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 25화 헌책방 거리 (3)
오전 10시.
헌책방 사장님들은 영업 준비를 위해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셔터를 올리는 분, 서점 안에 쌓인 책들을 판매대에 옮기는 분까지 사장님들은 손님맞이를 위한 준비로 한창이었다.
‘이런 식으로 작동이 되는구나.’
디텍션을 실행하자 내 몸을 중심으로 파란색의 둥근 원이 형성되었다.
원의 넓이는 어드바이저가 말한 것처럼 반경 10m 달했다. 10m라는 숫자가 얼핏 들었을 때 작은 수치로 여길 수도 있으나 원의 크기는 상상 이상으로 컸다.
삐비빅- 삐비빅-
한 서점에 발을 들이자 아이템이 있다는 신호음이 내 귓가를 때렸다.
살짝 소음으로 느껴질 정도로 요란스러운 소리가 울려 퍼졌으나 사장님의 무표정한 얼굴을 보니 나 이외에는 아무도 듣지 못하는 것 같았다.
‘저쪽에 있네.’
신호음과 동시에 떠오른 화면은 내가 찾는 책이 정확히 어디 있는지 알려 주고 있었다.
게다가 아이템과 위치가 가까워질수록 신호음이 점점 커졌기에 책을 찾는 데 큰 어려움이 없었다.
“그 책이 뭔지는 알고 고른 거야?”
사장님은 판매대에 놓인 두꺼운 책을 보며 물었다.
책 제목은 영어로 쓰인 데다가 관리가 안 된 탓에 먼지가 가득 쌓인 상태였다.
“아니요. 그냥 영어 공부 좀 하고 싶어서 골랐어요.”
“그래? 옛날에 미군이 와서 팔고 간 책인데, 어떤 내용인지 궁금해서 물었어. 가격은 음, 만오천 원만 내.”
“예, 잠시만요.”
헌책방에서 만오천 원이면 상당히 비싼 가격이었으나 책의 가치를 아는 나에게는 오히려 횡재처럼 느껴졌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서적이 동대문 헌책방 거리에 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 못 했어. 다산 정약용 선생님의 제자가 새긴 목판도 그렇고 참 신기하다.’
나는 종이가방에 책을 넣으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이후에도 디텍션을 켠 상태로 거리를 돌아다니며 미션 수행에 필요한 책들을 탐색했고 목록에 적힌 모든 책들을 구하기까지 채 30분이 걸리지 않았다.
‘디텍션 기능이 없었으면 하루를 책을 찾는 데 보냈을 거야.’
내가 원하는 아이템이 어디에 위치해 있는지 정확히 짚어 주는 디텍션이 없었다면 거리에 있는 모든 서점과 책들을 헤집고 다녀야 했을 것이다.
기능이 주는 편리함에 감사해하며 안도를 하던 그때, 어드바이저가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사용자님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어? 네가 나한테 먼저 말을 걸 때도 다 있네?’
어드바이저는 사용자인 내가 궁금해하는 사안이 있거나 질문을 먼저 던질 때 활성화되는 기능인데, 지금 나는 현 상황에 만족을 느낄 뿐, 원하는 거나 알고 싶은 게 없었다.
‘말하고 싶은 게 뭔데?’
<사용자께서 현재 계시는 곳으로부터 영기가 깃든 아이템들이 느껴집니다.>
‘주역사전 목판처럼 범상치 않은 물건들이 있다는 거지? 그런데 그게 어쩐다는 거야?’
주역사전이야 미션 수행을 위해서 찾았다고 해도 다른 유물이나 고서들은 굳이 찾아 뭐 할까 싶었다.
<해당 아이템들이 사용자의 스탯을 향상시키는 데 도움을 줄 것으로 사료되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스탯이 그냥 오른다고?’
나는 어드바이저의 설명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렇습니다. 이전 보상도 원래는 경험치를 받는 것으로 끝나야 하지만, 목판을 읽음으로써 받은 경험치가 합산되어 LV UP으로 이어진 겁니다.>
‘미션 수행이나 훈련을 따로 하지 않아도 경험치를 얻을 수 있다니, 완전 짱이잖아!’
미션과 훈련을 수행하는데 따른 수고로움을 겪지 않고도 스탯을 올릴 수 있다는 말에 흥분을 감추기 어려웠다.
<현재 이곳에는 상서로운 기운을 가진 아이템들이 적지 않습니다. 사용자께서 마침 디텍션 기능을 개안했으니 잘 활용하시어 취하시길 바랍니다.>
‘오케이, 알겠어. 알려 줘서 고마워.’
션 교수님께서 하시는 작업은 빨라도 내일은 되어야 마무리되었기 때문에 오늘까지는 여유가 있는 편이었다.
