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사람들이 자꾸만 보은한다-101화 (101/122)

101. 25화 헌책방 거리 (2)

“어떻게 이리 능숙하게 고문을 읽을 수 있습니까? 혹시, 어디서 한학을 전문적으로 배우신 적이라도……?”

보통 한학을 전공한 자라 해도 한자를 읽은 후에 머릿속으로 뜻을 풀이해야 해서 해석에 시간이 걸리기 마련이다. 그런데 기껏해야 고등학생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소년이 소설책을 읽듯 술술 읽어 내니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렸을 때부터 어학에 관심이 많아 외국어라면 가리지 않고 열심히 공부한 덕분에 해석, 번역은 눈이 뜨였습니다.”

“공부가 깊어져서 언어에 달통하신 모양이군요.”

노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이해가 간다는 듯한 제스처를 보였다.

‘이걸 이렇게 받아 주신다고?’

해명이 필요한 상황이라 되는 대로 지껄인 것일 뿐인데, 할아버지께서는 이를 진심으로 믿어 주셨다.

“사실 이 목판을 보여 드리기 전까지 주역사전을 드려야 되는지 고민했었습니다.”

“한학에 조예가 있으신 분에게만 판매를 하는 건가요?”

“아무래도 선조의 정성이 깃든 물건이다 보니까 아무에게나 판본을 드릴 수는 없더군요.”

그는 고전의 가치를 아는 자하고만 거래를 하는 원칙을 갖고 있었다.

“판본이면 이 목판으로 찍어 낸 것을 말씀하시는 거죠.”

“목판 자체를 원하시는 분들도 있지만, 저에게 억만금을 줘도 판매할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이거 큰일이네. 내가 볼일이 있는 건 판본이라 아니라 목판인데…….’

미션 수행을 위해서는 판본이 아니라 영기가 서린 목판을 직접 읽어야 했다.

나는 어떻게 말씀드리면 좋을까 고민을 하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 사장님. 혹시 이 목판을 잠시 읽을 수 있을까요?”

“그건 조금 힘들 것 같습니다. 인쇄를 하거나 주요 고객이 왔을 때만 목판을 공개하는 것이 원칙이거든요. 그리고 목판을 읽으시기에는 시간이 벌써 너무 늦었습니다.”

노인은 벽에 걸린 시계를 바라보며 말했다.

시간은 흘러 어느새 밤 10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앞으로 한 시간 정도 여유가 있었지만, 방대한 양의 목판을 읽기에는 터무니없이 부족한 시간이었다.

‘이곳에서 밤을 새워서라도 목판을 다 읽고 싶은데 어떡하지?’

나는 책상 위에 올려진 목판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학생께서 어떤 연유로 목판을 읽고 싶어 하시는지 모르지만, 내용이라면 판본으로도 충분히 읽을 수 있지 않나요?”

“할아버지 말씀이 맞습니다.”

이치에 맞는 그의 말에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혀 버렸다.

“이 목판은 우리 선조께서 남긴 귀중한 가보로 합리적인 사유 없이는 타인에게 대여를 불허합니다. 그러니 앞서 말한 대로 판본을 가져가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원가격은 2만 5천 원인데, 학생에게는 특별히 그냥 드리겠습니다.”

노인은 거절한 게 마음에 걸렸는지 인쇄본을 공짜로 주려 했다.

‘합리적인 사유가 있으면 볼 수 있다는 거잖아?’

목판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길 원하는 할아버지의 바람과 달리 나는 그의 말에서 희망을 찾았다.

“저, 사실 제가 사장님께 드리지 못한 말씀이 있습니다.”

“네 말씀해 보세요.”

“제가 목판을 읽고 싶은 건 단지 주역사전의 내용을 알고 싶어서가 아닙니다.”

“그래요?”

인쇄본을 찾느라 책장을 뒤적이던 노인은 손을 내려놓고 나를 쳐다봤다.

“제가 목판을 읽고 싶은 건, 새겨진 내용도 내용이지만, 유물로서의 가치도 훌륭하기 때문입니다.”

“음, 그런가요?”

‘휴, 이러다가 괜히 미움만 사는 건 아닌지 모르겠어.’

노인은 짐짓 놀라는 표정을 지으며 반응했지만,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것을 보니 영 못마땅한 눈치였다.

“제가 어린 나이임에도 고서와 유물에 관심을 갖게 된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습니다. 저에게는 고서를 해독할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이 있거든요.”

“그 능력이라면 방금 주역사전을 통해 보여 준 것으로 아는데요?”

“주역사전은 다산 정약용 선생님이 지으신 것으로 한학에 일가견이 있으신 분이면 누구나 읽을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고려 시대나 신라 시대의 문헌을 읽을 수 있다고 하면 믿을 수 있겠습니까?”

