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 29화 도전 (1)
“네, 부탁드리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다기를 이쪽으로 모두 옮겨야겠군요.”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나는 책상 위에 놓인 다기들을 응접용 테이블 위로 옮겼다.
“지난 7월에 마인드넷에 론칭했던 작품이 큰 인기를 끌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이규석 선배는 차를 한 잔 마신 뒤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마침 부모님께서 마인드넷 콘텐츠 부서에서 일하고 계셔서 실시간으로 현황을 듣고 있습니다.”
“부모님께서 뿌듯해하시겠네요.”
“천마회귀로 이미 성공을 거둔 상황이라 예전부터 인정해 주시긴 했습니다.”
“내놓는 작품마다 대박을 터트리시니 인정을 안 하실 수가 없겠지요. 아, 그리고 며칠 전에 푸른닷컴 관계자와 이야기를 나눴는데, 타 출판사에서 우리 회사를 많이 부러워한다고 합니다.”
“그런가요?”
선배님께서 대충 어떤 말씀을 하실지 예상이 됐지만, 내 입으로 말하기는 부끄러워 잠자코 있었다.
“작가님께서 푸른 닷컴뿐만 아니라 다른 플랫폼들도 쓸고 계시니 배가 아픈 게지요.”
“선배님과 회사가 많이 도와준 덕분에 가능했던 일입니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작가님을 원하는 경쟁사들이 무척 많다고 들었습니다. 최근에는 타 출판사 관계자가 우리 직원에게 접근해서 남은 계약 기간과 조건을 물어봤다고 하더군요.”
“타 회사가 어떤 조건을 내밀어도 넘어가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나는 돈을 조금 더 벌겠다고 선배님을 등질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아닙니다. 우리 회사보다 더 좋은 조건을 맞춰 줄 수 있는 곳이 있다면 당연히 그곳으로 가셔야지요.”
이규석 대표는 손을 저으며 말했다.
“사실, 두 달 전쯤인가? 부모님께서 저에게 회사를 옮길 생각이 없냐고 물어보신 적이 있습니다.”
“혹시 마인드넷에서 제안이 들어온 겁니까?”
선배님은 짐작이 간다는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마인드넷은 플랫폼 회사였지만, 자체적으로도 출판사를 운영하고 있어서 소속된 작가들이 적지 않았다.
“네, 부모님께 절 영입하는 조건으로 두 분의 승진과 연봉 인상 그리고 저에 대해서는 업계 최고 수준의 대우를 약속했다고 들었습니다.”
“흠, 아주 영악한 놈들이군요.”
이규석 대표는 작가의 부모님까지 협상의 대상으로 올린 마인드넷의 행동에 짜증이 올라왔다.
앞서 더 좋은 조건이 있으면 가도 된다고 말한 그였지만, 막상 나한테 이야기를 들으니 마음이 격동되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휴우, 부모님께서 요청하신 거라 고민이 많이 되셨겠습니다.”
“아닙니다. 저희 부모님은 자식들의 의사를 존중하시는 분이라 결정을 하는 데 있어서 어떤 강요도 하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저는 이야기를 들은 순간 바로 제안을 거절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이 자리에도 함께하시는 것이겠지요.”
그는 내가 일언지하에 거절했다는 말에 감동을 받았지만, 감정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마인드넷의 제안을 의리 때문에 거절한 것은 아닙니다. 저는 선배님께서 푸른닷컴이나 마인드넷 같은 거대 회사보다 작가들을 더 잘 키워 줄 수 있다고 생각해서였습니다.”
“말씀을 들으니 앞으로 더 잘해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감성 출판사와 함께 하는 이유가 단순히 정이나 의리와 같은 감정이 아니라는 점을 짚자 선배님의 얼굴에는 화색이 돌았다.
“요즘 일이 바빠서 많이 피곤하던 참이었는데, 작가님께서 이리 덕담을 해 주시니 힘이 샘솟습니다.”
“그렇게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자, 그럼 슬슬 일 이야기로 들어가 볼까요?”
이규석 선배는 다기를 한쪽으로 치운 뒤 본론으로 들어갔다.
“우선 ‘복싱으로 전설이 되다’에 관한 사항을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작가님이 화제의 복서라는 게 밝혀지고 난 이후 작품이 다시 상승 기류를 탄 건 이미 알고 계실 겁니다.”
“예, 의도하지 않았는데 어쩌다 보니까 그렇게 됐네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일전에 웹드라마가 인기를 끌긴 했지만, 대중들에게 널리 전파되었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었습니다. 따라서 컨텐츠를 재활용하는 게 가능하다는 판단을 내렸습니다.”
