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 26화 프로 (1)
<제국 연구소에서 메시지가 도착했습니다.>
<확인해 보시겠습니까?>
‘확인할게.’
내 대답을 들은 시스템은 전달받은 메시지를 화면에 띄웠다.
<아르마이스 님. 연동 작업을 방금 막 완료했습니다. 지금부터는 아공간에서 아카이브에 저장된 자료를 열람하실 수 있으니 참고하시길 바랍니다. -션 다이스 교수->
‘감사합니다. 교수님.’
비록 화상으로 대화를 나누는 것은 아니라 직접 표현할 수는 없었으나 마음속으로나마 감사의 뜻을 표했다.
<사용자님이 지시한 작업을 모두 완료했습니다.>
우연의 일치였을까, 션 다이스 교수의 메시지를 읽은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스캔 작업도 마무리되었다.
‘일단 아이템들을 먼저 읽어야겠다.’
10권 이상 읽어야 보상을 받는 미션과 달리 적은 시간 투자만으로도 스탯을 올릴 수 있었기에 남은 고서를 1순위로 삼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사용자님께 아이템 관련하여 알려 드릴 게 있습니다.>
‘뭐지?’
침대에 누워 일루션을 실행시키려던 그 순간, 어드바이저는 알려 줄 게 있다며 말을 걸어왔다.
<스캔 기능은 아이템에 깃든 기운까지는 복사하지 못합니다. 즉, 데이터 형태로 존재하는 고서는 오래된 책에 불과하다는 뜻이지요.>
‘휴우, 하마터면 괜히 시간만 낭비할 뻔했잖아? 알겠어.’
나는 어드바이저를 종료하고 책상에 앉아 고서를 읽기 시작했다.
두 권의 고서는 앞선 일기와 달리 분량이 상당히 많았기 때문에 한두 시간으로 완독이 어려운 책들이었다.
그러나 고서를 먼저 읽어 두기만 하면 그 뒤로는 아공간에서 작업을 할 수 있었기에 시간에 쫓기는 기분은 들지 않았다.
‘양을 보니 일찍 자는 건 그른 것 같아.’
고서 읽기는 새벽이 다 끝나갈 때까지 계속됐고 아침 해가 떠오르는 것을 본 뒤에야 잠에 들 수 있었다.
* * *
아침 10시.
나는 하나 남은 고서를 열심히 읽고 있었다.
‘조선 시대의 수학이 이 정도로 발전했을 줄은 상상도 못 했어.’
‘무명’이란 제목을 가진 고서는 조선 시대에 영의정을 9번이나 역임했던 최석정 선생의 제자가 쓴 책이었다.
최석정은 황희 정승보다 더 오래 정승직을 유지했던 인물로 유명했지만, 조선 최고의 수학자로도 그 명성이 자자했다.
그는 독일의 저명한 수학자 크리스토퍼 클라비우스의 서적을 한문으로 번역한 동문산지를 통해 서양 수학에 눈을 뜨게 되었고 재임 중에도 연구를 계속하여 기존의 마방진과 차별화된 직교라틴방진을 발견했다.
이는 18세기 유럽의 최고 수학자 오일러보다 50년 이상 빠른 것으로 체계적인 수학 교육이 이루어지지 않았던 조선에서 발견됐다는 건 정말 대단한 일이었다.
‘이렇게 훌륭한 책을 출판하지도 못해서 참 아쉬웠겠어.’
최석정 문하의 제자였던 저자는 스승이 돌아가신 후에도 수학 연구를 지속했고 그 결과 자신이 배웠던 모든 이론을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유학이 숭상되던 조선 시대에 수학과 과학 서적은 높은 평가를 받지 못했고 그가 평생에 걸쳐 만든 역작은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 동대문의 한 헌책방으로 흘러 들어간 것이다.
<사용자의 스탯에 변화가 감지되었습니다.>
<확인하시겠습니까? Y/N>
“응.”
부모님은 지연이를 회사 숙소로 데려다주기 위해 밖에 나가 계셨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시스템과 대화를 나누어도 무방한 상황이었다.
<고서를 읽은 대가로 지능 경험치가 50% 상승했습니다.>
<경험치 상승으로 인해 스탯 레벨이 변동되었습니다.>
<지능 스탯이 LV 4에서 LV 5로 향상되었습니다.>
“훗, 대박인데?”
나는 레벨이 올랐다는 시스템의 설명에 쾌재를 불렀다.
나에게는 논리학 서적을 읽어야 하는 미션이 있었는데, 보상으로 지능 스탯의 레벨이 오르기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 와중에 고서로 스탯 레벨이 올랐으니, 나중에 보상을 받으면 LV 6을 찍을 수 있다는 말이었다.
