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 23화 성공의 조건 (1)
“어제 민규를 보러 가는 길에 널 찾는 전화가 왔었거든.”
“절 찾는 전화요?”
관장님의 말씀에 난 호기심이 생겼다.
“내가 일전에 너한테 OX에이전시에 대해 이야기했던 적이 있지?”
“설마 OX에서 연락이 온 건가요?”
“하여간 눈치 하나는 끝내준단 말이야. 전화로 듣기로는 OX에서 토미야스를 관찰하기 위해 직원 몇 명을 출장 보냈는데, 스텝 중 하나가 너에게 관심이 있는 것 같아.”
백성철 관장은 입 안에 스프를 넣으며 말했다.
“그래서 뭐라고 대답하셨어요?”
“내일모레 출국해야 하니까 보려면 오늘 보자고 했지.”
“어디서요?”
“오후 1시에 호텔 카페로 온다니까 거기서 보면 될 거다. 잠깐만 진우야.”
어제 과음한 탓에 속이 부대꼈던 관장님은 국그릇에 된장국을 담은 다음 자리로 돌아왔다.
“관장님. 생각해 보니까 좀 이상한데요?”
“뭐가?”
“용건이 있으면 저한테 연락을 하지 왜 관장님한테 했을까요?”
“너도 참 웃기는 녀석이다. 언제는 내가 네 매니저라며?”
“어? 그럼 앞으로도 쭉 제 매니저가 돼 주시는 거예요?”
관장님의 농담에 나도 농으로 받아쳤다.
“매니저 한다고 돈이 나오는 것도 아닌데, 내가 왜 하냐?”
“나중에 자리만 잡히면 섭섭지 않게 챙겨 드릴게요.”
“아이고 됐네요. 헛소리 그만하고 밥이나 먹어.”
“훗, 네.”
나는 관장님의 반응에 실소가 터져 나올 뻔했지만, 꾹 참고 아침밥을 먹었다.
* * *
오후 1시 30분.
‘흠, 조금 늦네? 무슨 일이라도 있나?’
나는 호텔 1층에 위치한 카페에서 에이전시 직원을 기다리고 있었다.
“약속 시간이 30분이나 지났는데 전화는 왜 또 안 받는 거야?”
백성철 관장은 어제 전화가 왔던 번호로 수차례 통화를 시도했으나 상대방은 묵묵부답이었다.
“진우야, 그만 가자. 이렇게 기본이 안 돼 있는 놈들하고는 같이 일할 필요가 없어.”
“딱 5분만 더 기다려 봤다가 안 오면 그때 일어나죠.”
나도 마음 같아서는 자리를 당장 박차고 일어나고 싶었으나 OX 측에서 우리에게 연락이 온 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알았기 때문에 조금만 더 기다려 보기로 했다.
‘아시안 게임에서 금메달을 땄다고 프로 레벨에서 통한다는 보장은 없어. 저들 입장에서는 내가 우스워 보이는 게 당연한 일이야.’
올림픽에서 메달을 따거나 세계 선수권에서 우승한 선수들이 프로로 전향해서 TOP5까지는 어찌어찌 진입하는 일은 적지 않았으나, 챔피언 타이틀을 획득하는 경우는 많지 않았다.
게다가 OX에이전시에 소속된 선수들은 대중들이 이름만 들으면 아는 사람들이라 같은 챔피언들 사이에서도 급이 높은 자들이었다.
‘휴, 내가 아직 안 유명해서 그러는데 누굴 탓하겠어.’
OX에 속한 선수 중 경력이 가장 떨어지는 자가 방어전을 6번 치른 선수니, 다른 선수들의 스펙이 얼마나 화려한지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됐다.
“진우야, 저 사람 왠지 우리를 찾는 것 같지 않아?”
관장님은 손가락으로 한 남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제가 가서 한번 물어볼게요.”
“그래, 옆에 통역하는 사람도 있는 걸 보면 OX 직원이 맞는 것 같다.”
나는 카페 내부를 두리번거리는 남성에게 다가가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안녕하세요. 혹시 OX에이전시에서 오셨습니까?”
“오, 여기 계셨군요. 반갑습니다. 저는 OX에이전시 스카우터로 활동하고 있는 샘 밀러라고 합니다. 그냥 편하게 샘이라고 불러 주세요.”
“강진우라고 합니다.”
“하하, 알고 있습니다. 지난 결승전에서 몸놀림이 어찌나 좋으신지 한 번만 봤을 뿐인데, 제 머릿속에 각인이 되더라고요.”
샘은 결승전을 관전한 상태라 내가 아시안 게임에서 금메달을 딴 선수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일단 이쪽으로 오시죠.”
나는 샘과 통역사를 데리고 우리가 앉았던 곳으로 데려왔다.