어드바이저의 충고가 없었더라면 집에 돌아가 산 책들을 정독할 생각이었으나, 본격적인 공부는 가상공간에서 할 계획이어서 시간을 내는 데 아무런 부담이 되지 않았다.
‘이 근방에 내 스탯을 올려 줄 만한 아이템들이 있는지 알려 줘.’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책을 찾을 때 나타났던 푸른 원이 생성되었다.
삐비빅-삐비빅.
‘이쪽이다.’
나는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동안 스탯을 올리는 데 적지 않은 노력과 시간을 투자해서였을까, 헌책방에 들어가는 내 모습은 밤을 샌 사람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활기가 넘쳐 흘렀다.
* * *
시간은 흘러 저녁이 되었다.
“지연아, 7월부터 드라마 촬영 들어간다면서?”
“네, 조연이긴 해도 제법 비중 있는 역이어서 열심히 하려고요.”
“우리 딸, 엄청 잘나가네? 내가 연예 뉴스를 봤는데 아이돌 랭킹이라는 게 있더라? 거기서 네가…….”
지연이는 부모님과 거실에서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전, 할 게 있어서 먼저 들어갈게요.”
“오빠, 오랜만에 휴가 나와서 보는 건데, 좀 있다 들어가면 안 돼?”
“미안해, 지연아. 어제랑 오늘 이틀간 소설을 하나도 못 써서 일을 해야 할 것 같아.”
“그럼, 어쩔 수 없지. 대신 일 끝나면 나와.”
동생은 서운한 마음을 애써 감추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알겠어. 금방 쓰고 올 테니까 티비 보고 있어.”
나는 지연이에게 다시 오겠다 약속을 한 뒤 방으로 들어왔다.
‘좋아, 이건 1시간 정도 빠짝 집중하면 읽을 수 있겠어.’
헌책방 거리에서 구한 아이템은 총 3개로 모두 연대가 오래된 고서였다.
3개의 고서 중 내가 고른 건 조선 시대 교육 기관인 성균관의 최고 책임직 대사성을 지냈던 사람이 쓴 일기였다.
일기는 1900년대 초반에 쓰였던 거라 비교적 상태가 괜찮은 편이었고 일반적인 고서들과 달리 서양식 종이에 기록이 되어 있었다.
따라서 사장님은 이 고서를 그저 오래된 책 정도로 취급했고 비교적 싼 가격에 획득할 수 있었다.
‘대사성은 이미 나라가 망할 거라고 확신하고 있잖아?’
일기가 쓰인 시점은 1900년으로 경술국치까지 10년이 남았으나 글쓴이는 국운이 회복 불가할 정도로 기울어졌음을 깨달은 상태였다.
고종은 강제로 나라를 개국한 후, 조선에서 대한제국으로 국명을 개칭하며 새로운 시대를 맞을 준비를 했고 이에 나라의 근간이던 유학자들의 힘은 쇠약해져만 갔다.
‘재밌다.’
조선 최고의 교육 기관이자 학문의 요람이었던 성균관이 시시각각 급변하는 정세에 맞춰 몰락해 가는 과정이 상세히 적혀 있었다.
그리고 이를 바라보는 대사성의 심정이 구구절절이 쓰여 있어 보는 이로 하여금 실제 그 시대를 산 것 같은 기분을 느끼게 해 주었다.
‘경술국치 이후로는 일기를 쓰지 않았던 걸까? 이분은 어떻게 되셨을까?’
짧게는 한 달, 길게는 6개월 단위로 쓰인 일기는 성균관이 철폐되어 비탄하는 내용을 끝으로 막을 내렸다.
나는 곧바로 일기를 덮지 않고 대사성의 마음을 헤아리며 한동안 여운에 잠겨 있었다.
‘보상이 주어지려나 보네.’
잠시 후, 시스템이 활성화되면서 화면이 눈앞에 떠올랐다.
<아르마이스의 의지가 발동되었습니다.>
<사용자의 스탯에서 변화가 감지됩니다.>
<아이템으로 인해 필력 경험치가 50% 상승합니다.>
<필력 레벨이 올랐습니다.>
<확인해 보시겠습니까?>
‘응.’
내가 대답을 함과 동시에 스탯이 표시된 창이 생성되었다.
‘LV 6이면 나쁘지 않네.’
1시간 투자로 스탯 레벨을 올린 기쁨에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일기를 읽고 필력이 오른 이유가 뭐야?’
나는 어드바이저에게 필력 경험치를 받은 연유를 물어봤다.