젊은 사람들이 웹드라마를 많이 시청한다고 하지만, 메인 매체라고 보기에는 아직 부족한 감이 있었다.
“어떻게 말씀이신가요?”
“영화를 제작하면 어떨까 계획 중입니다. 현재 AJ기획 측과 계속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그쪽에서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고 합니다.”
“제 소설을 바탕으로 영화를 만든다고요?”
내가 쓴 소설이 영화화된다니…….
작년에 처음 론칭했을 때만 해도 유료 연재에 감사해하던 나였다.
비록 이세계의 존재들이 도와준다고는 하지만, 탑티어가 되려면 적어도 3년은 걸릴 줄 알았다.
그런데, 불과 1년 사이에 웹툰, 웹드라마에 이어 영화로까지 제작된다고 하니 꿈을 꾸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처음에는 영화까지는 무리라고 생각했었습니다. 첫 작이 성과를 제법 내긴 했지만, 뒤에 나온 작품들에 비해선 느낌이 약했거든요. 그런데, 작가님이 유명 복서라는 걸 공개한 이후로 평가가 달라졌습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글들에 대한 평가가 이루어졌나 보다.’
감성 출판사는 작가들이 쓴 소설의 작품성과 흥행력 등을 검토하여 웹툰, 웹드라마 등으로 제작할 만한 가치가 있는지를 판단했다.
내부 회의 끝에 긍정적인 결론이 나오면 플랫폼 회사와 제작사와 협의하여 작업을 진행했는데, 이와 같은 프로세스는 감성 출판사가 다른 경쟁사들보다 경쟁력이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
내부에서 호평한 작품의 2차 저작물을 쉽게 만들 수 있다는 건, 회사가 가진 영업 능력이 좋다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제 정체를 밝힌 게 그렇게나 큰 영향을 미쳤나요?”
“물론입니다. 국가 대표 복서 겸, 스타 작가인 사람이 시나리오를 제공한 영화라고 하면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할 수 있다고 판단했거든요. 그리고 만약 작가님께서 직접 홍보에 나서시면 영화 흥행에 적지 않게 도움이 될 겁니다.”
“영화 홍보는 배우들이 하는 거 아닌가요?”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반문했다.
“보통의 경우라면 그렇겠지요. 하지만, 작가님은 배우들 못지않은 영향력을 갖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냥 조금 알려진 것일 뿐, 유명 배우와 비할 정도는 아닌 것 같습니다.”
“복싱이랑 웹소설 커뮤니티를 들어가 보니 다들 작가님 이야기만 하던데요?”
“최근에 매스컴에 많이 노출된 탓에 그렇지 오래가진 않을 겁니다.”
“유명세라는 게 다 그렇지요. 그리고 반짝하는 거면 또 어떻습니까? 원래 이 바닥이 물 들어올 때 노 젓는 곳이니까 이 순간을 즐기세요.”
이규석 선배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새겨듣겠습니다.”
“편하게 한 말이니까 부담 없이 들으셔도 됩니다. 그리고 여자 주인공 역은 이전처럼 강지연 양으로 배정될 수 있게 안배했습니다. AJ기획이랑 TM엔터테인먼트 양사에 모두 말해 놨으니 조만간 여동생분께도 소식이 전달될 겁니다.”
“감사합니다, 선배님.”
대화가 무르익으면 지연이 이야기를 꺼내려고 했는데, 알아서 잘 처리를 해 주시니 나로서는 고마운 마음이 들 수밖에 없었다.
“만족해하시는 것 같아서 다행이네요. 말씀을 안 드리고 진행한 거라 속으로 걱정했거든요.”
“여동생에게 득이 되는 거라면 그 어떤 걸 진행하셔도 상관없습니다.”
나는 손을 저으며 괜찮다는 제스처를 보였다.
“아, 그래요? 그럼 드라마에도 출연할 수 있게 신경을 써 보겠습니다.”
“드라마 출연이요? 그게 가능할까요?”
올해 초, 내가 쓴 ‘조선 거상, 재벌가 망나니로 환생하다’의 드라마 제작이 결정된 바 있었다.
이규석 대표는 언론계의 인맥을 총동원하여 상영할 곳을 물색한 뒤, 방송국에서 AJ기획에 외주를 맡기게끔 하여, 제작부터 송출까지 이르는 전 과정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따라서 드라마 배역 하나쯤은 입맛대로 배정하는 게 가능했다.