게다가 스탯 레벨은 오르면 오를수록 경험치를 쌓는 게 어려워지기에 기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고서도 다 읽었으니까 일루션을 실행해 볼까?’
나는 고서를 책장에 잘 꽂아 놓은 뒤, 침대에 누웠다.
<아르마이스의 의지가 발동되었습니다.>
<사용자의 요청에 따라 일루션이 실행됩니다.>
시스템이 일루션을 작동시키자 번쩍하는 빛과 함께 암전이 발생했다.
그리고 얼마 있지 않아 아공간이 눈앞에 펼쳐졌다.
‘아카이브.’
아공간에 접속한 것을 확인한 나는 연동 작업이 잘되었는지 확인하기 위해 아카이브를 실행시켰다.
‘스캔은 문제없이 된 것 같네.’
나는 도서 목록을 연 다음 저장된 파일들을 하나하나 확인했다.
헌책방 거리에서 구한 논리학 도서부터 시험 공부를 위한 수험 서적까지 책들은 온전한 형태로 아카이브에 저장된 상태였다.
‘시험은 상대 평가고 출제 방식은 수능과 똑같다고 그랬나?’
특별반 선발 고사의 시험 범위와 과목은 수능과 동일했다.
마지막으로 본 모의고사에서 내가 거둔 성적은 평균 3.3등급이었다.
공부를 하나도 안 한 것을 고려하면 괜찮은 성적으로 볼 수 있었지만, 고2 학생들이 보는 시험이라는 점과 자동 번역 기능으로 외국어 점수를 베이스로 깔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가야 할 길이 멀다고 볼 수 있었다.
그리고 학교 측에서는 수능 형식으로 선발 시험을 치르는 게 고등학교 2학년에게는 큰 부담이라는 것을 잘 알았다.
따라서 선발 방식을 등수 안에만 들면 되는 상대 평가로 정했다.
‘우선 미션을 먼저 처리하고 공부를 하는 편이 좋겠어.’
보통의 학생이라면 시험이 한 달 남은 상황에서 다른 것을 먼저 처리할 엄두를 내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나의 경우는 조금 달랐다.
미션을 통해서 스탯 레벨을 먼저 올리는 게 학습 효율 면에서 훨씬 나았기 때문이다.
“테이블이랑 의자 좀 세팅해 줘.”
<알겠습니다.>
평소에 가상 스파링이 벌어지던 무대 위에 고급 목재로 만들어진 책상과 의자가 생성되었다.
나는 시스템이 만든 의자에 앉아 서적들을 읽어 나갔다.
* * *
시간은 흘러 7월이 되었다.
올해는 예년보다 장마가 일찍 왔었다.
6월 중순부터 말까지 10여 일간 내렸던 비는 7월이 되자 말끔히 개더니 찌는 듯한 무더위가 시작되었다.
“야, 날씨가 왜 이렇게 덥냐?”
백성철 관장은 타는 듯한 더위에 손으로 부채질을 하며 차를 운전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에어컨을 켜자니까요.”
나는 창문을 뚫고 들어오는 뜨거운 태양 빛을 맞으며 볼멘소리를 냈다.
“에어컨 켜면 기름이 빨리 떨어져서 안 돼.”
“이러다가 프로 테스트라도 떨어지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요. 사랑하는 제자, 컨디션 관리할 수 있게 좀 도와주세요.”
오늘은 KBW에서 주관하는 프로 테스트가 있는 날이었다.
KBW는 세계 챔피언을 역임했던 선수들을 중심으로 설립된 신흥 단체로 한국 복싱의 세계화를 최우선 목적으로 하는 곳이었다.
WBA, WBC와 같은 국제 복싱 기구와 동일한 체급 기준을 적용하는 건 기본이고 국내 챔피언들의 해외 진출을 돕기 위해 유명한 에이전시들과 MOU도 맺었다.
게다가 얼마 전까지 현역으로 뛰던 챔피언들이 중심이 되어 만든 단체인 만큼, 선수들의 권리도 철저히 보호해 주는 편이라 기여금 명목으로 대전비를 떼 가는 행위는 절대 하지 않았다.
“아시안 게임에서 금메달 땄던 놈이 프로 테스트 하나 합격 못 하면 그게 말이 되냐? 그건 그렇고 체중 관리는 잘했어?”
“어차피 유지만 하면 됐는데 관리랄 게 있겠어요.”
“한 체급만 더 늘리자니까 왜 이렇게 말을 안 듣냐?”
백성철 관장님은 룸미러로 나를 쳐다보며 물었다.
그는 체급 내에서 장신에 해당하는 제자가 과도한 체중 감량으로 경쟁력을 잃을까 염려했다.
“그래도 명칭은 슈퍼웰터급으로 바뀌었잖아요. 그냥 계속하던 체급이 편해서 그런 거니까 이해해 주세요.”
