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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계 사람들이 자꾸만 보은한다-97화 (97/122)

97. 23화 성공의 조건 (2)

‘뭐가 괜찮다는 거야?’

아직 프로에 데뷔하지 않은 복서의 입장에서 5,000만 원이 작은 돈은 아니었지만, OX에이전시의 명성과는 걸맞지 않은 액수였다.

게다가 웹소설에서 창출되는 수입만 한 달에 5,000만 원이 넘었고 웹툰과 웹드라마 수익까지 합하면 1억에 육박하는 돈을 벌고 있는 터라 처음 제시액을 들었을 때 코웃음이 터져 나올 뻔한 걸 간신히 참아 냈다.

“선수님 어떻습니까? 이 정도면 신인 복서에게 파격적인 제안이지 않습니까?”

“제가 생각할 땐 OX에서 저의 가치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한 것 같은데요?”

“오, 정말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샘은 눈을 크게 뜨며 의외라는 제스처를 보였다.

“선수님을 만나기로 한 게 전적으로 저의 결정이었다는 걸 기억하십니까?”

“예, 기억합니다.”

“그 이유도 짐작이 가십니까?”

“돌려 말하지 말고 편하게 말씀하세요.”

나는 그의 입에서 어떤 이야기가 튀어나올지 알았으나 가르치는 듯한 말투가 거슬려 까칠하게 대응했다.

“우리 회사에서는 애당초 강진우 선수에게 어떠한 관심도 갖지 않았습니다. 아니,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고 하는 게 맞겠지요. 하지만, 이곳에 출장 나온 직원들 중 유일하게 제가 강진우 선수를 만나야 한다고 주장했고 이렇게 조건부 계약서나마 들고 찾아뵌 겁니다.”

“저를 좋게 봐 주시고 노력해 주신 건 감사하지만, 지금 당장 계약에 대한 확답을 드리긴 어려울 것 같습니다.”

“아직 경험이 부족하셔서 그런가, 세상 돌아가는 걸 잘 모르시네.”

샘은 자신의 계획과 달리 계약이 순조롭게 진행이 되지 않자 삐딱하게 굴기 시작했다.

“선수님께서 스타성을 갖추고 실력도 출중하신 건 인정합니다. 하지만, 우리 회사 기준에서 볼 땐 평균을 약간 웃도는 수준이지 특별하진 않습니다.”

“그런가요?”

‘좋게 해선 안 되니까 강하게 나오시겠다?’

나는 갑작스럽게 변한 그의 태도에 황당한 기분이 들었으나 일단 이야기를 끝까지 듣기로 했다.

“최근에 태국 선수 하나가 페더급 WBC 챔피언에 등극했습니다. 자국에서는 국민 영웅이고 실력은 말할 것도 없지요.”

“네, 뉴스를 본 적 있는 것 같습니다. 사갓 선수를 말씀하시는 거죠?”

태국과 필리핀은 복싱 경량급에서 두각을 드러낸 나라였기 때문에 챔피언이 하나둘 배출됐다고 해서 그렇게 놀랄 일은 아니었다.

“2주 전쯤인가요? 동료 직원에게 전해 들은 이야긴데 사갓 선수가 우리 회사와 계약을 맺고 싶다고 먼저 접촉을 했다더군요.”

“사갓 선수면 나름 이 바닥에서는 유명하신 분 아닌가요?”

사갓은 나이도 젊고 KO율이 높은 데다 현재 함께 일하고 있는 에이전시와 계약 기간이 3개월밖에 안 남은 상황이라 눈독 들이고 있는 회사가 적지 않았다.

이제 막 챔피언이 돼서 방어전 경험이 전무하나 시합 때 보여 준 퍼포먼스가 화려한 편이라 해외에서도 인기가 좋은 선수였다.

“스포츠 에이전시 회사라면 누구나 탐을 낼 만한 우수한 선수죠. 하지만, OX에서 볼 때는 그렇게 매력적인 선수는 아닙니다. 실제로 사갓 측에서 우리에게 직접 사람을 보내 협상을 시도하려 했지만, 정중하게 거절했습니다.”

“말씀을 들으니까 왜 그렇게 당당하셨는지 알 것 같네요.”

“그래서 억울하면 성공하라는 말도 있지 않겠습니까? 강진우 선수께서 한 경기로 수천억의 수익을 창출할 수 있는 분이라면 제가 아니라 사장급 임원이 영접을 하러 나왔겠지요. 그리고 제가 사갓 선수를 언급한 건 OX의 우수함을 설명하려는 이유만 있는 건 아닙니다.”

샘은 내가 처음으로 수긍하는 태도를 보이자 열정적으로 설명을 이어 갔다.

