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사람들이 자꾸만 보은한다-104화 (104/122)

104. 26화 프로 (2)

계체량 측정이 끝나고 테스트가 시작되었다.

대기하던 응시자들은 호명이 되면 링 위로 올라가 그동안 갈고닦았던 실력을 가감 없이 드러냈다.

‘여기서 기다리면 되겠다.’

체육관 한쪽에는 사람들이 앉을 수 있도록 철제 의자가 구비되어 있었다.

이번 테스트에 응시한 자들이 적지 않아 꽤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됨에도 불구하고 의자에 앉아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협회 관계자부터 응시자를 응원하러 온 지인들까지 링 주변에 서서 시합을 구경하고 있었다.

“선수님, 오랜만입니다.”

의자에 앉아 순서를 기다리고 있는데, 한 남자가 말을 걸어왔다.

고개를 돌려 얼굴을 확인하니 김현철 기자님이셨다.

“어, 기자님. 여기는 어쩐 일이세요?”

“선수님이 프로 테스트에 참가하신다는 소식을 듣고 취재를 하러 왔습니다.”

김현철 기자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평범한 프로 테스트일 뿐인데 건질 게 있을까요?”

“당장 타이틀 전을 치러도 무방할 선수가 둘이나 참여했는데, 그게 어떻게 평범한 프로 테스트 입니까?”

그가 말한 두 선수는 나와 김철민을 의미했다.

“지금 저기 서 있는 사람들 보이시죠.”

“네.”

“편한 차림으로 있어서 평범한 사람들처럼 보이지만, 다들 일선에서 일하는 기자들입니다.”

“김철민 선수와 제가 프로로 전향한다는 소식을 듣고 오신 거군요.”

나는 이제야 매스컴에서 이번 테스트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이해가 갔다.

“복싱계에서 인지도가 높은 두 분이 프로에 도전하는데 알고 보니 테스트 합격자는 한 명뿐이랍니다. 이거 제법 스토리가 되지 않겠습니까?”

“기자님 말씀을 들으니까 괜히 긴장되네요.”

프로 테스트에 사람들의 이목이 많이 쏠렸다고 생각하니 부담감이 약간 생겼다.

“준비하신 것만 잘 풀어내시면 승리는 문제없을 겁니다.”

“하하, 그러게요…….”

기자님께서 자상한 태도로 응원을 해 주셨지만, 귀국한 이래로 훈련을 하나도 하지 않은 상태라 민망한 기분이 들었다.

“아, 하마터면 깜빡할 뻔했네요. 먼저 이걸 받으시죠.”

“어? 회사를 옮기셨나요?”

나는 스포츠 성동이라 적힌 명함을 건네받고는 깜짝 놀라 물었다.

“성동일보 본부장이 허구한 날 자기네 회사로 와 달라고 하는 바람에 옮기게 되었습니다.”

서울 데일리에서 15년 이상 근무를 했기에 아쉬울 만도 했으나 얼굴에 화색이 가득한 걸 보니 옮긴 걸 내심 기뻐하는 듯 보였다.

“지역지에서 중앙지로 옮긴 거면 좋은 거 아닌가요?”

“하하, 안 그래도 주변 동기들이 부럽다고 난리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건 다 선수님 덕분입니다.”

“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기자님의 뜬금없는 말씀에 난 의아해하며 물었다.

“제가 선수님의 특집기사를 독점하는 바람에 여러 언론사에서 애가 많이 탔다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 점이 성동일보에서 저를 스카웃하게 된 결정적 이유였다고 들었습니다.”

“본의 아니게 않게 기자님을 도와드리게 됐네요.”

나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대중들에게 나를 알리기를 결심한 뒤로는, 들어오는 인터뷰를 거절하는 일은 드물었다.

아시안 게임 금메달을 획득한 이후 인터뷰 제의가 쏟아진 적이 있었는데, 사정상 사전에 질문을 받고 답변을 해 주는 형식을 취하거나 시간을 정해 전화로 인터뷰를 해야만 했다.

하지만 김현철 기자님만은 밖에서 따로 만나 심층 인터뷰를 하였는데, 이는 과거 무명 시절부터 친밀한 관계를 지속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제 곧 테스트를 치르셔야 하겠군요. 준비하시는데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어차피 잠깐 일어나려던 참이었습니다.”

이후, 기자님은 간단하게 대화를 나눈 뒤 취재를 하러 돌아갔다.

“와!”

‘무슨 일이지?’

갑자기 들리는 환호성 소리에 화장실을 가려던 발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봤다.

“이제까지 나온 사람들 중에 제일 잘하는 것 같은데?”

“너 김철민 선수 몰라? 아시아 게임이랑 세계 선수권 대회에서 1등 했던 사람이잖아.”