<아이템은 어떻게 제조됐느냐에 따라 특유의 성질을 띠기 마련입니다. 일전에 주역사전 목판을 읽은 대가로 통찰력이 주어졌던 걸 생각하면 쉽게 이해가 가실 겁니다.>
주역은 고대 사람들이 점을 치기 위해 고안한 학문으로 공자에 의해 유교의 근본 경전인 사서삼경 중 하나로 인정을 받았다.
역경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주역은 단순히 길흉 판단하는 것을 넘어 상황에 대한 분석, 그리고 이에 따른 행동지침까지 줄 수 있기에 통찰력과 연관이 있다고 볼 수 있었다.
‘주역사전을 읽고 통찰력이 오른 건 이해가 가지만, 일기를 읽고 필력이 오르는 건 연결이 잘 안되는데?’
<사용자님께서 읽은 아이템을 분석한 결과 일기를 쓴 저자의 문장력이 굉장히 뛰어나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맞는 말이야. 글이 어찌나 잘 읽히던지 이런 식으로 소설을 쓰면 대박이 날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어.’
나는 일기 속 문장을 떠올리며 어드바이저의 말에 공감했다.
성균관 최고 책임자인 대사성으로 임명됐다는 것은 나라에서 으뜸가는 학자임을 의미했고 현실로 치면 국내 제일 명문대인 한국대학 총장과 동격인 존재였다.
비록 일기 형식으로 쓰여 격조가 살짝 떨어질 수는 있으나 당대 최고의 학자인 만큼, 필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고서를 더 읽고 싶은데 그랬다가는 지연이에게 한 소리 듣겠지?’
아이템의 효능을 목격한 나는 앉은 자리에서 남은 고서를 완독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오빠, 엄마가 나와서 과일 먹으래.”
“응, 알겠어.”
종이 가방 안에 든 고서를 뺄까 말까 고민하던 그때, 여동생의 목소리가 거실에서 들려왔다.
난 자리에서 일어나 가족이 있는 거실로 나갔다.
* * *
밤 12시.
‘한두 시간만 있다 오려고 했는데, 예상보다 늦어졌네.’
지연이가 스마트 티비로 영화를 보자고 조르는 바람에 자정이 다 돼서야 방에 돌아올 수 있었다.
나는 방에 들어오자마자 미션 수행에 필요한 책들과 남은 고서 그리고 특별반 선발 시험 공부에 필요한 수험서까지 모두 꺼내 놓았다.
‘아카이브.’
내가 생각을 함과 동시에 두꺼운 책 형태를 띤 아카이브가 책상 위에 생성되었다.
‘여기 있는 책들을 모두 스캔해.’
<사용자의 지시에 따라 스캔 모드가 실행됩니다.>
<현재 아카이브가 인식한 책의 개수는 총 29권입니다.>
<개수를 확인해 주시고 맞으면 Y 버튼을 눌러 주십시오.>
나는 시스템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Y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아카이브에서 푸른빛이 쏟아지더니 앞에 있는 책부터 스캔에 들어갔다.
일루션의 스캔 모드는 상대의 전투 스탯을 분석, 수집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면, 아카이브의 스캔 모드는 현실 세계의 텍스트를 데이터 형태로 전환하여 아카이브로 옮기는 역할을 했다.
‘스캔하는 동안 웹소설 좀 써야겠다.’
작업 속도를 보니 스캔이 완료되려면 족히 30분 이상은 소요될 듯했다.
가만히 서서 멍하니 있는 것보다 뭐라도 하면서 기다려야 지루하지 않은 법이다.
나는 향상된 필력도 확인해 볼 겸 컴퓨터를 켜고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글 쓰는 속도가 더 빨라진 것 같아.’
작가가 글을 빨리 쓰기 위해서 에피소드를 구상하는 능력이 제일 중요하지만, 머릿속 생각을 글로 옮기는 능력도 못지않게 중요했다.
필력은 이 두 능력 중, 후자와 관련이 있었는데, 내가 느낀 바로는 필력이 향상될 때마다 문장의 질만 좋아지는 것이 아니라 관념을 언어로 표현하는 속도도 빨라졌다.
나는 향상된 필력을 바탕으로 쉼 없이 키보드를 두들겼고 그 결과 20분 남짓한 시간 만에 1화 분량의 소설을 쓰는 데 성공했다.
‘하루에 1시간만 투자해도 작품 연재에 아무런 지장이 없겠어.’
내가 현재 연재하고 있는 작품은 총 3개였는데, 한 화를 쓰는 데 걸리는 시간이 20분에 불과하니 1시간만 집중하면 연재 분량을 모두 채울 수 있다는 계산이 나왔다.
‘어? 갑자기 뭐지?’
발전된 능력을 확인하고 기뻐하던 그때, 허공에 화면이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