“지연 양이 저번에 연기를 잘한 덕분에 감독님들 사이에서 평판이 괜찮은 편입니다.”
“평판이 좋다고는 하지만, 영화에 이어 드라마까지 연달아 배역을 맡게 되면 내부에서 반발이 만만치 않을 겁니다.”
지연이는 가수 활동을 하던 중, 팀 내 불화로 적지 않은 스트레스를 받은 적이 있었다. 나는 무리하게 일을 진행하다가 동생이 사람들의 미움을 살까 걱정되었다.
“이미 아실 수도 있겠지만, 동생분께서는 여느 유명 아이돌 못지않게 인지도가 높은 편이십니다.”
“생각해 보니까 그랬던 것 같기도 하네요.”
부모님은 종종 지연이에 관련된 소식을 나에게 알려 주곤 했다.
최근에 들은 이야기로는 지연이가 속한 라비가 공중파 가요 프로에서 1위를 차지했을 뿐만 아니라 음반도 잘 팔려 TM엔터테인먼트 안에서도 핵심 가수로 분류되었다고 한다.
게다가 지연이의 경우 팀 내에서 인기도 가장 많아 광고 촬영도 두 차례나 진행했고 연예 전문 매체인 STARS가 실시한 선호하는 여자 아이돌 설문 조사에서도 3위를 차지했다고 했다.
누군가는 그래봤자 1등은 아니라며 폄하할 수도 있겠지만, 1,2위가 빌보드 차트에도 종종 오르는 세계적인 걸 그룹의 멤버인 것을 고려하면 대단한 성과라고 말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관계자들과 아직 이야기는 못 했지만, 지연 양이 관심 있다고 하면 저쪽에서도 싫어하지는 않을 겁니다.”
“아, 생각해 보니까 영화도 그렇고 우선 지연이의 의사를 물어봐야겠네요.”
“상호 간에 합의가 어느 정도 된 상황이라서 그 부분에 대해선 크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규석 선배는 찻잔을 입에 갔다 대면서 차분하게 말했다.
“지연이랑 따로 연락을 하시나 보네요?”
“제가 TM엔터테인먼트 대표랑 사적으로 아는 사이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곤 하거든요.”
“아,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나는 일전에 박태민 대표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의 말에 따르면 선배님과 박 대표는 한국대 동기로 20대 때부터 알고 지낸 사이라고 했다.
‘40년 가까운 세월을 알고 지내신 분을 사적으로 아는 사이 정도로만 표현하시는 걸 보면, 나에 대해서 얼마나 좋게 생각하는지 알 수 있겠어.’
날 대하실 때 여전히 존댓말을 하시긴 하지만, 그게 거리를 두는 것으로 느껴지진 않았다.
한참 아래 연배인 나와 동등한 위치에서 사안을 두고 의견을 나눌 때면 선배님의 인품에 감탄할 때가 적지 않았다.
이후에도 우리는 감성 출판사에서 내 작품과 관련하여 추진하고 있는 프로젝트에 대해 논의했다.
“오늘 말씀하셨던 것들을 최대한 수렴하는 방향으로 일을 진행해 보겠습니다.”
이규석 선배는 내 요구 사항이 적힌 수첩을 덮으며 말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미리 의견을 정리해서 올 걸 그랬습니다.”
나는 이야기하는 내내 부지런히 메모하던 선배님의 모습에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우리 회사를 책임져 주는 대표 작가님이신데, 이 정도 정성은 보여야지요.”
“감사합니다, 선배님. 배려해 주시는 만큼 집필 활동을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
“지금까지 보여 주신 퍼포먼스만으로도 충분히 차고 넘칩니다. 제가 볼 때 이번에 론칭한 작품까지 잘 마무리하고 휴식 시간을 잠깐 가지셔도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이규석 선배는 손을 저으며 만류하는 제스처를 보였다.
“개인적으로 쉬는 거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괜찮을 것 같습니다.”
나는 휴식이라는 단어에 거부감이 들었지만, 선배님께서 하신 말씀이라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우리야 작가님이 글을 많이 쓰실수록 좋지요. 하지만, 대부분의 작가님들은 보통 한두 작품을 마치시면 짧게는 1, 2주 길게는 한 달 이상씩 휴식 시간을 갖곤 한답니다.”
‘나를 걱정해서 하신 말씀이구나.’
선배님은 내가 오버 페이스로 글을 쓰다가 번아웃에 걸리지 않을까 걱정하고 계셨다.