“챔피언 타이틀을 딴다고 해서 누구나 부를 거머쥘 수 있는 건 아닙니다. 간단한 예를 들면 비슷한 실력과 스타성을 가진 사람 둘이 있다 쳐도 저희 회사에 속하냐 속하지 않느냐에 따라서 연 수입 면에서 적게는 3배 많게는 10배 이상 차이가 날 겁니다.”

“매치업을 잘 성사시키는 게 그만큼 중요하다는 거네요.”

“훗, 매치업은 OX에서 하는 수많은 일 중 일부에 불과합니다. 마케팅, 경기장 대관, 입장료 산정, 생중계를 담당할 방송국 선정까지 이 모든 것들이 잘 맞물려 돌아가야 수익을 창출할 수 있는 거지요.”

‘흠, 들으면 들을수록 놀라운 회사인 건 분명해.’

나는 겉으로는 티를 내지 않았지만, 그의 설명을 듣고 내심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OX에이전시에 취급하는 종목은 복싱에만 국한된 게 아닙니다. 현재는 복싱 에이전시에만 주력하고 있지만, 회사 규모가 커지고 있는 상황이라 조만간 축구, 야구, 농구 업계에서도 자리를 잡는 건 시간문제이지요.”

“OX의 능력이라면 금방 자리를 잡을 겁니다.”

“좋게 말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자, 이제 어떻습니까? 우리 회사와 계약할 마음이 드십니까?”

“구미가 땡기는 건 사실이지만, 현재로서는 어떤 확답도 드릴 수가 없겠네요.”

타이틀 획득을 조건으로 OX의 전속 선수가 된다는 건 상당히 괜찮은 딜이었다.

그러나 마음에 안 드는 구석이 여럿 있었기 때문에 선뜻 계약을 하겠다는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거 참, 별것도 없으면서 되게 재네.”

“방금 뭐라고 했습니까?”

나는 혼자 궁시렁거리는 샘에게 반문했다.

“하하, 아닙니다. 그냥 선수님이 계약에 대한 의지가 별로 없으시니 좀 의아해서 그랬습니다. 이런 기회가 흔한 것도 아닌데 답답해서요.”

“절 위해서 하시는 말씀인 건 알겠지만, 제 의지까지 간섭할 건 아닌 것 같습니다.”

“……하하, 간섭이라니요. 가당치도 않습니다.”

샘은 애써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었으나 마음 같아서는 다 뒤집고 나오고 싶었다.

그는 자신이 찾아온 취지와 회사에 대해 설명을 하면 내가 두 팔을 벌리고 환영할 것으로 예상했다.

그도 그럴 게 프로 세계에서 입증도 안 된 선수를 업계 1위인 OX에서 조건부로나마 계약을 하려는 건 매우 드문 일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샘의 그런 확신이 나에게 거부감을 일으켰다.

나이가 어리다고 가르치려는 태도나 은혜를 베푸는 듯한 제스처가 아까부터 내내 거슬렸다.

“후우, 이거 제가 오늘 괜히 온 것 같습니다. 좋은 의도로 왔는데 본의 아니게 선수님의 심기를 건드린 것 같네요.”

“전 괜찮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리고 절 높게 평가해 주신 점은 고맙게 생각하고 있고요. 아무튼 앞서 말씀하신 데로 계약서를 보내 주시면 검토를 한 뒤에 의견을 알려 드리겠습니다.”

나는 OX에이전시와 계약을 맺을 생각은 없었으나 굳이 척을 질 생각까지는 없었다.

“아닙니다. 제가 선수님의 가치를 똑바로 파악하지 못하고 무리하게 계약서를 작성한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이번 계약은 없던 걸로 해야 할 것 같습니다.”

‘하아, 피곤하다.’

그는 겉으로 미안한 척을 하고 있었지만, 목소리 안에 오기가 가득했다.

“알겠습니다.”

“알겠다는 건 설마 우리랑 계약을 하지 않겠다는 말씀이신가요?”

샘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반문했다.

“예, 그렇습니다.”

나는 무미건조하게 대답했다.

“후우, 이래서 어린 애랑은 대화가 안 된다니까?”

“용건 끝났으면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면상에 스트레이트를 한 방 꽂아 주고 싶었지만, 지금까지 참은 게 아까워 자리를 뜨기로 했다.

“어디서 건방을 떨어? 우리랑 척을 지고 얼마나 잘되는지 지켜보겠어.”

“딱 보니까 회사 내에서도 말단을 간신히 벗어난 것 같은데, 괜찮겠습니까?”

“뭐야 새끼야?”

쾅-

샘은 분노를 참지 못하고 탁상을 내리쳤다.

