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사람들이 자꾸만 보은한다-109화 (109/122)

109. 28화 시합은 만드는 거야 (3)

토요일이 되었다.

서울 종로에 위치한 KBW 사무실.

이곳에는 나와 조효종 선수의 기자 회견을 위해 기자들이 부산스럽게 움직이고 있었다.

“잠시 후면 곧 기자 회견이 시작될 예정이니 기자님들은 모두 착석해 주시길 바랍니다.”

사회는 협회장님의 요청에 의해 김현철 기자님이 진행하고 계셨다.

성동일보 소속인데 이래도 되나 싶어 여쭤보니 KBW 측에서 전담 기자로 위촉해 준 덕분에 회사에서도 별로 터치하지 않는다고 했다.

전담 기자가 되면 협회 측에서 공개되는 정보를 가장 빨리 입수할 수 있게 되어서 신문사 입장에서도 나쁠 게 없었기 때문이다.

“먼저 김우철 협회장님의 짧은 인사말이 있겠습니다.”

“안녕하십니까, KBW의 김우철입니다. 일단, 바쁘신 와중에도 자리에 참석하신 기자님들께 감사하다는 인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복싱은 국민들의 희로애락을 책임졌던 대중적인 스포츠였습니다. 하지만…….”

김우철 협회장은 예상보다 많은 기자들이 회견 자리에 온 것에 감격했는지 인사말을 다소 길게 하였다.

“다음으로 선수들 발언 시간이 있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챔피언이신 조효종 선수부터 말씀해 주십시오.”

“안녕하세요, 조효종입니다. 이번 타이틀 전은 침체된 복싱계를 부흥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비록 상대 선수인 강진우 선수가 중간 과정 없이 곧바로 타이틀전을 치르는 게 무리라고 생각하시는 분도 계시겠지만…….”

김현철 기자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조효종 선수는 마이크를 잡고 하고 싶은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나 역시도 그가 그랬던 것처럼 상투적인 언어로 발언을 마무리했다.

‘이런 큰일이다.’

마이크를 내려놓고 물을 마시던 중, 기자들의 상태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알아챘다.

이번 기자 회견 이후에도 중간에 두 차례 더 기자 회견이 있는 데다가 중간중간 인터뷰도 예약되어 있어서 적당히 해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현자의 눈으로 기자들을 보니 지루함과 실망을 느끼는 자들이 적지 않았다.

나는 이 상황을 어떻게 타개할까 고민하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 죄송하지만, 한 말씀만 더 드려도 괜찮을까요?”

김현철 기자는 김우철 회장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고는 발언권을 주었다.

“예, 말씀하세요.”

“회장님께 하나 건의 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하하, 선수님이 저에게 용무가 있으셨던 거군요.”

김우철 회장은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제가 알기로 기자님들과의 질의응답 시간이 10분으로 예정되어 있는데, 이를 늘려서 20분으로 하면 어떨까 해서요.”

“흠, 혹시 특별한 이유라도 있을까요?”

그는 내 요청에 바로 응하지 못하고 난색을 표했다.

기자 회견 이후에 포스터 제작을 위한 사진 촬영부터 잡지사 인터뷰까지 소화해야 할 일정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조효종 선수도 그렇고 저도 기자 회견 내내 한국 복싱을 부흥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지금 와서 보니 우리 생각만 말하는 데 급급했지, 주변 분들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것 같습니다. 저, 잠시만요.”

나는 잠시 손을 들어 보인 뒤 냉수를 단숨에 들이켰다.

정신력 스탯이 높아진 이후로 웬만한 것으로 긴장하지 않는다지만, 처음 하는 기자 회견이라 그런지 목이 바짝바짝 말랐다.

“이곳에 지금 30명 가까운 기자님들이 계시는데, 복싱계의 현재 주소를 생각하면 떨어진 인기에 비해 애정을 가져 주시는 분들이 여전히 많다는 걸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정해진 질문만 받고 기자 회견을 마치기보단, 기자님들 더 나아가 대중들이 궁금해하는 사안을 성실히 답변하는 자세가 필요하지 않을까 싶어서 이런 제안을 드린 겁니다.”

작년 이맘때쯤이었을까, 나는 미션을 수행하기 위해 카산트 대륙에서 제일가는 웅변가가 지은 수사학 저서를 읽었던 적이 있었다.

예상보다 밋밋한 기자 회견에 불만족스러워하는 기자들을 달랠 방법이 없나 고심하던 찰나에 오래전에 읽었던 책의 내용이 떠올랐다.