“설마 지금 학생께서 그게 가능하다고 주장하시고 싶으신 겁니까?”

노 사장은 눈을 가늘게 뜨며 질문을 던졌다.

“예, 그렇습니다. 만약에 서점 안의 어떤 고서를 저에게 보여 주시더라도 해석을 할 자신이 있습니다.”

자동 번역 기능은 현대 언어에만 국한돼서 능력을 발휘하는 게 아니었기 때문에 연대가 오래된 언어라도 해석하는 데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

“흠, 그러면 잠깐 기다려 보세요.”

“네, 알겠습니다.”

그는 대답을 들음과 동시에 사무실 안에 배치된 금고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건 뭐예요?”

할아버지께서는 금고에 있던 기다란 비단 주머니를 꺼낸 뒤 책상에 올려놓으셨다.

“이건, 조선 시대에 인삼과 비단 장사를 하셨던 우리 조상님이 중국에서 구해 오신 겁니다. 만약 이걸 읽으실 수 있으면 방금 하신 말씀이 거짓이 아님이 입증될 겁니다.”

“저, 그럼 지금 바로 읽어 봐도 되겠습니까?”

나는 할아버지께서 고개를 끄덕이시는 것을 확인하고는 비단 주머니를 열어 오래된 종이 하나를 꺼냈다.

‘어휴, 떨려 죽겠네.’

조선 시대에 유통되었던 것인 만큼, 한 치의 손상도 허용되지 않았기에 꺼내는 손길이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무슨 글인지 감이 오십니까?”

“네, 이 종이에는 최치원 선생님께서 고국인 신라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시의 형식으로 절절히 적혀져 있습니다.”

“오, 그리고요.”

“그리고 맨 아래쪽에 적힌 이름을 보니 왕유필이라는 분께서 최치원 선생님의 글을 대필하셨다고 써 있네요.”

탁-

“할아버지, 갑자기 왜 그러세요?”

나는 책상을 치고 일어나는 할아버지의 모습에 어안이 벙벙해졌다.

“최치원 선생님께서는 통일 신라 시대의 인물로 당시 통치국이었던 당나라에 유학을 가서 관리까지 되셨던 분입니다. 그분의 글솜씨가 어찌나 유명한지, 당시 반란군 수장이었던 황소에게 썼던 토황소격문은 중국 사람들 사이에서도 명문으로 꼽히지요.”

“예, 학교에서 선생님께 들은 적이 있는 것 같습니다.”

“최치원 선생님께서 활동했던 시기가 통일 신라와 당나라가 있던 시기라면 이 글이 쓰인 지가 1200년 이상은 됐다는 말입니다. 이건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학생의 나이는 고작 10대 후반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데, 고대 언어를 읽을 수 있다니요.”

할아버지는 상기된 얼굴로 열변을 토하셨다.

“제 능력을 높게 평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당연하지요. 현재 학계의 저명한 인사들도 삼국 시대의 문헌을 학생처럼 물 흐르듯이 해석하실 수 있는 분은 아마 없을 겁니다.”

‘말씀을 들어 보니 이야기가 더 쉬워지겠어.’

나는 사장님의 말씀을 듣고 생각을 정리한 뒤, 입을 열었다.

“바로 그 부분 때문에 제가 속마음을 털어놓기가 어려웠던 것 같습니다.”

“네? 그건 또 무슨…….”

“옛 언어를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을 공개하게 되면 제 인생이 피곤해질 것 같은 예감이 들었거든요.”

“하긴, 그렇게 귀한 능력을 갖고 계신 것을 세상 사람들이 알게 된다면 언론, 학계 등 곳곳에서 학생을 가만두지 않았을 겁니다.”

노인은 이해가 간다는 표정을 지으며 격하게 공감했다.

‘나를 보는 눈빛이 확실히 달라지셨어.’

거짓말을 한 게 걸리긴 했지만, 처음부터 허심탄회하게 말하지 못한 이유를 말씀드린 이후로 사장님의 마음속에는 신뢰가 싹트고 계셨다.

나는 현자의 눈으로 할아버지의 심리 상태를 파악한 뒤 쐐기를 박았다.

“저, 이만하면 목판을 열람할 자격을 얻었다고 해도 될까요?”

“하하, 물론입니다. 편하실 때 언제든지 와서 읽으세요.”

할아버지는 자신만만한 내 모습에 웃음을 터뜨리셨다.

“그럼, 오늘 밤새도록 이곳에서 목판을 읽어도 될까요? 제가 학교도 가야 하고 이런저런 할 일이 많아서 다른 날에 오기는 어렵거든요.”