“야, 너 영어를 할 줄 알았던 거야?”
백성철 관장은 외국인과 자유자재로 대화를 나누는 제자가 신기하면서도 놀라웠다.
“어렸을 때부터 틈틈이 공부해 놓은 걸로 하는 거예요.”
“하긴, 요즘은 영어 유치원이다 뭐다 해서 애기들도 영어를 곧잘 하더라고. 그나저나 옆에 앉아 계신 분은?”
“죄송하지만, 저는 일본어 통역 담당이라 한국말은 잘못합니다.”
통역사는 일본인으로 영어와 일본어에만 능통할 뿐 한국말은 하지 못했다.
“어? 저분은 왜 우리한테 영어로 말씀하시냐?”
“일본어랑 영어는 할 줄 아는데 한국말은 못 하신대요. 보니까 샘이 일본 생활하는 걸 도와주시는 분 같아요.”
“쓰읍, 우리랑 대화를 하러 왔으면 한국 통역사를 준비해 주셨으면 좋았을 텐데, 좀 아쉽네.”
관장님은 상대의 성의 없는 모습에 기분이 상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중요한 계약이 이루어질 수도 있는 만큼 표정 관리에 신경을 많이 썼다.
“일단 용건이 뭔지 들어 보기로 하죠. 저, 어제 관장님께 연락을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네, 일본에 비지니스를 하러 왔는데, 아시안 게임에서 워낙 좋은 활약을 보여 주셔서 바쁜 일정 중에도 시간을 빼서 왔습니다.”
“감사합니다.”
‘내가 100퍼센트 마음에 드는 눈치는 아니네.’
샘이 미소를 지으며 덕담을 함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의 말을 전적으로 신뢰하지는 않았다.
현자의 눈을 통해 그의 감정을 살펴보니 나를 생각하는 마음이 그리 크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떻게 계약이라도 하재?”
백성철 관장님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나에게 물었다.
“아직 계약 이야기는 없네요.”
“옆에 계신 분이 뭐라고 하시는 건가요?”
“예, 이분은 저희 관장님인데 OX에서 저와 계약을 맺고 싶어 하는지 궁금해하십니다.”
나는 기왕 이야기가 나온 거 허심탄회하게 물어보기로 결정했다.
“음, 서로에 대해 조금 더 알아본 뒤에 말씀을 드릴까 했는데, 이렇게 물어보시니까 좀 당황스럽네요?”
“어차피 해야 할 이야기면 나중으로 미루나 지금 하나 똑같지 않겠습니까?”
“말씀을 듣고 보니까 굳이 미룰 필요는 없겠네요. 그럼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 회사는 강진우 선수를 지금 당장 영입할 생각은 없습니다.”
샘은 낮은 목소리로 진지하게 말했다.
“이 양반이 지금 뭐라는 거냐?”
백성철 관장은 여태껏 싱글벙글 웃으며 말하던 사람이 굳은 얼굴로 변하자 궁금증이 일었다.
“저를 영입하러 온 게 아니라고 하시네요.”
“뭐? 그럼 여길 뭐 하러 온 거야?”
“관장님께서…….”
나는 관장님이 하신 말씀을 그대로 전했다.
‘관장님이 옆에 계시니까 편하네.’
솔직히 초반에는 대화 중간중간 끼어드는 관장님을 자제시킬까 고민도 했으나 내가 물어보고 싶은 말을 대신 해 주신 덕분에 편리한 점도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강진우 선수와 계약서를 작성하고 싶지만, 일본 출장에서 맡은 주 업무가 클라이언트의 상태를 체크하는 거라 새로 고객을 영입할 권한까지는 없는 상황입니다.”
“그럼 책임자는 따로 있다는 말입니까?”
“예, 그렇습니다.”
“흠, 그건 그렇고 클라이언트랑은 어떻게 하실 계획이신가요?”
샘이 앞서 언급한 클라이언트는 다름 아닌, 토미야스를 말하는 것이었다.
“신경이 쓰이시나 보죠?”
“궁금하기는 하네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순순히 인정했다.
“토미야스와는 원안대로 계약을 진행하기로 했습니다. 아마 지금쯤이면 본부장님과 계약서를 작성하고 있겠네요.”
샘은 손목시계로 시간을 확인하며 말했다.
“…….”
“흠, 이거 표정을 보니 납득을 못 하시는 모양이네요?”
“그냥 조금 이해가 안 돼서요. 저 잠시만요. 아 이게 무슨 이야기냐면…….”
관장님이 옆구리를 툭툭 치시는 바람에 대화를 진행하기가 어렵다고 느낀 나는 샘과 나눈 이야기를 말씀드렸다.
