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 25화 헌책방 거리 (1)
‘일단 나가자.’
나는 이세계 존재들과 대화를 마친 후, 나갈 채비를 했다.
목록에 있는 고전들은 쉽게 구할 수 있는 것들도 있었지만, 국내 출판 여부가 불분명한 도서들도 있었다.
사실 요즘은 인터넷 서점이 잘되어 있어서 굳이 밖에 나가지 않아도 책들을 검색할 수 있었다.
하지만 오랜만에 바깥바람을 쐬고 싶은 마음이 올라와서 수고로움을 무릅쓰고 직접 돌아다니기로 했다.
‘훗, 괜한 걱정을 했나 보네.’
아시안 게임 이후, 나름 유명해졌다는 생각에 모자와 마스크를 챙겨 밖으로 나왔으나 나를 알아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간혹, 나를 알아보고 깜짝 놀라는 사람들이 있긴 했지만, 다가와서 말을 거는 경우는 발생하지 않았다.
결국 그동안 했던 걱정들은 모두 기우였던 것으로 밝혀졌다.
‘몇몇 책들은 서점에 없을 수도 있어. 청계천에 헌책방 거리가 있다고 하니까 그쪽도 돌아보자.’
나는 대형 서점 외에 헌책방도 들릴 생각이기 때문에 서둘러 집을 나섰다.
* * *
광화문 근처의 한 카페.
서점에서 책을 산 나는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을 마시며 스마트폰을 하고 있었다.
‘동대문역 근처에 있는 청계천에 헌책방들이 모여 있구나. 서울 살면서 청계천 산책을 많이 한 것 같은데 그동안 왜 몰랐을까?’
나는 블로그에서 내가 찾는 책들이 있을 법한 헌책방들을 검색한 다음 지하철역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헌책방들은 역에서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 있어서 찾는 데 시간이 얼마 걸리지 않았다.
평화시장과 오간수교 사이에 있는 헌책방 거리에는 사람들이 많이 다니지 않았으나 서울의 옛 풍경을 느낄 수 있는 운치 있는 장소였다.
‘책들이 이렇게 많은데 이걸 어떻게 찾지?’
헌책방 거리에 도착하자 자그마한 서점들이 눈에 들어왔다.
족히 수십 년은 돼 보이는 1층짜리 건물에서 운영되는 헌책방들은 규모 측면에서는 일반 서점에 밀릴지는 몰라도 보유하고 있는 서적의 양은 전혀 뒤지지 않을 것 같았다.
서점 앞에는 책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는데, 그곳에 놓인 것들만 해도 족히 수백 권은 됐다.
‘밖에 있는 것들만 확인하는데도 반나절은 걸릴 것 같은데, 안에도 책이 엄청나잖아?’
대다수의 서점들은 노상에 책을 놓는 것도 모자라 책방 안에도 책들을 즐비하게 쌓아 놓은 상태였다.
‘어디든 일단 들어가서 살펴보자.’
션 교수님께서 작업에 이틀에서 삼 일은 걸린다고 하셔서 내일까지는 여유롭게 시간을 써도 됐지만, 되도록 오늘 안으로 필요한 책들을 모두 구하고 싶었다.
“사장님, 안녕하세요. 저 찾고 있는 책이 있는데요.”
나는 운봉서점이라는 곳에 들어가 사장님께 말을 걸었다.
“예, 말씀하세요.”
“아리스토텔레스 분석론 전서라는 책이 여기에 있을까요?”
“그렇게 물어보시면 책을 찾기 어려워요. 아리스토텔레스면 철학 서적이죠? 저 안쪽으로 들어가면 종교 서적이 모여 있는 곳이 있는데 그 근방을 한번 살펴보세요.”
“감사합니다. 아, 저 혹시 원문으로 쓰인 책들도 파나요?”
나에게는 자동 번역 기능이 있어서 외국어로 쓰인 책들을 읽는 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외국책들은 입구에서 바로 오른편에 있는 책장에 꽂아 뒀으니까 거길 보시면 됩니다.”
“예, 감사합니다.”
나는 사장님께 꾸벅 인사를 드린 뒤 책들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책이 정말 많긴 하다.’
옛 어른들은 철학을 기독교나 불교처럼 종교와 한데 묶어 말씀하시는 경우가 많았다.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알려 준다는 점에서 철학과 종교가 같다고 판단하셔서 그렇게 말씀하셨을 것이다.
그나저나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책의 수가 많을 뿐만 아니라 종교 서적, 동양 철학, 서양 철학 심지어 사주, 관상학책까지 다양한 카테고리의 책들이 두서없이 진열되어 있어서 내가 원하는 책을 찾는 게 쉽지 않았다.
15분가량 책을 찾는데 몰두했으나 이제 겨우 책장 두 개를 확인했다. 게다가 사람이 지나다니는 통로 곳곳에도 서적들이 쌓여 있어 이것들도 살펴보려면 족히 1시간 이상은 걸릴 것 같았다.
‘하아, 시간이 부족한 건 아닌데 너무 귀찮다. 조금 더 효율적이고 괜찮은 방법이 없을까?’