저자의 말에 따르면 상대의 인품을 세련된 방식으로 치켜세워 준 이후, 대화의 주도권을 넘겨주면 쉽게 환심을 살 수 있다고 했는데, 현자의 눈으로 기자님들의 감정을 살펴보니 과연 효과가 있었다.

‘후우, 지금부터 대처만 잘하면 무사히 마칠 수 있겠어.’

다소 지루한 기자 회견에 졸린 표정을 짓고 있던 기자들은 자세를 고쳐 앉고 무엇을 질문하면 좋을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김우철 회장도 회견장 분위기가 긍정적으로 변한 것을 감지하고 발 빠른 대처에 나섰다.

“준비를 나름대로 열심히 했다고 생각했는데, 선수님 말씀을 듣고 나니까 정신이 번쩍 드네요. 박 실장님, 혹시 뒤에 있는 일정들을 30분씩 미룰 수 있을까요?”

“최대한 양해를 구하면 가능할 것 같습니다.”

“그럼, 지금 당장 업체들한테 연락을 돌려 보세요.”

“네, 회장님.”

박 실장은 지시를 이행하기 위해 급하게 회견장을 빠져나갔다.

“원래 질의응답 시간은 10분으로 예정되어 있었지만, 선수님의 제안에 따라 20분 아니 30분으로 연장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자유 형식으로 진행할 거니까 참고해 주시길 바랍니다. 아, 네 말씀하세요.”

김우철 회장은 손을 들고 있는 기자에게 발언권을 주었다.

“만평일보의 박지훈 기자입니다. 혹시 대표님께도 질문을 드려도 괜찮겠습니까?”

“물론입니다. 기왕 일어나신 거 궁금하신 게 있으면 편하게 물어보세요.”

“감사합니다, 그럼 질문드리겠습니다.”

회장의 유연한 진행으로 자연스럽게 질의응답 순서로 넘어갔다.

“협회의 공지에 따르면 서초역 부근에 있는 아레나 경기장에서 시합이 열립니다. 제가 알아보니 관중석의 규모가 총 1,000석으로 상당히 큰 것으로 파악되는데, 어떤 방식으로 홍보를 하고 관객들을 불러모으실지가 궁금합니다.”

박지훈 기자는 복싱으로 1,000석이나 되는 관중석을 채울 수 있냐며 물었다.

“우리는 조효종 선수와 강진우 선수 외에도 매력적인 선수들을 매칭시킬 예정입니다. 그리고 대회 당일 전까지 효과적인 마케팅을 벌여 사람들의 이목을 끌어들이면 충분히 가능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의 답변이 끝나기 무섭게 10여명의 기자들이 손을 들었다.

보아하니 그의 대답에 맹점이 많았던 모양이다.

‘훗, 강진우 선수가 제대로 불을 지펴 줬어.’

김우철 회장은 다소 당황스러운 상황이 펼쳐졌음에도 미소를 짓고 있었다.

송곳처럼 들어오는 질문을 받아 내야 하는 수고로움은 있겠지만, 아까와 같은 무색무취한 기자 회견보다 훨씬 나았다.

“이승현 기자님께 발언권을 드리겠습니다. 예. 둘째 줄에 앉아 계신 분 맞습니다.”

김현철 기자는 다시 사회를 보기 시작했다.

그는 이곳에 있는 기자들과 대부분 안면이 있는 상태여서 발언권을 줄 때 이름으로 호명할 때가 많았다.

“안녕하십니까, 천마일보의 이승현 기자입니다. 방금 타이틀전 외에 다른 경기로 대중들의 이목을 사로잡겠다고 하셨는데, 현실적으로 그게 가능한지 의문입니다. 대중들은 대한민국의 마지막 세계 챔피언이었던 김영민 선수가 누군지도 잘 모릅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추가로 복싱 경기를 더 잡는다고 관객을…….”

이후, 협회장과 두 선수에게 날카로운 질문이 들어왔고 회견장 분위기는 점점 뜨거워졌다.

“프로 무대가 아마추어와 차원이 다르다는 것을 강진우 선수에게 보여 주겠습니다. 솔직히 흥행을 위해서 시합을 받아들였지만, 저와 타이틀전을 치르고 싶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조금 황당했거든요.”

기자 회견 초반에는 예의를 갖추고 신중한 태도를 보였던 조효종 선수는 입이 풀렸는지 거침없이 말을 쏟아 냈다.

‘이제야 좀 기자 회견 같네.’

상대 선수의 도발에도 전혀 기분 나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분위기가 전환된 것에 대해 안도하고 있었다.