그러자 관장님은 얼굴이 울그락불그락 해지시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후우, 여기 더 있다가는 실수할 것 같으니까 먼저 올라가마.”
“미팅이 끝나는 대로 찾아뵐게요.”
“저놈이랑 너무 오래 이야기하지마. 에이전시가 하나만 있는 건 아니니까 끌려다니지 말고.”
“네, 관장님.”
할 말을 마친 관장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카페를 떠났다.
“이런, 관장님께서 화가 많이 나셨나 보군요. 이해합니다. 승자보다 패자가 더 좋은 대우를 받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우리 입장에서 볼 때 토미야스 선수와 강진우 선수 간에 큰 차이가 있습니다. 그게 뭐냐면…….”
“인기, 인지도, 티켓 파워 이런 것들을 말씀하시려고 하는 겁니까?”
“하하, 이거 이미 다 알고 계시니까 괜히 무안하네요.”
샘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하나 더 추가하면 국적도 있겠네요.”
“국적이요?”
“네, 한국이 최근 선진국 반열에 올라서 구매력이 늘은 건 사실이지만, 복싱이나 격투기처럼 투기 종목에 관련된 시장에서는 비교 자체가 안 되거든요.”
“이러나저러나 어쨌든 돈이 안 된다는 말씀을 하고 싶은 거군요.”
나는 OX에서 토미야스에게 접근하는 이유를 일찌감치 눈치채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말에 전혀 기분 나빠하지 않았다.
“음, 이야기를 하다 보니 궁금한 점이 하나 생겼습니다.”
샘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질문을 던졌다.
“어떤 게 궁금하십니까?”
“이렇게 금방 알아들으시는 분이 아까는 왜 이해가 안 간다고 했을까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토미야스에 비해 제가 뒤떨어지는 점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여러 면에서 토미야스와 강진우 선수가 겹치는 부분이 적지 않지요. 인지도가 떨어지는 부분만 빼면 오히려 더 나을 수도 있고요.”
그는 토미야스보다 더 낫다는 내 말을 순순히 인정했다.
“제가 현재 토미야스 선수보다 인지도 면에서 많이 뒤처질진 몰라도 실력 면에서는 많이 앞선다고 합니다. 그리고 유명세라는 건 경력이 쌓이면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거라 쉽게 해결할 수 있고요.”
나는 앞으로 3년 이내에 지금보다 훨씬 더 성공하고 유명해질 자신이 있었다.
“대단한 자신감이군요. 뭐, 제 안목으로 봤을 때도 충분히 자격이 있으십니다. 그러나 잠재력 하나만 믿고 계약을 맺기에는 우리 회사의 리스크가 너무 큽니다.”
“그럼 저에게 원하는 게 뭡니까?”
“우리 회사는 강진우 선수와 조건부 계약을 맺고 싶습니다.”
“조건부 계약이요?”
“아쉽게도 강진우 선수는 아직 미성년자라서 법률 행위를 단독으로 하기가 어렵습니다. 따라서 오늘은 계약 내용을 전달하는 것으로 마무리를 짓고 나중에 한국의 자택으로 송달해 드릴 테니 부모님과 상의해서 결정을 내리시면 됩니다.”
‘아까는 계약을 안 한다더니 이제 와서 또 무슨 소리야.’
샘의 아리송한 말에 답답한 마음이 들었지만, 일단 들어 보기로 했다.
“이 계약서는 당장 사인을 한다고 효력이 발생하는 게 아니라…….”
이후, 10분이 넘는 설명이 이어졌다.
나는 사소한 내용도 놓치지 않겠다는 마인드로 집중해서 경청했다.
법률 용어가 난무했던 그의 설명을 쉽게 풀이하면 이랬다.
현재, 나의 위치가 OX와 계약하기에는 많이 부족하니 세계 챔피언 타이틀을 따는 것을 조건으로 계약을 맺자는 내용이었다.
대신, 프로로 전향하면 매해 5만 달러를 지원해 주는데, 3년으로 기간이 정해져 있어 제한된 시간 내에 성과를 내지 못하면 계약서는 휴짓조각이 된다는 말이었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3년 안에 타이틀을 따내면 된다는 거죠?”
“단순한 타이틀 획득으로는 부족합니다. 회사 수뇌부에서 판단할 때 매력이 있다는 판단이 들어야 하거든요.”
“그래서 효력 발생 조건의 마지막 과정에 임원 심사를 넣으신 거군요.”
까다로우면서도 비합리적인 조건에 점점 짜증이 치밀어 올랐지만, 애써 참으며 대화를 이어 갔다.
“어떻습니까? 이만하면 괜찮지 않습니까?”
샘은 이런 내 마음을 모르는지 천진난만한 표정을 지으며 조건부 계약이 이루어질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