목록에 적힌 도서 중에는 절판됐거나 번역이 안 된 것도 있어서 미션 수행을 위해서는 헌책방 전체를 뒤진다는 마인드로 샅샅이 살펴봐야 했다.
제자리에 서서 한참 방법을 고심하던 그때, 시스템이 가동되더니 화면이 눈앞에 떠올랐다.
<아르마이스의 의지가 발동되었습니다.>
<사용자의 욕망을 감지했습니다.>
<어드바이저가 사용자에게 도움이 되는 기능을 찾았습니다.>
<확인해 보시겠습니까? Y/N>
‘응 바로 확인할게.’
나는 일말의 고민도 없이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사용자께서는 미션을 수행하기 위해 특정 아이템을 찾고 계신 것으로 사료됩니다.>
‘아이템? 아, 시스템이 책을 아이템이라고 인식하나 보네.’
<사용자님은 전생에 아르마이스로 활동하실 때 여러 특수 스킬을 갖고 계셨습니다.>
‘특수 스킬?’
<예, 다른 존재들에게는 허락되지 않는 사용자님만의 고유의 스킬 말입니다.>
‘고유 스킬이면 자동 번역 기능 같은 걸 말하는 건가?’
어드바이저의 이야기를 듣는 순간, 미르헨 총장님께서 해 주셨던 말씀이 떠올랐다.
전생의 나는 카산트 대륙 안에 그 어느 누구도 갖고 있지 않은 여러 스킬들을 보유하고 있었다.
현재 내가 발현하는 데 성공한 고유 능력으로는 자동 번역 기능, 미션 수행을 통한 능력치 향상, 그리고 타인에게 미션을 주어 스탯을 올려 줄 수 있는 능력 등이 있다.
‘영혼 동기화 작업을 하려면 시간이 좀 걸릴 텐데, 이를 어쩌지…….’
고유 능력을 발현시키기 위해서는 전생의 기억을 되찾는 영혼 동기화 작업이 선행되어야 했다.
하지만, 이를 위해서는 미르헨 총장님의 조력과 적지 않은 시간을 투자해야 해서 나로서는 선뜻 할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해당 스킬은 현자의 눈과 연계된 것이어서 영혼 동기화 작업을 따로 할 필요가 없습니다.>
‘현자의 눈과 관련된 거면 통찰력 스탯과 연계된 거야?’
<그렇습니다. 저는 사용자께서 미션을 수행하여 통찰력을 올린 후에 특수 스킬을 발현할 것을 추천드립니다.>
‘그건 그렇고 네가 말하려는 스킬이 정확히 뭐야?’
<스킬의 이름은 디텍션인데, 사용자께서 원하는 사물을 감지할 수 있게 도와줍니다.>
‘오, 그런 게 있었으면 진즉에 말하지.’
디텍션 기능을 활용한다면 일일이 책을 뒤져야 하는 수고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었기 때문에 지금 현 상황에서 꼭 필요하다고 볼 수 있었다.
<그리고 현재 계신 헌책방 거리에는 영기를 띤 아이템이 존재하여 사용자께서 수월하게 미션을 수행할 것으로 예상했습니다.>
‘영기를 띤 아이템?’
<스탯 향상에 도움을 줄 수 있는 물건들은 그 테두리가 눈에 보이지 않는 영기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일종의 스킬북 같은 건가 보네. 일단 알겠고 미션 먼저 바로 진행해야겠어.’
<네, 알겠습니다.>
어드바이저가 대답을 함과 동시에 허공에 미션 창이 떠올랐다.
<미션이 생성되었습니다.>
<목표: 정약용의 주역사전을 찾아 읽으십시오.>
<보상: 통찰력 LV UP>
‘다산 정약용 선생님의 주역사전?’
나는 미션 내용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조선 후기에 활동했던 정약용은 학문에 조예가 깊고 명석하여 정조의 총애를 받은 대학자이다.
그는 천주교를 믿고 서학을 숭배했다는 이유로 전라남도 강진에 유배를 당했다.
보통의 사람이라면 실의에 빠질 만한 상황이었지만, 정약용은 긴 유배 생활을 학문을 익힐 기회라 여기고 책 읽기와 저술 활동에 매진했다.
그 결과 법, 경제, 정치, 유학 등 다양한 분야의 책을 남기게 되었고 이는 당대를 넘어 이백 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명성을 유지될 수 있게 해 주었다.
‘인터넷에 치면 나오는 책인데 무슨 영기를 띤다는 거야?’
정약용의 ‘주역사전’은 온라인 사이트에서 유통되는 책으로 희소성이 다소 떨어지는 책이었다.
그러나 어드바이저가 거짓말을 할 리가 없었기 때문에 믿고 계속 찾아봐야 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나? 서점들도 다 문을 닫고 있잖아.’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하니 벌써 밤 9시가 되어 가고 있었다.
사실, 헌책방 거리에 도착했을 때도 서점 중 절반은 이미 문을 닫은 상태였다.