“이 세상에 에이전시가 OX만 있는 것도 아닌데 제가 왜 그쪽한테 매달려야 되죠? 그리고 궁금한 게 방금 절 협박하신 겁니까?”

“그건 두고 보면 자연스럽게 알게 될 거다.”

“말씀하시는 걸 보니까 협박이 맞네요. 좋습니다. 저도 오늘 일은 잊지 않고 두고두고 마음에 새기겠습니다. 그럼 들어가십시오.”

“하아, 건방진 새끼. 어디서 주제도 모르고…….”

나는 악담을 퍼붓는 녀석을 뒤로하고 관장님이 계시는 방으로 갔다.

“어떻게 됐어?”

“그냥 없던 걸로 하기로 했어요.”

“잘했다. 사람을 뭘로 보고 그따위 조건을 들이대.”

“그러게요.”

관장님의 말씀을 들으니 심란했던 마음이 조금은 진정되었다.

‘항상 그랬던 것처럼 최선을 다하면 길이 있을 거야. 주눅 들지 말고 내 길을 개척해 보자.’

OX에이전시라는 든든한 후원자를 놓쳤지만, 그렇다고 목표를 낮추거나 꿈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나는 샘과 OX에이전시의 콧대를 납작하게 만들겠다고 다짐하며 전의를 불태웠다.

* * *

아시안 게임 폐막까지 10일가량 더 남았지만, 일정을 모두 마친 상황에서 일본에 더 머무를 이유는 없었다.

복싱 대표단은 한국행 비행기를 타고 귀국했다.

공항에 도착하자 꽤 많은 기자들이 인터뷰를 하기 위해 나에게 다가왔다.

“강진우 선수, 금메달 따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일단, 소감 한마디 부탁드리겠습니다.”

기자 하나가 여러 언론사들의 녹음 마이크를 묶은 것을 내 입에 갖다 대고 질문했다.

“우선 아시안 게임에서 금메달을 딸 수 있도록 도움을 준 분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저를 포함한 선수들을 물심양면 챙겨 주신 백민규 감독님, 그리고 제가 복싱에 입문한 이래로 가르침을 아끼지 않은 백성철 관장님까지…….”

나는 은인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언급하며 감사의 뜻을 표했다.

“저희 복싱 대표 팀에 지원을 아끼지 않은 대한복싱협회와 대현그룹에 감사 인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고된 훈련에도 힘든 내색 하나 하지 않은…….”

백민규 감독님도 나와 멀리 떨어지지 않는 곳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었다.

“조금 전에 확인해 본 결과 강진우 선수가 뛴 결승전 영상의 조회 수가 백만을 넘겼습니다. SNS상에서도 강진우 선수의 영상과 사진이 올라오는 횟수가 갈수록 늘고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관심을 가져 주셔서 감사한 마음입니다. 응원해 주시고 격려해 주시는 만큼, 열심히 해서 더 멋진 모습을 보여 드릴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다음 질문입니다. 아시안 게임이 막 끝난 상황이라 경황이 없을 수도 있는데요. 혹시 다음 행보에 대해서 말씀해 주실 수 있으십니까?”

기자들은 1년 후에 있을 세계 선수권 대회나 2년 후에 열리는 올림픽 대회를 염두에 두고 질문을 던졌다.

“정확한 건 관장님과 의논을 한 뒤에 말씀드리는 게 맞지만, 기자님들께서 궁금해하시니 편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7월 초에 있는 프로 라이센스 테스트에 응시하여 프로 복서로 전향할 계획입니다.”

“현재 기량이면 올림픽에서도 메달권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인데 아깝지는 않으십니까?”

“복싱을 시작할 때부터 프로 복서로서 성공하는 걸 목표했기 때문에 아쉬움은 없습니다. 올림픽은 프로 생활을 마무리하고 나서 참가 여부를 결정하지 않을까 싶네요.”

원래는 프로 복서의 올림픽 참가는 금지되었지만, 몇 년 전에 룰이 개정되어 프로 복서도 올림픽과 아시안 게임에 출전하는 게 가능해졌다.

따라서 프로 복서로 성공을 한 뒤 올림픽에 도전한다는 게 허황된 말은 아니었다.

“개인적으로 프로 복서로서 성과를 내는 길이 복싱 저변을 확대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어디까지 올라갈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열심히 해서 한국 복싱을 부흥시킬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이상입니다.”

“선수님, 짤막하게 질문 하나 드려도 되겠습니까?”

“저도 질문이 있습니다.”

답변을 마무리했음에도 불구하고 추가 질문이 쏟아지는 바람에 1시간이 지난 후에야 공항을 빠져나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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