사람들은 김철민 선수가 현역 프로 선수와 시합을 하는 것을 보며 혀를 내두르고 있었다.

‘칼을 갈고 나왔네.’

나는 어느새 사람들 옆에 서서 시합을 관전하고 있었다.

김철민은 지난 수년간 복싱 경기에 뛰지 못했기에 옛날에 비해 실력이 떨어졌을 거라는 평가가 많았다.

그러나 세간의 평가와 달리 그는 날카로운 몸놀림을 보여 줬다.

물론 링을 떠난 세월이 짧지 않아서 옛 실력을 모두 회복하진 못했지만, 지난 몇 달간 절치부심하고 준비한 덕분에 전성기 때의 번뜩이는 움직임이 드문드문 이게나마 나오고 있었다.

“잠시 쉬었다가 이어 가도록 하겠습니다.”

“헉, 헉.”

프로 선수는 숨을 헐떡이며 체력을 충전하고 있었다.

김철민에 앞서 두 명의 응시자를 처리할 때만 해도 땀 한 방울도 나지 않던 그였다.

압도적인 실력 차로 인해 게임은 일방적으로 흘러갔고 실력 미달로 판단되면 심사 위원이 중도 탈락을 선언했기 때문에 체력을 세이브할 수 있었다.

그러나 김철민 선수와는 4라운드가 다되도록 승부를 내지 못해 상당히 지친 상태였다.

‘4라운드면 힘들 만하지.’

다른 협회의 경우 3분 2라운드의 프로 테스트 과정을 진행하는 데 반해 KBW P급 테스트는 3분 4라운드로 구성되어 있었다.

“시간이 애매해서 식사를 간단히 하고 테스트를 하겠습니다. A급 테스트를 치른 인원은 귀가하셔도 좋으니 참고하시길 바랍니다.”

프로 선수의 충분한 휴식을 위해 테스트는 점심 식사를 한 후에 재개되기로 했다.

복수의 합격자가 허용되는 A급 테스트 참가자들은 테스트 응시 후 귀가가 허락됐지만, P급 테스트 인원들은 동점자가 발생할 수도 있어서 대기해야 했다.

“진우야, 테스트를 곧 치러야 하니까 간단하게 먹자.”

“네, 안 그래도 주변 편의점에서 간단하게 먹으려고 했어요.”

나는 관장님의 말씀에 공감했다.

시합 직전에 음식물을 많이 섭취하는 것은 바보 같은 행동이었기 때문이다.

“여기 있어. 내가 사 올게.”

“아니에요. 같이 가요.”

“됐고 컨디션 관리나 잘해.”

나는 점심을 에너지바와 프로틴 음료로 대체했다.

“다음 응시자 올라오세요.”

드디어 내 차례가 되었다.

‘보는 눈도 많은데 쉽게 끝내면 안 되겠지?’

현자의 눈으로 파악한 현역 프로의 스탯은 모든 면에서 나에게 뒤처졌다.

따라서 마음만 먹는다면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현역 선수를 쓰러뜨릴 수도 있었다.

내가 만약 일방적으로 시합을 끝내면 대등한 경기를 펼쳤던 김철민 선수에 비해 더 우수한 결과를 셈이어서 합격은 따 놓은 당상이었겠지만, 기자들이 모인 이 기회를 허무하게 날리기는 싫었다.

“역시, 금메달리스트라 다르긴 다르구나.”

“강진우 선수가 프로 테스트를 본다는 게 말도 안 됐던 거지.”

“지금 당장 챔피언이랑 타이틀 전을 치러도 손색이 없겠어.”

사람들은 김철민 선수의 시합을 볼 때 그랬던 것처럼 나에게도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아까 김철민 선수랑 붙어도 볼 만하겠는데?”

“강진우 선수가 아무리 강해도 김철민 선수에게 되겠어? 세계 선수권은 아시안 게임이랑 급 자체가 다르다고.”

“그건 까 봐야 알 것 같은데? 솔직히 몸놀림은 강진우 선수가 더 좋았잖아.”

관중들은 금일 테스트에서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 준 나와 김철민 선수를 두고 설왕설래했다.

‘심사 위원들이 내 계획대로 움직여 줘야 할 텐데.’

나는 링에서 내려온 뒤 물을 마시며 심사 결과를 기다렸다.

이전 테스트들의 경우 결과가 나오기까지 5분이 채 걸리지 않았지만, 나에 관한 심사는 10분이 훌쩍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계속됐다.

“뭘 저렇게 꾸물거리는 거야?”

“P급 테스트는 합격자가 1명이라서 그런 거 아닐까?”

결과 발표가 지체됨에 따라 사람들이 점점 웅성거리고 있던 그때, 심사석에 있던 위원 하나가 마이크를 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강진우 씨를 마지막으로 원래 계획했던 테스트 과정이 모두 마무리되었습니다. 하지만, 채점 중 동점자가 나오는 바람에 위원님들끼리 잠시 의논하는 시간을 갖게 되었습니다.”

