지면에 발을 붙인 채 가만히 있었다.

“사이드로 돌아 빨리!”

아래에 있던 일본 코치진은 작전대로 움직이지 않고 망부석처럼 서 있는 토미야스에게 소리를 질렀다.

‘퇴로를 다 막고 있는데 어떻게 하란 말이야.’

그는 자신의 사소한 움직임 하나에도 내가 기민하게 반응하자 미쳐 죽을 지경이었다.

앞 손 잽으로 혼돈을 주고 라이트 훅으로 치면서 사이드 스텝을 밟으려 하면 이 모든 것을 예상이라도 한 듯 더킹으로 피하고 자신이 갈 방향으로 몸을 틀어 퇴로를 차단할 때만 해도 우연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우연이라 생각했던 일들이 지속적으로 벌어지자 의심은 확신으로 변하였다.

‘이 새끼가 설마 날 갖고 노는 건가? 좋아, 그럼 네가 원하는 대로 해 줄게.’

토미야스는 시합 중간중간에 허점이 훤히 노출했음에도 타격이 들어오지 않자 부아가 치밀었다.

그는 2라운드 내내 고수하던 아웃복싱 전략을 버리고 전면전에 돌입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오, 뭔가 하려는 모양인데?”

“드디어 정신을 차린 거지. 아까는 뭐가 그렇게 겁나서 계속 도망 다녔던 거야.”

토미야스는 여성 팬 못지않게 남성 팬도 많았는데, 이는 곱상한 외모와 달리 정면 승부를 즐기는 화끈한 경기 스타일 때문이었다.

아직 나이가 어려 소화한 경기가 많지 않으나 근접 거리에서 난타전이 벌어질 때면 곡예사와 같은 환상적인 몸놀림으로 상대의 공격을 모두 피해 내던 그였다.

게다가 토미야스는 선수들 사이에서도 눈과 반사 신경이 좋기로 정평이 나 있어 난타전이 종료하고 나면 상대의 얼굴은 선혈이 낭자한 경우가 많았던 것에 반해 그의 얼굴은 멀쩡하니 팬들 입장에선 그가 근접전을 할 때 기대를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훗, 드디어 마음을 먹었나 보네?’

상대가 정면 승부를 벌이기로 작정한 것을 눈치챈 나는 가드를 내리고 그의 범위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하아, 그냥 쉽게 가면 되는데 왜 저렇게 오버를 하는 거야?”

백성철 관장은 머리를 쥐어뜯으며 중얼거렸다.

보통 사람이라면 본인이 상대보다 한 수 위의 기량으로 판단되면 안정적으로 경기를 운영하고 승리를 거머쥐었을 것이다.

그러나 내 목표는 아시안 게임 금메달을 넘어 에이전시의 눈에 띄는 것이었기 때문에 평범하게 경기를 운영해서는 안 됐다.

“이 새끼가!”

내가 가드를 내리고 한 대 때려 보라는 듯 얼굴을 들이밀자, 이를 지켜보던 토미야스는 눈이 뒤집혀 냅다 주먹을 날렸다.

‘멍청한 놈.’

복싱 시합을 함에 있어 적당한 분노는 투쟁심으로 치환이 가능하나 감정이 과하여 평정심을 잃게 되면 동작이 흐트러져서 카운터펀치를 맞을 빌미를 주기 십상이었다.

나는 상대의 공격을 여유롭게 피한 뒤, 턱에 훅을 강하게 꽂아 넣었다.

그러자, 온 힘을 실어 펀치를 날렸던 토미야스는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졌다.

“다운, 원, 투, 쓰리, 포…….”

“…….”

토미야스를 응원하는 팬들로 시끌시끌하던 국기관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좋아, 바로 그거야.’

백성철 관장은 마음 같아서 허공에 어퍼컷을 지르며 포효를 지르고 싶었으나 심각한 주변 분위기에 주먹을 불끈 쥘 뿐이었다.

“계속할 수 있겠습니까?”

“허억, 허억. 네, 할 수 있습니다.”

토미야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스타트!”

선수의 의사를 확인한 심판은 손을 걷어 올리며 시합 재개를 알렸다.

‘아까는 너무 흥분했어. 이번이 마지막 기회야.’

토미야스는 시합 재개와 동시에 자신에게 다가오는 나를 보며 생각했다.

방금 맞은 일격으로 적지 않은 충격을 받은 탓에 시간을 끌며 3라운드를 도모하는 게 현명한 선택이었지만, 조금 전의 다운으로 판정으로 이기기는 어려워진 상황이라 이판사판 들이받기로 결심했다.

‘생각보다 터프한 면이 있네?’

나는 결연한 얼굴로 다가오고 있는 상대를 보며 생각했다.

그리고 잠시 후, 토미야스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와, 끝내준다.”

“주먹이 엄청 빨라.”

토미야스는 잽, 스트레이트, 훅 등 다양한 펀치를 속사포처럼 쏟아 냈고 침울해하던 관중들은 다시 활기를 되찾았다.

훅-훅-훅

‘거저 우승 후보가 된 건 아니네.’

가상 스파링을 통한 경험과 스탯의 우위로 침착하게 대응은 하고 있었지만, 펀치를 피할 때마다 바람 소리가 귓가를 스쳐 지나갔다.