아마추어 웰터급은 프로에선 슈퍼웰터급과 동일했다.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욕 얻어먹겠지?’
내가 슈퍼웰터급을 선택한 이유는 여러 체급을 석권하기 위해서였다.
흔히 위대한 선수라 불리는 사람들을 보면 보통의 챔피언들과는 차별되는 특징들이 있다.
높은 KO율, 무패 챔피언, 다 체급 석권, 통합 타이틀 획득 등이 바로 그것인데, 이와 같은 수식어가 챔피언에게 따라붙게 되면 파퀴아오나 타이슨처럼 레전드급 챔피언이 되는 것이었다.
“하여간 말은 잘해요.”
“저, 관장님.”
“왜?”
“테스트 끝나면 고기 사 주신다는 건 안 잊으셨죠?”
“참네, 라이선스는 이미 따 놓은 당상이다 이거지? 야, 그래도 명색이 P급 테스트인데 긴장 좀 해라.”
KBW는 프로 테스트를 P급과 A급 이렇게 두 가지로 분류했다.
A급 테스트는 다른 단체에서 진행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응시자들 간에 시합을 붙인 다음 기량을 평가한 후 라이선스를 부여한다.
P급 테스트는 시합이 치러진다는 면에서 A급 테스트와 같았지만, 상대가 현역 프로 복서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었다.
그리고 A급 테스트에는 주로 일반인들이 응시한다면 P급 테스트에는 나처럼 아마추어 대회에서 실력을 입증한 선수들이 응시했다.
“이번에 응시한 선수 중에 꽤 유명한 놈도 있더라.”
“김철민 선수 말씀하시는 거죠?”
김철민 선수는 서른둘이라는 적지 않은 나이로 프로 테스트에 응시했는데, 여기에는 나름의 사연이 있었다.
전국체전 6연패, 아시안 게임 금메달, 세계 선수권 금메달 등 화려한 이력을 가진 그는 복싱계의 저명한 인사들로부터 차세대 챔피언 소리를 수도 없이 들은 인재 중의 인재였다.
웬만한 아마추어 대회를 모두 석권한 김철민은 사람들의 기대 속에 프로로 전향했으나 거친 성미 탓에 폭력 사건에 자주 휘말려 결국 라이선스를 박탈당했다.
그러던 중, 신흥 단체인 KBW를 발견하게 되고 1년에 걸친 심의 끝에 간신히 도전 기회를 부여받은 상태였다.
“알다시피 P급 테스트에 통과할 수 있는 사람은 한 명뿐이라는 건 알고 있지?”
P급 테스트 합격자는 곧바로 상위 랭커와 대전을 치를 수 있는 특혜가 있기에 인원을 제한할 필요가 있었다.
“경우에 따라서 김철민 선수랑 붙을 수도 있다는 말씀을 하고 싶으신 거죠?”
“이번에 떨어지면 6개월을 더 기다려야 되니까 최선을 다해라.”
합격자 선정은 현역 선수와 시합을 치른 후 심사 위원 채점으로 이루어지는데, 동점 상황이 발생한 경우에는 추가 시합을 통해 동점자 간의 우열을 가렸다.
“네, 관장님.”
나는 장난기 어린 표정을 거두고 진지하게 대답했다.
잠시 후, 강남역에 인근에 위치한 국제 프로 짐에 도착했다.
국제 프로 짐은 KBW의 임원이 운영했는데, 프로 테스트를 하기 위한 장소로 종종 이용되는 곳이었다.
“테스트에 앞서 계체량 측정이 있겠습니다. 응시자들은 순번에 맞춰 한 명씩 나와 주시길 바랍니다.”
사람들은 직원의 안내에 따라 부산스럽게 움직였다.
‘P급 테스트에 참여하는 프로 선수가 저 사람인가 보다.’
나는 심사 위원들 사이에 가만히 서 있는 남자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짧은 머리에 날카로운 눈매를 가진 그는 아시안 게임에 출전한 선수들 못지않은 스탯을 갖고 있었다.
“P급 테스트를 맡은 선수가 저 사람이래. 현재 국내 슈퍼웰터급 랭킹 2위고 타이틀 전 경험도 있데.”
관장님은 어느새 내 곁에 다가와 말을 걸었다.
“알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관장님은 어떻게 그런 정보를 다 아세요?”
“훗, 이 체육관을 운영하는 애가 나랑 아주 막역한 사이거든. 그건 그렇고 나는 저쪽에서 보고 있을 테니까 테스트 잘 받아라.”
“알겠습니다.”
그는 제자의 어깨를 두들기며 격려를 해 준 다음, 테스트가 이루어지는 링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얼마 있지 않아 계체량 측정이 이루어졌고 예상한 대로 무난하게 통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