‘후우, 다행이다.’

처음부터 동점 상황을 만들려고 계획했었던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KBW의 규정에 의하면 P급 테스트에서 동점 상황이 발생한 경우 당사자들 간의 시합을 통해 최종 합격자를 선정하게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앞으로 30분간 휴식을 취한 뒤 매치를 열도록 하겠습니다. 동점자인 강진우 씨와 김철민 씨는 추가 시합에 동의하십니까?”

“동의합니다.”

“네, 하겠습니다.”

심사 위원의 물음에 나와 김철민은 거의 동시에 대답했다.

‘이게 웬 떡이야.’

‘시간을 내서 온 보람이 있네.’

추가 시합 결정을 두고 속으로 쾌재를 부르는 기자들이 적지 않았다.

테스트를 치른 소감이나 들으러 온 거였는데, 인지도 높은 선수들이 한판 붙는다고 하니 기뻐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진우야, 괜찮겠어? 김철민은 이름만 들었지 개인적인 친분도 없는 사이라 내가 아는 게 없다. 후우, 이럴 줄 알았으면 미리 대비를 했을 텐데……. 관장이라는 놈이 이런 모습 보여서 미안하다.”

백성철 관장의 얼굴에는 미안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는 제자의 실력이면 프로 테스트 정도는 쉽게 통과할 거라고 여겼고 사전 조사라곤 KBW 홈페이지에 들어가 테스트 규정을 살핀 게 전부였다.

“아니에요. 어차피 상대도 저에 대해서 잘 모를 거예요.”

“널 왜 모르겠냐? 언론사에서 네가 프로 전향을 한다고 기사를 얼마나 써 댔는데.”

기자들은 아시안 게임에서 금메달을 땄으니 다음 목표로 올림픽을 잡을 줄 알았던 내가 뜻밖에도 프로 진출을 선언하자 신이 나서 기사를 쏟아 낸 적이 있었다.

어린 나이에 프로 전향을 결정한 것도 화제였지만, 국제 무대에서 실력을 입증한 유망주가 과연 프로에서도 통할 수 있을지도 큰 관심사였다.

그리고 김현철 기자님의 인터뷰부터 세계 챔피언을 지냈던 선배들의 분석, 예측까지 다양한 형태의 기사가 작성된 만큼, 나에 관한 정보가 많이 노출되어 있었다.

즉, 김철민 선수는 내가 KBW 프로 테스트에 참가한다는 것을 알았음은 물론, 전력 분석까지 모두 끝마친 상태일 확률이 높다는 이야기였다.

“내가 저놈이라면 네 경기 영상을 모두 분석하고 철저히 준비하고 나왔을 거야. 그러니까 방심하지 말고 최선을 다할 생각해.”

“김철민 선수가 아시안게임 영상들을 분석해서 전략을 짜왔다면 승부는 그렇게 어렵지는 않을 겁니다.”

“참네, 뭘 믿고 저렇게 천하태평인지…….”

관장님은 태연하게 구는 나를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했다.

“지난 결승 때도 전력을 다한 게 아니라서 드리는 말씀이에요.”

“결승이면 토미야스랑 했던 시합 말이냐?”

“네, 물론 그때도 압도적인 실력 차이로 이기긴 했지만, 본 실력의 70퍼센트 정도만 발휘한 거였다고요.”

나는 조금 전 비아냥에 살짝 기분이 상했던 터라 웃음기 없이 진지하게 말했다.

“그럼 됐다. 가서 실력을 보여 주고 와.”

“그렇게 빨리 수긍을 하신다고요?”

“네가 허튼소리 하는 놈은 아니잖아. 여기서 편안하게 보고 있을 테니까 가서 후딱 끝내고 와라.”

그는 제자가 호언장담을 하고 나면 반드시 지킨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휴식을 마치고 테스트를 재개하도록 하겠습니다. 아까 호명됐던 응시자들은 글러브를 착용하고 링으로 올라와 주시길 바랍니다.”

일찌감치 준비를 해 두었던 나는 공지를 듣자마자 링으로 올라갔다.

“경기는 3분 4라운드로 진행됩니다. 이 외의 규칙과 주의해야 할 사항은 테스트 때와 동일하고요. 질문 있으십니까? 없으면 양 선수 코너로.”

할 말을 마친 심판은 코너에서 대기하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얼마 있지 않아 종소리와 함께 시합이 시작되었다.

땡-

꿀꺽-

제법 많은 사람이 관전하는 중이었지만, 침 넘어가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링 주변은 조용했다.

화려한 이력을 가진 양 선수의 격돌은 타이틀전 못지않은 긴장감을 자아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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