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사람들이 자꾸만 보은한다-105화 (105/122)

105. 26화 프로 (3)

나는 경기 개시를 알리는 벨 소리를 듣자마자 링 중앙을 점거했다.

‘어쭈, 이 자식 봐라.’

김철민 선수는 이런 나를 가소롭다는 듯 쳐다봤다.

링 중앙을 점거한다는 건, 상대와의 전면전을 피하지 않겠다는 뜻이었고 이는 본인의 역량이 상대에게 밀리지 않는다는 확신이 있을 때만 할 수 있었다.

인상적인 경기력으로 금메달을 땄다고는 하나 아시안 게임보다 훨씬 힘든 세계 선수권 대회에서 입상을 했던 그의 눈에는 어린아이의 치기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내가 몇 년 쉬어서 퇴물이 됐다고 해도 너 같은 애송이는 문제없어.’

김철민은 가드를 올린 후, 일말의 망설임 없이 나에게 대시했다.

나는 쏜살같이 다가오는 상대에게 거침없이 주먹을 휘둘렀다.

휙-휙-

서로의 거리 안에 들어온 우리는 치열하게 공방을 주고받았다.

내 선공을 간단하게 쳐 낸 김철민은 후속타를 날렸으나 동체 시력과 민첩성에서 우위에 있는 나를 맞히기는 역부족이었다.

퍼억-

드디어 시합 중 처음으로 유효타가 나왔다.

“으윽…….”

김철민 선수는 복부에 느껴지는 통증에 당황스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씨발, 배 한 대 얻어맞은 거 가지고 왜 이러지?’

그는 오늘 아침에 먹은 음식이 넘어올 것 같은 충동을 느꼈지만, 꾹 참으며 나를 노려봤다.

‘예상대로야.’

나는 통증을 견디지 못하고 인상을 찡그리고 있는 상대를 보며 생각했다.

김철민은 원체 뛰어난 선수였던 만큼, 3개월 정도만 준비해도 과거 실력의 7할 이상은 되찾을 수 있었다.

그리고 실제로 붙어 보니 모든 스탯이 나보다 떨어짐에도 불구하고 타고난 경기 센스가 좋아 어느 정도 대등한 경기를 펼치는 것을 보고 내심 감탄했다.

하지만, 목과 복부 단련처럼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는 훈련은 아직 미진했고 복부에 타격 한 방을 허용한 것으로 호흡이 올라온 것을 보면 체력적인 부분도 대비가 덜 된 것처럼 보였다.

“진우야, 뭐 해? 가서 빨리 끝내!”’

백성철 관장은 손가락으로 김철민 선수를 가리키며 외쳤다.

나는 관장님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상대에게 그대로 대시했다.

한편, 김철민 선수는 쓴웃음을 지으며 복잡미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샌님처럼 생겨서 약골인 줄 알았는데 제법이잖아?’

프로 선수와 테스트를 치를 때도 유효타를 몇 대 맞았지만, 시합하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반면에 지금 시합에서는 복부에만 딱 한 대를 맞았을 뿐인데, 다리에 힘이 쫙 풀리는 게 느껴졌다.

그는 내가 뻔히 다가오는 것이 보였으나 다리가 굳은 상태라 기민하게 대처하기 어려웠다.

‘에라, 모르겠다.’

김철민 선수는 가드로 얼굴을 가린 뒤 이를 꽉 깨물었다.

그리고 잠시 후 엄청난 연타가 그의 몸을 뒤덮었다.

퍽-퍽-퍽

대부분의 공격이 가드에 가로막혔지만, 주먹이 부딪힐 때마다 발생하는 커다란 타격음은 내 펀치력을 짐작하게 했다.

‘글러브에 돌이라도 넣었나, 왜 이렇게 아프지?’

김철민 선수는 양팔을 바삐 움직이며 펀치를 막는 데 심혈을 기울였고 덕분에 치명타는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레벨 6에 달하는 힘을 지닌 내 주먹을 단련이 덜 된 팔로 막아 내는 것은 역부족이었다.

시간이 점점 흐름에 따라 굳건했던 가드는 헐거워져 갔고 안면은 점점 노출되기 시작됐다.

땡-

‘아쉽다.’

회심의 일격을 꽂아 넣으려는 순간, 1라운드 종료를 알리는 종이 울렸다.

나는 아쉬운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코너로 돌아갔다.

“테스트 때는 실력이 비슷해 보였는데 막상 붙으니까 실력 차이가 상당하네.”

“이미 승부는 결정됐고 김철민 선수가 2라운드를 넘길 수 있을지가 관건인 것 같아.”

“옛날에는 강진우 선수보다 더 촉망받던 선수였는데, 세월이 참 야속하다.”