“부모님의 허락만 받으면 전 괜찮습니다.”

“감사합니다, 지금 바로 부모님께 전화를 드리겠습니다.”

나는 할아버지께 꾸벅 인사를 한 뒤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는 헌책방에 하루 머물고 오겠다는 아들이 걱정되어 처음에는 집에 돌아오라고 만류했지만, 할아버지와 안부 인사를 나눈 뒤에야 안심이 되셨는지 마침내 허락을 하셨다.

“사장님이 잘 말씀해 주셔서 여기 머물 수 있게 되었네요.”

“어머니가 학생을 많이 믿으니까 가능했던 일입니다.”

노인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저, 그런데 사장님은 종이에 적힌 내용을 어떻게 아신 거예요?”

할아버지는 1200년 전에 쓰인 문장들의 내용을 모두 알고 계신 것처럼 보였다.

“아, 그게 부친께서 가보를 저에게 물려주시면서 유래와 그 의미를…….”

이후, 우리는 다양한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었고 할아버지는 자정이 다 돼서야 집으로 돌아가셨다.

‘후우, 사장님이 돌아오시기 전에 다 읽으려면 서둘러야겠어.’

나는 서점 문을 잠근 뒤, 사무실로 돌아와 목판을 꺼내 읽기 시작했다.

* * *

‘으윽, 끝이다.’

마지막 목판을 끝으로 주역사전을 완독했다.

나는 기지개를 켠 뒤, 목판을 집어 원래 있던 자리에 갖다 놓았다.

<아르마이스의 의지가 발동되었습니다.>

<미션이 완료되었음을 알려 드립니다.>

<보상: 통찰력 LV UP.>

<보상을 받으시겠습니까? Y/N>

‘받을게.’

내 생각을 읽은 시스템은 곧바로 보상을 적용했고 얼마 있지 않아 화면에서는 밝은 빛이 쏟아졌다.

<통찰력이 LV 6을 달성함에 따라 현자의 눈에 새로운 기능을 추가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바로 추가해 줘.’

어드바이저가 말하는 새로운 기능은 일전에 언급됐던 디텍션을 의미했다.

<사용자의 요청에 따라 업데이트 작업을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작업 진행률

25%…… 60%…… 95%…….

잠시 후, 업데이트 작업이 완료됐다는 표시가 떴다.

‘디텍션 기능은 어떻게 사용하는 거지?’

<디텍션은 자동 번역 기능과 똑같은 메커니즘으로 작동이 됩니다.>

나는 새로운 기능을 시험해 보기에 앞서 사용법을 제대로 숙지하려 했다.

‘자세히 말해 봐.’

<사용자께서 특정 아이템을 찾고자 마음을 먹으시면 디텍션 기능이 자동으로 활성화되어 해당 물건의 위치를 알려 드립니다.>

‘이거라면 책을 찾는 건 식은 죽 먹기겠는데?’

<하지만, 이 기능이 만능은 아닙니다.>

‘그래?’

<디텍션의 수색 범위는 사용자의 통찰력 수준에 맞춰 설정됩니다. 현재 레벨로 수색 가능한 최대 범위는 10m이니 참고하시길 바랍니다.>

디텍션은 다른 기능과 마찬가지로 제약 사항은 갖고 있었다.

‘통찰력 레벨을 올리면 기능 효율이 더 좋아지는 방식이구나. 그래도 10m면 나쁘지 않은 수치야. 어떤 방식으로 작동이 되는지 확인을 해 볼까? 응, 사장님이 벌써 오셨나?’

드르륵-

“오셨어요?”

나는 서점 문을 열고 영업 준비를 하시는 사장님께 다가가 인사를 드렸다.

“잠자리가 불편하진 않았나요?”

사무실 안쪽에는 할아버지가 낮잠을 잘 때 쓰는 접이식 침대가 있었다.

“밤새 목판을 읽느라 잠을 못 잤습니다.”

“그러다 괜히 몸이라도 상하면 어쩌려고요.”

“대신 부지런히 읽은 덕분에, 주역사전을 완독할 수 있었습니다.”

“허허, 정말 대단하십니다.”

노인은 너털웃음을 지으며 감탄했다.

“목판을 읽을 수 있게 해 주셔서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다 인연이 돼서 가능했던 거지요. 하여튼 여유가 되면 언제든지 들리세요.”

“거리에 있는 다른 서점들을 더 둘러볼 거라 좀 있다가 또 올 수도 있어요.”

“네, 쭉 둘러보다가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 오세요.”

할아버지는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후, 나는 사장님과 담소를 짧게 나눈 뒤, 서점을 빠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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