운동 신경과 속도를 바탕으로 경기를 푸는 녀석으로만 알았는데, 막상 접해 보니 펀치력도 제법이다.

에이전시의 이목을 끌기 위해 반격을 삼가고 간발의 차로 펀치를 계속 피하고 있었지만, 상대의 펀치가 안면이나 복부를 스쳐 지나갈 때면 간담이 서늘해지는 기분이 들곤 했다.

“와, 개쩐다 진짜.”

“아쉽지만, 상대를 잘못 만난 것 같아.”

“솔직히 잘하긴 잘한다. 나중에 집에 돌아가면 검색해 봐야겠어.”

관중들은 토미야스의 주먹이 번번이 허공을 가르자 자국 선수가 기량에서 밀리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기 시작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나? 그만 끝내자.’

경기 종료까지 25초밖에 남지 않았기에 슬슬 마무리를 지어야 했다.

나는 토미야스의 스트레이트를 고개를 숙여 피한 뒤 그대로 크로스 카운터를 날렸다.

파악-

엄청난 강타음이 국기관에 울려 퍼졌다.

“윽…….”

안면 정중앙을 직격당한 토미야스는 다운은 되지 않았으나 코에서 피가 폭포수처럼 흘러내렸다.

“스톱, 의료진은 링으로 올라와 주시길 바랍니다.”

심판은 선수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경기를 중단했고 의사는 곧바로 링 위로 올라왔다.

“코뼈 골절이라 여기서 경기를 중단해야 할 것 같습니다.”

“호흡만 약간 힘들 뿐이지 괜찮습니다. 이대로 계속하겠습니다.”

체크를 마친 의사가 기권할 것을 종용했으나 토미야스는 눈을 부릅뜨고 의지를 불태웠다.

“충격으로 인해 뼛조각이 내부로 침투하게 되면 돌이킬 수 없는 치명상을 입을 수도 있습니다. 죄송하지만, 여기서 경기를 중단해야 할 것 같습니다.”

“…….”

복싱이나 격투기에서 코가 부러진 채로 시합을 감행한 사례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토미야스의 경우 그 상태가 심각했기에 이 이상의 시합 진행은 불가했다.

“저, 아무래도 여기서 경기를 멈추셔야 할 것 같습니다…….”

의사는 심판에게 자신의 소견을 전달했고 잠시 후, 나의 TKO 승리가 선언됐다.

‘하아, 목마르다. 일단 내려가서 물 한잔해야겠다.’

아시안 게임 금메달이 확정되는 영광스러운 순간이었지만, 내 마음은 이상하리만치 평온했다.

“축하한다 진우야.”

링에서 내려오니 감독님께서 와락 날 껴안으셨다.

“감독님 덕분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아니다, 내가 더 고맙다.”

감독님은 한동안 날 부둥켜안고 놔주시지 않으셨다.

‘훗, 그렇게 좋으신가?’

나는 감독님의 몸이 미세하게 들썩거리는 것을 느끼며 미소를 지었다.

“저, 선수님.”

경기 진행 요원 하나가 부둥켜안고 있는 우리에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5분 후에 시상식이 열릴 예정이니까 준비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어제 동메달 결정전이 치러진 상태라 메달 수여식을 하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단상 위에 올라가 주시면 됩니다.”

“예.”

나는 진행 요원의 안내에 따라 단상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잠시 후, 태극기가 계양됨과 동시에 애국가가 울려 퍼졌다.

* * *

다음 날 아침.

나는 비몽사몽 하는 관장님을 모시고 호텔 조식을 먹고 있었다.

“어제 감독님이랑 계속 술 드셨던 거예요?”

“몰라도 되니까 밥이나 먹자.”

“오늘 체크 아웃이니까 일찍 들어오시라고 했잖아요.”

백민규 감독님은 선수들의 노고를 치하하기 위해 숙소 근처에 있는 식당에서 회식을 여셨다.

선수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사케와 맥주를 마시며 회포를 풀었고 나는 이들 옆에서 음료수를 마시며 음식을 즐겼다.

‘어쩐지 너무 빨리 자리를 뜨신다 했어.’

감독님은 주변의 만류에도 식사만 간단히 하시고 음식점을 나가셨다.

선수들은 자리를 편하게 즐기라는 감독님의 배려라 생각했지만, 알고 보니 관장님과 술을 마시러 가신 거였다.

“자식, 잔소리는……. 그건 그렇고 금메달 딴 거 축하한다.”

“관장님께서 잘 지도해 주신 덕분입니다.”

“그나저나 플래카드는 어디다 달면 좋겠냐?”

“웬 플래카드요?”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제자가 금메달을 땄다고 소문을 내야 체육관에 사람들이 많이 찾아올 거 아니야.”

“참나, 축하해 주려고 다시는 건 줄 알았는데 그런 이유였어요?”

“요즘 불경기라 관원도 계속 줄어드는데 제자 덕 좀 봐야 하지 않겠어?”

관장님은 장난기 어린 말투로 농담을 던졌다.

“관원 몇 명 늘어나는 걸로 되겠어요. 제가 더 열심히 해서 호강시켜 드릴 테니까 기대하세요.”

“지금처럼만 하면 충분하니까 오버하지 마라. 아, 그리고 어제 술 먹느라 깜빡하고 못 한 말이 있어.”

“뭔데요?”

나는 손에 들고 있던 젓가락을 내려놓고 관장님을 쳐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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