이제 막 1라운드가 끝났을 뿐인데, 기자들은 승부의 추가 이미 많이 기울어졌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 있지 않아 김철민 선수는 시합을 포기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저, 김철민 씨가 기권을 하시겠다고 합니다.”

“그래요? 흠, 알겠습니다.”

심판으로부터 상황을 전달받은 협회 임원은 마이크를 들고 자연스럽게 사회를 진행했다.

“잠시 안내 말씀드리겠습니다. 방금, 김철민 씨가 컨디션 난조를 이유로 기권을 하셨습니다. 따라서 이번 P급 테스트 최종 합격자는 강진우 선수입니다. 이상으로 예정되었던 일정이 모두 끝났습니다. 바쁘신 와중에도 귀한 걸음 해 주신 귀빈 여러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 인사를 드리며…….”

‘조금 더 멋지게 경기를 마무리 짓고 싶었는데…….’

테스트를 통과했음에도 불구하고 가슴 한 켠에 찜찜한 기분이 들었다.

부상을 당한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빨리 포기했을까?

모처럼 모인 기자들 앞에서 경기력을 뽐내고 싶던 나는 아쉬운 마음을 달래고 있었다.

“진우야, 수고했다. 이거 마셔라.”

관장님은 링에서 내려온 나에게 다가와 물병을 건넸다.

“감사합니다.”

“의심해서 미안하다. 아시안 게임 때 전력을 다 안 쏟았다는 말이 사실일 줄 누가 알았겠냐?”

그는 어깨를 으쓱하며 자신이 틀렸음을 시인했다.

“아니에요. 누구라도 다 관장님처럼 생각했을 거예요.”

“어쨌든 프로 테스트 통과 축하한다. 오늘 기분이다. 이 근처에 내가 잘 아는 고깃집이 있으니까 회식이나 하자.”

“고맙습니다…….”

“고맙다는 놈이 왜 이렇게 힘 알맹이가 없어?”

관장님은 승리를 거뒀음에도 별로 기뻐하지 않는 제자의 모습에 의아해했다.

“그냥 경기가 너무 맥없이 끝난 것 같아서요.”

“경기 내용이 어쨌든 통과했으면 된 거야. 그러니까 쓸데없는 것으로 고민하지 말고 기자들이랑 인터뷰할 준비나 해.”

“맞는 말씀이에요. 대중들한테는 프로 시합에서 어필하면 되니까 일희일비 안 해도 될 것 같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관장님의 말씀에 공감했다.

“풋, 기자님들한테 잘 보이고 싶었던 거야?”

“몸값을 높이려면 기사 한 줄이라도 실려야 되잖아요.”

관장님이 정곡을 찌르자 내 얼굴은 금세 빨개졌다.

“어차피 다 널 보러 오신 분들이니까 걱정하지 마라.”

“알겠습니다. 관장님, 저 잠시 화장실 좀 다녀올 테니까 기자님들이 찾으시면 말씀해 주세요.”

“휴우, 가끔 내가 네 관장인지 매니저인지 모르겠다니까? 나중에 챔피언 돼서 돈 많이 벌면 은혜 갚아야 된다.”

백성철 관장은 짜증 나는 척하며 넉살을 피웠다.

“훗, 당연하죠. 그럼 빨리 다녀올게요.”

나는 가볍게 웃은 뒤 화장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기자님이시네?’

볼 일을 마치고 나오니 김현철 기자님께서 나를 기다리고 계셨다.

“진우야, 기자님이 너랑 인터뷰가 가능한지 여쭤보시는데?”

관장님은 나와 기자님의 관계가 각별하다는 것을 고려하여 다른 사람들보다 먼저 인터뷰를 할 수 있게 안배해 놓았다.

“당연히 해 드려야지요.”

“김현철 기자님 외에 두 분 더 인터뷰를 받기로 했어. 나머지 분들은 아쉽지만, 전화나 메일로 문의를 드리라고 했고.”

“감사합니다, 관장님.”

내 대신에 일을 처리해 준 관장님께 감사한 마음을 표현했다.

“이거, 관장님께서 제자를 위해 매니저 역할도 해 주시는군요.”

김현철 기자는 이 광경을 흐뭇하게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크흠, 전 엄연히 선수를 훈련시키는 트레이너입니다. 그럼 다음에 뵙도록 하겠습니다. 진우야, 1층 카페에 있을 거니까 인터뷰 마치면 거기로 와.”

“예.”

백성철 관장은 매니저라는 말에 겸연쩍어하며 체육관을 떠났다.

그리고 잠시 후, 인터뷰가 시작되었다.

“프로 선수가 된 소감이 어떠십니까?”

“예측하지 못한 일들이 연달아 일어나서 그런가, 조금 얼떨떨합니다.”

나는 기자님의 물음에 차분히 대답했다.