마침 내일은 토요일이어서 아침 일찍 나와 책을 찾을까 고민했지만, 아직 문을 닫지 않은 서점이 하나 있어 그곳을 들린 후에 집에 돌아가기로 했다.
“허허, 이제 문을 닫으려고 하는데 이를 어쩌나?”
‘초연당’이라는 간판을 건 서점 안으로 들어가자 사장으로 보이는 할아버지께서 난색을 드러내며 말씀하셨다.
“제가 급하게 찾는 책이 있어서 그러는데, 이곳에 있는지만 확인할 수 있을까요?”
“이곳은 유학 서적이랑 고서를 취급하는 곳이라 학생이 찾는 책은 없을 겁니다.”
“말씀을 들으니까 잘 찾아온 것 같네요. 제가 마침 주역에 관한 책을 찾고 있었거든요.”
주역은 유학자라면 모두 익히는 사서삼경 중 삼경에 속한 책이었다.
“학생처럼 보이시는데 주역에 관심이 있으십니까?”
노인은 나를 기특하게 바라보며 물었다.
“네, 제가 고전 읽는 걸 좋아하거든요.”
“그렇군요. 이곳에는 주역 원문을 담은 책도 있고 해설서도 있는데 어떤 걸 원하십니까?”
“해설서를 읽으려고 합니다.”
“그래요? 그럼 누구의 해설서를 찾고 있나요?”
나에게 흥미를 느낀 노인은 문 닫을 시간이 지났다는 것도 잊은 채 대화에 집중했다.
“정약용 선생님의 ‘주역사전’을 찾고 있습니다.”
“주역사전을 찾고 있다고요? 이유가 뭔가요?”
‘갑자기 왜 이유를 물으시지? 흠, 딱 보니까 정약용 선생님을 존경하시는 분 같네.’
현자의 눈을 통해 할아버지의 감정 상태를 관찰해 보니 나에 대해 흥미와 호기심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는 정약용에 대한 짤막한 지식을 언급하며 그에 대한 존경심을 한껏 드러냈다.
“제가 알아보니까 정약용 선생님께서 주역의 달인이셨더라고요. 아침에 주역으로 점괘를 보면 그날 오후에 무슨 일이 발생할지도 맞혔다고 들었어요.”
‘백과사전을 읽은 게 이럴 때 도움이 될 줄 누가 알았겠어?’
옛날에 백과사전 미션을 진행하며 다방면의 지식을 습득할 수 있었는데, 그중에는 정약용에 관한 내용도 들어 있었다.
“맞습니다. 정 선생님은 멀리서 반가운 손님이 올 때면 미리 알고 마중 나와서 사람들을 놀래키곤 했지요. 하하, 이거, 학생 입에서 그 일화를 듣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습니다.”
할아버지는 내 말에 맞장구를 치며 즐거워하셨다.
“저, 그런데 혹시 이곳에 주역사전이 있나요?”
사장님과의 대화가 싫은 건 아니었지만, 미션 수행을 위해서는 책의 향방을 알아야 했다.
그러자 노인은 미소를 지으며 나를 서점 안에 있는 사무실로 인도했다.
“어쩌다 보니 대화가 길어졌군요. 이쪽으로 오세요. 우리 가게에 있는 주역사전을 보여 드리겠습니다.”
사무실 안에는 책장이 하나 더 있었는데, 그곳에는 글자가 새겨진 목판이 빽빽이 꽂혀 있었다.
“이 목판에는 주역사전의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노인은 목판 하나를 조심스럽게 꺼낸 후, 나에게 보여 주었다.
“딱 봐도 엄청 귀해 보이는데 이걸 어떻게 갖게 되신 건가요?”
“저희 선조께서 다산 선생님의 제자셨는데, 스승의 저서를 오래오래 보존하고 싶어서 목판을 제작하셨습니다.”
“글씨가 정갈한 걸 보면 솜씨 있는 분에게 맡기셨나 봐요.”
나무에 양각으로 새겨진 글씨는 정갈하면서도 힘이 있어 조각가의 솜씨가 예사롭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저희 선조가 마을에서 유명한 목수였다고 합니다.”
“헉, 그럼 이 많은 걸 직접 다 새기신 건가요?”
“스승에 대한 존경심이 컸기 때문에 가능했겠지요.”
‘이래서 아이템에 영기가 서려 있다고 한 거구나.’
내가 보고 있는 주역사전 목판은 오랜 역사를 머금었을 뿐만 아니라 한 개인이 숭고한 마음으로 혼을 담아 만든 것이어서 일반적인 목판에 비해 훨씬 특별한 것이었다.
“그나저나 여기에 새겨진 것들은 모두 조선 말에 쓰였던 고문들인데 읽을 수 있겠습니까?”
노인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다행히도 어렸을 때 한문을 배운 적이 있어서 불가능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저, 그럼 이 구절을 한번 읽어 보시겠습니까?”
“네, 알겠습니다. 주역의 큰 의리는 바로 이 ‘亨’과 ‘貞’ 두 글자에 있는 것이니, 天時와 人事를 점칠 때 활용한다. 따라서…….”
나는 자동 번역 기능을 사용하여 물 흐르듯 고문을 읽어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