“이에 대해서 강진우 선수는 하실 말씀 없으십니까?”

“제가 알기로 조효종 선수가 챔피언 자리에 계신 지 1년이 훌쩍 넘었지만, 해외 프로모션에서 어떤 제의도 없는 것으로 압니다. 이제는 제가 KBW의 간판이 되어 한국의 복싱을 세계에 알리려고 합니다. 그리고…….”

나는 조효종 선배에 대해 관록은 있으나 세계 무대에선 통하지 않는다며 도발성이 짙은 멘트를 주저하지 않고 날렸다.

상호 간에 날 선 대화가 오가자 신이 난 기자들은 키보드를 두들기며 말을 옮겨 적느라 정신이 없었고 질의응답은 예정된 시간을 10분이나 더 오버 돼서야 끝이 났다.

* * *

오전에 있던 기자 회견을 마치고 협회에서 잡아 놓은 일정을 모두 소화하니 어느새 저녁이 되었다.

“피곤하실 텐데, 괜찮으시겠어요?”

김현철 기자님은 자동차 룸미러로 나를 보며 물었다.

이날, 나는 이규석 선배님과 저녁 미팅이 잡혀 있어 감성 출판사 사무실로 향하는 중이었다.

“저보다는 기자님이 고생 많으셨죠.”

바쁜 일정 탓에 이곳저곳 움직여야 하는 상황에서 기자님은 매니저를 자처했고 난 그 덕분에 스케줄을 편히 소화할 수 있었다.

나는 잡지사 인터뷰를 끝으로 협회 일정을 마무리한 뒤, 혼자 미팅 장소로 가려고 했지만, 기자님께서 본인이 태워다 주겠다고 나서시는 바람에 편안하게 이동할 수 있게 되었다.

“저도 따라다니면서 기삿거리를 많이 건져서 남는 장사였습니다. 그보다 선수님이 아니었다면 오전에 있던 기자 회견을 망칠 뻔했습니다.”

“협회장님이랑 기자님이 대처를 잘해서 한숨 돌렸던 거죠.”

“아닙니다. 아까 포스터 촬영하고 계실 때 회장님께서 선수님 칭찬을 엄청 하셨습니다.”

“하하, 네…….”

덕담을 들어 기분이 좋으면서도 괜히 멋쩍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동안 기자 회견장도 많이 돌아다니고 짬밥이 많이 찼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일을 맡아 진행을 하다 보니 허점이 너무 많았습니다.”

김현철 기자는 사회자로서의 능력이 다소 부족했다고 자각했다.

“처음 진행했던 것치곤 실수도 없고 괜찮았던 것 같아요. 그리고 다음 기회도 있으니까 그때 만회하시면 되죠.”

“옳은 말씀입니다. 어? 대화하면서 오니까 금방 도착하네요.”

우리는 어느새 목적지에 도달해 있었다.

“괜히 귀찮게 한 것 같아서 죄송합니다.”

“어차피 가는 길이어서 괜찮습니다. 조심히 들어가시고 다음에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안녕히 가세요.”

나는 차에서 내린 뒤 기자님께 작별 인사를 드렸다.

“안녕하세요, 작가님.”

건물 안에 들어서니 직원 하나가 나를 알아보고 인사를 건넸다.

내가 작가라는 게 매스컴에 노출된 후로 나를 알아보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는데, 이는 감성 출판사 직원들에게도 해당되는 말이었다.

“대표님은 집무실에 계시나요?”

이규석 선배는 타사 오너들이 사장이라는 명칭을 잘 쓰지 않는 것을 보고 직책명을 대표로 바꾸었다.

“네, 안 그래도 작가님과 미팅이 있으시다고 5분 전에 올라가셨습니다.”

“알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는 직원에게 가볍게 목인사를 한 뒤, 엘리베이터에 탑승했다.

“오셨습니까?”

“아, 네. 안녕하세요 선배님.”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후 노크를 하려던 순간, 문이 열리더니 선배님께서 날 맞아 주셨다.

“제가 온 줄 아셨나 보네요.”

“방음이 잘 안 되는 편이라 안에 있어도 엘리베이터 열리는 소리가 다 들린답니다. 그리고 약속 시간도 거의 다 돼서 작가님일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이규석 대표는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쪽으로 앉으시죠.”

“네.”

“어제 선물로 받은 용정차가 있는데 마셔 보겠습니까? 향이 은은하고 깊어 심신을 차분하게 해 주는 데는 이만한 게 없습니다.”

선배님은 미리 준비해 놓은 다기에 차를 따르며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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