한낱 프로 테스트장에 모여든 기자들부터 추가 시합에 상대 선수의 기권까지 일련의 상황들은 모두 내 예측 범위를 벗어나는 것들이었다.

“김철민 선수가 기권하실 줄은 몰랐나 보네요? 동료에게 듣기로 현재 몸 컨디션이 굉장히 안 좋다고 합니다.”

“전혀 눈치채지 못했습니다. 1라운드 끝날 때까지만 해도 투지가 살아 계셨거든요.”

“시합이 빨리 끝난 게 아쉬우셨나요?”

김현철 기자는 오랜 기자 생활을 하며 얻은 촉으로 내 감정을 읽어 냈다.

“기자님들에게 임펙트를 심어 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나는 김철민 선수와의 시합을 통해 인지도를 높이려던 계획을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했다.

“양 선수 모두 대중의 관심을 받는 선수이고 시합 영상도 곧 인터넷에 풀릴 예정이라 명경기가 나왔으면 꽤나 큰 이슈가 되었을 겁니다.”

“선배님 몸 상태가 안 좋으시다는데 어쩔 수 없죠.”

“하지만, 걱정하실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아까 다른 기자들과 인터뷰를 하는 걸 들었는데 오늘 저녁이나 내일쯤이면 복싱 커뮤니티가 선수님 이야기로 뜨거워질 것 같습니다.”

“김철민 선배님이 저를 언급하셨나 보네요.”

기자님의 말씀에 난 흥미를 드러냈다.

“그렇습니다. 기자 한 분이 진우 씨에 대해 평해 달라고 부탁하셨는데, 김철민 선수께서 아주 호의적으로 답변해 주셨습니다.”

“뭐라고 하셨는데요?”

“본인이 전성기 때의 실력을 찾아도 승부를 장담할 수 없다고 그랬습니다.”

김철민 선수의 전성기라면 세계 선수권 대회에서 우승했을 때를 말하는 것이었다.

세계 선수권은 각 나라의 최강자들이 모이는 자리로 난이도 면에서 올림픽과 거의 차이가 없는 대회였다.

“선배님께서 잘 말씀해 주신 덕분에 제 주가가 오르겠네요.”

“그렇습니다. 적어도 여기 있는 기자들은 선수님의 실력을 목격했으니 조만간 좋은 소식도 들릴 겁니다.”

“좋은 소식이요?”

“그건 두고 보면 아실 겁니다.”

김현철 기자는 내 물음에 답하는 것을 피하고 의미심장한 표정만 지을 뿐이었다.

“그럼 본격적으로 인터뷰를 진행하겠습니다. 아시안 게임이 끝나고 어떻게 지내셨습니까?”

“귀국한 뒤에는 학교로 돌아가서…….”

나는 기자님이 어떤 생각을 하고 계신지 궁금했지만, 더 묻지 않고 인터뷰에 집중했다.

* * *

프로 테스트를 마치고 1주일이 지났다.

‘드디어 끝났다.’

프란시스 베이컨의 서적을 마지막으로 논리학 고전들을 모두 완독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진즉 다 읽었어야 했지만, 내용이 어려워 예상보다 시간이 지체되었다.

<아르마이스의 의지가 발동되었습니다.>

<미션이 완료되었음을 알려 드립니다.>

<보상: 지능 LV UP>

<보상을 적용하시겠습니까? Y/N>

아카이브를 종료하기 무섭게 시스템이 활성화되었다.

나는 보상을 적용하겠다는 물음에 일말의 고민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화면에서 빛이 쏟아지더니 내 몸을 감싸 안았다.

“슬슬 시작해 볼까?”

그동안 꾸준히 스탯을 올린 덕분에 지능은 LV 6에 육박한 상태였다.

내가 복싱 스탯에서 LV 6을 찍은 이후로 아마추어 경기에서 적수를 찾기 어려워진 것을 감안하면 공부에 있어서도 괄목할 만한 발전이 있을 거라는 건 쉽게 예상할 수 있었다.

“문제나 한번 풀어 볼까? 책상 위에 필기구랑 메모할 것 좀 만들어 줘.”

며칠 전, 션 교수님에 의하여 시스템이 업데이트되면서 학습에 필요한 기능들이 추가되었다.

그 결과, 가상 공간 내에 칠판, 필기구, 종이 등과 같은 교구재를 생성할 수 있게 되었고 공부를 함에 있어 편리함을 갖출 수 있게 되었다.

<사용자의 요청에 따라 종이와 필기구를 생성합니다.>

‘바로 시작하자.’

나는 시스템이 만든 필기구를 손에 쥐고 문제를 풀어 나갔다.

“다했다.”

문제를 풀기 시작한 지 45분 만에 들고 있던 펜을 내려놓았다.

언어를 푸는 데 주어지는 시간이 80분인 것을 생각하면 엄청난 속도라고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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